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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4]아프리카 차드(Chad):툭하면 외세간섭-미-불 양국이 분열시켜 간섭하며 장애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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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주청년
댓글 1건 조회 9,182회 작성일 10-11-11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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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4]아프리카 차드(Chad):툭하면 외세간섭

미-불 양국이 분열시켜 간섭하며 장애역할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이번에는 민족통신 연재-54번째로 아프리카의 차드(Chad)에 대해 연구고찰한 내용을 다루면서 이 나라도 프랑스와 미국에 의해 장기간 시달려 왔고, 지금도 이들에 의해 내전이 떠날 날이 없었다고 지적하면서 이 나라와 우리 민족의 8.15이후 분단상황을 비유하는 한편 주체역량을 갖추지 못하면 언제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농간을 당할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의 논문을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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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 가운데에 <차드>라는 나라가 보인다

[연재-54]아프리카 차드(Chad):툭하면 외세간섭

미-불 양국이 분열시켜 간섭하며 장애역할



침략과 전쟁후 내전으로 헐벗은 또 하나의 아프리카, 차드
구 종주국 프랑스와 미국의 개입으로 장기화된 내전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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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유태영 박사
1960년에 프랑스의 식민통치에서 독립한 차드는 독립과 동시에 남북으로 분열되였으며 5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분열의 양상은 그칠줄 모르고 지속되고 있다.

차드에서 내전이 시작된데 대한 명목상 설명은 남쪽의 기독교 세력과 북쪽의 이슬람 세력간의 분열과 갈등으로 인하여 시작된 무력투쟁이라고 설명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설명은 내전의 원인을 왜곡하여 내전의 책임을 차드에게 몽땅 전가시키려는 프랑스와 미국의 속임수의 설명이다.

구 종주국인 프랑스는 차드에서 절대로 손을 떼지 않으려고 내전을 핑계삼아 개입을 지속했으며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냉전체제를 강화하여 차드의 내전을 부추기면서 개입의 구실로 삼고 있었다.

필자가 획득한 <차드에서 CIA 활동, CIA activities in Chad>자료 문건에 의하면 차드의 분열과 내전은 절대로 자생적으로 발생한 분열과 내전이 아니고 프랑스와 미국이 시작하고 개입함으로 인하여 발생하고 지속되고 있는 비극적
내전이다. 차드의 내전은 전적으로 외세의 침략과 간섭행위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분석된다.

1960년에 독립하고 1966년 부터 시작된 차드 내전을 배경으로한 영화 <다라트(‘Dry Season, Daratt, 2007’)>가 있는데 이 영화 <다라트,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는 2006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특별심사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아프리카 차드 출생의 마하멧 살레 하룬(Mahamat-Saleh Haroun)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다라트’는 전주영화제에서 선을 보여 관람객들에게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선사해주었다.

<다라트>의 주인공인 아띰은 16살에 내전으로 아버지를 잃었고 눈을 잃은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응징하라고 총을 건내준다. 하지만 아띰은 기구한 운명속에서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양아들이 된다. 아띰은 원수인 양아버지와 함께 눈먼 소경 할아버지 앞으로 왔다. 원수를 죽일것인가 말것인가? 아띰은 하늘을 향해 증오의 총탄을 날려 보냈다. 눈이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는 한발의 총성으로 아띰의 손을 잡고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고 만족해 하고 있다.

아띰이 하늘을 향해 날려 보낸 총성처럼 차드에서 내전과 복수의 폭력이 사라 진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오늘 차드의 현실은 <다라트>와는 정반대로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고 내전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1.차드(Chad)의 독립



차드는 한반도 영토의 6배가량 되는 1,284km2의 면적과 인구 1,100만이 되는 나라로 그 위치는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북쪽과 리비아의 남쪽에 있는 세계에서 21번째로 큰 나라이다. 셰계에서 6번째로 유명한 큰 차드호가 있는데 이 차드호는 지구 온난화로 인하여 70년대 이후부터 계속 줄어들어 2007년에는 10분의 1로 줄어 들었다.

차드는 줄어든 호수의 자연재해의 비운과 50년 동안의 내전으로 인한 정치적인 비운으로 심각한 고난에 처해 있다. 이러한 차드의 비운을 가리켜서 서방 나라들은 <아프리카의 죽은 심장>이라고 부른다.

