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래일에 사는 사람들 16
페이지 정보
본문
제16회
제 2 편 청 년 조
7
국가과학원 회의실에서 외국어경연이 한창이였다.
각지의 분원들과 연구소들에서 온 200여명의 연구사들이 한 책상에 한명씩 앉아 록음기에서 울려나오는 영어를 우리 말로 또는 영어로 받아쓰고 또 조선말로 불러주는 문장을 영어로 받아쓰기도 하였다.
최일은 떨리는 원주필로 자꾸 붓방아를 찧었다. 뒤에 앉은 임창만도 비지땀을 흘리고있었다.
최일은 이렇게 힘든 경연인줄 알았으면 아예 안 참가하든가, 썩 이전부터 착실히 준비할걸 그랬다고 백번 후회를 하였다.
그는 어찌나 당황하고 긴장했는지 조선말을 영어로 쓰는 3번 문제에서 조선말까지 삭갈리고말았다.
《지각이 완전히 발달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것을 부정할수 없을것이다. 그러나 실험심리학자들은 경험설을 믿지 않고있다. 정확한 기전은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못하고있다.…》라는 조선어문장에서 지각을 심리학적인 범주가 아니라 왕청같이 땅껍데기로 착각하고 영어로 써냈던것이다. 늦었다는 의미의 지각도 있지 않는가?!
참으로 까다로운 문제였다. 시험지를 걷어간 다음에야 깨달음이 왔다.
시험을 망쳤다는 생각에 최일은 일어설 맥도 없었다.
그 결과는 오후 6시에 이 자리에서 발표한다고 하였다.
바깥에 나오니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꽃이 후둑후둑 떨어졌다.
《다 써냈나?》 임창만이 따라오며 물었다.
최일은 얼굴을 찌프렸다.《통과되긴 코집이 글렀어.》
《야, 난 영어발음이 귀에 들어오지 않아 혼났구만.》
최일은 합숙에서 점심을 먹고 갑갑증이 나서 우산을 쓰고 연구소로 나갔다.
먼 우뢰소리가 구릉구릉 울리고 비발이 점점 굵어졌다.
연구소마당에 보지 않던 승용차가 한대 서서 비를 맞고있었다.
저건 새로 사온 부소장차인가? 차고를 늘인다더니…
최일은 맞갖지 않게 그 차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번호판을 보니 진흥기계공장 차였다. 그곳 설계연구소에서 새 공작기계설계문제를 토론하려고 사람이 온것 같았다. 참, 오은경은 어떻게 지내는지? 혹시 그새 어디 시집을 가지는 않았을가?!
최일은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당장 진흥기계공장에 달려가 그 처녀를 만나고싶었다. 지금은 찾아갈 처지가 못되는줄 알지만… 어떻게 그 모습을 잊을수 있으랴! 정숙한 기품이 느껴지는 흰 얼굴, 호수같이 그윽한 눈매…
돌개바람이 일어난 가슴을 눅잦히려고 애쓰며 최일이 조종장치실에 들어가니 아니나다를가 진흥기계의 설계연구소 소장 강삼룡이 와있었다. 늘 얼굴이 찌뿌둥하고 퍼런 수염터를 왼손으로 쓸어만지는버릇이 있는 그는 오늘따라 살가운 태도로 무슨 도면같은것을 펴놓고 진수현실장과 토론을 하고있었다.
최일은 얼결에 뒤걸음쳐 복도로 나오고말았다.
강삼룡소장을 만나고싶지 않았다. 지난해 최일이네가 공장에 갔을 때에도 무턱대고 리윤덕의 편을 들면서 최일을 무시하던 소장이였다.
오늘 강삼룡소장이 말끝에 최일의 일을 묻기라도 하면 진수현실장이 좋은 소리를 할리가 만무라고 최일은 넘겨짚었다. 최일이 자신이 그것을 변명할수가 없었다. 조장자리를 내놨지, 실장과는 기분 내키는대로 엇드레질을 했지, 오늘은 외국어경연시험마저 떨떨하게 쳤지.…
소장이 돌아가 이 사실을 오은경에게 전달한다면 그 처녀는 얼마나 놀라고 실망하겠는가! 환멸을 느낄것이다. 아니, 아예 돌아보지도 않을것이다.
최일은 터벌터벌 비속을 걸어 경연장으로 갔다.
