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래일에 사는 사람들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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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제 3 편 오늘의 의미
4
진수현은 이튿날 아침에 김정태초급당비서를 만나 남웅을 알아보지 못했던 자기의 실책을 이야기하였다.
김정태 역시 자기가 그의 조동을 별치 않게 대하였다고 심각히 돌이켜보는것이였다.
진수현은 그길로 남웅을 데려오려고 평양시내로 들어가는 뻐스를 탔다.
방금전에 초급당비서앞에서도 털어놓았지만 자책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 그를 괴롭혔다.
나는 어째서 인간들을 제나름의 꿈과 하나의 세계를 가진 존재로 보지 못했을가, 어째서 그들의 우점보다 부족점이 먼저 눈에 띄였을가? 그건 내가 연구과제와 그 해결을 위한 견지에서만 사람들을 보고 평가했기때문이 아닐가?! 그래서 사람들을 《쓸 사람과 못쓸 사람》으로 갈라놓지 않았는가. 어째서 난 이처럼 랭정하고 실무적인 인간으로 되여버렸는가?…
송화기계무역회사 정보통신실에 들어가니 남웅은 사장실에 가고 두명의 청년들이 프로그람을 짜고있었다.
진수현은 사장실로 찾아가려다가 남웅을 먼저 조용히 만나고싶어 그곳에 앉아 기다렸다. 회백색리놀리움바닥이며 진주가루를 뿌린듯 눈부신 벽지, 채광이 좋은 방에 즐비하게 차려놓은 콤퓨터들과 주변장치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정보통신실을 꾸리는 작업은 끝난것 같고 지금은 프로그람작업이 한창이였다. 한 청년은 무슨 자료처리프로그람 같은것을 짜고 다른 청년은 환자시세예측프로그람을 짜고있었다. 여기서 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였다. 그들에게 말을 시켜보니 남웅은 이 방에서 책임자노릇을 하는것 같았다.
진수현은 그를 데려가기가 어쩐지 힘들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부지중 한숨이 나갔다.
이윽고 남웅이 통신실에 들어왔다. 그는 그래도 진수현을 보자 반가운 모양이였다. 어딘가 죄송스러워하는것 같기도 하였다.
두사람은 복도로 나와 넓은 홀에 놓인 긴 쏘파에 가서 나란히 앉았다.
진수현은 그에게 멀리 에둘러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난 부소장동무한테서 남웅동무가 K방식풀이법을 착상했다는 소리를 듣고 정말 놀랐소. 그런데 왜 계속 전개하지 않고 물러섰소?》
리남웅의 갱핏한 얼굴이 밝아지는듯 하더니 이어 고통스럽게 찌프러졌다.
《저… 다른 까닭은 없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요?》
《말하자면 그… 내 힘에 부친 주제였기때문에…》
《아니요. K방식의 맹아를 발견했다는 그자체가 벌써 동무의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는거요. 난 그런줄 몰랐댔소.…》
진수현의 목소리는 침중하게 울렸다. 무슨 말로 그를 찬양하고 그앞에 사과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다음순간 두사람의 눈길이 서로 마주쳤다.
진수현이 다시 보니 리남웅의 눈은 졸음과 권태의 뿌연 그림자는 가뭇없고 고결함과 성실성, 총명함으로 빛나는것 같았다.
진수현은 절절하게 말했다.
《그래서 난 남웅동무가 자기 재능을 여기에 묻어버리지 말고 연구소로 돌아가자고 권고하고싶어서 찾아왔소.》
《…》
《남웅동무, 솔직히 말해보오. 여기가 마음에 드오?》
두팔굽을 무릎에 짚고 웃몸을 숙여 바닥을 내려다보던 리남웅이 길게 모두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창문쪽을 보았다.
《여기가 여러모로 좋습니다. 살아가는데도 그렇고… 하지만 학문을 탐구하는 사람이 있을 곳은 아닙니다.》
불시에 뜨거운것이 진수현의 가슴에서 끓어올랐다. 그래, 바로 저것이다!…
진수현은 자갈이 널린 강변에서 보석을 찾아쥔 심정이였다.
《오늘은 참 기쁘구만. 이제 사장한테 인사나 하고 돌아가자구.》
《저… 사장동지가… 펄쩍 뛸겁니다.…》
《그럼 내가 먼저 사장을 만나겠소.》
진수현은 본시 속으로 재는것이 많은 남웅이지만 지금 별나게 딱해하는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어쨌든 본인이 돌아가겠노라고 결심한 이상 사장도 어쩌지 못하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진수현이 사장과 이야기해보니 그는 보기 드문 벽창호였다. 그는 몇마디 안팎에 벌컥 성을 냈다.
