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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3-1. 윁남, 40년만에 밝혀진 통킹만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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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455회 작성일 22-08-28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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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고 류태영 박사

윁남, 40년만에 밝혀진 통킹만사건

 

윁남의 지나온 력사는 그자체가 눈물의 력사이다.

윁남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나라들의 지배와 서유럽침략자들의 식민지통치를 받아왔으며 5년간 일본의 강점밑에 놓이기도 하였다.

미국은 바로 이러한 비애의 력사를 가지고있는 윁남에 참혹한 전쟁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윁남에 대하여 오판하였다.

미국은 윁남의 력사와 문화, 이 나라의 민중과 정치지도자들에 대하여 너무나 몰랐고 최신무장장비들만 있으면 전쟁에서 손쉽게 이길수 있으리라고만 생각하였다.

결국 미국은 물리적힘의 한계와 윁남민중들의 서방에 대한 불신과 증오심, 그들의 단련된 정치적의식과 전투적위력에 대하여 파악하지 못하였던것이다.

당시 윁남전쟁에 관한 의사결정에 참여했던 미국의 케네디, 죤슨행정부는 윁남이 미국의 원칙과 전통에 무조건 복종하여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하지만 윁남민중은 결사의 각오를 가지고 미국을 반대하는 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이 싸워 진것은 당연한 귀결이였다.

그런데도 오늘 미국의 네오콘은 《세계 모든 사람들이 미국처럼 되고싶어한다.》라고 판단하는 환상적사고방식을 고집하고있다.

 

윁남의 간추린 력사

 

조선반도의 약 1. 5배 크기의 윁남은 인구가 대략 8 700만명정도이며 그중 70%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있다. 종족으로는 윁남족이 약 86%를 차지하고있으며 화교 100만명을 비롯하여 60여개의 소수민족들이 존재하고있다.

건국설화에 의하면 윁남은 신농씨의 3대후손에 뿌리를 두고있는데 오늘 윁남인들은 3대후손중에서 훙브엉을 B.C. 30세기경에 윁남국가를 세운 건국의 아버지로 여기고있다.

오랜 기간 여러 주변나라들의 침략과 맞서 싸우던 윁남은 쩐왕조시기에 이르러 나라의 안정을 이루게 되였으며 불교가 번성하여 윁남의 국교로 되였다.

윁남의 건국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열어놓았던 레로이왕조가 16세기에 이르러 쇠퇴하자 윁남은 북의 칭씨파와 남의 우엔씨파로 분렬되였다.

그리하여 윁남에서는 북과 남의 세력들사이의 분쟁이 계속 일어나게 되였다.

그러던 18세기말에 남쪽의 우엔씨파는 프랑스를 등에 업고 나라를 세웠으며 이를 느구엔왕조라고 불렀다.

그런데 느구엔왕조의 제2대왕인 민망왕의 통치기간 윁남에 대한 식민지통치의 기반을 닦기 위해 활동하던 프랑스인선교사가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였다.

이렇게 되자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1858년에 다낭을 공격하였으며 1885년에는 윁남전역을 프랑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하여 윁남에서는 프랑스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민중의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되였으며 이 운동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였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직전 빠리에서는 윁남공산주의운동이 태동하고있었다.

이 시기 윁남민중의 지도자 호지명은 빠리에서 활동하고있었다.

1930년에 호지명이 주도하는 윁남공산당이 창설된 후 이 조직은 각파의 정치세력을 규합하여 투쟁을 더욱 맹렬히 전개하였다.

그러던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윁남에 침입하자 프랑스는 윁남에 대한 식민지통치를 포기하고 물러갔다.

하지만 윁남민중은 호지명의 지도밑에 일본군을 대항하여 끝까지 싸웠다.

마침내 일본은 패전하고 제2차 세계대전도 끝나게 되였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일본군의 《무장해제》라는 구실로 윁남에 들어온 프랑스는 이를 윁남의 독립운동을 진압하고 프랑스의 윁남지배를 다시 시작하기 위한 계기로 삼았다.

프랑스는 윁남인 바오다이를 매수하여 사이공에 친프랑스괴뢰정권을 세우는 음모를 꾸몄다.

이에 대응하여 호지명은 1945년 9월 2일 북부윁남에 동남아시아에서 최초의 사회주의나라인 윁남민주공화국을 창건했다.