차드는 예로부터 동서교류의 교통요지로 차드호 주변에서 다채로운 역사가 전개되었다. 기원전7000년 내지 2000년경으로 추측되는 아프리카 고고학 유적들이 차드에서 발굴되었다. AD 800년 무렵 카누리족이 차드호 호수가에 왕국을 건설하고 이집트와 교류하여 번성했다. 16세기 말에는 카넴왕국이, 17세기에는 와다이 왕국과 바가르미 왕국등이 출현하고 있었다.

평화롭던 차드가 외세에 의하여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영국과 독일의 탐험가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1885년에 프랑스군이 처음 진주했고, 1894년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저들 마음대로 협정을 맺고 차드에 국경선을 설정했다.

그러나 1900년에 외세에 대하여 분개한 와다이 왕국과 바가르미 왕국은 함께 연합하여 프랑스에 대항하여 싸웠다. 하지만 자위력을 갖추지 못한 탓으로 화약과 총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군에게 패할 수 밖에 없었다. 차드를 완전히 점령한 프랑스는 1910년에 <적도 아프리카>를 창건하여 중앙아프리카 전지역의 모든 나라들을 하나로 묶어 식민지화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후 1948년에 차드는 프랑스공동체에 묶인 자치공화국이 되었고, 그 12년후인 1960년에 비로서 <차드공화국>으로 독립이 되었다. 차드는 아프리카에서 20번째로 신생독립국이 된다.

2.차드의 내전과 미정보국(CIA)의 활동



1960년에 독립을 쟁취한 차드는 겨우 6년이 지난 1966년부터 구 종주국인 프랑스가 또 다시 뛰어들어 남의 땅에 와서 북 치고 장구 치면서 내전의 슲은 역사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차드는 북족에 아랍계의 이슬람 세력이 자리잡고 있고, 남쪽에는 흑인계의 기독교 세력이 외세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갈등과 대립으로 인하여 분쟁이 시작되었다. 북쪽의 아랍계 이슬람은 <차드민족해방전선>을 구축하여 프랑스가 지원하고 있는 남쪽의 이른바 정부군과 무력투쟁을 개시함으로써 또다시 내전이 일어난다.


차드가 독립과 동시에 외세에 의하여 태생적으로 남과 북으로 분열된것은 우리 땅 코리아반도에서 8,15 해방과 동시에 북과 남으로 분열된 비극적인 우리 민족의 역사와 거의 유사한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남북대립으로 시작된 차드의 북쪽은 같은 아랍계인 리비아가 지원했다. 반서방주의자이며 반미반제국주의자인 카다피 대통령의 정권이 같은 아랍계의 차드의 북쪽을 지원하는것은 극히 당연한 정책이었다. 특히 그 당시 리비아의 카다피 대통령은 <아랍연방>을 구상하면서 이슬람교와 사회주의를 혼합한 반미 반제정책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구 종주국인 프랑스가 막강한 세력으로 남쪽의 흑인계의 기독교 친서방적인 <차드진보당, PPT>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줌으로써 분열의 정세가 가시화되고 있었다. 프랑스는 드디어 남쪽의 PPT 계열의 지도자인 웅가프다 톰발바를 일방적으로 지원하여 차드의 초대 대통령으로 세우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프랑스가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톰발바예 대통령에 대하여 북쪽의 이슬람계의 거센 반발은 1963년부터 시작하여 1966년에는 <차드국민해방전선, FROLINAT>을 결성하여 톰발바예 대통령을 반대하는 반정부 게릴라투쟁을 시작한다.

북쪽에서 반정부 게릴라전이 극심해지자 프랑스는 군대를 차드에 투입시켜 장기적으로 주둔시킴으로써 차드 내전에 적극 관여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관여에도 불구하고 1975년에 리비아가 지원하는 군부 쿠테타가 발생 하여 톰발바예 대통령은 암살되고 말았다. 쿠테타 세력은 <9인 최고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여기에서 펠릭스 말룸이 <9인 최고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였고 곧 이어
제2대 대통령으로 집권한다.

하지만 프랑스는 말룸 대통령 정권에 개입하여 말룸 정권 안에서 한 분파를 조성하는 공작을 개시했다. 프랑스의 공작으로 등장한 인물이 히센 하브레이였다. 하브레는 말룸정권 내부에서 권력다툼으로 내전을 일으켰는데 이 내전으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다.

