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라남의 열풍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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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편
19
책임비서의 방에 모인 18명의 당원들은 저으기 궁금한 얼굴들을 하고 앉아있었다.
방안에는 지배인과 고문지배인을 비롯한 당위원회집행위원들도 와있었다.
책상을 마주하고 누구인가 기다리며 앉아있던 책임비서가 당위원회 부원들이 지함 두개를 들고 들어오자 움쭉 일어섰다.
무슨 말을 하든 서론을 비약하고 제판 본론에로 들어가는 성미인 주혁민은 불쑥 이렇게 입을 열었다.
《우리모두에게는 두개의 생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적생명이 태여난 날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생명이 태여난 날입니다. 오늘 11월 9일은 동무들이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사랑과 믿음속에서 조선로동당원의 영예를 간직하게 된 날입니다. 공장당위원회에서는 이날을 축하하여 기념품을 마련하였습니다. 한사람씩 차례로 나와서 받으십시오.》
주혁민은 두개의 지함에서 붉은 겉가위를 한 학습장을 각각 한권씩 꺼내였다. 학습장 겉가위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의 말씀》이라고 씌여있었다.
이름을 부르는 순서대로 처음에 윤현덕실장이 나오고 다음으로 주물대형작업반장 강송무가 나와 책임비서가 내주는 두권의 학습장을 무겁게 받아들었다.
주혁민은 생산부기사장 최강철의 차례가 되자 문득 《강철동무, 동무는 누구를 믿고 살아갑니까?》하고 물었다. 학습장을 받으려고 두손을 올렸던 최강철은 책임비서의 느닷없는 질문에 일순 놀라는듯 하더니 동실한 얼굴에 녀인들처럼 수집은 웃음을 지었다.
《저는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 운명을 맡기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또 하나 물어봅시다. 그런데 왜 지난기간 지배인과 당비서의 눈치를 보았습니까. 그들의 새짬에서 고민하다가 불면증에까지 걸렸댔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최강철은 고개를 떨구고 대답을 못했다.
《강철동무는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믿음속에서 조선로동당원이 되고 오늘은 생산부기사장의 중책을 맡게 되였습니다. 무엇이 두려워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갑니까.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이 큰 나라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다 망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면 인생을 망칩니다. 진심으로 수령님과 지도자동지께 운명을 맡기면 무서울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 주혁민이나 김동철이가 도대체 뭐요?
사실 난 벌써 동무에게 이런 말을 하자고했는데 오늘이 적당한 날이라고 생각하고 동지적인 충고를 줍니다. 접수됩니까?》
《책임비서동지! 고맙…》
최강철은 두주먹으로 허벅다리를 문지르며 고개를 비틀었다.
이날 저녁 김동철지배인은 공장승용차를 타고 후방부지배인이 입원해있는 청진의학대학병원으로 갔다. 그는 입원실에 들어가 병문안을 한 다음 록음기를 설치하고 종업원궐기대회의 전과정을 록음한 카세트를 넣어 돌리였다.
부지배인은 처음부터 주의깊이 록음을 들었다.
록음을 다 듣고난 다음에도 부지배인은 오래도록 말없이 침대에 걸터앉아있었다.
그는 지배인이 몹시 답답해하는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내가 주혁민동지와 같이 일한것은 한달밖에 되지 않습니다. 회령에 배치되여 한달 지나자 주혁민동지의 실수로 인명피해사고가 발생되여 그에 대한 비판사업이 진행되였는데 어느 한 간부가 나한테 주혁민동지의 비행에 대한 자료를 넘겨주면서 비판하라고 하더군요. 나는 그 자료를 보고 정말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폭군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후에 알고보니 그 자료가 다 거짓이였습니다. 나는 그한테 복수를 당할가봐 라남으로 온것이 아니라 부끄러워서 왔습니다. 부끄러워 그 사람앞에서는 얼굴을 쳐들수가 없습니다.》
《그게 어떤 놈이요. 동무한테 자료를 넘겨준 놈이!》
김동철은 분개하여 소리쳐물었다. 그러나 후방부지배인은 그 간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이튿날 후방부지배인은 퇴원하였다.
11월 9일 종업원궐기대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생산에서 혁신이 일어나고 일군들의 인간관계도 별 말썽이 없이 좋게 풀려나갔다. 모든 일이 제대로 잘되여 주혁민이와 김동철은 성수가 났다.