이로써 1945년이후 윁남에는 북과 남에 각각 서로 다른 성격의 정권이 서게 되였고 대결과 분쟁의 골이 깊어가게 되였으며 이는 불피코 전쟁을 가져왔다. 8년동안이나 진행된 이 전쟁은 본질에 있어서 반프랑스민족해방전쟁이였다.

 

반프랑스민족해방전쟁

 

호지명은 프랑스가 남부윁남을 강점하고 괴뢰정권을 세운데 대처하여 조직적이며 결사적인 투쟁방법을 강구해나섰다.

그러자 프랑스는 공산주의로부터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미명하에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미국은 프랑스에 막대한 군사적지원을 제공하였다.

남부윁남의 군대는 이렇게 제공된 무장장비들로 속속 무장을 갖추었다.

그러나 프랑스에 리용되고 미국의 지원을 받고있던 남부윁남군인들은 사실상 북부윁남군과 적극적으로 싸울 의지가 없었다. 뿐만아니라 남부윁남의 국민정서는 프랑스가 또다시 윁남을 강점한데 대하여 강한 반감을 가지고있었다.

그리하여 남부윁남은 겉으로는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상 윁남민주공화국의 영향력밑에 있는것과도 같은 특이한 상태로 되여가고있었다. 호지명의 지도력이 북부윁남과 남부윁남을 하나로 단결시키는데 성공하였던것이다.

위기를 느낀 프랑스는 북부윁남군을 공격하기 위한 특별작전을 세웠다.

프랑스군은 제대로 무기를 갖추지도 못한 호지명의 북부윁남군을 깔보고 일방적으로 전차를 앞세워 총공세를 가하면서 단시일내에 전쟁을 끝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북부윁남군은 윁남의 자연적인 지형지물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게릴라전으로 정규군의 위력이상으로 전투력을 과시하였다.

전선이 따로 없는 게릴라전에서 북부윁남군은 야음을 타 여기저기에서 공격함으로써 프랑스군을 정신없이 만들었으며 게릴라전이 끝없이 계속되는 쟝글속에서 프랑스군은 점점 헤여날수 없는 수렁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가게 되였다.

이렇게 되자 상대를 얕보던 프랑스군은 당황하게 되였다.

이로부터 프랑스군은 북부윁남군과 북부윁남전역을 초토화시키며 외부로부터의 보급을 차단하여 북부윁남군의 숨통을 차단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프랑스군은 드디여 대대적인 공수작전을 시작하였다. 1만 6천명의 프랑스군병사들이 락하산을 타고 착륙했을 때에는 북부윁남군이 어디론가 도망쳐 없어진것 같아서 마치도 전투는 이것으로 끝나는듯 했다.

프랑스군은 북부윁남의 덴벤푸를 요새로 삼고 그곳에 미국으로부터 받은 많은 전차들과 화포들을 공수하였다.

이런 형편에서 프랑스군사령관은 북부윁남군이 겁에 질려 숲속으로 다 도망쳤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안심하고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사태는 그의 작전계획이 완전히 빗나갔음을 보여주었다.

북부윁남군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였던것이다.

밤이 되자 곳곳에 분산되여있던 북부윁남군은 모두 집결하여 프랑스군이 요새로 만든 덴벤푸를 완전히 포위했다. 프랑스군이 순찰비행기 70대나 동원하여 감시했으나 북부윁남군은 달도 없는 밤에 자전거, 소, 말 등으로 탄약과 식량을 운반하면서 이동하였던것이다.

5만명의 북부윁남군이 집결하였을 때 비로소 죽은듯 고요하던 덴벤푸요새는 전장터로 돌변했다.

북부윁남군의 기습에 프랑스군의 방어진은 무너지고 덴벤푸요새는 프랑스군의 지옥으로 변하였다.

결국 1954년 5월 7일에 8년동안의 전쟁은 끝나고 프랑스군사령관 나바르는 북부윁남군사령관 보구엔 지압에게 항복을 선언하였다.

그해 7월 윁남은 제네바협정에 따라 남북으로 분렬되게 되였다.

 

윁남전쟁에 숨겨진 미국의 조작

 

프랑스가 떠나간 후 미국은 반공의 명분으로 재빠르게 윁남내정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결국 앞문으로 프랑스가 떠나간 후에 뒤문으로 미국이 들어온셈이였다.

이 시기 미국은 메카니즘이라는 반공히스테리를 앓고있었다. 미국의 군수산업체들은 윁남의 평화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미국은 남부윁남에 저들의 꼭두각시인 느고 딘 디엠정권을 조작하기 위한 흉계를 꾸미였다.