《이보시오. 여기는 뭐 인재가 필요없는덴줄 아오? 나라의 기계공업을 추켜세우는데서 당당히 한몫을 하는 기관이란 말이요. 공장이나 연구소만 가지고 될것 같소? 유무상통이나 교류가 없이 발전을 기대할수 있을것 같은가!… 보아하니 당신도 우리 회사를 찌글사하게 보는 모양인데 관점부터 바로 가지는게 좋겠소.》
진수현은 이 사람에게 아무리 리치에 닿는 소리를 해도 도무지 들어먹을것 같지 않았다.
《사장동지, 남웅동무 자신이 연구소로 돌아가고싶어합니다.》
이 말은 역시 효과가 있었다. 사장은 뒤통수를 맞은것처럼 어리벙벙해졌다.
《그 사람이 돌아가겠다고 할게 뭐요. 실장동무가 강박한게 아니요? 가만, 내 그 사람하구 직접 말을 해보겠소.》
그는 전화기에 손을 뻗쳤다.
《지금 저 문밖에 와있습니다.》 진수현이 알려주었다.
《그럼 실례지만 실장선생은 좀 나가서 기다려주우.》
사장은 노기등등해서 제가 문을 열고 진수현을 내보낸 다음 복도에서 서성거리는 리남웅을 고개짓으로 불러들였다.
남웅이와 어기여 복도로 나온 진수현은 초조해서 오락가락하며 사장실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옛말에 제 칼도 남의 칼집에 꽂히면 빼기 어렵다더니…
한참만에 그 문이 열리며 남웅이 후줄근해서 나왔다.
《남웅동무?…》 진수현이 불렀다.
《저… 좀 더 생각해봐야 할것 같습니다. 이거 미안합니다.…》
《아니?…》
《실장선생, 어서 들어오우.》 사장방에서 큰소리가 들려왔다.
진수현은 어쩔수없이 다시 사장방으로 들어갔다. 서관범사장은 낯색을 고치고 그를 구슬렸다.
《여보, 그런 법이 어데 있소? 데리고있던 사람이라고 자꾸 마음을 든장질해놓으면 어떻게 하는가 말이요. 실장선생, 이젠 제발 저 사람을 다치지 마우. 저 사람의 일생 중대사를 망쳐놓지 말란 말이요.》
《중대사란 말이 옳습니다. 내편에서 그 말을 하고싶은걸요.》
《허허,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
사장은 곰살궂게 웃으며 수현에게 홍차를 권하고 자기도 그곁에 앉아서 차잔의 더운 김을 후후 불었다.
《기왕 내친김에 툭 털어놓읍시다그려. 사실은 남웅이 저 사람과 우리 딸애가 머지않아 약혼식을 하게 되오.》
《그래요?!》 진수현은 어지간히 놀랐다.
《실장선생도 5병원에 다니는것 같던데 우리 애를 알수도 있을거요. 서진주라고 안과에서 의사노릇을 하지요. 몇해전에 우리 애가 거기에 들어가게 된것도 윤덕부소장이 권고해서 그리된거요. 자기가 검진이랑 받으려고 5병원에 다녀보니 깨끗하고 조용하다기에 그 말을 따랐지요. 이번에 저 애들이 가까와지게 된것도 윤덕부소장이 소개를 잘한 덕분이라고 할가…》
《서진주의사가 그 집 따님이였군요!》
진수현은 반가왔다.
서진주라면 다방면의 실력을 갖춘 의사인데 성미가 시원시원하고 결단성이 있어서 평판이 좋았다. 이런 매력있고 활달한 녀의사와 사귀게 된것은 남웅이로서도 잘된 일일것이다.
《그것 참, 축하를 해야겠습니다.》
《그러니 남웅이 그 사람이 여기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건 어째서요?》
《그 까닭을 모르겠소? 그 사람이 도로 내려가면 우리 딸애는 어떻게 하느냐 그 말이요.》
《어떡하긴요. 결혼하면 남편을 따라서 우리 은정구역으로 오면 될게 아닙니까.》
《하아, 이러니 의사소통이 잘 안될수밖에… 여보, 당신두 딸자식이 있으면 이제 시집보낼 때 한번 겪어보우. 생활은 그렇게 단순하질 않소. 우리 진주가 과학원동네에 내려가겠다고 할게 뭐요.…》
《…》
진수현은 그제야 일이 심상치 않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는 처녀의 아버지앞에서 자기로서도 그닥 자신이 없는 무슨 륜리문제, 애정문제를 론하고싶지 않았다.
그래 실무적으로 말했다.