그리하여 종업원총회가 있은 때로부터 45일이 지난 12월 25일 5월10일종합공장에서는 1990년도 년간생산계획을 110프로 넘쳐수행한 자랑을 안고 종업원년간총화를 하게 되였다.
그들은 이 모임에서 수령님과 김정일동지께 편지를 올리면서 이렇게 아뢰였다.
《…1990년은 동유럽사회주의가 다 무너지고 적들의 반공화국책동이 악랄하게 벌어진 시련의 해였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을 모신 우리 인민은 공화국을 해치려는 제국주의자들의 검은 칼을 일심단결의 붉은 보검으로 부러뜨리고 우리 식 사회주의를 굳건히 지키였습니다.
적들은 놀라고 무서워 떨것입니다. 절망의 그림자가 덮일줄 알았던 평양거리에 한해사이에 3만세대의 현대적살림집이 새로 일떠서고 모든것이 좌절되고 침체될줄 알았던 이 땅에 대동강, 례성강, 압록강과 대령강을 하나의 대관개망으로 련결시키는 2천리물길이 이어져 곡창지대의 모든 논밭이 관개수로 차넘치게 되였으니…
이 거창한 혁명의 흐름속에서 저희들 5월10일종합공장에서도 〈HM기〉설계도를 우리 식으로 개조해나가고있고 유압식종합채탄기 4대, 심부탐사용절삭공구 82개, 특대형권양기 6대를 비롯하여 30여종의 대상설비생산과제를 넘쳐수행하고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 삼가 충성의 글월을 올리고있습니다.…》
주혁민은 이 편지를 화술이 좋은 공장방송원이 아니라 김동철지배인이 전체 종업원들앞에서 읽게 하였다.
편지채택모임이 끝난 뒤 김동철은 주혁민이와 마주 앉은 조용한 자리에서 눈물이 글썽해서 말하였다.
《책임비서동무, 내 한생에서 오늘처럼 기뻐본적도 흔치 않소. 나는 늙어 죽을 때까지 당신하고 같이 있겠소. 우리 10년후 2천년 12월 25일에도 〈HM기〉를 그쯘히 정렬해놓고 어버이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 오늘과 같은 충성의 편지를 올립시다.》
저녁에 그들은 창광원식목욕탕인 《기계원》한증탕에서 구수한 한담과 건드러진 셈세기노래로 웃고 떠들면서 피로를 풀었다.
《나는 원래 큰 과학자가 되자고 했는데 당일군이 됐소.》하고 주혁민은 고열속에서 말하였다.
《머슴살이를 하다가 광복후 땅의 주인이 된 나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다 농사군으로 만들자고 했소. 그러나 나는 농사일을 하기 싫어서 중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 몰래 석탄전문학교에 시험도 추지 않고 입학했소. 〈석탄〉이라는 글자를 보고 탄부의 아들까지도 그 학교에는 가지 않기때문에 입학하기가 아주 쉬웠지요.
나는 석탄전문학교를 다니면서 석탄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알게 되였고 그래서 이때부터 석탄박사가 되리라 마음먹었지요. 그런데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탄광에서 두어달 일을 했는데 하루는 초급당비서가 찾아와서 도당학교에 가라지 않겠소. 아버지가 머슴살이를 하고 형님은 조국해방전쟁시기 갈마반도에서 해안방어전투를 하다가 용감하게 희생된 전투영웅이기때문에 시체말로 토대가 좋아서 당일군으로 발전시키겠다는거요. 나는 당일군이 아니라 석탄박사가 되고싶으니 래년에 김책공대에 보내달라고 졸랐소. 그러나 어디 말을 듣소. 결국 이렇게 되여 나는 도당학교를 졸업한 다음 군당학교교원, 군당지도원, 과장, 비서로 그 다음엔 도당과장으로, 두루 이렇게 당일군이 되였소.
그러나 과학기술에 대한 취미는 버릴수 없어 당일군을 하면서도 청진광산대학을 통신으로 졸업했소.》
김동철이도 꿈많던 청춘시절을 이야기하였다. 철공소로동자의 아들로 태여난 그는 고급중학교를 졸업할 때부터 기계공학을 희망하고 김책공대 기계공학부에 입학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룡성기계공장에서 8년동안 현장기사생활을 한 다음 5월10일공장에 소환되여 인차 기술부기사장으로, 그다음에는 지배인으로 승급하였다.
