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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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살다보니 이런 인연이 있나 싶군요.
'나의 살던 고향은' 을 작사한 이원수 선생님에 대해서 제대로 몰랐었는데 어떤 일로 이번에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일에 대해서 글을 쓰려다 인터넷으로 '나의 살던 고향은'을 서치해서 조금 더 확실하게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뜻밖에도 제겐 아주 귀한 사실을 알게 해 준 이원수 선생님의 글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일은 그저께 저녁에 있었습니다. 자주 보는 1대 100 퀴즈 게임에 '공부의 신'이라는 젊은이가 등장했습니다. 수능 시험에서 0.01%에 들었다하니 계산해보면 만명 가운데 으뜸일 정도의 유능한 젊은이인 것 같고, 또한 한국처럼 경쟁적인 공부하는 환경에서 '공부의 신' 그룹에 속해 있으면서 사실 그 그룹의 의의는 신나게 공부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아무튼 공부를 잘한 젊은이면서 퀴즈 예심에서도 1위로 올라올 정도로 아는 것이 많은 젊은이로 보였습니다.
그런 젊은이가 5단계쯤에서 떨어졌는데 그건 퀴즈란 것이 가끔 엉뚱한 것을 문제로 내어서는 고르게 하는 일이 잦으므로 이해할 수 있고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그보다 제가 말하는 문제는 3단계쯤에서 일어났는데 제가 너무도 어이가 없어했고 그 충격이 가시지 않아 이렇게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그 문제는 미리 간단한 문제를 내어서 힌트 네 개를 얻어서 그것과 가장 관련깊은 것을 찾는 문제였습니다. 그 힌트 가운데 답이 '산골' '복숭아' '살구' '진달래' 가 있었는데 그 젊은이는 겨우 복숭아와 살구만을 맞췄습니다. 그 정도는 그래도 봐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 다음에 일어난 것이지요. 그 아래에 위의 힌트와 가장 적합한 동요를 찾아내라고 하면서 3개 가운데 한 개를 고르는 것이 나왔고 그 가운데 '고향의 봄'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 젊은이는 고향의 봄 노래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음치이고 음악엔 소질이 없다고 변명했지만 어떻게 보통의 젊은이도 아니고 만명 가운데 선두라는 젊은이가 고향의 봄 노래의 가사를 모르는 일이 일어났을까요? 결국 그 젊은이는 챈스를 활용하여 답을 선택하고야 말았습니다.
대한민국의 교육이 이렇게 인성교육과 상관없이 아이들을 길러도 좋을까요?
이십여 년 전 초등학교 아이들이 야구 시합을 위해서 미국에 왔다가 우리 집에서 묵은 적이 있는데 그 때 아이들의 오락 시간에 동요나 학교에서 배우는 좋은 노래는 커녕 아주 민망한 성인들의 노래를 불러대는 것을 보고 참 한심한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그래도 속으로는 동요는 다 알겠지만 아이들이 성숙해서 저러는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이번 일을 거치면서 정말 한국의 아이들이 '고향의 봄'도 모르고 자라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저렇게 공부를 잘 한 젊은이도 그 노래를 모른다하니 다른 아이들은 어떨까 싶기도 하고요. 그저 제 생각이 기우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 있으면서 그래도 남북이 서로가 혈육이고 동포란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함께 부르는 노래로 가능하기도 한 것을 종종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서로 남북 동포들이 한마음이 되어 함께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며 동포애를 나눌 수 있는 노래 가운데 하나가 아리랑과 함께 '고향의 봄' 입니다. 해방 전에 지어진 노래이기에 남과 북의 모든 어른 아이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이 노래를 지금의 젊은이들 가운데 많은 숫자가 모른다하면 훗날 남과 북은 과연 무엇으로 서로 하나 되고 화합해나갈 수 있을까요?
