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래일에 사는 사람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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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제 3 편 오늘의 의미
1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남산공작기계공장을 현지지도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제3가공직장에 도입된 유연생산체계를 돌아보시고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시면서 이 기술혁신에 참가했던 공장의 로동자, 기술자들과 일군들, 그리고 과학자들에게 조선로동당 총비서의 명의로 감사를 주시였다.
우리 나라에서 CNC기술발전의 토대는 류례없이 간고했던 시기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몸소 마련해주신것이였다.
주체84(1995)년 봄에 우리 장군님께서는 북방의 어느 한 공장을 찾으시였다.
그이께서는 《련하기계》자호가 찍힌 CNC공작기계앞에서 세번이나 박수를 쳐주시면서 공장사람들의 가슴마다에 CNC화의 불씨를 지펴주시였다.
그 불씨가 료원의 불길처럼 타올라 오늘은 우리의 힘으로 고속화, 정밀화, 지능화된 고성능형의 최첨단 CNC설비들을 척척 개발해내고있다.
CNC기술의 가장 높은 단계라고 할수 있는 유연생산체계, 통합생산체계들이 주요기계공장들에 도입되고있었다. 남산공작기계공장에서 가동되고있는 유연생산체계도 그중의 하나였다. 전자뇌수의 조종을 받는 공작기계들에 소재를 출하, 운반, 가공하고 검사하는 높은 급의 체계였다.
경사가 났다. 남산공작기계공장의 혁신자들과 함께 진수현과 그가 이전에 맡아보던 유연체계실의 연구사들이 평양에 올라가 경애하는 장군님의 은정어린 사랑을 받아안았으며 국가연회에도 참가하였다. 임창만은 연회장무대우에 뛰여올라가 노래까지 불렀다.
공장, 기업소들에서 CNC바람이 더 세차게 불기 시작하였다. 진흥기계공장에서도 8월 중순에 유연생산체계를 도입하기 위한 궐기모임을 열었다. 우렁찬 박수속에 경애하는 장군님께 올리는 맹세문을 채택하였다.
현대화연구소의 리윤덕부소장, 진수현실장, 청년조 조장 최일도 이 궐기모임에 초청되고 이어 협의회장으로 안내되였다. 거기에는 성에서 내려온 국장과 공장 일군들, 기술자들, 기능공들, 그리고 송화기계무역회사의 서관범사장이 참석하였다. 최일이 바라던것처럼 이 협의회에 설계연구사 오은경의 모습도 보였다. 그 처녀에게 점잖게 눈인사를 보내는 최일의 가슴은 지금 널뛰듯 하였다. 오은경도 정숙한 태도로 고개를 약간 숙여 답례를 보냈다. 처녀의 표정은 때로는 엄숙해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다감해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매정해보이기도 하였다.
협의회에서는 먼저 유연생산체계의 수준과 설계방향, 공정계획이 론의되고 다음에는 기계, 장치, 프로그람, 설비자재들을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하는 방도문제를 토의하였는데 마감에 여러가지 의견들이 엇갈렸다. 공장 설계연구소 강삼룡소장이 일어나 각종 공작기계들과 대차들의 기계부분은 공장에서 깎아내겠지만 그에 결합하게 되는 수자조종장치들을 비롯한 전자설비문제가 해결되여야 한다고 제기하였다.
론의가 벌어졌다.
진수현실장은 자기네가 지금 개발하는 수자조종장치《조종7호》를 리용할수 있을것이라고 말했다.
《〈조종7호〉? 그게 언제 나온다는겁니까?》
지배인이 물었다.
《늦어도 명년 3~4월까지는 완성할수 있습니다.》
진수현의 대답에 이어 곁에 앉은 부소장 리윤덕이 겸손하게 덧붙였다.
《그 성공여부에 대해서는 지금 단언하기 이릅니다만 될수록 우리것을 써야 외화도 절약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수자조종장치 수입결정은 래년 봄까지 미루는게 어떤가 하는것입니다.》
지배인이 신중한 어조로 《조종7호》의 성능지표들은 어떤가고 물었다.
그러자 진수현이 최일을 좌중에 소개하고 지금 개발하는 수자조종장치에 대해 이 동무가 설명할것이라고 덧붙였다.
