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래일에 사는 사람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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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제 2 편 청 년 조
1
최일은 오늘따라 일찌기 출근하였다. 체육인같이 그쯘한 몸매를 품위있게 감싼 검푸른 양복이며 눈부시게 흰 와이샤쯔에 꿀벌처럼 누르고 검은 무늬가 사선으로 건너간 화려한 넥타이차림은 사색과 예지가 번뜩이는 눈매와 더불어 쉬이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을 풍겼다.
실장방에서 진수현이 오랜 장치전문가인 김승길과 함께 기판문제를 의논하는데 마침 최일이 나타났다.
최일에게 두사람이 번갈아 기판제작방향을 시사해주자 그는 대번에 그 요점을 파악하고 한수 더 떠서 사뭇 기발한 의견까지 내놓는것이였다.
하나 하면 둘, 셋을 넘겨짚는 청년이였다.
최일은 밤새 세운 기판제작공정계획서를 내놓았다.
진수현과 김승길은 그것을 함께 토론하였다.
《분담은 어떻게 하겠소?》
진수현이 물으니 최일은 흔연히 대꾸하였다.
《나하구 남웅동무가 맡으면 됩니다.》
《청년조의 다른 동무들은 무얼 한다?》
《장치전문이 아니니까 기판이 될 때까지 프로그람작업을 위한 준비나 하게 해야지요. 문헌조사를 한다던가…》
《프로그람만 전문하는 경우에도 두달동안 기판제작에 붙으면 장치를 익힐수 있을거요. 젊은 동무들이니 기초를 잘 다져야지.》
《설사 이 친구들을 붙인다 해도 무슨 일을 시켜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송춘도동무도 장치에 밝은 모양이던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습니다.…》
최일이 흥심없이 대꾸하였다.
《어쨌든 참가시킵시다. 임창만동무도 장치제작에 경험이 있소.》
《실험공출신이니까 땜질은 좀 하겠지만…》
《인쇄기판설계도 할수 있구 여러가지로 이바지할수 있을거요. 학준동무도 이 기회에 장치에 대해 파악하게 합시다.》
《실장선생, 어제 밤에 좀 생각해보았는데 아무래도 이런 인물들 가지군 안되겠습니다. 연구소적인 청년조를 하나 내오는게 어떻습니까. 내가 수재급친구들을 서너명 알고있습니다. 그들이 모이면 기적을 만들어낼수 있습니다. 1류급수자조종장치제작은 우리 실 범위를 벗어나서 연구소적인 초미의 과제라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우리 실 청년들은 안되겠다는거요?》
《인재가 그렇게 흔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쩐지 난 조장동무의 말이 섭섭하게 들리누만. 곁에 있는 동무들을 그렇게 믿지 못하구서야…》
《참고하겠습니다. 실장선생하군 얘기하기가 참 바쁘군요. 좋습니다. 그럼 분담조직을 골고루 하겠습니다. 이제 모이겠는데 실장선생도 참석하겠습니까?》
《첫 모임에는 승길선생이랑 같이 참가하고싶소.》
《앞으로는 주로 우리들끼리 토론하면서 해결해나가겠습니다. 그래야 명실공히 청년조라고 할수 있지요. 정 도움이 필요하면 실에 제기하겠습니다.》
이거 조장의 자립성이 보통이 아닌걸?!
《그렇게 합시다.》
진수현은 그럴수록 그가 대견해보이기도 하였다.
장치실에서 청년조모임이 열렸다. 실장과 김승길이 방청격으로 뒤자리에 앉았다.
최일이 일어나서 먼저 2개월로 예견한 공정계획을 통과시켰다. 문헌조사, 기본설계, 세부회로설계, 기판제작, 시험…
이어 분담조직을 하였다. 구상과 기본설계는 자기가 하고 세부회로설계는 리남웅과 송춘도가 맡으며 그에 따르는 기판설계와 제작은 임창만, 지학준이가 맡게 된다는것이였다.
《의견이 있으면 제기하시오.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그러자 송춘도가 모임에 참가한 사람의 정색한 말투로 물었다.