아무리 요즘의 아이들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고향이 그저 도심 아파트 촌의 삭막한 풍경이라해도 '고향의 봄' 노래를 함께 부르게 하면서 아이들의 정서를 키워줘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이 인간다운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도록 교육하는 것이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아닐까 여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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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글 처음에 인연이라고 했던 것은 다름 아니고 윗 글을 쓰려다 찾아본 인터넷에서 다음과 같은 이원수 선생님의 글을 찾아낸 것입니다. 고향의 봄 노래는 이원수 선생님이 살았던 마산을 배경으로 한 것이란 것을 몰랐는데 이원수 선생님이 제 아버지가 다녔던 마산 상업학교를 나왔다는 것을 읽으며 이런 인연이 있나하고 여겼는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글에서 함안 읍에서 일한 것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거긴 제가 걸음마를 뗄 때에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아버지가 자신의 모교였던 그곳에서 몇 년간 부임해서 있던 곳이었지요. 그 다음에 이어지는 글에서 십리 남쪽의 여항산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그 산아래가 아버지의 고향이고 제가 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까지 자랐고 친지들이 살고 있는 고향인데 그곳을 자주 찾으면서 시골 사람들의 어려운 삶을 직접 체험하고 민중의 아픔과 함께 하려고 했던 그때의 심정을 아주 잘 표현해놓았군요. 60년대 중반에 저수지 가장자리로 버스 길이 났지만 그분이 근무했던 30년대 후반은 정말 첩첩산중이었지 않았을까 여겨집니다.
아무튼 '나의 살던 고향은'을 모르는 세대에 대한 글을 준비하면서 이원수 선생님이 제가 살던 고향에 대한 글을 쓰신 것을 발견하였으니 이 얼마나 큰 우연이며 인연인지요?
아래에 그 글을 옮겨왔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이원수
나는 소년 시절부터 동요와 동시를 써 왔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동화와 함께 동시를 쓰는것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다.
어른들의 세상에서는 눈에 뜨이지도 않는 일이고 또 문단에서도 따돌림을 받는 아동 문학을 하면서 한평생을 살아 온 것에 때때로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마음속에 내 생각이 스며드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순수한 어린 마음을 길이 살려서, 착한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이 밝고 깨끗한 곳이 되게 하는 데에 조그만 힘이라도 되려고 하는 나의 소망 때문이다.
일천구백삼십년 삼월에 마산 공립 상업학교를 졸업한 나는 함안읍에 있는 금융조합, 곧 지금의 농업 협동 조합에 취직이 되어 함안으로 갔다. 그때에 상업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좋은 일자리를 얻은 셈이었다. 그 일자리는 내가 취직 시험을 봐서 얻은 것이 아니고, 학교에서 성적에 따라 추천해 줘서 얻은 것이었다.
그곳에서 하숙을 하다가 한해 뒤에 어머니가 오셔서 함께 살았다. 하숙을 할 때는 줄곧 집 생각과 마산의 친구들 생각으로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마산과 함안은 가까웠기 때문에 나는 틈만 있으면 마산으로 갔다.
가슴속에는 문학에 대한 꿈을 안고 시를 생각하면서도 대부금과 예금 사무를 보는 시골 직장에 몸담고 있던 나는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 정책 밑에서 찌든 농민들의 생활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꽤 각박한 생활을 하는 농민들에게 대출금의 이자를 독촉해야 하는 나 자신의 꼴을 그저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별다른 힘이 없던 나로서는 기껏해야 이자를 좀 연기해 주는 것 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이자를 받으러 가면 농민들은 참 반가워했다. 농민들은 나를 금융조합의 직원이라기보다는 자기들이 가진 문제를 함께 의논해 주는 상담자로서 더 크게 생각해 주었다.
금융조합에서 빌려 주는 동의 액수는 담보물이 없을 때에는 이백 원까지였다. 이자는 백원에 하루에 삼전 일리였으며 한해의 이자율은 일할 삼푼이었다.
함안읍에서 바로 보이는 산으로 여항산이 있다. 봄 삼월, 결산기가 되면 나는 그 산을 넘어 저편 골짜기에 있는 동네에도 이자를 받으러 다녀야 했다. 그때에 함안의 금융 조합이 맡고 있던 지역은 함안면, 가야면, 산인면, 여항면의 네곳이었는데 그 중에서 여항면은 여항산에 둘러싸인 산골이었으며,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것말고도 숯을 구워 읍에 내다 팔기도 했다.