그리하여 남부윁남에서는 미국의 조장과 지원밑에 부정선거가 진행되였으며 친미적인 느고 딘 디엠정권이 들어서게 되였다.

그러나 디엠정권은 부패와 독재로 말미암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1963년에 디엠이 죽음으로써 종말을 고하였다.

그후 남부윁남에서 반정부적인 남부윁남민족해방전선이 남부윁남전역에 확장됨과 동시에 조직적인 반미투쟁이 곳곳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였다.

이에 당황한 미국은 윁남전체가 공산화되는것을 막기 위하여 윁남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사건을 조작하였다.

1964년 8월 4일 미국은 미리 짜놓은 계획에 따라 수십대의 비행기와 구축함 《매독스》호를 윁남민주공화국의 령해인 통킹만에 들여보내여 북부윁남의 연해지역에 함포사격과 기관총사격을 하게 하였다. 이에 북부윁남군이 대응해나서자 미국은 흑백을 뒤집어 북부윁남이 공해상에 있는 자기들의 함선을 공격하였다고 하면서 북부윁남에 대한 전쟁을 확대하였다. 미국은 북부윁남의 령토들을 로골적으로 폭격하기 시작하였으며 그후 하노이와 하이퐁일대에까지 폭격범위를 계단식으로 확대하였다.

이것이 바로 통킹만사건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 사건을 유엔안전보장리사회에 제소하는 기만극을 연출하여 진실을 가리우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은 미국이 윁남전쟁도발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순전히 조작한 사기극이였다는 사실이 《뉴욕 타임스》를 통하여 낱낱이 밝혀졌다.

미국방부가 작성한 윁남전쟁비밀보고서에 의하면 통킹만사건은 순전히 날조된 사건이였다. 윁남전쟁당시 국방장관이였던 로버트 맥나마라도 1995년에 《윁남전쟁은 자작극에 의하여 시작된 전쟁이였다.》라고 자백했다.

그리고보면 윁남전쟁은 허위보고에 근거한 선전포고에 의하여 시작되였고 1975년 4월에 막을 내리였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야만성을 만천하에 드러내놓았다.

오죽하였으면 서방의 언론들까지도 윁남전쟁기간 미군이 감행한 만행을 두고 살인전문부대의 노루사냥이였다고 표현하였겠는가.

대표적으로 보더라도 윁남전쟁기간 미군은 민간인사망자 200만명(추정)을 포함한 수많은 윁남민중을 살해하였고 600만명이나 되는 피난민을 발생시켰으며 무려 650만t이나 되는 폭탄을 퍼부었다.

전쟁기간 미군이 진행한 고엽제작전이 초래한 파국적후과는 오늘도 미국의 범죄적행동을 낱낱이 고발하고있다.

윁남전쟁때 미군은 밀림속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있는 사람들을 살해하기 위하여 비인도적이며 잔인한 방법으로 고엽제를 밀림지대에 대량살포하였다.

고엽제라고 하면 강한 독성을 나타내는 화학물질로서 사람이 일단 고엽제에 로출되는 경우 각종 암을 비롯한 치명적인 병에 걸리고 그 독성이 수십년까지 지속되여 후대에 가서도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된다.

미군은 바로 이러한 무서운 화학물질을 아무 거리낌없이 마구 살포하였던것이다.

그래서 윁남전쟁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고엽제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였으며 오늘도 그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고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전쟁터에 박정희군사《정권》은 수많은 청장년들을 미군의 대포밥으로 들이밀었다.

이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수치스러운 력사기록으로 남아있다.

 

어찌하여 남부윁남은 패망하고 북부윁남은 승리했나?

 

동남아시아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미국은 거대한 물자를 남부윁남에 들이밀었으나 윁남전쟁은 미국과 남부윁남의 패망으로 끝나고말았다.

윁남전쟁의 주역들중의 한 인물이였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1995년에 발간한 《윁남전의 비극과 교훈》이라는 책에서 패망의 전모를 고백했다.

이런 의미에서 맥나마라가 발간한 책 《윁남전의 비극과 교훈》의 요지를 알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요지는 대체로 이러하다.

첫째, 미국은 저들의 리익에 조금이라도 저촉되는 대상들을 무조건적으로 복종시키려는 오만성을 윁남에서 자행했다. 미국은 윁남민중들과 정치지도자들이 민주주의와 민족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애국심을 가지고있는데 대하여 너무도 무시하고 오판했다.

