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래일에 사는 사람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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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제 2 편 청 년 조
4
최일은 낮에 밤을 이어 16일만에 회로설계를 끝냈다.
그 회로도를 넘겨받은 임창만이 콤퓨터로 인쇄기판을 설계해나갔다.
최일은 그곁에 붙어서서 지도를 하였다.
최일이 보기에 임창만은 그새 꽤 발전한것 같았다.
지금 하는 이 배치배선은 수동적이고 헐한것이 아니였다.
이 분야도 하나의 커다란 학문이라고 할수 있었다. 더우기 이 기판은 몇층으로 겹쌓고 구멍도금으로 아래우기판들을 련결하는 립체로 된것이였다.
마침내 인쇄기판설계를 기억기에 담아 소자들과 함께 인쇄기판공장으로 넘겼다.
청년조성원들은 한숨 돌리게 되였다.
조장인 최일은 기판이 제작되여 돌아오기를 초조와 불안속에 기다렸다.
6월 1일 오전에 최일과 임창만은 공장에서 제작한 기판을 넘겨받았다.
최일은 실험실에 돌아오자마자 기판시험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실장선생님한테 알려야지?》
임창만의 말을 최일은 듣지 않았다.
《시험해보고 알려도 늦지 않아.》
최일은 초조하고 긴장하여 오씰로그라프를 지켜보았다. 검사점들에서 예견한 파형들이 나오지 않았다. 왕청같은 파형들이였다.
거듭 시험하였다.
론리분석기로 시험해도 마찬가지였다.
최일은 랑패한 기색으로 입구신호도 달리해보고 기판을 뒤집어놓고 테스타로 여기저기 짚어보기도 하였다. 땀이 이마로 흘러내렸다.
《뭘 멍청해있어? 창만이, 회로도와 결선도가 맞는가부터 검토해보라구.》
최일은 꾸물거리는 창만을 보다못해 그의 손에서 확대경을 빼앗아가지고 기판을 들여다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육안으로 결함을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벌써 퇴근시간이 되였다.
최일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아 학준에게 실장방에 가서 알리라고 분부하였다.
진수현실장이 들어섰다.
《수고했구만, 그런데… 안된다구?》
《제 파형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최일이 맥이 나서 보고했다.
《그건 파형이 아예 안 나오는것보다 못한거지. 어디 좀 볼가?》
최일이네는 행여나 해서 실장의 거동을 주시하였다.
한참 기판을 시험해보던 실장도 머리만 기웃거렸다. 끝내 원인을 짚어내지 못한 실장은 청년조원들을 둘러보았다.
《오늘은 이만하고 래일 다시 봅시다.》
이튿날부터 실장과 김승길연구사까지 붙어서 기판을 검토하였다. 년장자들이였지만 그들 역시 처음 만지는 큰 기판이다보니 어리뻥뻥한것 같았다. 최일은 실패의 원인을 제가 찾으려고 애썼다.
그는 점점 열이 올라 실장이 곁에 있는데도 목청을 돋구었다.
《창만동무, 구멍도금부분들을 다 훑어보라구.》
《그건 이상없는것 같은데…》
《없는것 같다? 무슨 얼빤한 소리요?》
《다시 보겠소.》
임창만이 공손히 확대경으로 기판을 들여다보았다.
최일은 지금 실험공출신인 임창만이가 제일 미덥지 않아보였다. 그는 며칠전에 인쇄기판설계를 할 때는 창만이가 뭘 좀 아는것 같다고 생각되였는데 기판이 구실을 못하게 되자 글쎄 그렇겠지 하고 창만에게 자꾸 잔소리를 하였다.
《배선들도 훑어보라구, 간격을 잘 보라니까. 전자기잡음장애, 알만해?》
《알겠소.》
하루, 이틀, 사흘…
최일은 점점 더 신경질을 냈다.
그는 이번에는 요소들의 정수값이 잘못 계산되지 않았는가고 의심하였다. 최일에게 들볶이면서 리남웅과 송춘도는 전자회로모의기로 세부회로들을 검토해나갔다.
나흘, 닷새, 엿새…
송춘도는 그만 진탈이 나서 실장에게 오후에 외출하겠노라고 제기하였다. 골이 지끈지끈 아팠다.
실장은 조장의 승인을 받으라고 하였다.
송춘도는 다시 실험실로 돌아와 최일에게 말했다.
《최동무, 병원에 잠간 갔다와도 되겠나?》
《동무하고 얘길 좀 하려던 참이요.》 최일이의 마뜩지 않은 대답이였다.
《검토는 다했소. 이상이 없구만 뭐.》
《병원에 갔다 와서 다시 검토해보라구, 자신에게 실책이 없는가를…》
《나한테?! 그건 어떻게 판단한거요?…》
《그게 바로 동무가 평소에 인정하지 않는 론리의 힘이라는거요.》
송춘도는 귀등으로 들으며 외출하였다.
