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라남의 열풍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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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편
22
강충현은 밤 11시가 되도록 방안에 누워있었다. 몸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의사의 강한 요구로 해서 박준이네 집에 조상도 가지 못하고 이불속에서 뒤척거리고있는데 기업소방송차가 확성기소리를 울리며 집옆으로 지나갔다.
당위원회 선전비서의 눈물머금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난의 행군〉의 전투장에서 장렬하게 희생된 박순진동무!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의 크나큰 정치적신임에 의하여 박순진동무가 사회주의애국희생증과 함께 조선로동당원의 영예를 받아안게 되였습니다. 화선입당을 하게 되였습니다.》
강충현은 자리를 차고 일어나 창문곁으로 다가갔다. 길옆 버드나무밑에 세워놓은 방송차의 뒤꼬리가 보이였다.
선전비서는 박순진의 화선입당에 대한 소식을 서너번이나 반복하여 전하고나서 래일아침부터 기업소에서는 집단출근을 하기로 결정하였으므로 아침 7시 30분까지 외래자숙소뒤 공지에 모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출근한 종업원들은 래일부터 매일 점심식사를 가족들과 함께 기업소 구내식당에서 하게 된다는것과 《HM기》를 비롯한 중요설비제작에 동원된 누구누구 25명은 료양소에서 치료를 받으며 영양제식사를 하게 된다는 소식을 알리였다. 영양제식사를 하는 명단에는 이날 뇌진탕을 받은 강충현의 이름도 들어있었다.
강충현은 도무지 갈래판을 알수 없었다. 그가 고개를 기웃거리고있는데 방송차에서 울리던 선전비서의 목소리가 멀리로 사라져갔다. 방송차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것이다.
(참, 모를 일이다.)
강충현이 풀수 없는 의문은 쌀을 한톨도 가지고있지 못하는 기업소가 모든 출근자와 그들의 가족에게까지 어떻게 점심을 먹일수 있는가 하는것이였다.
한참 지나 박준이네 집에 조상을 갔던 안해가 돌아왔다.
《머리가 좀 어때요?》
《괜찮아, 한데 방송차가 돌면서 래일아침부터 집단출근을 한다, 점심을 대접한다 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요?》
《아직 당신은 모르겠군요. 오늘 책임비서동지가 위대한 장군님을 만나뵈웠어요.》
안해는 주혁민이 김정일동지를 만나뵈온 사연을 이야기하고 《책임비서동지가 그 즉시 가까운 어느 료양소에 찾아가 기업소 당위원회 집행위원들을 전화로 불러 전화모임을 했대요. 그리고 ○○합영회사와도 파석기 3대를 만들어주기로 계약을 맺아서 회사에서 직접 쌀 수십톤과 부식물들을 가지고 라남으로 온대요. 차가 래일 점심전으로 도착한다는군요. 파석기를 수출하면 거기서 얻는 돈이 대단하다지 않아요.》하고 기뻐하면서 세상에 우리 장군님처럼 인정이 많은분이 어디에 있겠는가고 눈물을 훔치였다.
강충현은 어쩐지 그 모든것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도 뜻밖이고 돌변적이여서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생각되였다.
그 이튿날 려명이 깃들무렵이였다.
밤을 꼬박 새운 세사람-책임비서, 지배인, 기사장이 당위원회 사무실에서 아침행사를 토론하고있었다.
책임비서가 눈을 슴벅이며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우리는 집단출근을 하고 종업원들에게 점심 한끼를 공급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여기에 큰 의의를 부여하여야 하겠습니다. 오늘 첫날만은 지배인동무가 좀 시간이 가더라도 정문앞에 서서 출근하는 매 사람들에게 식표를 손에 쥐여주면서 고무적인 말을 한마디씩 해주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나는 그것이 물질적교양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일반식당에서 내주는 그런 단순한 식표, 식권이 아니라는것을 인식시켜야 할것입니다.》
주혁민은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하고 손끝으로 눈굽을 찍었다. 김정일동지의 다심한 사랑을 생각하니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책임비서동지!》
기사장이 일어났다. 《제가 집단출근대렬 맨앞에서 붉은 기발을 들고 나가겠습니다. 저도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식표를 받겠습니다.》
《참 잘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기사장이 선두기러기처럼 붉은 기발을 들고 출근대렬을 이끌고 나가면 사람들이 감동할것입니다. 나는 지배인동무옆에 서있겠소.》
주혁민은 마음이 흡족하여 지배인을 돌아보았다.