차드는 1979년에 인접 5개국의 조정에 의하여 임시 평화가 조성되었다. 그 결과 북쪽의 이슬람 반군 세력과 남쪽의 정부간에 잠정적으로 정전에 합의가 이루어 짐으로<카노협정>이 체결되였다. < 카노협정>에 의하여 그동안 적대관계였던 북쪽 이슬람권과 남쪽과의 주도권 싸움이 다소 화해되는 좋은 기회가 조성되면서 <잠정국민연합정부, GUNT>가 설립 된다. 이 <잠정국민연합정부, GUNT>가 창설됨에 따라 말룸 대통령은 외국으로 망명 길을 떠난다.

하지만 모처럼 결성된 <잠정 국민연합정부, GUNT>는 오래가지 못하고 둘로 또 다시 분열되었다. 물론 뒤에서 조정하고 있는 서방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미국의 흉계와 공작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공개된 비밀로 되었다.

<잠정국민연합정부>의 대통령으로 구쿠니 웨데이가 취임을 하고 국방장관으로 이센 하브레가 등장한다. 그러나 대통령과 국방장관은 서로 대립이 심화되여 결국 또 다른 내전으로 전변되었다. 구쿠니 웨데이 <대통령파, FAP>와 국방장관인 <하브레파, FAN>사이에 갈등과 암투가 일어난다. 1980년 3월에 FAP파와 FAN파간의 내전이 다시 시작됨으로 인하여 헐벗은 차드의 민중들에게 피바람은 사정 없이 게속하여 불어닥쳐 온다.

차드의 내전이 심화되여 한때 구쿠니 웨데이 대통령파는 리비아의 지원을 받아서 강세를 유지함으로 국방장관 하브레는 이웃나라 수단으로 일시 도피하고 있었지만 하브레는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수단에서 귀국하여 1982년 6월에 대통령파를 압박하여 차드의 수도 은자메나를 점령했다. 구쿠니 웨데이 대통령은1982년 6월에 알제리로 망명한다.

수도를 점령한 하브레는 미국의 각본에 의하여 1982년 10월에 차드의 제4대 대통령으로 취임 했다. 하브레를 차드의 대통령으로 취임시키기 위하여 미국 CIA는 1981년부터 맹렬히 활약했다. 미국의 차드에 대한 <인권관찰> 비밀보고서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미국 CIA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미국의 비밀음모 공작


ㄱ. 1981년에 레간 대통령 정권하에서 W. Casey정보부장은 하브레 국방장관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하여 비밀 작전을 착수했다. 그 당시 국무장관 Haig은 리비아의 카다피 대통령에게 치명타를 가하라고 지시하였으며, 미국은 하브레에게 수천만 달러를 사전에 제공했으며 집권에 성공한 후에도 반군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하도록 달러를 계속 지원해 주었다.

ㄴ. 1978년에 차드의 제 2대 대통령 말룸이 북쪽편과 리비아 외 가까운 것을 미국은 몹시 불편하게 여겨 그 당시 하브레를 국무총리로 만들어 말룸 대통령을 견제하도록 공작을 했다.

ㄷ. 1980년 3월에 차드에서 FAP파와 FAN파가 내전을 다시 시작한 사건도 <인권 관찰> 비밀보고서에 의하면 미국 CIA가 FAN에 속하는 하브레를 부추겨 내전을 이르키게 한 것으로 기록되여 있다.

ㄹ. 1982년 10월에 하브레는 드디어 미국이 만든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이 된 하브레는 미국의 지원하에서 비밀경찰을 창설하여 운영했는데, 이 비밀경찰은 이른바 “DSD”라는 비밀집행문건을 작성해 놓고 수 없이 많은 정적들을 처형했으며 또한 종족청서를 감행하여 자기와 다른 타종족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ㅁ. <인권관찰> 비밀보고에 의하면 하브레 대통령은 집권 기간 8년 동안에 저지른 죄악은 40,000 명을 정치적 이유로 살해했고, 200,000명에게 가혹한 고문을 감행한 것이다.

ㅂ. 미국과 프랑스는 차드와 리비아간의 마찰을 장려하고 분쟁이 생기면 하브레 대통령에게 군사적 지원을 계속하여 리비아의 카다피 대통령을 괴롭히도록 했다.

