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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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고범중 기자]
문성근은 여러모로 '평범'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배우로서 가장 유명한 그이지만 대다수 배우들과는 달리 그는 명문대에서 무역학을 전공해 대기업에서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10년 가까이 하던 중 뒤늦게 인생의 '꿈'을 찾아 '연기판'에 뛰어들었다.
"운이 좋아서"라고 한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후 배우로서 승승장구를 이어갔고 그 정점은 < 그것이 알고 싶다 > 의 진행자가 되면서 찾아왔다고 한다(2011년 3월 19일 오마이뉴스 기사 "대학생들 맨 정신으로 노래방 자주 가라" 참조).
'국민 배우'로 불릴 만큼 대중들의 지지를 받으며 살아가던 그의 삶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스크린 쿼터' 사태가 발생하면서부터다. 스크린 쿼터를 지키기 위해 2002년 대선 때 '노사모' 활동을 통해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지지에 나섰고, 당선 이후에는 "한몫 챙겼다"는 오해를 받을까 연기 활동도 미루고 물밑에서 지냈다.
정권이 바뀌고 그동안 못 했던 '연기'를 재개하던 그는 돌연 2010년 '국민의 명령'의 대표로 "야권통합은 국민의 명령"이라는 메시지를 한국의 야당들에 전달하고 있다. 이런 그를사람들이 좋게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몇 달 전 한 트위터리안 그에게 "연기자면 연기나 할 것이지 왜 그렇게 나서는 것이냐"고 힐난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국민의 명령 '수행자'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문성근.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지난 20일 국민의 명령 사무실에서 만나 나눈 많은 이야기를 2회로 나누어 싣는다. 1부에서는 문성근의 과거 삶을 돌아보며 현재의 문성근의 뿌리를 찾아보았고, 2부에서는 현재 국민의 명령 대표 문성근에게 정치, 사회적 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문성근의 인생을 돌아보다
- 10대 문성근은 어땠나?
"부모님께서 굉장히 자유롭게 놔두셨다. 네 삶은 네가 스스로 개척하라는 식으로 하셔서 덕분에 철없이 놀았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식화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서강대 무역학과를 진학하게 된 것은, 대학입시 시험이 끝나고 당시 '진학'이라는 잡지에 나온 시험 점수표 때문이다. 내 점수로 진학이 가능했다. 그래서 그곳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입학 후 금방 큰 후회에 빠졌다. 재미가 없고 내 적성에 맞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요즘 우리 교육이 '남을 누르고 올라가는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10대들이 때때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할지 생각해보고 스스로 정리하면서 살면 인생의 시행착오가 줄어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서 나의 꿈이 무엇인지 확인하면 힘들더라도 쉽게 포기하지 말고 지켜나가고 키워나갔으면 좋겠다."
- 부모님이 자유분방하게 키워주셨기 때문에 지금의 자유로운 '문성근'이 존재하는 건 아닌지?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덕분에 자유로운 상상을 할 수 있도록 한 근원이 되었을 수는 있다. 지금 '국민의 명령'을 통해 길거리 '민란'을 하는 것도 내가 '배우'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생각도 든다. 직업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주된 작업이기 때문에 국가 체제, 정당 등을 이리 저리 뒤집어 생각해 볼 수 있었고 '기존의 정당 체제에서 왜 벗어날 수 없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 아무래도 대한민국에서 결코 평범하지 않은 아버지를 두고 자라면서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을 텐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꼽는다면 무엇이 있는지 듣고 싶다.
"대학교 2학년 때 연극을 했는데 어느날 술 자리가 있어서 막차를 타고 집에 들어갔다. 문제는 내가 술이 약해서 필름이 끊어지는 타입인데 다음 날 일어나니 누나가 "어제 너 집 앞에 쓰러져 자고 있는 것을 아버지가 업고 들어오셨다"고 하더라. 아침 밥상에서 아버지는 이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셨고 나도 그랬다. 또 기억에 남는 건 83~84년쯤 아버지께 "고문당한 적 없으시냐?"고 여쭈었다. 그랬더니 "한 번도 없다"고 하시더라. "고문 위협도 받아 본 적 없으시냐?"고 하니까 "물론 있지" 하셨다.