그로부터 몇시간후 기업소주변에서 북소리, 나팔소리가 울리고 집단출근을 예고하는 녀성방송원의 힘찬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7시30분, 드디여 출근대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멈춰서서 물결처럼 흘러가는 긴 출근대렬을 희한하게 바라보았다.
북소리, 나팔소리가 울리는 속에서 녀방송원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마치도 선두기러기처럼 라남탄광기계련합기업소의 집단출근대렬을 인솔하는 최강철기사장동지! 그 뒤에서 4렬 횡대를 지어 발걸음도 씩씩히 걸어가는 〈HM기〉제작단 성원들인 윤현덕, 탁석준, 고정순, 김경복동지들!
1990년 9월 1일 어버이수령님을 우리 기업소에 모셨던 그날에 다진 맹세 헛되이 하지 말자고 끓는 가슴을 안고 피와 땀을 바친 동지들! 50여번의 실패의 언덕을 넘으면서도 락심과 절망을 모르고 백열전을 벌려온 우리의 사랑하는 제작단동지들! 이제 또 실패의 벼랑이 앞을 막아도 주저앉지 마시라. 〈HM기〉여러대를 정렬해놓고 위대한 장군님께 승리의 보고를 드릴 그날은 기어이 오고야 말것이다.》
마침내 선두대렬이 정문앞에 이르렀다.
지배인이 경리과의 한 녀인이 들고온 까만 나무함에서 길이와 너비가 4~5센치메터 되나마나한 흰 종이쪽지 한장을 꺼내였다. 식표였다.
최강철기사장이 식표를 받으려 지배인앞으로 정보행진을 하듯 힘있게 걸어갔다.
기동선동대원들의 나팔소리가 일시에 끊어졌다. 식표를 주고받는 지배인과 기사장사이에 무슨 말이 오고가는가를 들어보려고 모든 사람들이 시선을 집중한채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지배인옆에 서있는 주혁민이도 그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을지 궁금하였다.
그러나 지배인은 기사장의 손에 식표를 쥐여주었을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서있었다. 기사장도 입을 굳게 다물고 서서 지배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지켜보고만있었다.
침묵속에서 눈과 눈이 부딪쳐 불꽃을 일으키는듯 했다. 그들은 눈으로 뜨거운 심장의 대화를 하고있었다.
주혁민은 웬일인지 가슴이 울렁거리였다. 그 침묵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우렁찬 웨침이였고 전체 종업원들을 전투에로 부르는 뜨거운 호소였다.
거의 1분동안이나 말없이 서있던 기사장이 불현듯 식표를 쥔 손을 높이 쳐들고 출근대렬을 향해 돌아섰다. 마치 《나를 따라 앞으로!》하고 웨치듯이. 그러자 둥, 둥, 둥 북소리가 울리였다.
기사장이 물러서자 뒤따라 윤현덕이 지배인앞에 걸어나와 한장의 식표를 두손으로 무겁게 받아들었다. 40여년 세월 공업용기름에 절고 쇠물에 데고 용광로의 불길에 끄슬린 크고 꺼실꺼실한 손이였다.
주혁민은 저손으로 얼마나 많은 강철, 주철, 특수합금강을 만들어내고 기계를 개발했던가 생각하였다.
《실장동무, 부디 건강하시오. 쓰러지면 안됩니다.》
지배인이 윤현덕의 손을 움켜쥐며 하는 말이였다.
《순진이 장례를 치르군 프레스부속도 얻어오고 설태섭이녀석을 데려오겠습니다.》
어쩌면 동문서답하는것 같은 윤현덕이였다. 허나 그 말이 주혁민의 가슴을 크게 울리였다.
또다시 북소리… 다음에는 탁석준이 차례가 되였다.
