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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 <연재-53>중앙아프리카 독재와 폭정 옹호지원하는 미국과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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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주청년
댓글 0건 조회 15,418회 작성일 10-10-22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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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3]끝이 안보이는 중앙아프리카 참상

독재와 폭정을 옹호,지원하는 프랑스와 미국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은 이번에는 민족통신 연재-53번째로 중앙아프리카를 다루면서 "지금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정부군과 범죄단체 그리고 정권에 종속된 무장단체들이 남아공 어느 곳에서나 무고한 민중들을 납치하고 살육과 약탈과 방화등의 방법으로 잔혹한 폭력을 자행하고 있다. 이것을 지원하고 옹호하는 세력이 다름 아니라 미국과 프랑스로 알려지고 있어 이에 대한 국제사회 양심세력들의 분노는 고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을 싣는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53]끝이 안보이는 중앙아프리카 참상

독재와 폭정을 옹호,지원하는 프랑스와 미국



살육, 방화, 약탈, 강간 등 잔혹한 폭력의 현장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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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유태영 박사
지금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정부군과 범죄단체 그리고 정권에 종속된 무장단체들이 남아공 어느 곳에서나 무고한 민중들을 납치하고 살육과 약탈과 방화등의 방법으로 잔혹한 폭력을 자행하고 있다. 이것을 지원하고 옹호하는 세력이 다름 아니라 미국과 프랑스로 알려지고 있어 이에 대한 국제사회 양심세력들의 분노는 고조되고 있다.

1959년에 데이빗 다코가 불법적으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중앙공)의 초대 대통령이 되여 정권을 장악한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장 50여년 동안 잔혹한 독재정치가 지속되고 있다. 이 독재정부와 군부는 저들을 지지하지 않거나 함께 활동하기를 거부하는 민중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약탈하고, 방화, 강간 등을 저지르면서 이 나라 민중을 사정없이 탄압하고 살육하고 있다.

중아공의 집권세력은 친서방적 정권이며 또 프랑스와 미국에 종속된 정권이다. 그러기 때문에 프랑스와 미국의 막대한 달러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들 중아공 정권이 프랑스와 미국등 외세의 지배를 반대하는 세력이라면 그 상황은 지금과 다른 양상을 띄고 있을 것이다.


프랑스와 미국은 또한 중아공의 정권을 뒤흔드는 반정부 무장단체를 육성시켜 막대한 달러와 무기를 비밀로 제공하여 중아공에 내전을 일으키고 있다. 프랑스와 미국은 외세를 배격하는 민족자주적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하여 반정부 무장단체들을 양성하고 있는것이다.

그리하여 중아공의 민중들은 정권이 바귈때 마다 프랑스와 미국이 지원해 주는 무장세력의 폭력과 맞서게 된다. 지난 50여년 동안 수백만명의 중아공 사람 들이 고향과 재산을 잃고 빈 손으로 이웃나라로 거처를 옮겨야 하는 처지가 되어 왔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국제기관의 인도주의적 원조가 제대로 돕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국제사면위원회(amnesty)는 유엔에게 중아공의 난민들을 보호해 줄것을 요구해 왔으나 미국 정부는 오히려 이들의 요구에 장애물이 되어 왔다. 부시 미행정부 시기에는 오히려 이들을 탄압하였다. 2007년 7월 20일 미국 중앙정보국 요원들은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중아공에서 붙잡은 반정부 세력의 15명을 비밀리에 쿠바의 관타나모 수용소로 끌고 갔다. 다시 말하면 미국 당국자들은 미국이 길러낸 남아공 무장세력을 오히려 테러라는 누명을 쒸우고 그들을 쿠바 수용소로 보내기도 했다.

