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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기타 시대의 출발, 쎄시봉(C’est si 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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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2건 조회 2,517회 작성일 11-02-15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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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기타 시대의 출발, 쎄시봉(C’est si bon)

통기타가수하면 바로 김민기나 양희은 혹은 한대수나 양병집, 서유석을 떠올릴 것 이다. 지금이야 포크전사로 재평가되어 함께 묶여 거론되거나 아니면 몇가지 역사적 특징만으로 서로를 변별하며 나누곤 하지만 과거 이들은 소박하게 말해 음악살롱에서 노래하는 통기타 가수들이었다.
음악살롱 혹은 음악감상실이라고 불리던 곳중 가장 유명한 쎄시봉은 당시 통기타 가수라면 누구나가 거치고 싶어하던 유명한 무대였다. 앞에 거론된 사람들은 물론 소위 통기타 1세대로 불리던 송창식, 조영남, 윤형주, 김도향, 서유석, 김세환 등이 이곳 출신이다. (물론 양희은은 두번째 무대인 오비스캐빈에서 주로 활동하였지만 고등학교 YMCA활동 시절부터 이 1세대들과 함께 움직였다.)

1) 젊음의 명소

쎄시봉은 젊은이들에게 한마디로 친근한 곳이었다. 다른 음악감상실과 달리 음악이 편안했다. 이미 텔레비젼이나 고고장을 통해 팝음악이 익숙한 젊은이들에게 계속 클래식만 틀어대는 다른 음악감상실보다는 샹송이나 칸소네, 팝송을 주로 들을 수 있는 이곳이 친근할테니 말이다. 게다가 커피 한잔값이면 하루종일 편안한 의자에 앉아 마음껏 놀다 갈수 있었으니 쎄시봉이 명소가 되는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쎄시봉은 음악감상실이라는 틀에서 머물지않고 다양한 이벤트를 벌여 젊은이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대학생의 밤', '신인가수 선발대회', '시인만세', '스타와의 만남' 등 다양한 아마츄어들의 무대가 마련되었고 자연히 끼있는 젊은이들이 하나 둘 모여 재능을 발휘하고 또 인기를 모으며 쎄시봉 스타군단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자유분방한 분위기는 다양한 분야의 젊은이들을 모이게 했다. 실제로 쎄시봉에서 사회를 보고 여러 이벤트를 제안하기도 했던 이백천이나 정홍택은 방송언론 쪽 인물이었고 이장호나 최인호같은 영화,문단 등 예술계 젊은이들도 여럿 모였다.

2) 아마츄어와 프로

이 당시 살롱가수들은 대체로 아마츄어 였다. 대부분 신분이 대학생였던 그들은 자기의 재능도 발휘하고 용돈을 벌겸 살롱 무대에 올랐다. 서울 음대생이었던 조영남은 트롯곡을 성악 발성법으로 불러 주목받고 바로 쎄시봉에 데뷔했으며, 송창식(대학생은 아니었지만 대학을 돌아다니며 노래했다)은 오페라를 품위있되 편안하게 보통 발성으로 불러 환호를 받았다. 또 이장희가 저음으로 시낭송을 할때면 여대생들의 호응이 대단했다. 모두 이 아마츄어 무대 출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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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윈폴리오와 조영남>

또 전문가로 부터 인정을 받고 음반을 내거나 미군 무대에 서는 프로가수를 겸하기도 했다. 훗날 이들 대부분이 가수나 디제이, 엠씨로 방송등에 진출한다. 조영남은 이백천의 소개로 서게 된 미8군무대에서 '딜라일라'등을 히트시켰고 이장희는 쎄시봉의 'sunny' 히트 이 후 라디오에서 활동, 젊은이들의 기호에 맞는 음악을 소개해 디제이의 선각자로 불리기도했다. 또 홍대생이던 이상벽은 쎄시봉에서 정기적으로 MC를 보았고 이 곳의 인맥을 바탕으로 기자생활과 방송생활을 했다.