《석준동무! 기어이 〈HM기〉를… 알지?》
《지배인동지! 100프로 우리 식의 〈HM기〉를 개발해서 위대한 장군님께 기쁨을 드리겠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지배인이 속도를 높이였다. 그는 식표를 받는 종업원들의 손을 한번씩 힘껏 쥐여주고 그저 외마디로 《일 잘합시다.》혹은 《힘을 냅시다.》하고 떠나보내군 하였다. 그러던 지배인이 별안간 굳어져 아무 말도 못하고 서있었다. 박순진의 아버지 박준이 안경을 번뜩이며 불쑥 지배인앞에 나선것이다. 오성오지배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식표를 쥔 지배인의 손은 떨리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한장의 식표는 박준의 외아들 박순진의 죽음과 깊이 련결되여있는것이 아닌가.
《박준동무!》
지배인은 드디여 입을 열었다. 《나는 지난기간 동무한테 죄스러운 일을 많이 했소. 그런데 어제 또 내가 하나밖에 없는 동무의 귀한 아들을…》
박준은 천천히 안경을 벗어들더니 지배인을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10년동안 지배인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말도 하지 않은 박준, 이제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것인가?
사람들이 마음 조이고있을 때 박준은 긴 팔을 크게 벌려 지배인의 작은 몸을 꽉 그러안았다.
《오성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요. 깨끗한 인간이요. 나를 용서하시오.》
두사람은 굳게 포옹한채 오래도록 서로 뜨겁게 얼굴을 비비며 서있었다. 10년동안 박준의 가슴에 얼어붙어있던 《랭전》의 얼음이 비로소 봄눈처럼 녹아버렸다. 시련속에서 맺어진 우정은 진짜 우정이다. 그것이 동지애이다.
×
첫 집단출근을 한 그날 출근률은 98프로였다. 생산률도 급격히 올라갔다. 시련의 령마루를 넘어선듯 그날부터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주물, 주강직장에서 목말라 하던 형석광과 주물용모래를 라남근처에서 찾아내여 온 기업소가 환성을 올리게 된것도 그무렵이였다. 더구나 놀라운 일은 라남주변의 형석광과 모래가 조선의 제일등품이라고 하던 황산의 형석광이나 광평의 모래에 못지 않은것이였다.
주혁민책임비서가 라남주변에서 따온 형석광시료를 사무실에 가져다놓고 기뻐하고있을 때였다. 평남도의 어느 군병원 의사라고 하는 낯선 젊은이가 찾아와서 흰 봉투 하나를 내놓았다.
윤현덕실장이 보낸 편지라고 하였다. 윤현덕은 며칠전에 설태섭을 데리려 평성쪽으로 갔었다.
무슨 편지를 낯선 의사한테 보냈는가?
주혁민은 이상한 예감을 느끼며 서둘러 속지를 꺼냈다. 전혀 윤현덕의 글씨같지 않은 삐뚤삐뚤한 검은 글자들이 눈에 밟히였다.
책임비서동지!
림종의 침상에서 마지막힘을 다 모아 몇자 적습니다. 저는《HM기》를 개발하기전에는 죽을 권리도 없는 당원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의 맥박은 점점 떠지고있고 생명의 열이 식어가고있습니다. 중대한 혁명과업을 다 수행하지 못하고 가는 이 불민한 당원을 용서해주십시오. 허나 죽어서도 저의 넋은 장군님의 품을 떠나지 않을것입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고 인생은 이미 끝났지만 저는 웬일인지 지금 더욱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인생이 가장 값있는 인생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의 인생은 이미 끝났지만 설태섭은 이제 시작이 아닙니까. 유감스럽게도 저는 설태섭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미 곽경두와 함께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부탁컨대 우리 설태섭이가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부디 보살펴주십시오. 설계조에 홀로 남게 된 탁석준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픕니다.그를 사랑해주십시오. 그는 기어이 장군님께서 바라시는대로, 그이의 뜻대로 《HM기》를 개발하고야 말것입니다. 저는 탁석준을 자신처럼 믿습니다.
자력갱생! 우리 식! 장군님께서 늘 강조하신 말씀이 우리 라남의 《HM기》에 금문자로 깊이 새겨져야 하며 또 새겨지게 되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저는 병원일군들에게 저의 몸을 한줌 재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제 책임비서동지가 그 재를 가지고 가서 수봉작업장의 뒤산에 묻어주시오. 《HM기》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싶습니다.