중아공은 아프리카의 대륙의 중앙에 위치해 있음으로 중앙아프리카라고 부른다. 1959에 중아공의 초대 대통령이 독재로 통치를 시작한 이래부터 중아공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에게 전형적인 독재정권들의 전시장 노릇을 해 왔다. 그것도 반세기가 넘는 긴긴 세월이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중아공에는 군사독재정치, 민간도둑정치 그리고 심지어 황금의 왕관을 쓰고 황제제국정치를 감행한 무법통치자도 있었다. 미국 정부는 이 무법통치자를 친미노선이라는 조건하에서 암묵적으로 시인해 줄뿐만 아니라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그 어느 정권도 10년을 넘기지를 못했고 그 다음 쿠테타와 독재로 다양한 폭력정치의 형태를 선보여 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원조가 중아공의 독재자들에게 절대적인 도움이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미국은 남아공의 현직 대통령에게 인도적 지원명목으로 연간 1천200만 달러를 지원해 주고 있는데 남아공의 버지제 대통령은 그 막대한 달러를 인도적 용도로 사용하지 아니하고 정권유지를 위하여 비인도적 목적에 낭비해 왔다.

중아공은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이다. 하지만 중아공은 빈곤보다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는데 이것은 이 나라는 세계에서 소년병들이 가장 많은 나라이다. 어께에 총을 메고 있는 18세 이하의 소년들이 글은 읽지 못하지만 전투요원으로 양성되고 있다. 중아공의 200만명의 아이들을 교육시킬만한 교육제도가 빈약할 뿐만 아니라 교재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으로 나타났다.

1. 중아공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간추린 역사


중아공은 한반도의 2.8배의 면적과 인구 450만명의 나라로서 나라이름 그대로 아프리카의 맨 중앙에 위치해 있는 나라이다. 중아공에 대하여 고고학적으로 알려진 것은 다만 고대 이집트의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최초에 피그미족이 이 지역에 살고 있었다고 하는것 외에 특기할 것이 별로 없다.

1600년대를 전후하여 유럽의 노예상들이 중아공에 오기 시작하여 노예제도가 성행하였다. 유럽인들의 습격을 받아 잡혀간 중아공의 노예들은 카이로의 노예시장으로 팔려갔다. 중아공의 노예제도는 1800년대말까지 300여년의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중아공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나라가 되고 말았다.

유럽의 서방세력들이 저들의 마음대로 아프리카 대륙을 갈라 조각내고 있을 때 프랑스는 주로 중아공 지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이 지역을 또 다시 17개로 나누어 놓고 유럽의 여러 기업들에게 이권을 판매하여 15%의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이 기업체들은 무지막지하게 최대의 수익을 획득하기위하여 노예무역을 비롯하여 강제노동으로 다이아몬드와 목화등 농산물과 양질의 목재를 생산했다. 만일 강제노동을 거절하거나 도망치다 잡히는 사람들은 현장에서 죽고 말았다.

1897년에 프랑스와 영국은 지역의 이권분쟁으로 이른바 <파쇼다사건>이 발생했다. 이 대결을 해결하기 위하여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는 서로 나누어 먹기식으로 <영불협정>을 1899년에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중아공, 콩고, 차드등은 프랑스의 식민지로 확정되여 <프랑스령 적도 기니>라고 불렀다가 1916년에는 중아공을 따로 분리하여 중아공을 <우방기샤리>라고 불렀다.

1930년대에 들어서서 늦게나마 일련의 반프랑스 폭동이 일어나면서 중아공의 민중들의 저항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중아공 지역이 너무나도 유익한 곳 이기 때문에 좀처럼 이지역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 난 후에야 비로서 중아공에서 민족주의 저항운동이 다시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1958년에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인 바텔레미 보간다가 등장하여 중아공의 독립을 요구하면서 최초의 정당인 <아프리카사회진보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보간다는 1년후 1959년에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죽고 만다. 보간다의 의문사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자주독립운동 투쟁역사에 있어서 흔히 있는 공통된 의문사이다.

중아공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50여년 동안 정치적 불안과 내전이 계속되고 있는 그 불행의 시발점은 바로 독립운동의 선구자 보간다의 의문사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보간다가 의문사로 죽은 후 1960년 8월에 데이빗 다코가 초대 대통령으로취임했다. 다코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아주 강압적 독재로 민중을 압박하여 민중이 그에게 무릎을 꿇도록 폭정을 자행했다.

다코 대통령은 겨우 5년간 독재적 통치를 하다가 그의 사촌인 장 베델 보카사가 일으킨 무혈 쿠테타에 의하여 축출되고 말았다. 1966년에 무혈 쿠테타로 사촌을 축출하고 제2대 대통령이 된 보카사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제2대 보카사 대통령은 어떤 인물인가?

