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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라남의 열풍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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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579회 작성일 22-08-27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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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편

16

수봉작업장에서 돌아온 설태섭은 저녁그림자들이 길게 드리운 공장마당을 맥없이 걸어갔다.

이날은 44번째 실패를 하였다. 실패원인에 대한 이날의 기술협의회는 그 어느때보다도 심각하고 그 규모도 컸다. 《HM기》제작단 전원과 설계사업소 소장, 기술부소장을 비롯한 중견설계원들, 공장대학 기계공학과 교원들, 도안의 이름있는 기계공학 전문가들이 참가하였다.

기술협의회에서 크게 세가지 의견이 제기되여 론난을 일으켰다.

그중 하나의 의견은 설계사업소 독고소장을 비롯한 전문가들이 내놓은것으로서 개조도면을 전면부정하고 유럽의 원도면을 그대로 리용하여야 한다는 가장 절망적인 의견이고 다른 하나는 개조한 도면에는 큰 결함이 없고 금속재질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것으로서 제작단 설계조원들이 주장하는 의견이였다. 다음 세번째 의견은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있던 최강철기사장이 처음으로 내놓은 의견으로서 금속재질뿐아니라 새로 개조한 유압계통의 설계도에 근본문제가 있다는것이였다. 유압속도전자조절변들의 규격과 유압의 회로도들을 많이 고쳐야 될것 같다고 하였다.

이때문에 지배인이 몹시 성을 냈다.

《여태 가만 있다가 왜 이제야 그런 까다로운 의견을 제기하는가. 기사장동무도 참 별난 사람이요.》

《나도 지금까지는 확신이 없었기때문에 함부로 말하지 못했지요.》

기사장은 조금도 흥분하지 않고 뜨직뜨직 조용히 말하였다.

(어쨌든 유압이 말썽거리야.)

설태섭은 연방 한숨을 쉬며 걸어갔다.

서정후부부장의 말이 옳은것 같았다. 유압은 불가항력적인 장벽이였다. 이제 와서 설태섭의 절망감과 좌절감은 거의 공포에 가까운것으로 되였다.

공장마을을 지나 뒤골목길을 걸어 집으로 들어선 태섭은 습관대로 부엌에 들어가 솥뚜껑부터 열었다.

알른알른 윤기가 돌게 닦아놓은 은빛늄솥안에는 안해의 정성이 깃든 음식과 언제나 같이 놓여있는 종이가 있는데 그것은 안해의 따뜻한 정이 배여있는 글쪽지였다. 수천명 종업원들의 건강을 책임진 한정희는 저녁시간이 늘 바빠서 아무때건 짬이 생기면 종주먹을 쥐고 집으로 달려와서 저녁을 끓인 다음 꼭 글쪽지를 써놓고 가군 하는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음식그릇은 하나도 없고 글쪽지만 놓여있었다.

《철심이 아버지.

오늘이 곽경두직맹위원장의 생일이랍니다. 저녁에 철심이 아버지를 꼭 보내라고 몇번이나 당부했습니다. 현아 아버지도 초청했답니다. 나이많은분이 모처럼 청하시는건데 꼭 가보세요.》

설태섭은 망설이며 서있었다. 안해가 이 쪽지글을 쓸 때 무엇을 생각했을가? 다문 하루저녁이나마 남편에게 기름진 음식을 먹일수 있게 된 기쁨으로 전에 없이 흥겹게 글을 썼을가?

(가보자, 곽경두위원장네 집구경도 하는겸. 그런데 그분이 왜 나와 김경복형님을 유독 초청했을가.)

설태섭은 이런 생각을 하며 몇집 건너에 있는 김경복이네 집으로 갔다.

손녀를 데리고 부엌에서 밥주걱으로 강낭죽을 젓고있던 경복이어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 오게. 우리 아 애비는 아직 오지 않았구만. 막스러운 음식 더웠을 때 먹었으면 좋겠건만.》

《경복형님의 저녁은 남겨놓지 않아도 됩니다. 생일집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설태섭은 늙은 녀인의 머리에 얹힌 흰서리를 생각깊이 지켜보았다. 광복초기 공산당원이고 1960년대와 70년대에 도대의원으로 활동한 경복의 어머니는 리해력이 많고 정치의식수준이 높은 늙은이였다.