송창식과 윤형주는 본래 '쎄시봉 트리오'로 출발했었다. 맴버가 군대 문제로 빠지게 되면서 새로 팀을 정비한 것이 '트윈폴리오'다. 두 사람은 쎄시봉의 큰 인기에 힘입어 69년 '하얀손수건'이라는 번안곡 앨범을 냈다. 당시 노래들은 애상조의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들의 노래는 달랐다. 경쾌한 통기타 선율과 아름답고 맑은 화음은 순식간에 젊은이들을 사로잡으며 히트했다. 그러나 이들은 통기타 가수의 원조격임에도 또 신선한 감각의 통기타 곡을 히트시켰음에도 그저 외국곡을 번안한 가수일 수밖에 없었다. 주로 외국 곡을 피아노나 기타 반주에 그대로 부르거나 번안해서 부르는게 당시 통기타 가수들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한대수라는 싱어송라이터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3) 명동 통기타 살롱 등장

쎄시봉의 뒤를 이은 음악살롱은 명동의 '오비스캐빈'이다. 없는 원판이 없었던 '심지다방'이 오비스캐빈의 원조인데 이 곳은 팝송 매니아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곳 이다. 젊은이들 사이에 통기타 붐이 일자 69년 심지다방은 오비스캐빈으로 다시 태어난다.

무교동 '세시봉' 시대를 마감한 송창식, 조영남, 윤형주, 김도향, 서유석, 김세환, 양희은 같은 통기타 1세대들이 대거 무대에 섰다. 세련되면서도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잘 살렸던 '오비스 캐빈'은 문을 열자마자 젊은이 명소로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중략) 우리 대중음악사에 젊음의 낭만이 가장 넘쳤던 시절로 기록될 70년대 명동 통기타 시대. 그 현장들은 이제 경찰의 눈을 피해 명동 뒷골목을 숨어다니던 '장발 세대'의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무교동 '세시봉' 시대를 마감한 송창식, 조영남, 윤형주, 김도향, 서유석, 김세환, 양희은 같은 통기타 1세대들이 대거 무대에 섰다. 세련되면서도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잘 살렸던 '오비스 캐빈'은 문을 열자마자 젊은이 명소로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중략) 우리 대중음악사에 젊음의 낭만이 가장 넘쳤던 시절로 기록될 70년대 명동 통기타 시대. 그 현장들은 이제 경찰의 눈을 피해 명동 뒷골목을 숨어다니던 '장발 세대'의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4) 명동 통기타 시대는 70년대 중반 '쉘부르'가 문을 열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젊은이들 사이에 식을 줄 모르던 생맥주 붐도 한몫 했다. 후발주자인 '쉘부르'에는 이문세 남궁옥분, 전영, 신형원 같은 통기타 2세대들이 주로 출연했다.   그러나 70년대 말부터 명동 통기타 살롱들은 급속히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비지스, ABBA 등 가요계에 분 디스코의 바람과 77년 시작된 대학가요제 등의 영향 탓이다.

70년 초반 부터 이미 외국 음악들을 계속해서 소개해 온 이들이 아이러니하게도 통기타살롱 출신 DJ들이었다. 이런 팝송프로그램등의 영향으로 젊은이들의 음악취향은 폭넓고 다양해졌다. 대학가요제는 젊은 취향의 박력있고 발랄한 음악을 담아내 보기좋게 포장했고 그것을 통해 젊은이들은 힘있고 다양한 음악을 발산하고 또 즐겼다. 나약하고 서정적이고 단순한 통기타 음악의 한계와 더불어 통기타 살롱은 하나 둘 문을 닫았고 통기타 가수들은 무대를 잃었다.

◆쎄시봉(C’est si bon) 출신 가수들의 성공

1) 쎄시봉의 통기타 가수들

60년대 말부터 서울의 끼가 많은 젊은이들은 쎄시봉이라는 음악 감상실에서 하루를 보냈다. 여기에는 다양한 부류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젊은이들의 중심에는 통기타를 치며 샹송이나 칸소네 또는 팝송을 부르는 아마츄어 가수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포크가수라고 불렀다.

60년대 초부터 미국에는 포크음악의 바람이 불었고 이것은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대수가 국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젊은이들 사이에는 청바지, 장발, 생맥주, 통기타 등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문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음악적으로도 포크의 영향이 반영되었으며 김민기, 한대수, 양병집, 서유석 등의 포크의 핵이 형성되었다. 이 포크음악은 쎄시봉의 통기타 가수들에게도 영향이 미쳤다. 그러나 이 영향은 외면적인 것이었다.




미국 본토의 포크음악을 접하던 한대수는 69년 9월 국내에서 리사이틀(콘서트)을 열었고 그것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젊은이들은 그가 장발에 청바지를 입고 목에 하모니카를 걸고 부르짖듯 노래하는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쎄시봉의 통기타 가수들은 그에게서 누구라도 음악을 만들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자작곡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음악적으로는 포크보다는 그들이 기존에 부르던 샹송과 깐소네같은 노래들의 영향이 더 컸다.