보카사는 헌법을 폐지하고 국회를 해산하여 1인 독재체제를 강화할 뿐만 아니라 중아공 국호를 <중앙아프리카 제국>으로 선포하였다. 보카사는 대통령이 아니라 <보카사 1세 황제>라고 스스로 명칭을 선포했다. 보카사는 엉뚱한 환상으로 자기 자신을 나포레옹 1세로 착각하는 듯 중아공을 제국이라고 호칭하고 무고한 민중을 마구 학살했다.

보카사는 실제로 우간다의 악명 높았던 이디 아민과 같은 독재자였으며 또한 보카사는 17명의 부인에게서 최소 70명의 자녀를 둠으로 세계 정치 역사상 보기 드문 독재와 비행을 남긴 정치가였다.

또 한가지 보카사에 대한 기막힌 이야기가 있다. 보카사가 <중앙아프리카 황제>로 취임하는 대관식을 수도 방기에 있는 대성당에서 거행했는데 그 대관식 행사의 총 경비가 2억 달러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아공의 1년 국가 총예산이 4억 달러였다. 중아공의 1년 예산의 절반을 보카사 황제의 임관식에 사용했다는 것은 그 어느 나라에서도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보카사 독재정권은 처음에는 프랑스의 지원과 옹호를 받았으나 나중에는 결국 외면 당하고 말았다. 프랑스는 1979년 9월에 프랑스 낙하산 부대를 중아공의 수도 방기에 잠입시켜 보카사 정권을 전복시켰다. 프랑스는 비상수단으로 중아공의 초대 대통령이였던 다코 전 대통령을 다시 대통령직에 복귀시켜 제3대 대통령으로 정권을 장악하도록하여 곧 취임하게 했다.


프랑스 낙하산 부대에 의하여 추방된 보카사는 국외로 탈출했지만 결국 갈곳은 프랑스뿐이였다. 하지만 보카사는 프랑스의 버림을 받고 1980년 12월에 궐석재판에 의하여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겨우 사면되었다가 1996년에 사망했다.

프랑스가 복귀시킨 중아공의 제3대 대통령인 다코는 태생적으로 프랑스의 꼭두각시로 민중의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다코 대통령은 집권을 시작한지 2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1981년에 앙드레 콜링바가 일으킨 무혈 쿠테타로 축출되고 만다.

중아공의 제4대 대통령으로 1981년9월에 취임한 앙드레 콜링바는 이전의 군사독재체제를 해산시키고 새로운 <국가재건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1986년에는 <중아공 민주당>을 창설하여 6년 임기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콜링바 대통령은 지금까지 중아공이 오직 친서방정권이 통치해 온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하여 정권의 노선을 친서방 외교정책에서 벗어나 <비동맹전방위 외교>로 전환할 것을 전격 표명했다.

콜링바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들이 소련과 단교를 해온 외교정책에서 완전히 벗어나 1988년에 소련과의 국교정상을 신설했다. 하지만 콜링바 대통령의 반프랑스 와 반미 외교 정치노선이 결코 순탄할 수 없었다. 그 무엇보다 프랑스는 콜링바 대통령을 그대로 바라보고만 있지 않았다. 또한 중아공 내부에서 차기의 정권을 노리고 있던 정적들은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때마침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정적들은 국민을 선동하여 콜링바 대통령에게 민주화로의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반정부운동을 일으켰다. 1991년에 콜링바 대통령은 에드와르 프랑을 총리로 임명하여 다원주의 협상을 위한 헌법개정위원회를 설립하여 위기에 대비하여 중립적 무마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미국의 본격적 개입시기



하지만 때를 기다리고 있던 미국은 드디어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중아공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대사 대니얼 심슨은 국제사회에 여론을 확장시켜 콜링바 정권을 압박했으며 유엔을 끌어들이는 소동을 펴고 있었다. 유엔은 중아공에게 유엔 선거지원부와 국제선거감시단을 개입시키는 강력한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중아공은 유엔의 압력에 의하여 대통령 투표를 실시했는데 1992년에 콜링바 대통령을 낙선시킨 1차 투표와 1993년 10월에 2차 결선투표를 실시하였다. 미국은 사전 계획에 의하여 앙게펠릭스 파타세를 중아공의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데 성공했다. 파타세가 중아공의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배후에는 크게 두가지 여건이 작용했다고 분석된다.