《너나없이 식량걱정을 하는 때에 무슨 생일집에 가겠누.》

《일없습니다. 그 집은 괜찮게 사는 집입니다. 만약 경복형님이 오면 전 먼저 갔다고 일러주십시오.》

《응, 그리하겠네. 생일 말이 났으니 이 늙은게 곁에 있으면서도 임자네 철심이 돌생일을 변변히 차려주지 못한게 지금두 가슴에 걸리네. 아무튼 힘을 내서 일하세. 임자네들이 만드는 기계가장군님께서 마음 쓰시는 중요한 기계라니 빨리 성사시켜야겠네.》

경복이 어머니는 마당으로 나와 설태섭을 바래주면서도 《HM기》를 걱정하였다.

곽경두의 집은 설태섭이네 집에서 3리가량 떨어진 시내 변두리에 있었다. 블로크담장을 둘러친 널직한 마당 한쪽에는 꽃밭을 가꾸고 담장둘레로 덕대를 세워 청색스레트지붕으로 줄당콩이며 호박넝쿨을 올려서 풍족한 농촌집같은 인상을 주었다.

유리미닫이바깥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니 윤기나는 살색널복도가 집의 운치를 돋구었다.

김경복은 벌써 낙지, 명태, 문어따위의 갖가지 어물들과 돼지고기볶음이며 닭알찜이며 산나물채들이 가득 오른 둥근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있었다. 몇달째 강낭밥과 된장국만을 보아온 설태섭은 딴 세상으로 온것 같은 경이감에 눈이 희뜩 뒤집어질듯싶었다. 그리고 방안에 가득찬 고기볶음냄새에 빈 창자가 경련을 일으킬것처럼 꿈틀거렸다.

밥상에 마주앉은 김경복이도 의외로운 성찬에 놀라고 지어 당황해하는 기색이였다.

《오, 수학박사선생님이 오셨구만. 어서, 들어와 앉게. 난 임자가 오지 않을가봐 정희소장한테 여러번 일렀네. 경복인 내가 저리 잡아끌고 왔네.》

곽경두가 두부남비탕을 들고 부엌사이문턱을 넘어서면서 태섭을 반겨맞아주었다.

(정말 요란하게 차렸군.)

태섭은 태연히 앉아있었으나 내심으로는 여간 놀라지 않았다. 곽경두가 이 고난의 시기에도 이웃나라에 있는 친척의 도움으로 괜찮게 살고있다는것은 온 기업소가 알고있는 사실이지만 모든것이 생각했던것보다 더 요란스러웠다.

곽경두는 두부남비탕을 내려놓고 두 손님을 번갈아보며 말하였다.

《나는 나라의 인재들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일세. 더우기 앞날이 창창한 젊은 재간둥이들을 내 자식보다 더 귀중히 여기네. 그래서 임자네들을 청했으니 차린건 없지만 많이 들고 마시게.》

곽경두는 하얀 틀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이 몇해째 보기 좋게 살이 오른 그는 아직 40대초의 름름한 장년사나이로 보이였다. 주름살 하나 없는 흰 이마우에 물결모양으로 굽실굽실하게 넘어간 검은 머리카락도 잘 생긴 얼굴에 어울리게 멋있고 단정했다.

곽경두는 웃방으로 올라가 목이 기다란 중국빼주병을 들고 내려왔다.

설태섭은 술을 좋아하지 않고 김경복은 지배인처럼 술을 한방울도 입에 대지 못했다.

그대신 그들은 밥상우에 한가득 얹혀있는 고기, 떡, 닭알같은 영양가 높은 음식들을 맹렬히 먹어댔다.

《원, 젊은 사람들이 술을 마셔야지. 큰 일을 못하겠구만. 김경복인 술알레르기가 있다니 할수 없고 태섭이 자네야 몇잔 들어야지. 자, 마시게.》

곽경두는 많은 술이 가득 담긴 놋잔을 설태섭에게 권하였다.

설태섭은 성냥불을 대면 불이 펄펄 인다는 60프로짜리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불시에 뜨거운 불덩이가 목을 지지며 숨통을 막아 버리는듯 하여 가슴을 붙안고 기침을 깇었다.