여항면을 다닐 때는 거의 산을 타고 넘어야 했다. 차를 차고 가는 길은 산을 돌아 갔기 때문에 멀었고, 그보다도 나는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싫었다. 특히 여항면에 가느라고 땀을 흘리며 그 가파른 산고개 위에 올라서면, 먼 산줄기에서부터 솔바람이 불어왔다.
내가 고갯마루에 앉아 쉬고 있노라면 그 가파른 고개를 숯짐을 지고 때묻은 흰 바지저고리의 가난한 사람들이 넘어왔다. 읍내 장에까지 지고 가서 그 숯을 팔아 돈 몇 푼을 얻기 위해 하루를 다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산 너머 골짜기를 내려다보면 까마득히 먼 곳에 조개껍데기를 엎어 놓은 것 같은 집들이 보이고, 멀리서 낮닭 우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 왔다.
나는 함안에서 일하게 된 지 세해쯤 지난 뒤에 <여항산에게>라는 시를 썼는데 이걸 일본말로 번역하여, 금융 조합 감독부인 도청 이재과에서 내는 기관지에 기고했더니 요행히 게재되어 원고료 십원을 받았다. 그때는 동시 한편을 써서 일이원쯤 고료를 받으면 다행으로 여기던 때라 월급 삼십원짜리 나로서는 큰돈이었다.
농촌의 피폐한 모습과 흰옷 입은 산촌민의 모습을 그렸고 그들에 대한 내 뜨거운 마음을 노래한 시였는데 어떻게 일본 사람들이 그걸 실었는지 잘 모르겠다.
금융 조합 생활 속에서 내가 할 일은 조합 사무실뿐만이 아니라, 문학 공부를 혼자 힘으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문학 공부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문학 이론 서적을 많이 읽었다.
주로 일본 서적이었는데 그때 일본의 아동 문학가 몇 삶의 글과 소설도 많이 읽었다.
그때 "세계 문학 전집"이라는 일본말로 번역된 책을 꽤 감동깊게 읽었는데 그 뒤로는 다시 읽을 기회가 없었다. 남의 눈에 표나지 않게 하는 문학 공부였지만 날이 갈수록 남들이 나의 생활을 이단시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같은 금융 조합의 직원이면서 직업과는 어눌리지도 않는 문학 공부를 하는 것이 다른 직원들이 보기에는 내가 마치 별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농촌의 아이들과 어울려 노래하며 놀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농촌의 어린아이들의 생활은 나의 동시의 소재가 되었다. 그것은 자연히 슬픈 가락의 노래로 씌어질수밖에 없었다.
"이 추운 날도/언니는 지게 지고 나무 가셨다./호오호오 손 불면서/나무 가셨다.
솔밭 부는 바람은 위잉위잉…/골짜기 개울은 꽁꽁 얼어서/춥단 말도 안 나오는/저기 저 산. 해야./번쩍이는 해야./좀더 내려와서/나무 하는 우리 언니/쬐어나 주렴."(<나무 간 언니>)▣
그 무렵에 나온 동요들 중에는 즐거운 가락을 담은 것이 많았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이들이 그런 즐거운 가락을 담은 노래를 부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참된 즐거움이 될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웠다. 적어도 농촌 아이들에게 그 동요들은 즐거운 놀이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불우한 겨레, 그 중에서도 불우한 아이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내 시의 소재로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들에게 즐거운 가락의 놀이나 오락적인 내용의 노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시를 쓰는 것이 본디 고독한 일이겠지만 시골 농촌에서 회계 사무를 보며 살고 있던 나는 무척 외로웠다. 그러한 데서 좀더 활기있는 생활, 곧 문학의 불을 지피려는 생각에서 직장 동료 한 사람과 고향 마산의 친구들 몇 사람이 모여 문학 모임을 만들었다. 달마다 회합과 작품 회람, 합평회 등을 통해 농민 문학을 주로 공부하려는 모임이었다. 우리는 쓸데없이 꼬투리를 잡힐까봐 모임에 이름도 붙이지 않았다. 그때 우리 모임을 지도해 주면서 고문 노릇을 하던 사람은 민요 시인으로 알려진 양우정 씨였다.