책임비서동지, 슬퍼하지 마십시오. 누구를 물론하고 육체적생명은 끝이 있는것이 아닙니까. 중요한것은 죽은 모습이 추하지 말아야 하는것입니다.
아, 좀 더 일찌기 《HM기》를 개발했더라면 장군님을 뵈웠을텐데… 21세기!… 《HM기》!… 할 말은 끝없이 많지만 이제는 힘이 진해서… 안녕히!…
윤현덕의 유서를 다 읽은 주혁민은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젊은 의사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의사는 윤현덕의 유서를 가져오게 된 전말이야기를 하였다.
윤현덕의 려행은 처음부터 간고하였다. 그는 설태섭을 데리러가는 길에 650톤프레스부속을 얻어보려고 먼저 룡성기계공장에 들렸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헛물을 켠 그는 다시 렬차에 올라 설태섭을 만나려 과학원으로 갔다. 그런데 B광물연구소는 과학원에 있는것이 아니라 거기서 100여리 떨어진 농촌읍지구에 있다고 하였다. 그쪽으로 가는 뻐스가 잘 다니지 않아 그는 강냉이변성가루로 대충 요기하고 100리길을 밤새 걸었다. 이렇게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하니 설태섭이 벌써 며칠전에 수속을 다 끝내고 외국으로 갔다는것이였다. 가뜩이나 병약한 몸으로 수천리 철도려행을 하고 100리나 되는 농촌길을 걸어 지칠대로 지쳤는데 또다시 헛물을 켜게 되니 당장 쓰러질것 같았다. 그는 설태섭이가 인차 외국출장을 가게 된다는 말을 듣고 길을 떠났지만 모든 수속이 그렇게까지 빨리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게다가 그는 B광물연구소에 와서 또 하나 불쾌한 소식을 듣게 되였다. 서정후부부장이 라남의 《HM기》제작단사업에 대한 기술검열을 해달라는 어느 일군의 제기를 받고 부당위원회에 알리고 기술검열소조를 조직하였다는것이였다.
참을수 없는 울분에 윤현덕의 심장이 쥐여비틀리우듯 하였다. 그때부터 심장이 아파나고 쓰러질듯 기력이 진해졌으나 워낙 고정한 윤현덕은 라남으로 빨리 돌아가야되겠다는 생각에 자동차를 얻어탈 마련도 하지 않고 다시 기차를 타려 백리길을 되짚어가다가 실신하여 쓰러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실어갔으나 열시간만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윤현덕의 사망원인을 심근경색으로 보았다.
윤현덕은 사망직전 병원침대에서 최후의 힘을 가다듬어 주혁민책임비서에게 유서를 썼다.
《윤현덕동지의 부탁대로 화장했습니다. 유서에 책임비서동지가 와서 현덕동지의 시신(재)을 가져가도록 씌여있어서… 저는 그저 편지만 가지고왔습니다. 현덕동지를 살려내지 못한 저희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젊은 의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였다.
윤현덕의 편지봉투를 손에 쥔채 멍청히 서있던 주혁민은 그제야 오열을 터뜨리였다.
《윤현덕이! 동무도 가버리는가! 이 책임비서가 보기 싫어 다 달아나는가? 너무하오. 너무해. 엊그제 순진이가 죽었는데 내 어떻게 또 이 불상사를 장군님께 보고드린단 말이요. 동무를 금이야 옥이야 하시던 장군님께… 동무의 입당보증을 서주신 장군님께…》
주혁민은 그날로 지배인과 함께 과학원쪽으로 떠났다. 그는 렬차안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중요한것은 죽은 모습이 추하지 말아야 하는것입니다.》라고 쓴 유서의 한대목을 놓고 깊이 생각해보았다. 참으로 사람마다 세상에 태여나는 모습은 꼭 같지만 죽는 모습은 각이한것이다.
(그렇다. 그 모습이 숭고하여야 한다.)
그 시각 서정후는 라남을 향해 동해연선의 철길을 달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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