《자, 초간장에 버무린 이걸 들게.》

곽경두가 기침을 깇는 설태섭이앞에 문어회접시를 가져다놓았다. 그는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가지고 문어회를 부지런히 집고있는 설태섭을 보며 히뭇이 웃었다.

《수학엔 박사인데 술에는 유치원생이군.… 참 듣자니 오늘도 〈HM기〉시험에서 실패했다면서? 그래 다른 공장들에 가서 기술협의회를 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기분상태는 어떤가? 생각을 달리하려는것 같지 않던가?》

《그건 무슨 소리입니까?》

설태섭은 문어회접시에 가져가려던 저가락을 멈춰세우고 곽경두를 빤히 바라보았다.

《서정후부부장의 말대로 유럽의 설계도를 그대로 리용해보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던가 말일세. 책임비선 이미 생각을 달리한것 같아. 그래서 설계조동무들을 다른 공장에 가보게 했을거요.》

《자의대로 해석하지 마십시오.》

설태섭은 김경복을 얼핏 스쳐보고 문어회를 집었다.

《내 너무 걱정스러워 그러네.》

곽경두는 낯빛을 흐리면서 방바닥이 꺼지게 한숨을 쉬였다.

《나는 오늘 지배인과 기사장이 다른 기관손님들도 있는 앞에서 싸웠다는 말을 듣고 생각이 많았네.》

《야, 위원장동지, 제발 그런 말 그만합시다. 머리 아픕니다. 그런걸 말하자구 절 초청했습니까?》

설태섭이 이마살을 찌프리며 머리를 내저었다. 이제는 유압이라는 말만 들어도 입에서 신물이 났다.

《그래, 그래, 그만두기요. 내가 동무들을 부른 진의도는 그따위 말을 하자는게 아니라 생활문젤 풀어주기 위해서네.》

곽경두는 제 손으로 술을 부어 마시고 놋저가락으로 닭알찜을 집으며 넌지시 김경복을 건너다보았다.

《일전에 잘 아는 수산사업소 지배인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바다가양식을 잘해야겠는데 짐배기계가 자꾸 고장이 나서 애먹는다는거네, 그러며 재간있는 기계기사와 기능공 한명을 소개해달라기에 자네들 얘길 했네.》

설태섭은 그의 말을 주의깊이 듣고있었다. 김경복이도 귀를 기울이는듯 했다.

곽경두의 말은 수산사업소 지배인이 자기네 짐배기계를 고쳐주면 한달 먹을 식량을 주고 새 짐배설계를 하나 떠주면 1년 먹을 쌀을 주겠단다는것이였다.

《어느 하루 짬을 내서 가보지 않겠나? 기곌 고쳐주면 그들에겐 생산을 높이도록 해주니 좋고 동무넨 먹는 문젤 해결하니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지.》

설태섭은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김경복이도 아무런 응대를 하지 않고 앞에 놓인 두부탕에 천천히 숟갈질을 하였다. 깊이 생각해보는것 같았다.

곽경두는 두사람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려는듯 부드러운 곡선을 지은 민틋한 턱을 슬슬 만지면서 크고 검은 눈을 말없이 슴벅이고만 있었다. 이때 뒤벽에 걸어놓은 중국산 벽시계가 여덟점을 쳤다. 그 소리에 김경복이 흠칫 놀라며 급히 일어섰다.

《위원장동지, 이거 안됐습니다. 전 가야 하겠습니다.》

《아니 가다니?》

곽경두가 김경복의 갑작스러운 거동에 의아해하였다.

《제 오늘 밤에 박준아바이하고 같이 유압배관작업로를 만들자고 약속했습니다.》

(작업로?)

설태섭의 눈살이 꼿꼿해졌다.

그러니 이 사람들이 내가 설계한 작업로를 줴버리고 기어이 새 작업로를 만든다는것인가.

설태섭은 순간에 입맛이 싹 가셔지는것 같았다.

《아, 그런 약속이 있었나? 가만, 그럼 잠간 기다리게.》

곽경두가 급히 일어나더니 부엌에서 료리를 만들고있는 안해에게 밤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꾸리라고 하였다.

《아 위원장동지, 그러지 마십시오.》

김경복이 당황해하며 손을 저었다.

