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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마을에 정의와 평화가 올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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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조
댓글 0건 조회 1,620회 작성일 11-08-21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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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 사진을 보며 라디오헤드의 'no surprises'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저 우주 끝에서 심연으로 보내지는 느린 주파수처럼 뚜우 뚜, 뚜우 뚜…정체 모를 어떤 기호가 마음에 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사를 빌어 그 기호를 해석하자면 "정부를 전복시켜 버리자, 그들은 결코 우리를 대변해 주지 않아. Bring down the government, they don't, they don't speak for us"는 아닌 것 같다.

차라리 그 기호는 주술에 가까웠다. 노래의 마지막 소절이 반복되는 것처럼. "더 이상 공포도 없이 더 이상 두려움도 없이, 그저 고요하기를. No alarms and no surprises, silent silence……." 굳이 해석할 필요 없는 어떤 스밈 혹은 어떤 울림.

쇠사슬을 감고 탁자 위에 오른 그 사내

   
▲ 송강호 박사가 목에 쇠사슬을 감은 채 중장비를 앞세워 공사를 강행하려는 해군과 삼성 등 시공업자들에 맞서고 있다. 그 후 그는 7월에 긴급 체포돼 구속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강정마을에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사진 제공 강정마을 카페)
사진 속 사내는 쇠사슬을 목에 감고 탁자 위에 올라 있다. 정부가 주민들의 반대를 무시하며 해군기지를 짓겠다고 벼르고 있는 강정마을에서 2011년 5월 19일 벌어진 일이다. 쇠사슬은 비닐하우스 철골로 이어져 있고 사내는 일체의 동요가 사라진 얼굴을 하고 어떤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해군기지 공사를 수주한 삼성과 대림 건설업자들이 앞세운 중장비들이 크르릉 거리고 있다. 그들 곁에서 경찰은, 소풍 나온 동네 한량처럼 멀뚱멀뚱 사내와 마을 사람들의 움직임을 구경하고 있다.

중장비는 사나운 소리를 더욱 높이 지르며 조금씩 앞으로 다가온다. 그들이 철거하겠다고 나선 것은 주민들이 중덕해안에 친 비닐하우스였다. 하지만 사내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벼르고 있는 것이 오직 하나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완전한 굴복'이었다. 그래야 그들은 '공사'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사내는 중장비의 굉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목에 감은 쇠사슬을 더욱 강하게 틀어쥐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극단의 상황. 사내는 삶이 주는 작은 파동으로부터 이미 벗어나 있는 매우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 사내의 다리를, 성공회 김경일(생명평화결사 운영위원장) 신부와 한 젊은 남자는 안타깝고 처연한 눈을 하고 꽉 붙들고 있다.

"탁자 위에서 내려오기만 하면 바로 죽는 거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목에 감은 쇠사슬을 움켜쥐고 놓질 않아. '아 이 사람이 정말 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생각에 섬뜩해지더라구. 그래서 못 뛰어내리게 다리를 꽉 붙들었지.

나중에 다른 일로 서귀포 경찰서를 갔는데 한 형사가 나를 보고 와서 한다는 말이 '신부님, 정말 고맙습니다' 하는 거야. 왜냐고 물었더니 '신부님께서 한 사람을 살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는 거야."

사진 속 주인공은 송강호 박사. 국제 평화 단체 '개척자들' 소속이다. 만 10년이 넘게 국제 분쟁 지역에서 평화 봉사 활동을 하다가 2011년부터는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강정마을에 상주하고 있다.

송 박사는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싸움을 하며 20건이 넘는 혐의 내용으로 지난 7월 15일 긴급 체포됐다. 지금은 보석 상태다. 그는 또 '평생 만져 보지 못할 금액'을 손해배상이라며 청구 당할지 모른다. 저번처럼 공사를 강행하겠다고 해군 측이 다짜고짜 달려들면 어떤 식으로든지 몸을 던져 저항할 수밖에 없다. 두렵진 않을까.