최일이 가슴을 쭉 펴고 일어나 이제는 기판들이 한장으로 압축되였다는것과 프로그람작업의 현 단계와 전망을 설명하고 이 수자조종장치의 동시조종축수, 보간능력, 지령범위, 보정기능, 특수가공기능, 그리고 믿음성과 편리성, 가격 대 성능비까지 쭉 내리꼽으며 세계 최첨단급이라는것을 조목조목 론증해나갔다. 최일의 도도한 기품과 물흐르듯 하는 웅변에 반한 국장이 그의 경력과 최종출신학교를 리윤덕부소장에게 낮은 소리로 묻기까지 하였다.
최일을 우습게 여기던 이곳 설계연구소 강삼룡소장은 미꾸라지가 돌연히 룡으로 둔갑하여 구름을 뚫고 승천하는것 같은 환각을 보며 홀린듯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한창 설명을 이어가던 최일의 눈길은 그 처녀의 눈길과 피끗 마주치기도 하였다.
협의회에서는 수자조종장치 해결책을 래년 4월경에 다시 론의하여 확정하기로 하였다.
유연생산체계를 관리하는 프로그람도 수입결정을 서두르지 않고 일단 현대화연구소에서 맡아 개발하는것으로 락착이 되였다.
이것만 해도 진수현네는 소기의 목적을 이룬셈이였다.
오늘 협의회는 이렇게 초보적인 토의로 큰 선을 그었지만 앞으로 2차, 3차협의회들에서는 론의가 더 구체화되고 현실화될것이였다.
협의회가 끝나자 리윤덕은 절친한 손우의 친구 서관범사장과 사무실마당에서 만나 같이 담배를 피웠다.
서관범은 저으기 불쾌한 기색이였다.
《거 진수현이란 사람이 겉은 점잖고 틀져보이는데 여간 성급하고 무모하지 않구만. 아직 낳지도 않은 애를 자랑하는 격이랄가, 서뿔리 자체해결이요 뭐요 하면서 수입론의를 무산시키면 어쩐다는건가? 자네 그 사람을 데리구 일하기가 헐치 않겠네.》
그는 사장으로서 수출입문제에는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이래저래 편안치 않지요.》
리윤덕은 애매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진수현이 몹시 불만스러웠다. 오늘 협의회에서 진수현과 최일이 장담한 수자조종장치와 체계관리프로그람개발의 성공을 그는 좀체로 믿을수가 없었다. 너무도 현실에서 비약한 목표였다. 그러나 그는 지도일군으로서 미리부터 안된다고 뒤다리를 당기는짓은 할수 없었다. 그것이 되면 좋고 안되여도 빠질 틈을 내놓는것이 합리적일것이다.
그래서 남다른 야심을 가지고 엄청난 시도를 하는 진수현을 지지하고 밀어주면서도 그때문에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매번 앞뒤를 살펴주자니 윤덕은 속이 상할수밖에 없었다.
이 협의회전에 진수현이 자체개발문제를 제기하겠노라고 말할 때에도 리윤덕은 국가적리익의 견지에서 그것을 지지는 했지만 만일 해보다가 안되는 경우에는 수입안이 결정되도록 협의회에서 신경을 쓰지 않을수가 없었다.
(사람이 정말 곧은목이거던. 하긴 그래서 이 동창생이 있는거지. 저 사람은 이렇게 돌봐주는걸 알기나 하는지 원…)
범이 제 소리하면 온다고 진수현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정중히 말을 건넸다.
《사장동지, 우리 남웅동무가 가서 일을 잘합니까?》
《예?!…》 서관범사장은 금시 그의 뒤소리를 하던 참이라 제김에 얼굴을 찌프리며 마지못해 대답하였다. 《예, 좋은 사람 보내주어 감사합니다.》
《인젠 일을 거의 끝냈습니까?》
《그렇다고 할수 있겠지요.》 서관범이 어정쩡하게 대꾸하였다. 그는 남웅의 동원기간이 끝나면 아예 회사에 눌러앉히기로 윤덕과 약속한것이 드러날가보아 어험어험 군기침을 하면서 서둘러 작별인사를 남기고 떠나가버렸다.
《자, 우리도 가볼가?》
윤덕이 수현에게 고개짓으로 승용차를 가리켰다.
《두어시간쯤 있다가 떠나지 않겠나?》 수현이 제의했다.
《왔던 길에 현장을 좀 돌아보자구.》
《그런건 차차 료해해도 되지 않나. 이제부턴 자주 올텐데…》
리윤덕이 가자고 독촉이다.