그 내용을 들어보니 취조에 협조하지 않자 지하의 고문실을 보여주며 조사관이 "협조하지 않으면 여기서 애들과(고문담당자) 며칠 지내셔야 됩니다"라고 했고 아버지는 "그래라"고 하셨다. 만약 고문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낀 기색이 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몰랐겠지만 그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 그러라고 하는 자세를 보고 조사관이 "올라가자(위층의 조사실로)"고 했단다. 1, 2분의 짧은 이야기였는데 이때 얘기를 들으면서 머릿속에 상상으로 그렸던 이미지가 머릿속에 깊이 박혀있다."
- 아버지의 '일'로 인해 고통 받거나 힘들어서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었는지.
"전혀 없었다. 원망이나 이런 것은 있을 수 없고 당신께서 당신의 삶을 온전히 던져 일을 하시는 것이고 내가 워낙에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계셨기에 내가 도와드리지 못해 늘 죄송했을 뿐이고 원망해 본 적은 조금도 없다. 그럼에도 가족들이 고통을 겪는 일이 적지 않긴 했다. 가령 아예 여권이 발급되지 않았고 이것이 배우할 때인 6공화국에서도 방송금지와 같은 형태로 이어졌다. 하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런 수준이라서 그런 것을 어쩌겠나. 김미화, 김제동과 같이 특정 정파의 이익에 맞지 않다고 '생업'을 끊으려는 시도는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권리'를 다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아서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들이 원망스러운 것이지, 아버지가 원망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 '아버지'를 문 목사라고 부르는 것은 '문성근의 아버지'의 차원을 넘어서 대한민국의 역사에 환원하겠다는 의지의 투영인가 ?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문 목사는 자기희생을 감수하고 활동하시던 분들과 동지였고 많은 사람들이 '문목(문 목사)'이라고 부르고 기억하신다. 또한 역사 속의 한 인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문 목사'라고 언급하는 것이 대화하기 더 편하기도 하다."
- 대학에 다닐 때가 시대적으로 '권위적'이었고 이에 항거하고자 하는 대학생들이 많았는데 어땠나 대학생 문성근은?
"내가 72학번인데 이때가 유신 때다. 이때는 '플래카드'를 꺼내려고 하면 잡아갔고 잡혀가면서 비명 몇 번 지르는 정도였다고 말해도 될 정도다. 나의 경우는 민주화 운동에 '전혀'라고 이야기해도 될 정도로 참여한 것이 없다. 아버지의 삶을 보고 내가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피했었다. 대신 구속된 사람의 가족으로 구속자를 위한 활동은 조금 했다.
1980년 '내란 음모 사건' 때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전원이 구속 상태였고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사형'이 언도된 상황이었다. 이때 구속자 당 두 명이 들어가서 재판을 참관할 수 있었는데 이때 기록할 수 있는 도구는 어떤 것도 지참할 수 없었다. 참관을 하고 나와서 그 내용을 문서로 기록하고 밖에 전달하는 일을 내가 했고 구속자 가족의 의견을 도합해서 '성명서'를 만들어 전달하는 일종의 '대변인' 역할을 담당했다.
또 89년 '문익환 목사 방북' 때는 한겨레를 제외한 모든 신문에서 문 목사를 맹비난하고 있었고 문 목사를 변호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위해 문 목사의 방북 성과와 목적,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을 통해 약속된 내용 등을 정리하고 전달하는 일을 했다. 이런 일들 외에는 하지 않았고 2001년 '스크린 쿼터 사태'에 영화계가 공동 대응할 때 비로소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 20년 혹은 30년 전의 과거 문성근이 현재 문성근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 것 같나?
"(한참을 뜸들인 후) 뭐… 그렇게 즐겁게 보지는 못 할 거다. '어쩌다가 저 인간 저러고 살지?' 이런 생각 할 거다. 우리 사회의 역사와 내 인생의 흐름이 총체적으로 영향을 미쳐 지금의 내 모습과 활동이 있는 것이니까 안타깝지 않을까 싶다. 이는 단순히 내 인생뿐만 아니라 우리의 역사가 더 원만하게 진행되어 왔다면 달라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측면에서 안타까울 것이다."