둘째, 미국은 세계적명사들, 학자들, 사상가들의 조언에 좀더 귀를 기울여야만 했었다. 그리고 미국은 윁남에 대하여 의사를 결정할때 세계적인 중량급인사들의 조언을 존중히 여기지 않았다.

셋째, 한 나라의 가장 근원적인 힘은 그 나라의 군사적강대함이 아니라 그 나라 국민의 단결력에 있는 법이거늘 미국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넷째, 미국만이 절대로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미국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나라들을 미국이 생각하는 이미지대로 만들수 있는 주권과 권리를 가지고있지 않다.

다섯째, 미국은 윁남에서의 대안적정책과 실패가 명확해졌을 때 정책을 변경할 필요성을 론의하고 분석하는데 있어서 오유를 범했다.

우에서 살펴본 맥나마라의 고백은 오늘 미국이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 부닥치고있는 사태와 매한가지라고 판단된다.

사실 이라크뿐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있는 분쟁들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오판과 오만때문인것이다.

그러면 북부윁남이 승리를 거둔 배경은 무엇이였는가?

첫째, 북부윁남은 태생적으로 윁남민족의 정통성을 보유하고있는 정권이다. 남부윁남정권은 외세가 세운 어용정권으로서 외세를 등에 업고 독재와 부패로 민중의 적이 되고있었다.

둘째, 북부윁남이 승리한 결정적요인은 호지명의 능숙한 지도력이였다. 남부윁남정권은 말로는 자유를 주장하고있었지만 쿠데타가 9번이나 발생한 불안정한 정권이였다. 미국이 개입하여 조작한 이 정권은 철저한 친미정권으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친미적독재와 부패로 일관되여있었다.

셋째, 남부윁남의 민중들은 낮에는 남부윁남군을 못 본척 하다가 밤에는 북부윁남군을 위하여 열성적으로 봉사했다. 낮에는 쟝글속에 숨어있다가 밤에는 나와서 북부윁남군을 위하여 활동했다. 그러니 북부윁남군의 승리는 당연했다.

넷째, 윁남에는 쟝글과 산악지대가 많다. 북부윁남군과 남부윁남의 애국세력은 이 자연지리적조건을 리용한 땅굴작전으로 유명하다. 그들이 리용한 땅굴은 윁남전역에 거미줄처럼 퍼져있었는데 1만 7천명을 수용할수 있는 지하공간과 지하 15m깊이의 땅굴들이 수천km나 되였다고 한다. 윁남전쟁기간 수많은 미군이 투입되고 수백만t에 달하는 폭탄이 투하되였지만 북부윁남군이 끄떡없이 최후승리를 거둔것은 이들의 정신력과 윁남의 지형지물에 적합한 땅굴때문이였다고 분석된다.

다섯째, 북부윁남은 전쟁기간 어디까지나 윁남민중의 힘에 의거하였다.

윁남전쟁에서 전투 하나하나만을 따지고 무기만을 가지고 평가한다면 미국이 우세했다고 말할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미국이 북부윁남앞에 무릎을 꿇고말았다. 결국 북부윁남은 자기 민중의 힘에 의거한탓에 미국을 이길수 있었던것이다.

미국은 윁남전쟁에서 당한 패배감과 좌절감에 오래동안 빠져있었다. 그 좌절감을 회복하려고 지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전쟁에 뛰여들어 몸부림치고있다면 그것도 애당초 잘못된 계획이다.

지금 국제사회는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을 침략행위로 보면서 이 전쟁에서 미국이 결코 승리할수 없다고 보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미국은 시대착오적인 패권주의적사고방식의 깊은 수렁에서 헤매고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인들에게 묻고싶다. 아직도 미국의 군사력만을 과시하면서 이것이 다른 나라에 미국의 가치를 심어주는데 있어서 유효하다고 하는 오만한 생각에 사로잡혀있는가.

미국이 말하는 《자유》는 본질적이며 보편적인 자유라고 말할수 없다. 그것은 오직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자유일뿐이고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오늘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이 꼭 윁남전쟁을 그대로 닮아가고있으니 조소를 받지 않을수가 없는것이다.

윁남전쟁이 끝난지도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오늘도 윁남은 사람들로 하여금 패권주의적인 미국의 어제와 오늘, 래일을 가늠케 하는 의미있는 곳으로 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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