ㅅ. 미국은 1985년에 차드 경찰들을 미국으로 단기유학을 시켜 고문기술을 훈련시켰으며 그들은 귀국후에 경찰간부로 특대를 받게 했다.

ㅇ. 미국은 차드 하브레 정권하에 있는 비밀경찰에 매달 5백만 달러를 제공하고 정기적으로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ㅈ. 미국 CIA은 차드의 이웃나라들과의 정보망을 모자이크식으로 구성하고 운영했는데 이스라엘, 토고, 중아공, 자이레, 카메룬등 6개국을 하나로 묶어 비밀로 운영하면서 비밀운영자금을 제공하고 있었다. 차드의 하브레 대통령은 모자이크식 운영에 있어서 항상 특별한 혜택을 받고 있었다.

ㅊ. 위의 모든 CIA의 비밀활동과 2,500만 달러의 지출에 대한 내역은 1998년에 미국 국회에 보고되었다. 그 외에도 군수장비와 무기구입 등을 위하여 1983-86년사이에 2,800만 달러를 지출했다고 국회 보고했다.

하브레 대통령은 1982년 10월에 차드의 제4대 대통령으로 등장하여 1990년 12월까지 8년동안 미국의 지원을 받아 막강한 권력으로 철권집권을 했다. 그 누가 감히 하브레 대통령이 정권에서 물러나리라고 상상 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1990년 12월에 하브레 대통령은 막강한 권력을 포기하고 국외로 추방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브레 대통령과 불화로 인하여 수단에 망명중에 있던 이드레스 데비가 <애국구제운동, MIPS>을 조직하여 리비아의 지원을 받으면서 차드의 수도 은자메나를 점령하고 하브레 대통령의 철권정권을 붕괴시켰다.

이드레스 데비는 1991년 4월에 과도의회 의원을 선출하고 1994년에 최고국민 의회를 출범시키고, 1996년 7월에 대통령선거에서 69.1%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취임한다.

데비 대통령이 정권을 획득함에 따라 차드의 내전의 양상은 새로운 모습으로 급변한다. 차드의 독립 이후부터 지금까지 프랑스와 미국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남쪽의 흑인계와 기독교 세력이 여당이 되여 정부군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북쪽의 아랍계와 이슬람 세력을 탄압함으로써 또다른 차드의 내전이 발생한다.

그럼으로 지금까지 <반군>이라는 명칭은 바로 북쪽의 아랍계와 이슬람 세력을 가르키는 대명사이었다. 하지만 데비 대통령이 정권을 획득한 후부터는 내전의 양상이 정반대로 바뀌였다. 이제는 북쪽의 이슬람과 아랍계가 집권 여당이 되였기때문 이제부터는 정반대로 프랑스와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남쪽이 야당이 되고 만다. 그래서 남쪽의 흑인계외 기독교 세력이 차드의 야당반군이 되여 차드의 뿌리 깊은 비극적인 내전을 계속하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반군>이라는 대명사는 프랑스와 미국을 배경 삼고 있는 남쪽의 흑인계와 기독교 세력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로<반군>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목되었던 것은 전 하브레 대통령이 어디에 숨어 있는가에 초점이 모아졌다. 그는 미국의 CIA와 프랑스의 비호를 등에 업고 8년동안 40,000만명을 처형했으며, 200,000명에게 가혹한 고문을 자행한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권좌에서 물러나기 바로 하루전에도 300명의 정치범들을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미국은 어찌하여 미국에 충성한 하브레 대통령을 포기했을까? 미국의 대 차드 정책에 대하여 한 평론가의 짧은 한 마디 가 매우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그는 말하기를 “하브레 대통령은 전쟁에서는 훌륭했지만 국가 지도자로서는 그리 적절하지 못했다. 미국은 그의 국가 지도력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게되여 하브레 대통령을 몰아내기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하브레는 1990년 12월부터 세네갈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2005년 11월에 체포되여 재판을 받는 과정에 처해 있으며 차드 정부는 그에게 사형을선고 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차드 정부의 법원은 전 하브레 대통령에게 충성하여 중범죄를 저지른 11명에게도 사형을 선고 했는데 이들은 모두 해외에 도피 중에 있는 상황이다.