첫째는 프랑스는 350년 동안의 중아공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후 부터는 영국의 위치가 미국으로 이전되였으며 미국은 유엔의 이름으로 중아공의 정권교체를 주도하고 있었다.

둘째는 파타세의 당선은 카바종족과 카레종족의 승리인 파타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상은 바로 이 두 종족이다. 이 두개의 종족이 파타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다. 중아공에는 80여개의 종족들이 있는 고질적인 종파분쟁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파타세 대통령은 집권초기부터 새벽의 여명은 암울하고 가혹한 현실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였다. 1993년에 집권한 파타세 정권은 사회기반 시설들이 흔들리고 혼돈이 중폭되면서 파타세 대통령은 통치능력의 한계점을 들어 냈다.

아무리 막강한 미국의 지원이 있다할지라도 1996년에는 무장한 반정부반체제들의 폭동이 4차례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미국이 지원하는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폭력이 계속되였으며 시민집단들은 정부군을 외면하 반군편에 서는 정세가 조성되고 있었다. 이러한 불안한 정세속에서 파타세 대통령의 정권은 휘청거리고 수 많은 기업들이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 렀다.

파타세 대통령은 그의 재임기간 10년동안 총 6차례의 쿠테타 위기를 겪었으며, 그때마다 미국은 직접 또는 간접으로 파타세 대통령에게 군사지원을해 주었다. 이러한 위기에 처한 파타세 정권에 대하여 이번에는 미국이 구원의 손을 펴는 대신 오히려 파타세 정권의 교체를 위한 그 다음 구상을 고안해 내고 있었다.

2. 그바야족 출신 프랑수아 버지제 (Bozize) 대통령 등장


중아공 제 6대 대통령으로 80여 종족중에서 제일 큰 힘을 과시하는 그바야종족 (33%) 출신인 프랑수아 버지제 장군이 2003년 5월에 무혈 쿠테타를 이르켰다. 그바야종족은 식민시대 초창기부터 역사적으로 프랑스와 우호적인 종족으로 많 은 특헤를 독점하는 친프랑스적 종족 이다.

버지제 장군은 바로 이러한 그바야종족 출신이며 1946년생으로 중아공의 현직 3군 참모총장으로서 무혈 쿠테타를 일으켜 휘청거리고 있는 파타세 대통령을 쿠테타로 축출하는데 아주 쉽게 성공했다.

버지제 장군은 쿠테타를 이르켜 집권 초기 2년간을 계엄사령관으로 과도정부의 수반으로 통치를 하다가 2005년 3월에 치뤄진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정권을 잡은 버지제 대통령은 국영 방송을 통해 의회해산을 선포하고 야간통행금지를 전국에 선포하여 삼엄한 통치를 시작했다. 일부 군인들은 제복을 벗고 짐을 챙겨 이웃 나라로 달아났다고 외국 통신은 전했다.

버지제 대통령이 집권한지 1년도 되기전 2006년 2월에 중아공 북부지역에서 광범위한 폭동사태가 발생했다. 고향을 떠난 수천명의 난민들이 정부군과 반군들의 사이에서 십자포화에 갇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7천명의 난민들이 북쪽 차드로 피난하였다.

이웃 나라로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남아공에 그냥 남아 있는 사람들을 정부군이 무조건 반군을 도와주었다는 터무니 없는 혐의로 남자들과 소년들을 학살하고 여자들은 강간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버지제 정권은 이러한 정부군들의 악행에대하여 침묵하고 있었다. 외신 보도에 의하면 2006년 이래 남아공의 정부군의 폭력을 피해 국외로 탈출을 원하는 남아공 주민은 최소 5만명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남아공에는 미국이 지원하는 버지제 정권을 대항하여 싸우는 반군단체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 두개 조직이 대표적 조직이다. 첫째, 장 마다포스가 이끄는 <민주공화회복인민군, APRD>과 둘째, 미셀 디토디아가 이끄는 <통일민주연맹 UFDR>이 있다. 이들 강력한 투쟁단체들이 싸우고 있는한 제아무리 미국이 지원하는 버제제 대통령의 정부군이라할지라도 매우 불안한 상태에 처해있다.