"저라고 두렵지 않겠습니까? 두려움은 사람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때도 해군기지 공사를 강행하겠다며 삼성 관계자들이 포클레인을 막 밀고 들어왔을 때였어요. 최성희(평화운동가,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투쟁을 하다 구속수감) 씨랑 포클레인 밑에 누워서 막고 있는데 최성희 씨가 어딘가로 계속 전화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왜 그렇게 전화를 하냐'고 물었더니 '두려워서 그런다'는 거예요."

그는 이 이야기를 하며 맑게 웃었는데 작은 해프닝을 소개하는 즐거운 표정이었다.

"저도 죽음이 두렵죠. 저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어서 '나의 생애를 정의와 평화의 제단에 바치겠으니 두려움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합니다. (살짝 웃으며) 죽겠다고 작정하니까 안 죽겠다는 것이 두렵더라구요. 죽음을 각오한다는 것은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힘인데 그게 제겐 신앙인 것 같아요."

르완다에서 만난 전쟁…"평화는 장식이 아니다"

   
▲ 그의 미소는 순하고 맑다. 또한 노리치의 성녀 줄리안의 기도처럼 한없이 낙천적이다. (사진 제공 이주빈)
1994년 그가 세 명의 청년과 르완다 내전 현장을 방문했을 때다. 아비규환의 상황,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 타인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에 주민들은 내버려져 있었다. 그나마 그들을 돕겠다고 와 있던 국제 NGO 활동가들과 선교사들도 르완다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폭력과 살인이 버젓이 자행되는 만행의 현장. 르완다 주민들은 공포에 질려 떨고 있었지만 그들을 지켜 주고 안아 주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6·25세대도 아니고 전쟁의 끔찍한 고통을 겪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매우 근본주의적인 예수교 장로 합동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래서 교회에서 청년들 지도하면서 '선교 여행'을 다닐 때는 보수적 우월감에 전도를 해야 하질 않나 생각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르완다에서 사람들이 겪고 있는 가장 심각한 고통은 전쟁과 기아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소말리아나 나아지리아의 대량 기아 사태도 따지고 보면 내전으로 인해 식량 수송로가 차단되니까 발생하는 것입니다. 고립된 지역에선 사람들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전쟁이야말로 인간이 만들어 낸 최악의 재앙입니다. 쓰나미 같은 비극적인 재해도 전쟁이 만들어 낸 피해의 십분의 일도 안 됩니다.

르완다에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복 있다'는데 평화란 무엇인가, 교회마다 '평화의 왕 예수'라고 현수막을 거는데 '그 말은 장식용이 아니질 않나'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송 박사가 국제 평화 봉사의 길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개척자들'이란 국제 평화 단체를 만들어 1998년에는 보스니아, 동티모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분쟁과 전쟁 지역을 돌아다녔다. 1999년부터는 아예 활동가들을 분쟁 현장에 파견해 평화 봉사 활동을 하게 했다. "외부의 도움이 절실한 절박한 상황, 전쟁과 분쟁이라는 가장 열악하고 심각한 현장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 시대 신앙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이 쉬워 분쟁 지역 평화 봉사지 멀쩡한 생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다. 강도와 강간, 살인 등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폭력이 일상처럼 횡행하는 곳이다. 생사람의 살에 구더기가 파고 들고 마실 물 한 모금 때문에 살인이 자행되는 곳이다.

광신도들처럼 순교를 자처하며 "열방을 정복하겠다"고 선교 활동을 벌이는 일이 아니다. 세상 가장 살벌한 곳에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아프고 공포에 떨고 있는 이들 곁에 함께 있어 줄 뿐.

"'자비'에 해당되는 영어 'compassion(컴패션)'이 어원적으로 '아픔을 함께한다'는 의미라면, 예수는 실로 자비의 스승이었다. 예수는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하는 자비의 가르침을 그의 중심 가르침으로 삼았다."