나는 이 모임으로 생기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비록 조그마한 모임이지만, 자칫하면 빠져들기 잘하는 문학에의 회의 같은 것을 씻을 수도 있었고 용기도 돋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해 남짓 지났을 때, 그러니까 1935년에 그 모임의 회원들이 농민 문학을 연구한다고 불온 사상 단체로 몰려 제국주의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철창 신세를 져야 했다. 함안에서, 마산에서 그리고 일본 규슈에 가 있던 친구까지 모두 잡혀서 치안 유지법 위반 혐의로 예심에 넘겨졌다.
나는 어두컴컴한 유치장에서 두달 남짓 있다가 마산 형무소로 넘어갔고, 거기서 또 부산으로 옮겨가서 겨울을 나고 한해 남에 가까스로 집행 유예로 나왔다. 그 바람에 어머니가 무척 걱정하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때까지 한번도 만나 보지 못한 천리 밖의 한 여자가 몹시 마음을 졸인 사실은 함께 검거된 친구들도 모르는 일이었다.
1923에 소파 방정환 선생이 펴낸 <어린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내가 15살이 되던 1926년에 나는 이 잡지에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되는 <고향의 봄>을 써 보냈는데 이 동시가 실리게 되었다. 세상에 발표한 내 첫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 전해에 이 잡지에 수원에서 사는 최순애라는 여자가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로 시작되는 <오빠 생각>이라는 동시를 발표했었다.
나는 그 동시가 무척 좋아 내가 같은 잡지에 글이 실렸다는 것을 핑계로 편지를 썼더니 답장이 왔다. 이때부터 나와 최순애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안부를 묻고, 문학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그쳤는데 일고여덟해를 계속해서 편지와 사진까지 주고받게 되자 우리는 점차로 혼인할 뜻을 굳히게 되었다.
이렇게 계속해서 편지로만 사귀어 오다가 1935년에 드디어 우리는 수원에서 만날 약속을 했다.
사진으로 얼굴을 익히고는 있었지만 속으로 불안했던 나는 이러이러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수원역에 내리면 바로 난 줄 알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만나기로 약속한 그날에 나는 검거되어 외부와의 연락이 끊어지게 된 것이었다.
예심이 끝난 가을에야 겨우 편지를 낼 수 있었고, 그제서야 최순애의 편지를 받았다.
"…잡혀가셨더라도 곧 나오시려니 했는데 봄이 되어도 아니 오시고 여름이 되어도 소식조차 알 길이 없었어요. 뒷동산과 집 주위에 코스모스도 다 지고, 지금은 찬바람에 눈이 옵니다."
그래도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는 걸 알고 참으로 큰 위로가 되었다.
1936년 1월 30일에 풀려나서 마산으로 돌아온 나는 완전히 실직자요 빈털터리였다.
그러나 한해 동안 나를 기다려 준 최순애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수원으로 갔다. 그때 들었지만 그녀와 만나기로 했다가 내가 잡힌 그날에 지금은 내 아내가 된 최순애 대신에 수원역에서 나를 기다리던 장인은 내가 끝내 오지 않자 화를 내면서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더욱이 내가 "사상범"이라는 어마어마한 죄로 옥에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아내의 집안은 발칵 뒤집혀졌다고 했다.
아무튼 내가 수원에 간 것은 환상 속의 세계가 현실 세계로 펼쳐지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아내의 집에서는 내 전과를 내세워 혼인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때 우리 편에 서서 도와 준 사람은 그의 오빠 최영주였다.