《사실은 최일이 여기서 아는 사람을 만나고싶어하는것 같아서 시간을 좀 주자는거네.》
《아, 이 불같은 세월에!… 대체 누굴 만난다는건가?》
《잘 모르겠네.》
진수현은 이렇게 대답하고말았다.
이윽고 그와 리윤덕은 현장을 돌면서 기술자들도 만나보았다.
승용차 있는데로 돌아와 팔목시계를 보면서 수현은 속으로 굴리던 말을 윤덕에게 할가말가 망설이였다.
그는 자기와 윤덕이 사이가 점점 별나게 되여가는것을 괴롭게 생각하고있었다.
물론 두사람은 대학시절부터 자별한 친구지간이라고는 할수 없었다. 그는 윤덕의 청높은 달변과 선웃음, 호방한것 같으면서도 지내 타산에 밝은것같은 면들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래도 그는 동창생으로서 윤덕과 가까이 지내려고 애썼다.
그 정도의 결함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는 윤덕의 좋은 점을 먼저 보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를 도와주려고 왼심을 써왔다.
리윤덕이 역시 부소장이 된 뒤에도 수현의 일을 념려하고 이모저모로 떠밀어주려고 애를 쓰는것 같았다. 그만하면 동창생관계는 유지되여온셈이였다.
그런데 요즘 부소장 리윤덕의 결함이 이것저것 드러나서 사람들의 말밥에 오르고있었다. 수현은 동창생에 대한 뒤소리가 달가울리가 없었지만 그가 보기에도 윤덕의 일이 점점 불만스러웠다. 그는 언제건 한번 윤덕을 일깨워주고싶었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윤덕이와 마주하면 수현이 자신도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게 되고 내키지 않는 웃음을 짓게 되는 그것이였다. 몇달전에 윤덕의 후임으로 조종장치실을 맡으면서도 그 주되는 리유인 후비문제를 그에게 찍어 말하지 않고 《문제야 어느 실에나 다 있지.…》하고 넘겨버렸던 수현이였다. 그때 수현은 비서와 소장앞에서도 동창생의 허물을 들추는것 같아 조종장치실의 전망에 대한 우려를 별로 입밖에 내지 않고 얼버무렸었다.
그렇게 하는것이 동창생을 위하는게 아니라는것을 알면서도 진수현은 실천에 부닥치면 윤덕과 자주 《외교》를 하게 되고 그의 체면을 보아주느라고 에누리를 하게 되는것이였다.
그와 진정으로 가까이 지낼수는 없을가? 동창생이라는 형식적인 관계뿐이 아니라 그우에 무엇이 더 있어야 할것 같은데… 그래, 터놓고 말을 하는게 낫지. 마침 기회도 좋지 않은가.
《이보라구, 연구소밖으로 나온김에 내 좀 하고싶은 소리가 있는데…》
진수현이 드디여 말을 꺼냈다. 《동창생으로서 들어주겠나?》
《뭔데 그렇게 심각해서 그래? 기탄없이 얘기하라구.》 리윤덕이 오히려 그를 고무해주었다.
《자네가 행정실무에 바쁘겠지만 자습시간을 좀 냈으면 좋겠구만. 과학부소장인데 나중엔 실장들이 실력면에서 자네를 인정하지 않을수 있어. 가속도로 발전하는 세월에 어제, 오늘이 다르지 않나. 눈 깜박하는 사이에 뒤떨어질수 있지.》
《허허, 실장들속에서 무슨 소리가 떠도는 모양이다?》 리윤덕이 태연해지려고 애쓰며 물었다.