한마디로 한대수, 김민기와 쎄시봉의 통기타 가수들은 달랐다. 한대수는 본토 포크의 음악과 정신을 고국에 와서 펼쳐보이며 포크 정신을 소개하는 역할을 했고, 김민기는 그 정신을 이어 자신의 음악스타일을 만들어 내었다. 또 한대수는 전위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예술가적 면모를 보였고, 김민기는 김지하등 문학인들이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내면의 예술 세계를 넓혀갔다. 이처럼 한대수나 김민기는 자아를 노래한 포크가수였으며 예술세계를 가진 작가였다.
 
반면 쎄시봉의 통기타 가수들은 이들과 달리 60년대 붐을 이루었던 미국의 포크음악의 영향에서 멀리 있었다. 그들은 돈은 없지만 통기타를 퉁기며 젊음을 노래하는 낭만을 아는 젊은이였고, 모든 것을 사색하며 깊이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시대의 아픔을 나눌 줄 알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쎄시봉의 거렁뱅이라고 불렀다.
 


 

그 시절 무교동엔 당대를 풍미하던 통기타 청바지 신문화가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청바지 문화의 기수를 자처했다. 애당초 귀공자 타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사불란하게 '거렁뱅이 패거리'로 뭉쳤다. 가진 것은 골고루 똑같이 나눈다는 얼치기 마르크시즘을 신봉했다. 자장면, 비지백반, 고기 살점은 눈씻고 보아도 없는 감자탕 한 그릇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쎄시봉에서 사시사철 공동으로 숙식하다시피 했다. 송창식이 잠옷처럼 입고 지내던 흰색 여름 수영복 팬티는 겨울이 지날 쯤이면 연탄 색깔이 되곤 했다. 구석진 감상실 주방에서 얻어먹는 저녁밥은 성찬이었다. 의자 두어개 붙여놓으면 침대였고, 피아노 덮는 천이 이불이었다.
2) 74,5년의 통기타 문화의 전성기

- 쎄시봉 출신 통기타 가수들의 성공 ; 통기타에서 밴드 사운드로

70년대 초반 트로트와 신중현 또 패티김이나 정훈희 같은 가수들이 주류를 이끌고 있을 때 젊은이들의 통기타 음악은 그저 그들만이 모여 즐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73년 '그건너'의 성공은 통기타세대가 주류로 되며 가요계의 주도권을 갖는 시발점이었다.

'그건너'의 주인공 이장희는 쎄시봉 출신으로 일찍부터 라디오 인기 DJ로 명성을 날고 있었다. 그런 그가 73년 에 발표한 '그건너'는 기존의 통기타 음악이 아닌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이었다. 통기타의 단순하고 쉬운 반주 대신 전자기타를 사용하였고 밴드 연주를 통해 비트와 화려함을 추가시켰다. 하지만 기존 통기타 음악이 갖는 젊은 감성과 신선함을 잃지 않았다. 바로 그러한 점이 성공의 열쇠가 되었다.

'그건너'를 출발로 어니언스의 '편지'가 히트하면서 두 노래는 젊음을 상징하는 노래처럼 되버렸다. 그것은 두노래에 기성가요에서 찾을수 없는 신선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젊은이들의 사랑, 감성 그리고 일상사가 그대로 녹아있는 내용을 담고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음 해인 74년에 개봉된 최인호 원작, 이장호 감독의 <별들이 고향 >의 영화음악이 대거 히트하면서 이에 힘입어 통기타 가수들이 주류로 나가기 시작한다. 영화음악을 맡았던 이장희는 두사람과 같은 서울고 동문으로 이미 쎄시봉에서 친분을 다진 사이였다. 그는 영화 삽입곡이었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잔의 추억', '한 소녀가 울고있네', '촛불을 켜세요', '나는 열 아홉살이예요'등 많은 곡들을 히트시켰다.

연이은 그의 음악의 성공은 통기타 가요를 변화시켰다. 이전의 쎄시봉 출신 통기타 가수들은 소박한 통기타와 하모니카등의 반주로 노래를 했다. 그러나 이장희의 성공 이후에는 기타, 드럼, 베이스 등의 밴드 사운드를 사용하고 거기에 키보드나 현등의 화려함을 추가하는 것은 기본이 되어버렸다.   '그건너'는 통기타 가수들의 진영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72년 전성기를 이루던 듀엣팀들이 '그건너' 이후 거의 모두 해체하고 솔로로 데뷔하게 된다. 멜로디가 중시되는 통기타 가요에 있어서 화음은 음악의 주요한 역할을 하게된다. 더욱이 반주가 통기타가 중심이 되는 소박한 상황에서는. 그러나 밴드 사운드의 사용과 키보드나 현 등의 장식은 화음보다 앞선 유행이 되었고 화음은 더이상 역할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그 많던 듀엣은 사라지게 되었고 솔로로 독립한 가수들은 대부분 인기를 얻으며 주류에서 통기타 출신들의 영역을 넓게 하는 역할을 하게한다.