배우, 스크린 쿼터 그리고 노사모
- 다른 배우들처럼 연극을 전공하거나 젊은 나이에 연기를 했던 것이 아니고 심지어 요즘 대학생들이 들어가고 싶어하는 '대기업'에 있다가 뒤늦게 연기판에 뛰어들었는데 그 정도로 연기가 좋아보였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일단 당시는 취업하기 위해 지원서를 내면 10군데 20군데에 합격하던 시절이니까 지금하고는 비교하기 어렵다. 문 목사는 어렸을 때 일제치하에서 '독립'을 꿈꾸며 자라오셨기 때문에 예술적인 '감수성'이 풍부한 분이었다. 또 형들도 대학에서 '연극'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대학가면 연극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대기업에서 일을 하면서 지내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죽어가고 있다'고 느껴졌다. 절벽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느낌이랄까 ? 그래서 내가 살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느꼈다. 자금이 충분해 사업을 하거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내가 몰두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연극'이었다. 현실적인 요인과 감성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연기'를 선택한 것이다."
- 배우 활동하면서는 사회적 현안에 대해 언급하는 일에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문익환 목사와는 다르게 살겠다는 의지의 투영이었나?
"아니 아니다. 다르게 살아야겠다는 의지는 아니고 아버지는 내가 접근할 수 없는 곳에 계셨던 분이기에 나는 나대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 목사는 만주의 '명동촌'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민족 공동체'를 위해서 일하게끔 훈련이 된 반면 나는 자유롭게 자라왔고 어려서부터 '죽음'을 각오한 아버지의 활동을 보면서 경지가 다르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피해왔다고 볼 수 있다."
- 침묵을 깨뜨리고 나오게 한 사건이 '스크린 쿼터' 문제였다고 알고 있다. 당시 어떤 각오와 인식이었는지?
"당시 영화계가 스크린 쿼터 문제에 대응하는 모습이 마치 '앵벌이'하는 듯했다. '문화는 약하니까 지켜주세요'라는 식으로 어떤 논리나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에 몹시 답답하고 화가 났다. 그래서 정당하게 주장하자는 생각이었고 이때 '무역과'에서 전공한 것이 유일하게 빛을 보게 되었는데 '스크린 쿼터'는 '독과점 규제 장치'라는 내용의 글을 잡지에 싣게 되었다. 경제의 논리로 항변을 한 것이고 이것이 당시 많은 효과가 있었다. 이 때부터 얽혀들었다(웃음)."
-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가? 아니면 노무현이라는 '사람'에 매력을 느끼고 정치적 이념에 동의하였기 때문인가?
"스크린 쿼터와 관련된 것은 전혀 아니다. 당시 20명 가량이 매일 모여 대책회의를 했는데 회의가 끝나고 나, 명계남, 이창동 등 4명이 택시를 타고 집에 가곤 했다. 한날은 'DJ정부에서는 스크린 쿼터가 지켜져 가는 분위긴데 다음 정권에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4명이 모두 '노무현'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만큼 이전의 인식이 그러했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게 된 것은 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달성되고 김대중, 김영삼 양김이 분열하는 일을 막지 못 했던 문 목사의 책임을 옮겨 지기 위해서였다.
문익환 목사는 일생에 '논쟁' 거리가 없었는데 딱 하나 '양김의 분열'을 막지 못한 것이 유일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하면 87년의 분열을 극복하겠다고 했기에 문 목사는 안 계시지만 국민께 내가 대신 또 한 번 사죄하겠다는 의지로 노 대통령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노 대통령이 당선되더라도 나는 어떠한 혜택도 받지 않고 나의 본업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 고 노무현 대통령의 가치가 집약된 '민주주의 2.0'과 같이 정치, 경제, 사회적인 입장에도 동의를 했던 것인가?
"오히려 당시에는 참여정부가 당선 이후 어떤 일을 총체적으로 벌여 나갈 것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다만 당시 사회가 정치적으로 철저히 '지역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일을 하든지 동의하는 현상이 만연해 정당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이 문제만 해결되면 다른 일들은 '토론'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니까 여기에 최우선의 가치와 동의를 두었다. 오히려 노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후 참여정부의 가치에 대해 다시 공부하게 되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퇴임 이후 여러 일 중 '서거' 당시 어떠셨는지 또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추억하고 있나.
