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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유영모의 양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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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조
댓글 0건 조회 1,867회 작성일 11-03-27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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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먹는 것은 끄니(끊이)로 먹어야 한다. 한참 끊었다가 먹으라고 끄니 또는 끼니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줄곧 이어서 달아 먹으려는 것은 잘못이다. 먹음에 실컷 먹겠다는 생각을 버린 사람은 일부러 금식도 하고 단식도 한다.
먹을 것이 모자라서 먹기를 끊을 때는 (굶을 때는) 오히려 이것을 하느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의 뜻으로 받는다. 말씀을 바로 아는 집안에서는 ??나쁘듯 먹여라??는 말을 한다. 온당한 말이다.(1956)

2. 양생법(養生法), 장생법(長生法)이라는 것이 있는데 한 때는 듣는 것 같아도 다 못쓴다.
그저 줄곧 곧이(貞)의 정신을 가지고 입 다물고 숨쉬어야 한다. 곧이(貞)를 가지면 숨이 잘 쉬어진다. 대부분 먹는 것이 지나치면 식곤(食困)이 생겨서 잠이 많아지고 앉아도 바로 앉지를 못한다. 따라서 바로 숨도 잘 쉬지 못한다. 숨쉴 식(息)자는 코(自)에 염통(心)이 붙어 있는 회의(會意)문자다. 사람이 곧이 곧장 가려면 식(息)이 성해야 한다. 세상 모르고 잠이 들 때도 숨은 더 힘차게 쉬니까 불식(不息)이라 쉬지 않는 것이다. 식(息)이??숨쉬다??와 ??쉰다??는 뜻이 있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 숨(息은) 처음부터 쉬지 않는 불식(不息)이다. 숨길은 쉬면 안 된다. 건강하려면 식불식(息不息) 해야 한다.(1956)

3. 밥 먹고 자지 말고 밥 먹고 깨어나도록 밥을 먹어야 한다. 밥은 제물(祭物)이다. 바울은 우리의 몸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몸이 하느님의 성전인줄 아는 사람만이 능히 밥을 먹을 수 있다. 밥은 하느님에게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이다.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밥을 먹는다는 것은 예배요 미사다. 내가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배드리는 맘으로 밥을 먹는다는 말이다.
알찬 쌀을 쭉정이 같은 내가 먹을 자격이 있단 말인가? 중생인 부족한 우리로서는 떳떳하게 먹을 수는 없다. 참으로 미안하기 그지없으나 그렇다고 안 먹을 수 없으니 먹는 것이다.그러니 먹는 까닭은 구차한 생명을 연장하자고 먹는 것이 아니다. 몸삶을 연장해서는 무엇을 하겠는가? 아까운 밥만 썩일 뿐이다. 그보다는 이제라도 깨서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깨우치는 약으로 먹는 것이다. 사람이 얼나를 깨달은 참사람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먹는다. 그렇게 되면 조금이나마 쌀에 대하여 덜 미안하게 될 것이 아닌가? 내가 쌀로 하여금 하느님의 뜻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먹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니 그곳에 욕심이 붙을 수가 없다. 식탐(食貪)의 욕심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깨는 약으로 먹는 것이다. 하느님께로 나아갈 길을 바로잡는 것이 인생의 사명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밥을 먹어야 한다.(1957)

4. 몸성히(건강)를 위해서는 탐욕을 버려야 한다. 자꾸 먹고 싶은 욕심을 경계하고 많이 먹지 않도록 하는 이것을 불교에서는 점심(點心)이라고 한다. 점심을 위해서 석가는 대낮에 한 번 먹었다고 해서 일중식(日中食)이라 했다. 24시간에 한 번 먹는다고 해서 점심이라고 하고 먹는 등 마는 등 마음에 점(點)친다고 해서 점심이라고 하게 되었다. 내가 하루 한 끼를 먹어보니 몸성히의 비결이 점심에 있다 . 하루 한 끼니만 먹으면 온갖 병이 없어진다. 모든 병은 입으로 들어간다. 감당 못할 음식을 너무도 집어넣기 때문에 병이 난다, 사람은 안 먹으면 병이 없다. 욕심을 줄여서 한 점을 만드는 것이 점심이다. 그것은 석가가 오랫동안 실천한 건강법이다.(1957)

5. 옛날 사람은 정(精)을 가지고 단(丹)을 만든다고 했다. 아랫배가 단단하게 단(丹)이 박힌 사람이 도인(道人)이다. 그들의 기운은 날듯하고 그들의 신기(神氣)는 상쾌하며 그들의 정신은 고상하다. 이러한 사람을 절대무위한도인(絶對無爲閑道人)이라고 한다. 남녀 관계를 끊고 정신적으로 사는 사람이 도인이요 신인이다. 이들은 정(精)에서 기운이 나오고 기운에서 신(神)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시행한 것은 정좌(正坐)다. 깊이 숨을 들이쉬면서 배 밑에 마음을 통일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지경에 이른다. 자기의 형해(形骸)를 초월하는 것이다. 이것을 장자(莊子)는 좌망(坐忘)이라고 했는데 불교의 참선과 같다. 그리하여 아랫배에 힘이 붙기 시작하면 기해단전(氣海丹田)에서 성단(成丹)이 된다. 마치 나무를 불완전 연소를 시켜서 숯을 굽는 것과 같다. 밥의 알짬(精)으로 단(丹)을 만드는 것이다. 이리하여 아랫배 안에서 숯과 같은 단(丹)이 굳어지면서 거기서 나오는 열이 기운이다. 이 숲이 금강석이 되면 거기서 나오는 지혜가 신(神)이다.
정(精)을 함부로 내어버리지 말고 아끼고 아껴서 그것을 가지고 숯을 구어 석탄 만들고 금강석을 만드는 것이 좌망(坐忘)이다. 이리하여 사람은 없어지고 신선(神仙)이 된다. 사람에게 힘이 있다면 정(精)이라는 기름을 불 때서 기관을 움직이는 것일 것이다. 기름을 아낄 줄 모르고 함부로 하수도에 버리고 만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일로 지혜에 병이 든 것이다.(1957)

6. 우리의 숨은 목숨인데 이렇게 할닥할닥 숨을 쉬어야 사는 생명은 참생명은 아니다. 성령을 숨쉬는 얼생명이 참 생명이다. 영원한 참 생명에 들어가면 숨쉬지 않아도 끊기지 않는 얼숨이 있을 거다. 내가 어쩌구 하는 그런 나는 소용이 없다. 석가의 법신(法身)과 예수의 하느님 아들은 같은 말이다. 숨 안 쉬면 끊기는 이 목숨은 가짜 생명이다. 숨에 짓(行)을 맞춰 주어야만 쉬는 숨이 바로 쉬어진다. 숨은 쉬지 않고 끊임없이 쉬듯 짓도 따라서 끊임없어야 한다. 이승에서는 목숨처럼 짓을 끊임없이 맞춰야 한다. 낮잠이나 자서는 안 된다.(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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