《문제가 단순치 않다는건 리해됩니다. 그러나 리남웅동무는 연구소로 돌아와야 합니다. 국가적견지에서도 그렇고 본인의 발전을 위해서도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장동지네 집에서도 남웅동무의 일이 잘되기를 바라겠지요?》
《도대체 뭐가 발전이고 잘된다는건지 난 리해가 안되누만.》
서관범사장이 비양조로 나왔다. 진수현은 침착하게 말했다.
《이것 보십시오. 우리 연구소의 장래를 놓고보아도…》
《여보, 실장동무가 연구소를 대표하는것도 아니잖소, 말은 바른대로… 보다 책임적인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미 다 리해하고 동의한 일인데 실장동무가 중뿔나게 나서서 헤살을 놓으면 어떻게 하는가 말이요. 우습지 않소?》
《…》
아무래도 즉석에서 문제가 풀리기는 틀렸다. 좀 더 여기 앉아있다가는 필경 싸움이라도 일어날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단념할수가 없었다.
《사장동지, 우리 이 문제를 좀 더 생각해봅시다. 전번에…》
《난 생각할대로 생각해봤소.》
서관범은 무슨 장부책으로 책상우의 보이지 않는 먼지를 쓸어냈다.
진수현은 끈끈히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남웅동무가 어떤걸 착상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알고있소, K방식같은건 윤덕부소장한테 들어서 대체로 알고있소. 방금전에도 그 사람과 전화로 얘기가 있었소. 이보우, 당신은 제발 좀 곁에서 가만있구려 응?》
(리윤덕이?!…)
진수현은 어떤 깨달음이 있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오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잘 가오.》
진수현은 생각에 잠겨 회사현관으로 나왔다. 마당에서 리남웅이 고개를 수굿하고 기다리고있었다.
《이거 죄송합니다.… 사정이 좀 있어서…》 리남웅은 뒤더수기를 긁으며 말을 더듬었다.
《나두 대충 들었소. 약혼식을 한다니 기쁘구만. 그때문에 돌아오는 일이 좀 복잡하게 될수도 있겠지. 이젠 자기 일을 혼자서 결심할수가 없으니까. 그래도 기본은 남웅동무의 결심이라고 생각하오.…》
진수현은 한참 리남웅을 설복하였다. 퇴근시간이 지나 회사울타리를 나와서도 거듭 권고하고 일깨워주었다.
한참 들을만 해있던 남웅이 웬일인지 흘끔흘끔 곁눈질을 하였다. 그 처녀가 곁으로 다가오고있었던것이다.
고도근시안경을 낀 진수현은 그 눈치를 못채고 안타까이 말을 계속하였다.
《…남웅동무가 옳은 선택을 했는데 그 처녀가 안 따를리가 있겠소. 어차피 동무를 리해하게 될거요. 인차 리해를 못하면 할 때까지 근기있게…》
《누가 리해한다는거예요? 이분은 연구소에서 온 간부인가요? 아니…》
서진주는 자기네 병원 환자로 등록된 진수현을 알아보고 당황해서 어쩔줄을 몰랐다.
진수현 역시 위생복차림의 의사와는 너무도 다른 화려한 진주의 모습을 보고 어지간히 놀랐다.
《진주동무, 저리 좀 가서 기다리오.》 리남웅이 난처해서 진주에게 귀띔하였다. 진주는 듣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실장선생님이시군요. 무슨 말씀인가요, 누굴 리해시키라는거예요?》
《그런게 아니라… 난 그저…》 진수현은 말을 더듬었다.
《뜻밖이군요. 여기서 실장선생님을 만날줄은 몰랐어요.》
명백한 비난이였다.
진수현은 지금 자기가 어떤 판에 끼여들었는가를 깨닫자 난처해졌다. 역시 애인들사이의 관계조정은 자기 사업령역이 아니였다. 이런 자리에선 그저 피하는게 상책인데…
《진주동무, 내 말을 좀 듣소. 사실은…》 바빠난 남웅이가 애원하듯 말했다.
《모르겠군요. 어째서 그렇게 주견이 없이 오락가락하는거예요? 남자가…》
《제발 좀 가만있으라는데…》
《이거 놓으라요!》
이젠 애인들끼리 다투는 판이였다. 진수현이 중간에서 말려야 하였다.
《이젠 진정들하라구. 응, 진정하라니까.…》
진수현은 이것도 남의 사생활에 끼여드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주춤거렸다. 그러나 말리지 않을수도 없었다. 한참 법석하는통에 진수현은 그만 진땀을 뺐다.
겨우 처녀를 얼려서 먼저 보낸 남웅이 면구한 얼굴로 진수현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땅이 꺼지게 한숨을 지었다.
진수현이도 같이 한숨을 지었다.
그러나 헤여지면서 말했다.
《잘 생각해보오. 내 다시 오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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