서너시간은 잘 기다렸다.
6시에 당선자발표를 하였다.
《이제부터 준결승경연 당선자들을 발표하겠습니다. 이름을 부르면 좀 큰소리로 대답해주십시오.
15번 최성학, 43번 김민수, 65번 김재욱, 70번 안정희, 81번…》
점점 등록번호 92번으로 가까이 오고있었다.
내가 92번이 맞던가?
《…93번 임창만.》
《예!》
최일은 뒤에 앉은 그를 돌아볼수가 없었다. 수치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준결승경연 당선자들은 래일 오전 9시부터 이 장소에서 최종결승경연에 참가하게 됩니다. 자기의 론문을 영어로 발표하게 되므로 다음과 같은 준비품들을 지참해야 하겠습니다.…》
최일은 락선자들속에 섞여 비뿌리는 현관계단으로 내려갔다. 어둠… 비바람… 섬섬한 번개불…
그는 우산을 펴들지 않았다. 씨원히 맞고싶은 비였다. 계단아래에는 당선자들을 맞이하는 커다란 꽃송이들인듯 울긋불긋한 우산들이 활짝 펼쳐져있었다. 그중 한 우산밑에서 아는 얼굴을 띄여보자 최일은 옆으로 게걸음을 치며 피해달아났다. 진수현실장이 우산을 쓰고 최일이 자기와 창만이를 기다리는것이였다.
최일은 그를 볼 낯이 없었다. 그래, 어스름과 비속으로 사라져버리는게 상책이다. 아니, 이건 비겁하다. 최일이, 넌 언제부터 이런 졸장부가 되였는가? 너는 수치를 당해야 한다. 《실장선생, 나는 락선되였습니다.》하고 말하라, 자기를 채찍질하라! …
우산들과 비발사이로 주춤거리며 실장에게 접근하던 최일은 실장의 우산밑에 나란히 서있는 강삼룡소장을 보게 되자 감전된 사람처럼 온몸으로 경련이 줄달음쳤다.
《헛참, 우리 은경이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거던.》 하고 강삼룡이 진수현에게 수군거리였다.
《뜨르르한 대상자들이 들어와두 외눈으로도 보지 않으니 말이요. 그런걸 연분이라고 하는지? 한데 그 젊은이가 뭐 변변하우? 작년에 보니 사람이 별로 탐탁해보이지 않더구만.…》
《그건 착오인것 같습니다. 그는 보기 드문 인재지요.》
《그렇소? 이젠 경연이 끝난것 같은데…》
《아마 당선되였을겁니다.》 진수현이 말했다.
최일은 다시 뒤걸음을 쳤다.
《실장선생님! 야, 혼이 났습니다.》
《오- 창만동무, 통과됐소?》
《예, 한데 래일경연은…》
《최일동무도 통과요?》
《저…》
《글쎄 그럴테지.》
강삼룡소장이 중얼거리며 승용차에 들어앉았다. 차체에서 뽀얗게 비발이 일었다.
《실장선생, 잘있소!》
그러자 진수현실장이 승용차를 따라가며 말했다.
《두고보십시오. 래년엔 당선될겁니다. 워낙 바탕이 있으니까 틀림없이…》
《원, 모르겠소.》
승용차는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진수현실장은 우산을 받치고 승용차를 바래다가 무슨 생각에선지 머리를 떨구고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서있었다. 무엇때문에 괴로와하는가? 누구를 걱정하는가?…
그는 창만의 재촉을 받으며 그 자리를 뜨다가 우산을 접은채 발치에 드리운, 물참봉이 된 최일과 마주치자 제편에서 당황하고 어색한듯 미소를 지었다.
《여기 있었구만.》
실장이 하는 소리였다. 임창만은 마주선 두사람을 남겨두고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최일은 젖은 머리칼사이로 실장을 쏘아보았다.
그의 울대뼈가 들먹거렸다.
《실장선생은 구차하게 누굴 두둔하는겁니까? 가치없는 존재는 내버려두십시오! 괜히 체면만 깎이지 말고…》
폭우는 여전히 대줄기처럼 쏟아져내렸다.…
- 이전글[김웅진 칼럼] 자본주의에 리상과 목표가 있는가? 22.05.11
- 다음글[김웅진 칼럼] 김지하, 그리고 인생 후반부 22.05.1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