"사실 노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뵌 것이 2008년 가을이었기 때문에 7~8개월 정도 가까운 곳에서 뵙지 못했다. 왜냐하면 참여정부 출범 이후에 내가 내 본업 활동을 통해 매체에 노출 되는 것이 '역차별' 적으로 참여정부에 손해가 될 것이라고 판단해서 '칩거' 비슷하게 지냈고 정권 교체 이후에는 다시 나의 본업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찾아뵙거나 하지 않았다.
서거 하시고 나서 '봉하'에 내려가 마을 방송을 담당하며 대통령의 '유서'를 읽었는데 이 유서를 나 스스로의 의미로 해석하는데 1년 반이 걸렸다. 노무현 대통령의 삶 전체에는 '신화의 비극적 요소'가 모두 깔려있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해 독특한 캐릭터가 형성되었고 끝없이 무모한 도전을 하다가 스스로의 허물을 안고 몸을 던짐으로 해서 민주진영 전체에 역사 발전을 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래서 그의 삶을 예술가들이 재해석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그만큼 참 무서운 사람이다.
유시민씨에게 들은 얘기가 있는데 대통령 후보 시절에 유시민과 정태인씨가 경제 영역을 담당 했었다. 하루는 토론회를 준비하기 위해 수백장에 달하는 두꺼운 보고서를 아침 9시경에 전달하고 오후 5시쯤 만나 회의를 하는데 그 사이에 특정 논리에 대한 핵심을 파악해 '허점'을 지적하며 "이런 문제를 어떻게 보완 할 수 있다는 것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도 상당히 뛰어나신데 돌아가셔서 많이 아쉽지만 그래도 충분한 기간을 우리 역사를 위해 힘을 쏟아주셨다고 생각한다. 반면 노 대통령은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그 아쉬움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지만 그래도 그 분의 가치는 영원히 역사에 남아 살아 숨 쉴 것이기 때문에 이 아쉬움을 감당해 낼 수 있다
문성근은 여러모로 '평범'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배우로서 가장 유명한 그이지만 대다수 배우들과는 달리 그는 명문대에서 무역학을 전공해 대기업에서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10년 가까이 하던 중 뒤늦게 인생의 '꿈'을 찾아 '연기판'에 뛰어들었다.
"운이 좋아서"라고 한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후 배우로서 승승장구를 이어갔고 그 정점은 < 그것이 알고 싶다 > 의 진행자가 되면서 찾아왔다고 한다(2011년 3월 19일 오마이뉴스 기사 "대학생들 맨 정신으로 노래방 자주 가라" 참조).
'국민 배우'로 불릴 만큼 대중들의 지지를 받으며 살아가던 그의 삶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스크린 쿼터' 사태가 발생하면서부터다. 스크린 쿼터를 지키기 위해 2002년 대선 때 '노사모' 활동을 통해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지지에 나섰고, 당선 이후에는 "한몫 챙겼다"는 오해를 받을까 연기 활동도 미루고 물밑에서 지냈다.
정권이 바뀌고 그동안 못 했던 '연기'를 재개하던 그는 돌연 2010년 '국민의 명령'의 대표로 "야권통합은 국민의 명령"이라는 메시지를 한국의 야당들에 전달하고 있다. 이런 그를사람들이 좋게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몇 달 전 한 트위터리안 그에게 "연기자면 연기나 할 것이지 왜 그렇게 나서는 것이냐"고 힐난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국민의 명령 '수행자'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문성근.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지난 20일 국민의 명령 사무실에서 만나 나눈 많은 이야기를 2회로 나누어 싣는다. 1부에서는 문성근의 과거 삶을 돌아보며 현재의 문성근의 뿌리를 찾아보았고, 2부에서는 현재 국민의 명령 대표 문성근에게 정치, 사회적 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문성근의 인생을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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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서 굉장히 자유롭게 놔두셨다. 네 삶은 네가 스스로 개척하라는 식으로 하셔서 덕분에 철없이 놀았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식화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서강대 무역학과를 진학하게 된 것은, 대학입시 시험이 끝나고 당시 '진학'이라는 잡지에 나온 시험 점수표 때문이다. 내 점수로 진학이 가능했다. 그래서 그곳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입학 후 금방 큰 후회에 빠졌다. 재미가 없고 내 적성에 맞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요즘 우리 교육이 '남을 누르고 올라가는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10대들이 때때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할지 생각해보고 스스로 정리하면서 살면 인생의 시행착오가 줄어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서 나의 꿈이 무엇인지 확인하면 힘들더라도 쉽게 포기하지 말고 지켜나가고 키워나갔으면 좋겠다."