2006년에 대표적인 반정부 투쟁단체들이 중아공 북부지역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급해진 버지제 대통령은 황급히 프랑스군과 유엔 평화유지군의 도움을 요청하여 두 달만에 사태는 안정되었다. 버지제 대통령은 외국의 도움 없이는 정권을 하루도 유지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것이다.

또 하나 남아공의 불안요소는 2008년 이래 공공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고 있는 정부에 대하여 총파업이 언제라도 일어나고 또 내전과 폭동, 쿠테타의 발생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음으로 버지제 대통령정권은 항상 불안에 떨고 있다.

이 글을 끝 맺으며,


중아공 버지제 대통령은 난국을 수습할 의욕을 가지고 2007년에 3차레 반정부 무장단체들과 평화 협상을 시도 했다. 2008년 11월에는 가봉의 봉고 대통령의 중재로 평화협상 체결을 위하여 또 다시 3차례에 걸처 정부-반군간 협상을 진행했다.

이와같은 움직임을 기초로하여 2008년 12월에는 수도 방기에서 포괄적인 각계 정치적 대표자들의 대화모임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의 결과로 인하여 정부-반군간 화해를 이루기 위한 기초로 <사면법>이 처음 논의되었다.

하지만 중아공의 정부-반군간의 모든 움직임의 결과는 곧 물거품으로 끝나고 만다. 왜냐하면 아프리카의 여러 분쟁문제들을 미국이 제 마음껏 주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남아공에 화해와 평화가 정착되는 것보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민주냐, 독재냐>가 아니라 오직 <친미냐, 반미냐>에 달여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제아무리 중아공의 버지제 대통령이 궁지를 면해보려고 정부-반군간대화를 시도한다 할지라도 그 결과는 분명하다. 동족의 피를 먹고 살아온 중아공의 외세종속정권은 어떤 협상과 대화를 통하여 해결할 대상이 결코 못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미국이 뒤에서 음모하고 간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중아공을 그 얼마나 무시하고 우습게 여기고 있는가는 중남미 아이티의 아리스티드 대통령의 납치사건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아이티는 남미 중남미 전체 나라들 중에서 유일한 흑인의 나라로서 흑인이 전체인구의 98%이다.

미국은 아이티의 적화방지를 위하여 신학박사인 아리스티드 대통령을 좌파라하여 납치하였다. 처음에는 미국으로 끌고 왔고, 두번째 납치에는 그를 중아공으로 끌고가 숨겨 놓았다. 납치된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미국 맥신 위터스 하원의원에게 비밀전화를 이용해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나는 지금 미국의 쿠테타에 납치되여 중아공의 르네상스 궁전이라고 불리는 곳에 강금되어 있다. 현재 무장한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미국은 특히 중아공을 자국의 뒷마당으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역사상 최악의 중아공의 보카사 태통령을 미국은 끝까지 후원해 주었으며 그를 프랑스로 피신시키기 까지했다. 끝으로 희극 같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고 끝맺으려고 한다.

어느날 보카사 대통령이 국가적 귀빈으로 가봉을 방문했는데 가봉 정부는 최고로 화려한 무도회를 베풀어 보카사 대통령을 환대했다. 밤이 깊도록 화려한 무도회는 계속되었으며 가봉의 최고 미녀들이 보카사 대통령을 기쁘게 해 주었다. 다음날 귀국 비행장에서 의장대의 사열을 끝마치고 두 대통령은 작별의 악수와 포옹까지하고 보카사 대통령의 비행기는 이륙했다.

그런데 이게 웬말인가? 이륙한 보카사 대통령의 비행기는 10분후에 다시 가봉 비행장에 되돌아와 안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보카사 대통령의 성명의 말은…<지금 나의 가봉 방문은 공무가 아니라 나 개인의 사적 방문이다>

보카사 대통령이 비행기를 되돌여 다시 가봉으로 돌아온 그의 사적 방문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전날 밤에 그 화려한 무도회에서 함께 춤을 춘 미녀들이 그리워서라고 했다. 이것은 단지 희극(Comedy)아 아니라 실화이다.(끝)




[출처 : 유태영 박사 2010-10-22]

민족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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