《필요한 소자들은 누가 받아옵니까?》
《그런 걱정은 마오, 우린 자재명세를 실에 제기하면 됩니다.》
최일이 엄하게 대답하였다.
《그것도 우리가 주인이 되여 해결할수 있다고 봅니다.
자재공급계통에는 내가 좀 파악이 있습니다.》
《그런데는 신경을 안 써도 되오. 동문 연구사지 자재인수원이 아니란 말이요. 다른 의견들은 없습니까?》
최일이 조성원들을 쭉 둘러보았다. 별로 의의가 있어보이지 않는 이런 토론을 빨리 끝내버리고싶은 모양이였다.
《나도 한가지 제기하랍니까?》
임창만이가 싱긋벙긋 웃으며 일어났다.
《앉아서 이야기하오.》 최일이 말했다.
《예, 난 분담조직에 원칙적으로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너무 계선을 그은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실지 개발이 시작되면 이 분담이 좀 변경될수도 있다고 봅니다.…》
《조리있게 말하오.》
《말하자면 구상단계에서 조장동무 혼자 머리를 짜느라고 애쓰지 말고 조원들과 토론도 하면서 집체적인 지혜를 모아보자는겁니다.》
《창만동무도 기본설계단계부터 참가하고싶다 그거요?》
최일이 어처구니없어 하는 소리에 창만은 무랍없이 벌쭉 웃었다.
《난 그저 조장동무한테 도움이 될가 해서…》
《됐소. 남웅동무는 다른 의견이 없소?》
《나야 뭐…》
《실장선생, 말씀할건 없습니까?》
《없소, 승길선생은?》
《나도 말할게 없습니다.》
그러자 최일이 결론하듯 말했다.
《동무들이 문헌조사에 들어가기 전에 강조할 문제들이 있습니다. 기판제작의 방향은 바로 이 A-20소자의 특성으로부터 규정되는것입니다. 이 소자내부에는 CPU와 맞먹는 론리회로들이 집적되여있고 보호열쇠까지 있습니다.…》
최일의 말을 들으면서 진수현실장은 그의 머리속에 벌써 기판의 구성도 륜곽이 비슷이 잡혔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놀라운 청년이였다.
진수현은 김승길에게 청년조일을 보아주라고 눈짓하고 발끝걸음으로 그곳에서 나왔다.
그는 프로그람실에서 오랜 연구사들과 그들의 과제수행방향을 토론하면서도 최일을 생각하면 기분이 뜨는것 같았다. 그야말로 인재를 찾아낸것이였다.
한참후에 장치실에서 나온 김승길도 최일이를 두고 놀라와하였다. 조장으로서 기판제작의 방향도 바로 긋고 방법론까지 척척 내놓더라고 하였다. 《역시 사람은 무슨 책임을 지워보아야 알겠습니다.》
《시작이 괜찮지요?》
진수현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김승길은 좀 신중해졌다.
《한데 뒤를 꼬나내겠는지…》
《잘 도와줍시다.》
진수현은 리병섭에게 실에 배구공이 없는가고 물어보았다.
배구공은 구석에서 딩굴고있었다.
그는 이 조종장치실 청년들이 팀을 무어 배구장에 나오는걸 본적이 없었다. 연구소마당에 배구장이 둘이였는데 하나는 연구실별로 대전을 하는 마당이고 다른 마당에서는 대체로 《혼성팀》들이 경기를 하였다.
진수현은 그 두번째 배구장에서 최일이나 학준이 다른 연구실의 청년들과 어울려 노는것을 드문히 보군 했었다.
진수현은 어릴적부터 축구선수로 뽑혀다녔고 탁구와 배구도 좋아하였다. 그가 맡는 연구실마다 체육바람이 불었다. 거기에는 젊은이들이 많아서 떠들썩하고 신바람이 났었다.
그는 점심때가 되자 공을 가지고 실험실로 가서 최일이네를 불러냈다.