통기타출신 가수 내부의 변화들은 그들이 쎄시봉이라는 작은 음악감상실에 모여서 아마츄어리즘으로 노래하는 것에서 벗어나 주류 시장으로 진출하여 가수로서 성공하고자 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이장희와 어니언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 가능성을 보고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김정호 등이 가요계의 중심으로 나아갔고 모두들 스타가 되었다.

76년 이후 쎄시봉 통기타가수 출신들이 대거 성공을 하자 이전의 통기타 진영은 자연스레 해체되었고, 과거의 명성만이 남은 쎄시봉에는 제2의 송창식이 되려는 무명 가수들이 모여들었으나 예전 같은 통기타 음악의 중심을 회복하지 못하고 77년 이후 대학가요제와 디스코의 영향으로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 <별들의 고향 > 그리고 <바보들의 행진 >

60년대 말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젊은이의 문화는 젊음의 자유와 낭만을 풍부하게 했다. 젊은이들은 가부장적인 사회구조를 따르는 대신 장발과 청바지, 생맥주, 쌍쌍파티를 즐기고 통기타음악을 들으며 젊음을 만끽했다. 72년 유신이 선포되고 사회의 분위기가 더욱 억압적으로 되었을 때도 한대수와 김민기는 자작곡을 선보이며 자유, 이상, 꿈, 좌절을 노래하며 젊은 문화를 선도해갔다.

이런 젊은이의 문화는 74년 최인호의 원작 소설 <별들의 고향 >이 서울고 동창인 이장호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면서 폭발하기 시작한다.   청순한 처녀 경아가 첫사랑에 실패하고 결혼한 남자에게서도 버림받아 결국 늙고 초라한 호스티스로 전락하여 인간에 대한 배신감에 괴로워하다 알코올중독자가 되고 결국 자살한다는 비극적 내용의 멜로 드라마인 <별들의 고향 >은 72년부터 73년까지 신문상에 연재된 것을 74년 출간한 것으로 상,하권 합해 약 1백만권이 팔리는 베스트셀러였다.

영화로 만든 <별들의 고향 > 역시 당시 관객 46만을 동원하며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며 28살의 최인호는 청바지, 장발, 생맥주, 통기타로 상징되는 젊은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또 영화 <별들의 고향 >의 엄청난 성공과 영화보다 더 인상깊었던 이장희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는 오랫동안 기억되었다.

다음해인 75년 UCLA에서 촉망받던 하길종 감독이 귀국하여 <바보들의 행진>을 만든다.  대학생 병태와 영자가 겪는 대학의 낭만과 현실과의 괴리와 거기에서 오는 허무감을 담고있는 이 영화는 청년문화의 또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영화음악을 맡았던 송창식은 이장희와 마찬가지로 '왜 불러'와 '고래사냥', '날이 갈수록'을 히트시켰다. 다만 영화속 장발단속 장면과 함께 울리던 '왜불러'는 금지곡 판정을 받았다.

음악감상실의 통기타 문화라는 작은 틀속에서 머물던 젊은이의 문화는 <별들의 고향 >과 <바보들의 행진 >으로 세상으로 분출되었고 기성세대로 하여금 새로운 세대의 문화를 인정하게끔 했다. 동시에 쎄시봉 통기타가수 출신들의 음악은 더욱 멀리 퍼지며 젊은 감성을 이어가며 전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고 젊은 세대의 문화를 깊게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다.


3) 1세대 통기타출신 가수들의 시련과 몰락



1974년 8월15일 제29회 광복절, 장충동 국립극장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가 재일 교포 테러리스트 문세광이 쏜 권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또한 75년에는 65년부터 한국군이 대대적으로 참전하여 지원해주던 베트남이 끝내 패망하였다.  공산권에 대한 국가적인 위기감이 증폭되던 이런 시기에 박대통령의 아들 지만이 히피 친구들과 어울리며 대마초에 중독되었다는 얘기가 퍼졌다.  그 후 통기타문화는 불온시 되었고 대마초 일제 단속이 시작되었다.

퇴폐문화 단속으로 많은 노래가 금지곡이 되었고 검열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활동은 위축되고 자유로운 창작 활동 또한 어려워졌다.   히피문화의 시초로 간주되던 한대수는 박정희에게 그 아들을 더럽힌 퇴폐문화의 전도사로 낙인이 찍혀 그의 앨범이 판매금지 되고 대부분의 노래가 금지곡이 되었다. 한대수는 결국 음악 활동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도미했다. 또 계속해서 자유가 억압당하는 현실을 피해 이장희, 조영남 등 많은이들이 고국을 떠났다.