《글쎄 가만 있으라. 동물 빈손으로 보내면 내가 박준아바이한테 뭐가 되나.… 그건 그렇구 어때? 수산사업소 지배인을 좀 도와주지 않겠나? 어느날 하루 짬을 내게. 그것두 다 나라를 위한 일인데.》

《예, 짬을 내보겠습니다. 그러나 대가는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뭐 삯일을 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시시합니다.》

《시시하다니? 삯일이라는건 또 뭐야. 너무 그러지 말게.》

곽경두는 흥이 나서 떠들다가 부엌에서 음식꾸레미가 들어오는것을 보고 돌아섰다.

《자, 이걸 가지고 가게.》

곽경두는 배가 불룩한 비닐구럭을 김경복에게 안겨주었다.

《감사합니다.》

김경복은 안주인에게도 인사를 하고나서 밑에는 비취색 고급유리창을 달고 우에는 진달래빛 색창호지를 바른 화려한 미닫이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곽경두는 마루방에까지 나가 김경복을 바래주고 들어왔다. 그는 몸에 열기가 나는지 웃통을 벗어던지고 바른쪽 어깨밑에서부터 왼쪽 허리어방까지 주먹같은 영문자가 사선으로 내리그어진 흰 샤쯔바람으로 술상앞에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까만두리상에 촘촘히 놓인 갖가지 음식그릇들을 훑어보더니 설태섭에게 어깨를 기울이며 속삭이였다.

《마침 잘됐네. 자네하고 조용히 할 말이 있었네.》

설태섭은 이 사람이 또 무슨 말을 꺼내려는가싶어 긴장해졌다.

《숨김없이 말하면 내 지금 서정후부부장과 손을 잡고 〈HM기〉를 개발하기 위한 큰 작전을 짜고있네.》

《예?!》

설태섭은 부지중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기계공학에 백지인 곽경두가 《HM기》를 개발하기 위한 작전을 짜고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단것이다.

《그래서 나와 서정후부부장 사이는 아주 가까와. 일전에 그분한테 동무의 이야기를 자세히 했네. 들어보더니 라남촌구석에 있을사람이 아니라며 크게 발전시켜주어야 되겠다고 했네. 거 뭐야? 미립자해석법? 좌우간 그런걸 연구한다고 하니 깜짝 놀랍데.》

곽경두는 또다시 제 손으로 술을 부어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런걸 연구하는 사람이 세계적으로 세명밖에 안된다네. 우리 나라에 한명, 로씨야에 한명, 카나다에 한명 있는데 놀라운건 카나다에 있다는 그 사람도 조선사람이라는거네. 그가 누구인고 하면 바로 강충현소장의 형님일세.》

《아니?!》

설태섭은 눈을 흡뜨며 놀란 소리를 냈다. 강충현의 형님이 량자력학에 정통한 그렇게도 큰 물리학자인줄은 몰랐던것이다. 사실 설태섭이 미립자해석법을 연구해보려고는 하지만 이제 겨우 그 문앞에서 어스벙대고있는 정도인것이다.

《소장의 형님과 우리 나라에 있는 미립자해석법연구자가 공동으로 B광물탐사를 하고있다는거네. 이걸 보면 조선사람이 머리는 좋아. 글쎄 그 좋은 머리를 가지고 조선사람이 왜 일본놈의 식민지가 되였댔는지 참 모르겠어. 그런데 참 내 언제부터 물어보자고 했는데 거 자네가 한다는 모호수학이라는건 뭐구 미립자해석법이란건 뭔가?》

설태섭은 쓰거운 웃음을 지었다. 곽경두에 대한 비웃음이 아니라 지난번 행정총화모임때 받은 비판에 대한 반발과 조소였다.

그는 모호수학에 대해 아무리 설명한들 곽경두의 굳은 머리로는 리해조차 못할것 같았으나 통속적인 설명을 하였다.