- 부모님이 자유분방하게 키워주셨기 때문에 지금의 자유로운 '문성근'이 존재하는 건 아닌지?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덕분에 자유로운 상상을 할 수 있도록 한 근원이 되었을 수는 있다. 지금 '국민의 명령'을 통해 길거리 '민란'을 하는 것도 내가 '배우'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생각도 든다. 직업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주된 작업이기 때문에 국가 체제, 정당 등을 이리 저리 뒤집어 생각해 볼 수 있었고 '기존의 정당 체제에서 왜 벗어날 수 없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 아무래도 대한민국에서 결코 평범하지 않은 아버지를 두고 자라면서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을 텐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꼽는다면 무엇이 있는지 듣고 싶다.
"대학교 2학년 때 연극을 했는데 어느날 술 자리가 있어서 막차를 타고 집에 들어갔다. 문제는 내가 술이 약해서 필름이 끊어지는 타입인데 다음 날 일어나니 누나가 "어제 너 집 앞에 쓰러져 자고 있는 것을 아버지가 업고 들어오셨다"고 하더라. 아침 밥상에서 아버지는 이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셨고 나도 그랬다. 또 기억에 남는 건 83~84년쯤 아버지께 "고문당한 적 없으시냐?"고 여쭈었다. 그랬더니 "한 번도 없다"고 하시더라. "고문 위협도 받아 본 적 없으시냐?"고 하니까 "물론 있지" 하셨다.
그 내용을 들어보니 취조에 협조하지 않자 지하의 고문실을 보여주며 조사관이 "협조하지 않으면 여기서 애들과(고문담당자) 며칠 지내셔야 됩니다"라고 했고 아버지는 "그래라"고 하셨다. 만약 고문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낀 기색이 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몰랐겠지만 그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 그러라고 하는 자세를 보고 조사관이 "올라가자(위층의 조사실로)"고 했단다. 1, 2분의 짧은 이야기였는데 이때 얘기를 들으면서 머릿속에 상상으로 그렸던 이미지가 머릿속에 깊이 박혀있다."
- 아버지의 '일'로 인해 고통 받거나 힘들어서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었는지.
"전혀 없었다. 원망이나 이런 것은 있을 수 없고 당신께서 당신의 삶을 온전히 던져 일을 하시는 것이고 내가 워낙에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계셨기에 내가 도와드리지 못해 늘 죄송했을 뿐이고 원망해 본 적은 조금도 없다. 그럼에도 가족들이 고통을 겪는 일이 적지 않긴 했다. 가령 아예 여권이 발급되지 않았고 이것이 배우할 때인 6공화국에서도 방송금지와 같은 형태로 이어졌다. 하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런 수준이라서 그런 것을 어쩌겠나. 김미화, 김제동과 같이 특정 정파의 이익에 맞지 않다고 '생업'을 끊으려는 시도는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권리'를 다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아서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들이 원망스러운 것이지, 아버지가 원망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 '아버지'를 문 목사라고 부르는 것은 '문성근의 아버지'의 차원을 넘어서 대한민국의 역사에 환원하겠다는 의지의 투영인가 ?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문 목사는 자기희생을 감수하고 활동하시던 분들과 동지였고 많은 사람들이 '문목(문 목사)'이라고 부르고 기억하신다. 또한 역사 속의 한 인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문 목사'라고 언급하는 것이 대화하기 더 편하기도 하다."
- 대학에 다닐 때가 시대적으로 '권위적'이었고 이에 항거하고자 하는 대학생들이 많았는데 어땠나 대학생 문성근은?
"내가 72학번인데 이때가 유신 때다. 이때는 '플래카드'를 꺼내려고 하면 잡아갔고 잡혀가면서 비명 몇 번 지르는 정도였다고 말해도 될 정도다. 나의 경우는 민주화 운동에 '전혀'라고 이야기해도 될 정도로 참여한 것이 없다. 아버지의 삶을 보고 내가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피했었다. 대신 구속된 사람의 가족으로 구속자를 위한 활동은 조금 했다.