최영주는 방정환 선생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개벽>, <신여성> 같은 방정환 선생이 편집을 맡았던 잡지사에서도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가 편을 들어 주어 아내의 집에서 간신히 허락을 받아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
1936년 6월에 우리는 장인이 아는 서울 견지동의 작은 교회에서 혼례를 치렀다. 우리집에서는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고 아내의 집 식구들만 참석한 초라한 혼례였다.
식을 올리자마자 수원으로 내려온 나와 아내는 신혼여행을 가는 셈치고 곧장 마산으로 갔다.
나의 신혼 생활은 행복과 고통이 뒤범벅된 것이었다. 실직자로서의 불안한 나날을 신혼의 달콤한 즐거움으로 덮으며, 나는 마산시의 동쪽에 있는 산호동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그때의 산호동은 지금과는 달리 외딴 동네였고 집 뒤로는 바로 용마산이 있었다.
사랑이 중하다 해도 직업도 재산도 없는 내게로 와서 사투리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아내는 무척 괴로웠을 것이다. 저녁을 먹고 나면 아내는 집 뒤 산머리에 올라가서 곧잘 작은 소리로 토셀리의 <소야곡>을 부르곤 했다. 그 노랫소리는 내 신세 탓인지 무척 슬프게 들렸다.
고향 마산에서 나는 한때 한약방의 회계로 일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생활은 어려웠다.
그런데 이듬해인 1937년에 나는 함안 금융조합에 다시 가게 되었다.
이른바 사상범으로 형을 받은 사람을 써 줄 턱이 없는 시절이었건만 그곳의 이사 김정완 씨는 우선 임시 직원으로라도 오라고 했던 것이다. 그의 고집과 열의가 마침내 나를 다시 복직시켜 주어,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고 지내게 되었고, 함안에 가자마자 첫아들도 낳았다.
그러자 곧 일본의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어 세상 살기가 날로 어려워져 갔다.
농작물 공출 때문에 식량 부족이 도시에서 사는 사람 못지 않게 심했다.
이러한 시기를 맞아 변절하는 문인들이 생기고 우리글로 된 신문, 잡지들이 못 나오게 되어 갔다. 내 시를 발표할 곳도 없어졌다.
농민들은 식량을 공출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인력 공출도 해야 했다. 이른바 보국대라 하여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만드는 공장이나 탄광에 끌려갔다. 지원병이란 이름 아래 젊은 청년들이 전쟁터로 끌려갔다. 한번 간 삶은 예정한 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것이 예사였다.
그 무렵의 내 동시도 슬플 수밖에 없었다.
"개나리꽃 들여다보면 눈이 부시네/노란빛이 햇볕처럼 눈이 부시네./잔등이 후꾼후꾼 땀이 배인다./아가, 아가, 내려라. 꽃 따 주께. 아빠가 가실 때는 눈이 왔는데/보국대 보국대, 언제 마치나?/오늘은 오시는가 기다리면서/정거장 울타리의 꽃만 꺾었다."(<개나리꽃>)
강제로 끌려간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린 아들딸들의 마으을 노래한 것이었지만 이런 시나마 쓰지 않고서는 내 울분과 적막감을 누를 길이 없었다.
내가 함안읍에서 가야면으로 옮아왔을 때는 전쟁이 점차로 가열되어 한동안 보류되었던 금융 조합 직원도 보국대에 끌려가게 되었다.
큰아이가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우리말 우리글을 쓰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나는 내 동시들을 모아 붙인 공책을 국어책으로 삼아, "뒷산 부엉이 부엉부엉 운다/ 동무 동무 없다고 부엉부엉 운다" 같은 것을 읽어 주곤 했다.
가야에서 나는 젊은 청년들과 가까워졌다. 지원병으로 나가라는 강요에 시달리고 징용에 끌려가게 될지도 모르는 그들은, 그 지독한 황국신민화 교육을 받고도 내게서 무슨 시원한 말이라도 듣고 싶어했다.