3. 이드리스 데비 대통령 정권의 어제와 오늘의 전망



하브레 대통령 정권에 의하여 추방되여 수단에서 망명중에 있던 이드리스 데비 는 미국이 하브레 대통령을 포기한다는 유리한 기회를 이용하여 재빠르게 행동하여 <구제인민운동,MPS>을 결성하고 리비아의 지원하에서 하브레 대통령 정 권에 대하여 무력투쟁을 개시였으며 1990년 12월에 수도를 점령하고 하브레 대통령 정권을 붕괴시킨다. 하브레는 세네갈로 망명하여 간신히 죽음을 면한다.

이드리스 데비는 리비아의 지원을 받아 데비의 쿠테타 병력을 성공적으로 수도에 진입시키고 임시로 정부통치를 시행했으며 1992년 2월에 MPS는 데비를 대통령으로 세우는 국가헌장을 채택했다. 프랑스는 차드의 이러한 급변 상항에 대하여 어떠한 반대도 표시하지 못하고 다만 지켜보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 후에 2년동안 수차에 걸쳐 데비 대통령 정권을 반대하는 남쪽의 여러 단체와 조직들이 쿠테타를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러한 남쪽의 반정부 조직들의 모든 행동을 가리켜서 <차드 반군들의 행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프랑스는 지금까지의 침묵을 깨고 데비 대통령에게 평화청책에 대한 방도를 제시했다. 프랑스의 제시에 따라 데비 대통령은 다원화된 민주정권을 수립할 목적으로 정부, 정당, 노조, 군부등 750명을 초청하여 회합을 주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쪽의 아프리카 흑인계와 기독교 세력은 데비 대통령의 제안을 외면하고 남쪽에서 대규모 민간인 학살사건을 장하며 정치적 불안을 확대시켰다.

1994년에 데비 대통령은 남쪽의 반정부 반군 그룹들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제안했지만 오히려 남부의 재생을 위한 <민주전선>과 <연방공화국>을 주장하는 일부 군부세력들은 데비 대통령의 정부군과 격돌할 뿐이였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속에서도 데비 대통령은 1996년에 대통령선거를 실시할 강한 의도를 밝히고 1차와 2차투표를 통하여 남쪽의 쿠테타 주모자들을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 그리고 1997년에는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125석 가운데서 63석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물론 남쪽에서는 부정선거 라고 소동을 벌이며 불만을 표시했다.

1998-2003년 5년간에 데비 대통령의 정부군과 남쪽의 반군사이에 크고 작은 전투는 하루도 쉬임 없이 계속되었고, 이 바람에 수천 여명의 민간이들과 정부군인들이 반군들에 의해 사살되는 일들이 벌여졌다. 이러한 정국의 불안 속에서 야당과 반군의 세력이 더 이상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데비 대통령 정권은 대통령 재선을 위한 헌법을 개선할 수 있었다.

집권세력은 2005년에 데비 대통령의 재선을 허용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대통령 임기제한을 철폐시켰다. 2006년 5월 3일에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보이콧한 가운데 총 유권자 580만명의 77.6%를 획득하여 세번째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지난 3-4년 간 데비 대통령은 3,4차례 쿠테타의 위기와 그의 생명에 위협을 노리는 반군들의 반격에 시달려 왔다.

데비 대통령은 2007년 10월에 리비아의 주선으로 4개의 반군 그룹과 평화협정을 맺고 서명했다. 그러나 2008년 2월에 남쪽의 반군은 또 다시 차드의 수도인 은자메나를 점령하려고 공격했다. 이것은 실패했다.

이글을 끝맺으며…


끝을 모르는 차드 내전의 주요 원인은 남부의 아프리카계 비이슬람 세력과 북부의 아랍계 무슬림 새력간의 갈등으로 역사적으로 길고 긴 내전이 계속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프랑스나 미국 같은 강대국들이 이해관계를 갖고 간섭하고 지배하려는 음모행위들도 차드의 내전을 부추기고 분열을 도모해 왔다고 지적할 수 있다.

아직도 차드의 내전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선 북아프리카의 맹주의 위치에 있는 리비아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이는 반미와 반제국주적 노선을 강조하면서 차드가 위기에 처할 때 마다 지원해 왔다.