《이렇게 별걱정없이 마음껏 배우고 공장지배인까지 되니 제 잘나서 그런가하구 우쭐댔지. 이런 못난놈을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선 용서해주시구 어버이수령님께선 년로하신 몸에 먼 라남땅에까지 친히 찾아와 잘못을 일깨워주셨으니… 그 사랑과 은혜에 다소나마 보답해드린것 같아 내 오늘 이렇게 기뻐하는거요.》
김동철은 《기계원》에서 푸짐히 한증을 하고난 다음에도 주혁민의 팔을 끌고 공장마당을 한바퀴 돌면서 기쁨에 떠서 그냥 두서없이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소학교에 다닐 때 미신이 많은 어머니가 아들의 사주팔자를 본 이야기까지 하며 웃기였다.
김동철은 수염발이 긴 령감이 점괘를 풀고 륙갑을 짚으며 사주팔자를 풀이하는걸 직접 보았다고 했다.
《령감이 우리 어머니더러 아들의 사주팔자가 참 좋시다 하며 무릎을 쳤소. 커서 큰일을 하고 여든여섯살 꽃피는 봄날에 고종명(편안히 죽는다는것)한다는것이였소. 하하하… 말마시오. 내가 대학때 사주팔자에 일종의 유물론적인것이 있다는 말을 했다가 아예 버릇이 떨어졌소. 되게 비판을 받았소.
여든여섯살까진 못살아도 지금의 건강상태를 보면 여든살까지는 살것 같아. 난 그때까지 책임비서하구 절대로 헤여지지 않겠소. 같이 살겠소. 야, 좋은 밤이로구나!》
김동철은 마당 한복판에 서서 별이 뜨기 시작하는 맑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성을 올리고는 전극작업장에 가보자고 하며 주혁민의 팔을 잡아끌었다.
로동자들이 퇴근한 뒤여서 작업장은 조용하였다.
김동철은 혼합기며 공기다짐기들을 하나하나 애틋이 쓸어만지였다.
《난 이 전극생산기지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소.
이게 5월10일종합공장에 새겨진 김동철의 얼굴이요. 9월 1일 수령님께서 오셨을 때 이 전극생산기질 보여드리지 못한게 분하오. 그런데 오성오가 뭐랬는지 아오. 수령님께 보여드리지 않은게 천만다행이라는거요. 수령님께서 그걸 보셨다면 분명 크게 걱정하셨을거라는거요. 고사람 이따금 고런 퇴매한 소릴 잘하거든. 자체로 전극을 생산해서 쓰는데 왜 걱정하신단 말이요. 내 그래서 한바탕 욕을 퍼부었소.》
기분이 좋아 웃고 떠들던 김동철의 세모눈이 날카롭게 번뜩이였다.
《지배인! 리해하오. 제 마음에 맞지 않으면 벌처럼 콕 콕 쏘는게 오성오의 결함인데 지내보니 사람은 깨끗하고 재간둥이요. 인재요, 인재! 나도 그렇고 지배인도 그렇고 결함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소.》
《아, 그렇지 않구. 털어놓고 말하면 오성오는 나보다 훨씬 아는게 많고 똑똑하오.
최신첨단과학에선 내가 그의 발뒤꿈치에도 못갑니다. 그러게 〈HM기〉제작단 단장을 그에게 맡겼지요.
금년 여름 출당을 당한다, 철직을 당한다 할 때 나는 오성오한테 지배인을 인계할 생각까지 했댔소. 그런데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이 김동철을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고 당신같은 좋은 당일군을 보내주셨지.… 아마 이런걸 두고 옛사람들이 백골난망의 은혜라고 하는것 같소.》
김동철은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하고 한동안 잠자코있다가 열기를 띤 어조로 계속하였다.