1980년 '내란 음모 사건' 때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전원이 구속 상태였고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사형'이 언도된 상황이었다. 이때 구속자 당 두 명이 들어가서 재판을 참관할 수 있었는데 이때 기록할 수 있는 도구는 어떤 것도 지참할 수 없었다. 참관을 하고 나와서 그 내용을 문서로 기록하고 밖에 전달하는 일을 내가 했고 구속자 가족의 의견을 도합해서 '성명서'를 만들어 전달하는 일종의 '대변인' 역할을 담당했다.
또 89년 '문익환 목사 방북' 때는 한겨레를 제외한 모든 신문에서 문 목사를 맹비난하고 있었고 문 목사를 변호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위해 문 목사의 방북 성과와 목적,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을 통해 약속된 내용 등을 정리하고 전달하는 일을 했다. 이런 일들 외에는 하지 않았고 2001년 '스크린 쿼터 사태'에 영화계가 공동 대응할 때 비로소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 20년 혹은 30년 전의 과거 문성근이 현재 문성근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 것 같나?
"(한참을 뜸들인 후) 뭐… 그렇게 즐겁게 보지는 못 할 거다. '어쩌다가 저 인간 저러고 살지?' 이런 생각 할 거다. 우리 사회의 역사와 내 인생의 흐름이 총체적으로 영향을 미쳐 지금의 내 모습과 활동이 있는 것이니까 안타깝지 않을까 싶다. 이는 단순히 내 인생뿐만 아니라 우리의 역사가 더 원만하게 진행되어 왔다면 달라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측면에서 안타까울 것이다."
배우, 스크린 쿼터 그리고 노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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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당시는 취업하기 위해 지원서를 내면 10군데 20군데에 합격하던 시절이니까 지금하고는 비교하기 어렵다. 문 목사는 어렸을 때 일제치하에서 '독립'을 꿈꾸며 자라오셨기 때문에 예술적인 '감수성'이 풍부한 분이었다. 또 형들도 대학에서 '연극'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대학가면 연극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대기업에서 일을 하면서 지내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죽어가고 있다'고 느껴졌다. 절벽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느낌이랄까 ? 그래서 내가 살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느꼈다. 자금이 충분해 사업을 하거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내가 몰두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연극'이었다. 현실적인 요인과 감성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연기'를 선택한 것이다."
- 배우 활동하면서는 사회적 현안에 대해 언급하는 일에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문익환 목사와는 다르게 살겠다는 의지의 투영이었나?
"아니 아니다. 다르게 살아야겠다는 의지는 아니고 아버지는 내가 접근할 수 없는 곳에 계셨던 분이기에 나는 나대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 목사는 만주의 '명동촌'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민족 공동체'를 위해서 일하게끔 훈련이 된 반면 나는 자유롭게 자라왔고 어려서부터 '죽음'을 각오한 아버지의 활동을 보면서 경지가 다르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피해왔다고 볼 수 있다."
- 침묵을 깨뜨리고 나오게 한 사건이 '스크린 쿼터' 문제였다고 알고 있다. 당시 어떤 각오와 인식이었는지?
"당시 영화계가 스크린 쿼터 문제에 대응하는 모습이 마치 '앵벌이'하는 듯했다. '문화는 약하니까 지켜주세요'라는 식으로 어떤 논리나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에 몹시 답답하고 화가 났다. 그래서 정당하게 주장하자는 생각이었고 이때 '무역과'에서 전공한 것이 유일하게 빛을 보게 되었는데 '스크린 쿼터'는 '독과점 규제 장치'라는 내용의 글을 잡지에 싣게 되었다. 경제의 논리로 항변을 한 것이고 이것이 당시 많은 효과가 있었다. 이 때부터 얽혀들었다(웃음)."
-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가? 아니면 노무현이라는 '사람'에 매력을 느끼고 정치적 이념에 동의하였기 때문인가?