《조장동무, 어디 짚이는데라두 있소?》 임창만이 은근히 물었다.
《동문 알 필요없어.》
《실장선생님이 얘기한것처럼 아무래도 기본설계단계부터 내리검토해야 할것 같은데…》
《내게 다 생각이 있다니까.》
방금전에 최일은 송춘도가 요소정수계산을 틀리게 한 부분을 발견하였다. 지금 다시 검산을 해보는중이였다. 믿음성없이 되는대로 일하는 춘도 때문에 며칠동안 머리를 썩이고 진땀을 뺀 생각을 하니 천둥같이 화가 났다.
최일은 물론 이런 내부문제까지 미주알고주알 실장한테 반영할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버릇은 좀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그래 막 따지려는데 송춘도가 병원에 갔다 오겠다고 제기하는것이였다. 꾀병일건 뻔했다. 그러나 최일이 직접 청진기를 그의 동가슴에 갖다댈수도 없는노릇이여서 승인하고말았다.
그는 리남웅을 따로 불러 기판에서 요소를 짚어보이며 이게 동무가 계산한건가, 송춘도가 한건가고 찍어물었다.
남웅은 자기가 한건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니 송동무가 계산했다는거지, 그럴줄 알았어…》
《문제를 세우려구?》 리남웅이 불안스레 물었다.
《아니, 우리끼리 조용히 처리하자는거야.》
《왜들 그러나?》임창만이 또 끼여들었다.
최일은 그를 흘겨보았다.《또 상급에 반영하자는건가?》
《하하, 무슨 소릴 그렇게 하나?》
《입이 무거운게 좋아.》
최일이 주의를 주었다.
한편 골이 아파서 병원을 찾아가던 춘도는 시원한 바람을 쏘이자 한결 정신이 들었다. 병원 현관문고리를 잡았을 때는 아픔이 가뭇없이 사라지고말았다.
(거 조화다, 신경계통이 약간 과로했던걸가?…)
춘도는 병원에 들어가지 않고 꽃나무들이 늘어선 구내길을 좀 거닐다가 퇴근시간무렵에 돌아왔다.
그는 자기를 유심히 쳐다보는 청년조원들을 휘둘러보더니 싱거운 소리를 던졌다.
《왜들 이렇게 조용해졌나?》
《…》
《이젠 지쳐서 물러앉은셈인가? 아니, 남웅동무, 창만동무, 왜 모두 함구무언이요?》
《송동무, 여기 좀 와 앉소.》
최일이 기판을 손에 든채 지시하였다.
그는 뗑해서 주저앉는 송춘도에게 문제의 좁쌀알만 한 전자요소를 짚어보였다.
《이 부분은 동무가 계산한거지?》
《그렇소, 그런데?…》
《다시 계산해보라구.》
《틀림없을거요.》
송춘도는 확대경으로 그 요소의 자호를 읽어보고나서 회로도와 대조해본 다음 콤퓨터건반을 치면서 검산해보았다.
그는 눈을 끄먹거렸다.
《이게 어떻게 된건가?!…》
《이 기회에 자기를 돌이켜보는게 좋을것 같소. 이번 일은 이쯤하고 넘기겠지만 다시 이런 불미스런 일이 생기면 그땐 문제가 다르오. 이 요소는 즉시 바꾸라구.》
(일도 별나게 꼬이는걸, 황아장수망신은 고불통이 시킨다더니…)
송춘도는 주섬주섬 SMD고데를 달구어 그 전자요소를 기판에서 떼내고 새로 계산된 요소를 골라 땜해넣기 시작하였다. 고데의 열기때문인지 얼굴이 뜨뜻이 달아올랐다.
(아니, 이 부분 계산을 내가 했더라?…)
번거로운 생각이 갈마들면서 칼끝같이 예리한 고데가 떨리였다. 긴장해야 하였다. 머리칼처럼 가느다란 회로들과 개미다리와 같이 섬세한 소자의 《발》들이 드디여 련결되였다.
송춘도는 후-하고 숨을 몰아쉬며 미세수술도구같은 고데를 내려놓았다.
기억을 더듬을수록 이 부분 계산을 최일이 직접 한것 같았다. 쩍하면 조원들을 제쳐놓고 도맡아 세부회로를 그리며 계산을 하더니 이제 와선 누구한테 책임을 들씌우는가?
송춘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최일에게 까밝히고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아까는 얼떨떨해서 지적을 받다가 이제와서 깨닫고 다시 해명을 한다는것도 멋적은 일이였다.
그래, 지는게 이기는거야. 프랑스속담에도 이 비슷한 말이 있었지.
기판시험이 다시 시작되였다.