《우린 정말 복을 타고난 행운아들이요. 지, 인, 용을 겸비한 두분의 위인을 모셨거든. 수령이 위대하면 민족이 위대하고 강장에는 약병이 없다고 했소. 그런데 미제침략자들이 이걸 모르고 동유럽사회주의가 무너지니 조선도 조만간 무너지게 된다구 가을뻐꾸기 같은 소리를 한단 말이요. 부쉬(제41대 대통령)가 요즘에도 도이췰란드에서처럼 쏘련이 붕괴되기전에 북조선도 남조선에 흡수될거라고 한다는데 우리를 몰라도 너무 모른단 말이오. 그자가 참 어리석거든. 왜 그렇게도 모를가?》
김동철은 어이가 없는듯 허거프게 웃고는 주먹을 흔들었다.
《어림도 없지. 이 세상 제국주의가 다 달라붙어도 우리 공화국은 절대로 안무너져.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계시는데 왜 무너지겠는가. 내 그 신념만은 확고하오. 이것은 내가 광복후 오늘까지 40여년의 생활을 통해 받아안은 신념이요.
나는 수령님으로부터 〈HM기〉를 개발할데 대한 과업을 받을 때도 수령님과 지도자동지께서 무엇인가 멀리 앞을 내다보며 우리들의 운명을 지켜주고 행복의 길을 열어주실 큰 경륜을 펼치고계신다고 생각했소. 수령님께선 그때 21세기의 이야기를 많이 하시면서 우리더러 21세기의 주인들이라고 하셨소. 책임비서! 얼마나 좋소. 그날이 보이는것 같소.》
지배인은 벙글벙글 웃으면서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불쑥 이렇게 말하였다.
《책임비서! 나는 때때로 이런 생각이 들군 하오. 수령님과 지도자동지께서 우리에게 〈HM기〉를 맡겨주시면서 다른 무엇인가를 기대하고계시는게 아닌가하고 말이요.》
(음, 수령님과 지도자동지께서 단지 〈HM기〉를 개발하는 그 하나만을 바라시는것은 아닐것이다.)
주혁민이 깊은 생각을 더듬고있는데 지배인이 팔을 끌었다.
《책임비서, 이젠 그만 집으로 갑세!》
《갑시다. 지배인동문 그새 밤잠도 못자고 수골 했는데 오늘은 일찌감치 집으로 가서 로친네한테 술이나 한잔 부어달래 마시고 푹 자시오.》
《그러겠소. 책임비서동무두 세시간이상 잠을 자면 머리가 아프다지만 오늘만은 로친넬 품에 안구 일찍 자시오. 하하하, 참 좋은 밤이요. 즐거운 밤이요.》
김동철은 흥겨운 무도곡을 흥얼흥얼 부르면서 걸어갔다. 이렇게 지배인과 헤여져 집으로 돌아온 주혁민은 저녁상에서 기분좋게 맥주까지 들이키고 처음으로 밤 11시에 마음 편히 잠자리에 들었다. 습관대로 이튿날 새벽3시에 일어나 공장으로 나갈 차비를 하는데 문득 전화기 신호종이 울리였다.
《책임비서동지!》
수화기에서 녀자의 목소리가 울리였다. 주혁민은 그것이 진료소장 한정희의 목소리라는것을 알아차렸다.
《진료소장 아니야? 이 밤중에 왜?》
수화기에서는 진료소장의 흐느낌소리가 들리였다. 불시에 불길한 예감이 비껴들었다.
《진료소장, 왜 그래? 어째 울어?》
《책임비서동지! 지배인동지가… 지배인동지가…》
《어서 말하오. 지배인이 어떻다는거요?》
《지배인동지가 잘못됐습니다.》
《?!》
주혁민은 뒤통수를 얻어맞는것처럼 눈앞이 아찔해졌다.
《진료소장! 이자 그게 무슨 말이요?》
《지배인동지가 사망하셨단 말입니다.》
《뭐야?! 내가 어제저녁 그 사람하구 한증까지 하구… 공장을 한바퀴 돌구 헤여졌는데 죽었다는게 무슨 소리야?》
주혁민이 어떻게 소리쳤는지 아래방에 누워있던 안해와 딸이 소스라쳐 놀라서 일어섰다.
《책임비서동지!… 심장마비로… 갑자기…》
한정희의 뒤말은 흐느낌으로 이어졌다.
《야, 주먹으로 때리라! 심장을 치라!》
《이젠 늦었습니다. 흐윽…》
주혁민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캄캄한 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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