정말 막막한 시대였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모두 일본의 노예로 사는 것만이 가장 정당하고 옳은 것 같은 그런 시대였다. 그런 공기 속에서 젊은이들의 눈이 빛나고 핏대가 서는걸 보고 든든해했을 따름이었다. 나는 밤이면 그들과 수리 조합 둑에 모여 앉아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때 그 젊은이들이 다 어디로 가서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지금 고등학교 선생으로 있는 그 중의 한 사람을 면해 전에 만난 적이 있을 뿐이다.
1945년 8월에 나는 그 가야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요행히 노무 동원에 끌려가지 않고 그날을 맞이했던 것은 나로서는 무척 다행한 일이었다.
나는 담담하게 해방을 맞았다. 따지고 보면 나 자신도 친일 분자의 하나로 남들에게 보였을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디 살아 있을 수조차도 없었을지 모르겠지만, 그 많던 충성스럽던 친일 인사들이 어떻게 우리 민족으로 돌아올지 궁금했다.
급한 대로 나는 지방 자치 위원회를 만들고, 한글 강습회를 열고, 강연회를 갖고 하는 어수선한 일을 하다가 그해 가을에 시골을 버리고 서울로 올라와 학교 선생이 되었다.
그곳에 계속해서 있다가는 문학이란 꿈만 꾸다가 죽도록 금융 조합의 직원 노릇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해가 다 차기 전에 다시 출판사로 일자리를 옮겨 이런저런 일을 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 뒤에도 나는 우리 민족에게 닥쳐든 가지가지 어려움과 아픔과 죽음들을 당하고, 겪고, 보면서 문학이 가질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특히 아동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생각과 길은 더욱더 어려운 것임을 뼈저리게 깨닫기도 했다. 지금 사회 구성원이기 보다는 앞으로의 사회인이 될 이들에게 주어질 문학이니 말이다.
아동을 상대로 하는 문학, 곧 아동 문학을 동심 문학이라 하는 것, 거기 관련해서 아동을 천사로 보는 천사주의 문학이라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한 비판도 필요했다.
해방이 되었으니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짐작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나는 시만으로써는 도저히 내 가슴에서 솟구치는 감정을 나타낼 재주가 없어 해방된 두해 뒤부터 동화와 소년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첫 번 장편이 1947년의 <숲속 나라>와 <오월의 노래>였다.
앞의 것은 천진한 아이들이 외세를 배격하며 밝은 나라를 건설하는 얘기이고 뒤의 것은 제국주의 일본 시대에 수난받은 아이들의 얘기였다.
아무튼 70이 된 이 나이까지 쓴 내 작품이 모두 이런 것이라 내 길은 여전히 가시밭길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길을 버리지 않고 <SPAN style="FONT-F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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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폰툰님의 댓글
폰툰 작성일
이원수 선생님의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당시의 정황도 자연스레 잘 나타나 있군요.
왠만한 민초들은 모두가 고생을 하고 힘든 세월을 겪었는데..굳이 그 시기가
우리에게 아주 행운이었다는 식의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
참으로 암담하다는 생각입니다.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이원수 선생님에 대한 친일부역 문제도 대두된 듯합니다. 올해 백 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는데 잡음이 있다는군요. 본문에서 본인 또한 자신이 친일분자로 보였을 수도 있다고 밝혔군요. 그 시절에 살아남기 위해서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일제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고인이 1981년 돌아가시기 전인 70년대 말쯤 발표한 이 글로 이원수 선생님은 그 반대로 일제때 감옥까지 다녀온 사람인 것이 드러나는군요. 민족정통성이 중요하지만 얼마나 적극적인 친일이었나와 해방 이후의 행적이 어떠했는지 또한 고려해야만 하겠습니다.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이원수 선생님의 본문에서 최순애 선생님의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오빠생각) 동시를 읽고는 편지를 서로 교환하게 된 이야기가 있는데 70년대에 유행했던 펜팔의 원조가 바로 두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려움 끝에 두분이 부부가 되었다는 해피엔딩의 이야기 또한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오빠생각 또한 아주 귀한 동요인데 그 동요의 주인공인듯한 오빠가 두 사람의 결혼에도 큰 힘이 되어준 것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