《모호수학은 쉽게 말해서 문자 그대로 모호한 현상에 의해 은페된 본질을 해명하고 처리하는데서 수학적인 방법을 적용할수 있게 하는 새로운 수학분야입니다. 실례로 지금 사람들은 〈곽경두위원장네 댁에 돈이 많다.〉라고들 합니다. 이것이 바로 명백하지 못한 모호한 표현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다는것인지 알수 없습니다. 엄밀한 수자에 의해서 계산하는 정통수학에서는 이것을 해명할수 없고 그에 대한 답을 내놓을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정통수학이 침투하지 못하고있던 령역에까지 수학적방법을 적용할수 있게 하는 새로운 수학분야가 1965년에 생겨났는데 그것이 바로 모호수학입니다.》

《아니 그럼 모호수학을 하는 자네는 나한테 돈이 얼마나 있는지 알수 있단 말인가?》

술기운에 불깃해있던 곽경두의 얼굴빛이 갑작스레 창백해지는듯 했다. 그의 커다란 눈에 놀라움과 공포의 빛이 헨둥히 내비치였다.

《물론 알아낼수 있습니다.》

설태섭은 그를 더욱 놀래우고싶어 흰 소리를 쳤다.

우리 인간생활에서는 도처에서 모호한 현상과 부닥치게 된다. 경제관리, 의학(병의 진단, 병의 예측), 생리학, 생물학, 범죄수사학, 정보론, 자동차공업, 로보트설계, 기상예보들에서 나타나는 모호한 현상들을 처리하고 해명하는 과학사업에 오늘 모호수학이 적용되고있다.

《이렇게 절실히 필요한 학문을 연구하는데 대해 현학적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립자해석법인지 미립자해석법인지 하는건 뭔가?》

《소립자해석법이 아니라 미립자해석법입니다. 학술적으로 소립자와 미립자는 그 의미가 같지 않습니다. 미립자는 눈으로 보기 어렵거나 볼수 없는 작은 알갱이들을 통털어 말하는것입니다. 분자와 원자는 미립자이지만 소립자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소립자이며 동시에 미립자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설태섭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문어회 한점을 입안에 집어넣고 질근질근 씹으면서 계속하였다.

《연구자료에 의하면 모든 물체는 항상 미립자를 방출하고있다고 합니다. 지금 위원장동지의 몸에서도 미립자가 나오고있습니다. 이 방출되는 미립자를 해석하는 방법을 연구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수 있습니다. 그것만 연구되면 땅속에 깊이 묻혀있는 보물도 단번에 찾아낼수 있습니다. 강충현소장의 형님이 바로 그런 미립자해석법을 적용하여 B광물을 찾아내려고 하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습니다.》

설태섭은 미립자해석법을 연구하고있다는 우리 나라의 학자와 강충현소장의 형님을 만나보고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끼였다.

《그래 자네는 어느 수준인가?》

곽경두는 검은 눈을 빛내며 태섭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초학도수준에도 못됩니다. 뭐 연구랄게 못됩니다. 서정후부부장동지가 뭐라고 합디까? 제가 그런걸 연구하고있다니까.》

설태섭은 그 어떤 아리숭한 기대에 은근히 마음을 조이며 물었다.

《내 아까 말하지 않았나. 깜짝 놀라더란데. 그러나 조선의 수준에서는 그런걸 연구하는게 시기상조래. 어쨌든 동물 과학원에 끌어가겠대. 사실 동무야 〈HM기〉에 발목이 매우지 않았더라면 벌써 박사가 되고도 남았지. 서정후부부장의 낯이 넓소. 과학원, 대학… 큰 학자들, 간부들과 련계가 깊은분이요. 리명국비서도 서정후부부장이라면 절대적으로 믿고, 그리구…》

혀아래소리를 하던 곽경두는 웃방에서 울리는 전화기신호소리에 벌떡 일어섰다. 다급히 웃방으로 뛰여올라간 그는 전화기가 놓여있는 탁상과 마주 앉았다.

설태섭은 그제야 웃방을 자세히 올려다보았다. 국화꽃문양을 새긴 연한 풀색레자를 깐 웃방에는 십장생을 그린 양복장, 이불장이 한쪽벽면을 가리웠고 옻색을 먹인 새까만 원탁우에 록화텔레비죤이 얹혀있었다. 안쪽에는 상아빛랭동기가 은은히 벌우는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곽경두는 자체발전기를 사다놓았다.)