한편 구 종주국 프랑스의 영향력이다. 이 세력도 아직 차드를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영향력을 발위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다. 이들은 중앙아프리카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다. 특히 1990대 이후부터 차드가 막대한 원유 산유국이 됨에 따라서 이집트와 수단등의 주변국들은 물론이고 미국과 프랑스, 영국과 중국등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실타레처럼 얽혀 있어 차드의 내부권력구조는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다.

이러한 강대국들의 틈에 끼어 있는 차드의 데비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이른바 <실용주의 외교정책>을 세워 나아가고 있다. 미국은 현재로서는 더 이상 이전에 했던 음해공작을 삼가고 있는 움직임이다. 하브레 대통령을 지원한 미국 CIA 공작이 노골적으로 나타나지는 않고 있는 상황이다. 미 당국은 데비 대통령이 선택한 ‘실용주의 외교정책’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입장으로 진단된다.

프랑스는 남부의 비이슬람계 기독교 세력을 수 세기동안 지원했지만 이제는 대 차드 정책을 돌변시켜 데비 대통령의 정권을 형식상 적극 지원하면서 내용적으로는 데비 대통령에게 남측과 대화를 하도록 압력을 가중시키면서 이중적 외교정책을 구사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심스럽게 하고 있다.

한편 데비 대통령은 장기집권으로 인한 국민들의 반발에 부딪치고 있으며 동시에 측근 군부 일부세력이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어 이러한 움직임들을 어떻게 다뤄나가느냐가 현안 문제들로 안고 있다. 그의 당장의 과제는 2011년 재선을 여하히 성공시키느냐 못하느냐에 집중되어 있다.

데비 대통령은 석유판매 수입금을 활용하여 헬리콥터를 구입하고 외국인 조종사를 고용하는등 막대한 국방비를 지출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고 남부의 야당과 UN등 국제적 여론에 부딪치고 있다. 하지만 데비 대통령은 이런 여론에 개의치 않고 지금까지 강력한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는 형편이다.

오히려 데비 대통령은 구 종주국인 프랑스를 능수 능란하게 다루면서 정보와 군사훈련 그리고 병참분야에 이르기까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능숙한 정책을 펴나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때 현재 차드의 데비 대통령은 어느 새 친 서방적 대통령이 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로 인하여 데비 대통령은 국민들의 신뢰를 점점 잃어가고 있지나 않은가에 대하여 신경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데비 대통령 자신이 이슬람이며 차드 정부가 이슬람 중심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차드에는 180여개의 종족이 있는데 데비 대통령은 자카와 종족에 속해있다. 요즈음 수단 정부가 반군을 소탕하면서 수단에 있는 자카와족을 소탕하는데 대하여 데비 대통령은 분개하여 수단정부와 불편한 관계에 처해 있다.


차드정부는 수단에 있는 반군을 옹호해주고, 수단정부는 차드의 반군을 옹호해 주는 서로 모순된 처지에서 양국은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는 실정이다. 두 나라의 정부는 서로 모순에 빠져있는데 이것은 결국 프랑스와 미국의 이득을 더해 주는 것이 되고 있다.

차드의 데비 대통령과 리비아와의 관계는 계속 우호적이며 더욱 간밀하게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차드의 중국과의 관계는 특히 석유분야에서 서로 중요한 역할을 주고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차드의 미국관계는 데비 대통령의 줄타기식 양면정책으로 <실용외교정책>으로 이어질 것 같으나 이 관계는 매우 불안한 것으로 진단되고 있다.

차드의 남북관계 외교 역사는 남한과는 1961년 수교하였으며 의료,무역협정을 체결했고, 현재 주카메룬대사관에서 겸임을 하고있다. 북한과는 1969년 수교하여 외교관계를 맺어 왔다.차드의 대 북한외교는 우호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2007년 8월에 북조선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차드 공화국의 이드리스 데비 대통령에게 독립 47돌 축전을 보내면서 “나는 자주, 평화, 친선의 리념밑에서 귀국과의 친선협조관계를 폭넓게 확대강화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확언하면서 나라의 평화와 안전을 수호하고 경제적 발전을 이룩해 나아가는 당신과 귀 인민의 노력에 성과가 있기를 충심으로 축원합니다.” 라고 보낼 정도로 양국관계는 우호적이다.(끝)



[출처 : 유태영 박사 2010-11-11]

민족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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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스님의 댓글

달라스 작성일

유태영 박사님의 글 보니깐 마치도 우리 나라 분단사를 읽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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