《내 생각이야. 자넨 〈조종7호〉가 된다는걸 아직도 믿지 못하고있지 않나. 물론 최첨단수준을 파악한다는게 너나없이 어려운 일이지만…》
《그 승산여부는 지금 다툴 문제가 아니야. 자네 이런 생각은 해봤나? 좀체로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시도를 그래도 지지하고 떠밀어주는 사람의 수고가 대체 어떤건지 알고있는가말일세.》
그 말에 수현은 당황해졌다. 《그건 고맙게 생각하네. 내가 하자는 얘기는…》
《알겠어! 내 자질에 대해선 나도 요즘 생각하는바가 있네. 참고하겠네. 그다음 또 있나?》
《자네가 소장사업을 많이 대리하면서 연구소앞에 나서는 과제들의 선후차를 갈라서 력량을 집중하는것도 그렇고 우리 청사를 정신이 들게 꾸리자는건 좋다고 보네.》
《그래, 그래서?》
《창문틀을 수지창들로 바꾸는건 좋은데 차고를 더 짓고 승용차들을 교체하고 랭동실을 꾸리는 일들은 왜 자꾸 벌려놓나? 그러니 자금때문에 신경을 쓸수밖에… 정 토목공사를 하겠으면 나같이 나먹은 사람들을 동원시키게. 우리 연구소를 일떠세울 잠재력은 그 젊은 사람들한테 있지 않나.》
《내가 자네 보고 젊은 로력을 내라던가?》 리윤덕이 두손을 벌려보이며 짐짓 억울하다는 시늉을 했다. 《그래두 난 자네네 실만은 작업에서 면제시키고 번번이 특혜를 준것 같은데? 벌써 잊었나?》
《거야 알지.》 진수현은 그에게 아픈 소리를 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연구소전망을 생각해보라구, 손실이 크네.》
《허, 그 손실이라는게 어느 정돈가, 연구소재정이 죄다 탕진되기라도 했나, 청사 한귀퉁이가 무너졌나?》 윤덕은 롱담으로 돌리고싶은 모양이였다.
진수현은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좀 신중히 들어주게. 그 손실이 지금 눈에 보이는것보다 엄청나게 크다는걸 잘 알면서도 그래. 랭동실 기초구뎅이에 묻어버리는 젊은 연구사들의 지적재산을 그래 수만금에 비기겠나?》
《알아. 내가 알지― 자네 아니면 누가 날 이렇게 념려해주겠나. 허지만 소장이나 부소장위치에 서면 모든게 좀 다른 각도로 보이는것도 사실이야. 기관의 체모도 그럴듯하게 갖춰야 하고 후방공급사업도 개선해야 하지 않겠나. 어쨌든 고맙네. 그러지 않아두 몇몇 사람들이 내 뒤소리를 하고 다니는 모양인데 자네같은 중진들만 날 알아주면 끄떡없네. 뭘 좀 크게 해보자면 밑에서 말이 많거던. 일해먹기가 힘들구만, 힘들어.…》
《…》
벼르던 끝에 정색한 이야기를 해보려던 진수현은 도리여 어색해졌다.
어쩐지 자기의 시야가 좁고 일면적인것 같기도 하였다.
그는 윤덕에게 터놓고 이야기하면서 접근하려다가 그때문에 오히려 둘사이가 더 벌어지는것 같았다.
최일과 오은경은 공장구내의 한적한 포도넝쿨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처녀는 이따금 머리우에 드리운 묵직하고 향기로운 청포도송이들과 넓은 잎새들을 올려다보면서 가벼이 흰손을 쳐들어 오불꼬불 말린 넝쿨의 《손》을 만지였다.
최일은 부풀어오른 자부심과 감회에 싸여 그에게 자기의 지난날들을 이야기하였다.
그의 열정에 끌린 처녀는 정겨운 미소를 지었다.
《저는 이런 날이 올줄 알았어요. 우리 공장으로 꼭 다시 찾아오실거라고 생각되더군요. 그래서…기다렸어요.…》
처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서는 그 어떤 교태나 짐짓 딴전을 보는 야릇한 매력같은것이 아닌 티없는 진정이 울리고있었다.
그것은 총각의 가슴에 껴울림을 일으켰다.
최일은 자기를 믿고 기다려준 고마운 처녀앞에서 저절로 머리가 숙어졌다. 그의 말소리는 때로 자책에 잠겨 흐려지기도 하였다.
《… 그새 실패도 몇번 했고 불우한 날도 없진 않았지요. 내 못된 성미때문에… 돌이켜보기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처녀는 자기자신을 타매하는 총각의 새로운 면모에서 더 큰 우점을 찾아보는듯 하였다.
《그래도 이젠 어려운 고비를 넘기지 않았어요?》
《난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새 실장선생님을 만났으니까요. 좋은 사람들속에 산다는건 제일가는 복이라고 생각됩니다. 은경동무를 알게 된것도 그렇고…》
《…》
둘사이에 오가던 이야기는 달아오르는 흥분과 감동으로 도간도간 끊어지군 하였다. 이제는 애인들의 눈길과 거동이 사랑의 말들을 대신하였다.
홍조를 띠운 처녀는 다시금 머리우로 손을 뻗쳐 포도넝쿨을 바로잡아주었다. 그 우아한 자태를 바라보는 최일은 시간의 흐름을 잊고 무아경에 잠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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