살림방이 세칸이나 되고 목욕탕, 위생실에 창고까지 달려있는 이 덩지 큰 집을 곽경두는 모든 사람들이 한창 곤난하게 지내던 지난해에 구역건설대와 교섭하여 지었었다.

《예, 평양이 나왔소?》

송수화기를 붙들고있던 곽경두가 얼굴에 웃음을 띠으며 《여보시오. 서정후부부장동지이십니까. 제 곽경두입니다. 그새 편안히 지내셨습니까.》하고 기분이 뜬 소리로 떠들었다.

설태섭은 곽경두의 전화상대가 서정후여서 사뭇 긴장해졌다.

《예, 그 문제가 해결될것 같습니까. 그런데 부부장동진 못가실것 같다구요? 왜요? 예, 예.… 그럼 할수 없지요. 제가 혼자 가서 조카앨 구슬려 〈HM기〉자료를 뽑아오겠습니다. 예, 예. 안녕히 계십시오.》

곽경두는 송수화기를 놓고 싱글거리며 아래방으로 내려왔다.

《부부장동지가 힘써줘서 내가 이웃나라에도 가고 유럽려행도 하게 될것 같네. 동무네들이 몇년동안 씨루면서도 해결하지 못한 문젤 내가 이제 순간에 해결하는걸 보게. 조카녀석을 구슬려 내 기어이 〈HM기〉의 비밀자료를 다 뽑아오겠네. 나라를 위해 내가 할수 있는 일은 그거야.》

곽경두는 안주를 새로 끓여오라고 부엌에 소리치고 놋잔에 빼주병을 또 기울이였다.

설태섭은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정신이 몽롱해지는것 같았다. 그는 분명 같은 땅을 딛고 같은 흙을 밟고 다니면서도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다른 생활방식으로 살고있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을 이날에 비로소 보게 되였다.

설태섭은 진정 《HM기》의 성공의 열매를 《HM기》에 백지인 곽경두라는 이 엉뚱한 사람이 따게 되지 않을가 하는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배불리 먹고 마신 이 밤의 화려한 생활에 현혹되려는 자신을 의식하며 가벼운 전률을 일으켰다.

《태섭이! 자네 나하고 같이 유럽에 가지 않겠나? 부부장이 통역원을 붙여주겠다는데 무엇때문에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겠나. 과학도 알고 외국말도 잘하는 동물 데리고 가겠다면 부부장이 적극 찬성할걸세. 내가 왜 그걸 생각 못했을가?》

곽경두는 웃방으로 올라가 서정후부부장방에 전화를 신청하고 내려왔다.

《나하고 손을 잡읍세. 그러면 동문 운수가 터. 서정후부부장, 설태섭, 곽경두 이 세사람이 손을 잡으면 무엇을 못하겠나. 서정후부부장한테 딱 붙으라구. 그러면 동문 영웅이 되고 박사, 원사가 돼! 이번에 저리 과학원에 적을 붙이고 나하고 같이 이웃나라로 해서 유럽바람을 쐬자구. 서정후부부장의 말 한마디면 동무와 나의 문제도 저절로 해결되네. 나도 이번에 일자리를 옮기려고 하네. 〈나라를 위하여!〉나는 인재를 귀중히 여기네.》

설태섭은 혀가 꼬부라지고있는 곽경두를 놀란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보아온 곽경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고있었다. 그의 검은 눈에서 그 어떤 야심이 불타고있는것 같았다. 곽경두가 비록 전문분야에 대한 실력은 없지만 무한한 힘과 지략을 가진 모사처럼 느껴졌다.

설태섭은 물론 취중에 수다스럽게 한 곽경두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수는 없었다. 하지만 곽경두는 분명 서정후부부장의 방에 전화를 신청했었다.

(어디 두고 보자!)

설태섭은 서정후에게서 전화가 걸려올 때까지 기다려볼 작정이였다.

(그렇다. 《HM기》를 우리 식으로 개조하겠다고 하는것은 하나의 망상이였다. 아, 나는 그것때문에 많은것을 잃었구나. 6년이면 많은것을 할수 있는 시간이였다. 그런데 3급설계가로 미끄러져내려가고 부진설계원이라는 치욕을 당한것밖에 더 있는가.)

설태섭은 6년이란 세월을 어처구니없이 흘러보낸것이 분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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