《자, 우리도 한팀으로 마당에 나가보지 않겠소?》
《이 사람들 가지군 안됩니다.》 최일이가 고개를 저었다.
《나하구 임동무까지 하면 여섯이 되는데 한번 나가보잔 말이요.》
최일은 미타한 눈으로 송춘도며 리남웅이, 임창만과 지학준을 둘러보았다.
《괜히 한팀으로 나갔다가 웃음거리가 될가봐 그럽니다.》
임창만이 싱글싱글 웃으며 재촉했다.
《아마츄언데 뭐라나, 나가보자구!》
《일단 나가면 이겨야지 무슨 소리야.》
그러면서도 최일은 움직였다.
배구장에서는 새 팀을 환영하였다.
유연체계실젊은이들은 수현실장과 창만을 보고 자기네 팀으로 돌아오라느니, 배신했다느니 하며 우스개소리를 하였다.
최일은 시틋한 얼굴로 나왔지만 주장으로서 돌가보를 하고 경기장을 차지한 다음 선수배치를 할 때에는 두눈에 열이 올랐다.
그는 자기와 수현실장 그리고 련락수 송춘도를 공격구역에 세웠다.
진수현이 새삼스레 자기편 청년들을 돌아보니 목이 앙바틈한 임창만을 내놓고는 모두 키들이 늘씬하고 균형이 잡힌 체격들이였다.
먼저 유연체계팀의 처넣기로 경기가 시작되였다. 툭, 탁!- 그렇지, 타격이다!
조종장치팀 선수들이 그만하면 운동감각들도 있었다.
저 최일의 조약과 강타는 얼마나 멋진가!
송춘도는 느린것 같으면서도 여유있고 유연하다. 그는 낮은 공을 쳐올린 후에도 무릎의 먼지를 털만큼 침착하다.
지학준이를 보라, 얼마나 날파람있는가!
남웅이도 괜찮다.
실속이 있다. 자기 구역을 빈틈없이 지키려고 뛰여다닌다.
그러나 서로 《양보》를 하다가 빈구멍이 생기기도 하고 방어가 약하니 공격에로 넘어가지 못한다.
최일은 약이 올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여 춘도, 그대로 넘기면 어떻게 해. 조직하라!》
진수현이 3번위치로 바꾸어 서서 공을 받아 최일이앞으로 띄워주기도 하고 때로는 조약하여 넘어오는 공을 맞받아 타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판은 점점 더 기울어져갔다.
최일은 이젠 독판치기로 넘어갔다. 신경질도 잦았다. 그는 뒤에 엉거주춤 서있는 남웅을 보고 긴장하라고 소리치는가 하면 긴장을 풀라고 소리치기도 하였다.
그 바람에 남웅은 아예 얼어붙었다가 그만 날아오는 공이 머리에 맞고 튀여났다. 주위에서 웃음이 터졌다.
최일은 학준을 보고도 소리쳤다.
《야, 끝까지 공을 살리라! 벌써부터 그렇게 몸을 아껴서 어따 쓰겠어?》
학준은 뾰로통해졌다. 다 기울어진 판을 수습하려고 천방지축 뛰여다니는것은 역시 임창만이였다. 그는 경기장을 종횡무진하며 공을 살리고 사기를 북돋느라고 줄땀을 흘렸다.
《자, 남웅동무 놔두라요, 이건 내 몫입니다. 송동무, 자, 넘어갑니다.… 최동무, 저편 5번자리가 〈구멍〉이요-》
1회전은 어방없이 지고 말았다.
《자, 자- 2회전엔 정신들 좀 차리라구!》
최일이 주의를 주는데 송춘도가 퇴장하겠노라고 하였다.
《어디 좀 볼일이 있어 그래.》
《아니, 이 마당에서 빠지면 어떻게 해?》
《이건 점심시간까지 통제할셈인가?》
《싹 그만두자! 이거야 손발이 맞아야 해먹지.》
최일이 잡았던 공을 어깨너머로 던져버리고 경기장밖으로 나갔다.
진수현이 그를 위로하듯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겠나. 래일 또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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