"스크린 쿼터와 관련된 것은 전혀 아니다. 당시 20명 가량이 매일 모여 대책회의를 했는데 회의가 끝나고 나, 명계남, 이창동 등 4명이 택시를 타고 집에 가곤 했다. 한날은 'DJ정부에서는 스크린 쿼터가 지켜져 가는 분위긴데 다음 정권에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4명이 모두 '노무현'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만큼 이전의 인식이 그러했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게 된 것은 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달성되고 김대중, 김영삼 양김이 분열하는 일을 막지 못 했던 문 목사의 책임을 옮겨 지기 위해서였다.
문익환 목사는 일생에 '논쟁' 거리가 없었는데 딱 하나 '양김의 분열'을 막지 못한 것이 유일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하면 87년의 분열을 극복하겠다고 했기에 문 목사는 안 계시지만 국민께 내가 대신 또 한 번 사죄하겠다는 의지로 노 대통령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노 대통령이 당선되더라도 나는 어떠한 혜택도 받지 않고 나의 본업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 고 노무현 대통령의 가치가 집약된 '민주주의 2.0'과 같이 정치, 경제, 사회적인 입장에도 동의를 했던 것인가?
"오히려 당시에는 참여정부가 당선 이후 어떤 일을 총체적으로 벌여 나갈 것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다만 당시 사회가 정치적으로 철저히 '지역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일을 하든지 동의하는 현상이 만연해 정당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이 문제만 해결되면 다른 일들은 '토론'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니까 여기에 최우선의 가치와 동의를 두었다. 오히려 노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후 참여정부의 가치에 대해 다시 공부하게 되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퇴임 이후 여러 일 중 '서거' 당시 어떠셨는지 또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추억하고 있나.
"사실 노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뵌 것이 2008년 가을이었기 때문에 7~8개월 정도 가까운 곳에서 뵙지 못했다. 왜냐하면 참여정부 출범 이후에 내가 내 본업 활동을 통해 매체에 노출 되는 것이 '역차별' 적으로 참여정부에 손해가 될 것이라고 판단해서 '칩거' 비슷하게 지냈고 정권 교체 이후에는 다시 나의 본업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찾아뵙거나 하지 않았다.
서거 하시고 나서 '봉하'에 내려가 마을 방송을 담당하며 대통령의 '유서'를 읽었는데 이 유서를 나 스스로의 의미로 해석하는데 1년 반이 걸렸다. 노무현 대통령의 삶 전체에는 '신화의 비극적 요소'가 모두 깔려있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해 독특한 캐릭터가 형성되었고 끝없이 무모한 도전을 하다가 스스로의 허물을 안고 몸을 던짐으로 해서 민주진영 전체에 역사 발전을 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래서 그의 삶을 예술가들이 재해석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그만큼 참 무서운 사람이다.
유시민씨에게 들은 얘기가 있는데 대통령 후보 시절에 유시민과 정태인씨가 경제 영역을 담당 했었다. 하루는 토론회를 준비하기 위해 수백장에 달하는 두꺼운 보고서를 아침 9시경에 전달하고 오후 5시쯤 만나 회의를 하는데 그 사이에 특정 논리에 대한 핵심을 파악해 '허점'을 지적하며 "이런 문제를 어떻게 보완 할 수 있다는 것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도 상당히 뛰어나신데 돌아가셔서 많이 아쉽지만 그래도 충분한 기간을 우리 역사를 위해 힘을 쏟아주셨다고 생각한다. 반면 노 대통령은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그 아쉬움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지만 그래도 그 분의 가치는 영원히 역사에 남아 살아 숨 쉴 것이기 때문에 이 아쉬움을 감당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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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조져준다님의 댓글
조져준다 작성일
누군가 문성근을 웃기는 놈이라고 비판하는 일부 층도 있지만
그는 누구보다 역사의식이 투철하고 온전한 시민의식을 가진 사람이다.
생각같아서는 그를 비웃는 사람들을 모두 잡아다 패대기를 치고 싶지만
그가 극구 말리고 있어서 실행을 못하고 있다.
ㅎ님의 댓글
ㅎ 작성일
생각같아서는 그를 비웃는 사람들을 모두 잡아다 패대기를 치고 싶지만
그가 극구 말리고 있어서 실행을 못하고 있다.//
필요할때 저를 부르세요
저......한팔뚝합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