포크음악을 선도했던 한대수, 김민기의 노래가 금지되고, 통기타출신 가수들에게 새로운 길을 인도했던 이장희 등 선구자들이 자리를 비웠고 400여곡이 넘는 노래들이 금지당한 상황에서도 77년까지 통기타 출신의 가수들은 가요계를 장악하며 히트곡을 만들고 있었다. 송창식은 여전히 인기가수였고 정종숙, 이수만, 최백호, 김인숙 등의 신인 통기타 출신들이 정상의 자리에 위치해있었다.

그러나 76년 이후 이들은 정상권에 있었고 여전히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이전처럼 젊음을 대표하지는 못했다. 75년의 가요정화조치로 위축된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통기타 출신 가수들이 음악외적인 다양한 활동에 비중을 높이며 기성 연예인화 되어갔다는 점에 있다. 조영남, 어니언스 등은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열연하기도 했으며 이장희 등은 단역 배우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양희은, 윤형주 등은 라디오 DJ와 같은 방송활동을 하였고 김도향, 윤형주, 송창식 등은 CM송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중 김도향은 CM송의 귀재로 떠오르는등 통기타 출신 가수들은 방송, 연예계에 다양하게 진출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고있었다.

연예계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이며 중심으로 이끈 힘의 근원인 청년문화의 정신을 서서히 잃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음악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70년대 중반이후 가요계는 고고의 바람이 불었다. 기성가수 답게 이를 수용하였고 고고와 탱고 등의 리듬을 받아들였고 인기곡을 내었지만 예전같은 힘을 가지지는 못했다. 고고등을 받아들였지만 새로운 변화를 적극적으로 리드해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통기타출신 가수들이 이전에는 새로운 문화와 사고를 대변했지만 76년 이후부터는 젊은이 문화의 리더로서의 역할을 상실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77년 대학가요제가 개최되어 샌드페블즈가 '나 어떡해'를 선보였고 산울림이 '아니벌써'를 히트시키자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어버렸다. 이제 젊은이의 문화는 통기타 출신 가수들을 대신해서 새로운 대학 아마추어밴드들이 대변하게 된 것이다. 통기타 출신 가수들은 기성가수화 되는 과정에서 또 대학가요제 출신들에 의해서 젊은이라는 세력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78년에 사랑과 평화까지 나오자 이들은 사운드면에서도 신진세력과 경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통기타 세력은 그들의 힘이 근간이 되었던 이장희와 송창식류의 밴드사운드는 포기해야하는 시점까지 이른것이다.   78년 이후 통기타 세력은 새로운 사운드를 모색해야만 하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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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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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삼창님의 댓글

제삼창 작성일

배꽃잡아 드셧슈?
신선하군요
세상만사 님들 고전적인 닉 개성만땅 ~!!
제이엘 글은 한국 이름은 짝뚱?
글올리고 댓글도 씽씽 달려야 민족의 흥인데
나만 얼큰하네
유일무일 나만의 댓글 다른 님들이 본인 댓글을 못볼랴 아랫것 다시 팍팍 퍼 붙입니다

질리도록 올리는 기독교글들과 정치글들 남아들로써 느낀점을 요약해서
올리는건 자유지만 케이씨애틀에서 남들 이구 동성으로 싫어하고 고만좀 올리라고 지겹다고,,,그때는 완전 혼자 독무대 여론에의해 팽당햇나 아님 풍운의 깊은뜻이 있어 홀연히 사라진건가
여기선 배구로치면 시간차 작업이네 왜,,사람이 주는거없이 싫증나는거있잔우
말이 아니고 글일세 말보다 무서운게 글인지라
여기한번 꼭 들어가보소 퍼나르는건 자유고 ..지역감정에 치우치지말고
걍~~편한히 월드 마인드로 보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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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님의 댓글

인지 작성일

페더럴웨이에 LA피트니스 헬스클럽이 있는데 복싱겸 킥복싱 샌드백 8개 짐이 있습니다
저는  그곳서 매일 런닝,헬스  권투,격투기도 연습하고 있습니다
복싱 격투기 코치는 없고 두둘기고싶은대로
맘것 즐기세요 스트레스 확~~날아갑니다 
심장,폐활량 체력 몸쨩 만들어집니다
그래야 더 큰 포부와 포용으로 승화시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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