문제의 그 전자요소를 교체하면 제대로 나올줄 알았던 파형들이 약간씩 변형되였을뿐 그 식이 장식이였다.
《어딘가 또 결함이 있는 모양이야.》
임창만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최일은 낯이 해쓱해졌다. 실험대를 짚은 두팔이 가늘게 떨렸다.
《이젠 그만큼 경과를 봤으면 뭔가 좀 달리 생각해볼 필요도 있을것 같구만.》
송춘도는 실속은 없이 덤비는 최일을 일깨워주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러자 신경이 날카로와진 최일이 증을 냈다.
《좀 가만있지 못하겠소? 이거야 어디 집중을 할수가 있나.》
《조원들의 의견도 좀 들어보면 어떻소? 최동무, 이 기판이 안되는 까닭은 다른데 있지 않소. 근본원인은 지금 추구하는 방향이 잘못 그어졌기때문이요. 전혀 외딴데로 나가고있잖소, 말하자면…》
《됐소, 됐소.》 최일이 대뜸 넘겨짚었다.《송동문 또 D―3형쪽으로 나가자는거요?》
《그렇소, 난 도대체 리해가 안되누만. 어째서 실제적인 가능성이 보이는 안을 무시하는가 그거요. 남들도 그 방향으로 쏠리는게 우연한 일치야 아니잖소.》
《모르는 소리 그만하오. 그들도 이젠 다른 길들을 모색하고있소. 왜 그런가? D―3방향은 이젠 한계가 보이기때문이요, 우린 결정적으로 최첨단으로 가는 새 길을 개척해야 한단 말이요.》
《그런 욕망만 가지고 될것 같소? 최동무가 바라는 비약이 실지로 가능한가? 그 대답은 벌써 주어진셈이요.》
송춘도는 지시손가락으로 기판을 건드렸다.
최일은 숨결이 거칠어졌다.
《송동무, 이건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요. 동무의 그런 그릇된 견해는 우리 조의 전진에 방해나 될뿐이요. 필요없단 말이요!》
《필요가 없다? 자기 견해만 유독 옳다고 주장해서 되는가. 조장 혼자서 다 맡아할바에야 연구조는 무엇때문에 조직했소? 말이 난김에 아까 뜯어낸 요소의 정수계산을 누가 했는지 밝히지 않을수가 없구만.》
《뭐요?!》
최일은 아연해졌다.
모두가 송춘도를 놀랍게 지켜보았다.
《그건 내가 계산한게 아니요. 그러니 최동무,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작업내용과 질에 대해 서둘러 평가하는 일이 없어야 할것 같소.》
《잘은 수염을 내리쓴다- 계산상착오가 있었으면 그렇다고 간단히 인정하는게 어떻소. 대체 뭐가 두려워서 그러오?》
《정확히 말하면 그 부분은 조장동무가 우리를 제껴놓고 직접 계산한거요. 생각나지 않소?》
《송동무, 그만하자.》
최일은 대상이 안된다는듯 삑 돌아섰다. 그리고 뚜벅뚜벅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넓은 어깨가 큰 진폭으로 오르내렸다.
그럴수록 송춘도는 의분이 솟구쳤다.
《남한테 책임을 씌우더니 이젠 그냥 침묵할셈이요? 하긴 근거도 부족할테지.》
《정말 죄다 빠개놔야 알겠소?!》
최일의 두눈에서 불찌가 튀였다. 그는 남웅을 돌아보았다.
《저 친구한테 좀 알아들을만치 설명해주라구. 아까 확인한 내용을…》
미리 《증인》을 정해둔건 과시 선견지명이라 할수 있었다. 남웅은 난처해하였다.
《난 왜 자꾸 끌어들이나?》
《좋아, 그럼 한마디만 하라구. 남웅동무 보기엔 그 부분 계산을 누가 한것 같소?》
《글쎄, 난 잘 모르겠구만.》
《모른다?》 최일의 얼굴이 험하게 이그러졌다.
《여, 남웅동무, 모른단 말이지?!》
《보란 말이요. 객관적으로 증명이 안되잖아.》
《춘도동무, 그만하라구.》
임창만이 드디여 나섰다.
《조장동무도 좀 참구. 머리 큰 사람들이 아웅다웅 이게 뭔가, 응? 론쟁에 감정이 개입되면 되오? 아 조장이 먼저 자중해야지.…》
《동문 뭘 안다구 끼여들어? 비키라!》
방이 조용해졌다.
진수현실장이 들어선것이였다.
《조장동무, 무슨 일이요?》
최일은 대답대신 춘도와 남웅이, 창만이쪽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쓰겁게 내뱉았다.
《진정한 고독이란게 뭔지들 알아? 그건 바로 동무네들하구 같이 숨쉬는거야. 그럴바엔 차라리 무인도에 가서 사는게 나아.》
최일은 실장곁을 에돌아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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