비교종교학으로 깊이를 인정받는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 명예교수가 한 얘기다.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인 그 역시 '아픔을 함께한'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하려 했는지 모른다. 극한의 공포와 두려움을 이겨 내고 아픈 이들의 자리에 함께하는 삶, 어쩌면 그에겐 특별할 것 없는 순종의 삶이었는지 모른다. 그가 국제 분쟁 지역을 잠시 벗어나 강정마을에 머무르게 된 까닭도 이와 다르지 않다.

"동티모르, 아체 등지에서 제게 맡겨진 소임을 다하면서도 늘 마음속에 강정마을이 담겨 있었어요. 그리고 제게 2년의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져서 1월에 강정마을을 찾았죠. 그때 강정마을 분위기는 정의를 외치던 사람들이 상대방의 불의와 불법, 대항할 수 없는 힘 앞에 '이들과 싸워서는 이길 수 없구나' 하고 자포자기하고 침묵하는 느낌이었어요.

이에 반해 해군이나 삼성 등 건설업자들은 불의와 불법을 저지르고도 의기양양해하고 있었어요.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마을을 분열시키고 악착같이 평화를 방해할 수밖에 없는 해군이 악령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마을엔 그런 것들을 극복할 있는 의지와 동력이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죠. 침몰해 가는 공동체 같았어요."

이 땅에 정의와 평화를 이루겠다는 의지조차 허망한 욕망으로 느껴졌다. 그저 정의의 분노가 마음속에 다시 조성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이른 새벽 바다에서 올라오는 짠 이슬을 맞으며 기도했다. 한 분이라도 더 오게 해 달라고.

"나 혼자서 하는 기도는 힘이 없으니까 강정을 사랑하는 목사님, 신부님 한 분이라도 더 오셔서 함께해 주시라고 기도했어요. 처음엔 아무도 없어서 구럼비에서 혼자서 울부짖으며 기도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또 맑게 웃으며) 기도의 응답을 제대로 받은 것이죠."

   
▲ 그는 강정마을 해군기지가 백지화되면 또 다시 떠날 것이라 했다. 평화를 갈구하는 이들 곁에 늘 함께 하려는 그는 진정한 자발적 평화 유배자다. (사진 제공 이주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이것이 나의 삶"

그가 구속되어 있을 때 아들 한별(의료전문대학원 재학 중) 씨가 면회를 갔다. 서먹한 침묵으로 무선 교신하듯 이 평범한 부자는 한동안 서로 아무 말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예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걱정하지 마. 아빠는 아빠가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뿐이니까. 이게 나의 삶이다."

대체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어떤 곳일까. 대체 그의 삶은 어떤 삶일까. 그는 "물이 가장 깊은 곳을 향해 끝까지 흘러내리듯 가장 열악하고 심각한 현장에 찾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자연스런 결정이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묻듯 답했다.

"보수적 신앙을 갖고 계신 분들은 자기 신앙에 갇혀서 자기가 믿는 것이 아니면 인정하려 들지 않아요. 그래서 신앙을 성소 안에 가둬 두고 기독교라는 틀 속에 하나님을 가둬 버리는 오해를 하고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와 평화, 기쁨이 있는 곳이에요. 모든 인류가 경험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현실적이죠. 그런데 정의를 불의가 짓밟고, 평화가 산산이 깨어지는 현실, 그런 현실을 사는 이들 곁에 하나님이 계시죠. 신앙을 가진 이로서 전쟁과 분쟁의 현장에 투신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강정마을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부당하게 구속되었지만 저는 제가 선택한 길을 후회하지 않아요. 후회하지 않는 마음은 매우 단순해요. 정의를 위해 이런 선택을 했고 그에 따른 불이익이나 손해는 실현하기 위한 정의에 비견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죠. 그렇게 제가 있어야 할 곳, 제가 가야 할 길에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시죠."

그는 강정마을이 참 좋다고 했다고 했다. 눌러 살고 싶을 정도란다. 그리고 그는 강정마을이 제주도의 정치 지형은 물론 한국의 정치 지형을 바꿀 폭발력을 가진 곳이라 했다. 군사 주의로 무장한 정치 세력에게 막대한 타격을 줄 것이란다. 그리고 강정은 끝내 '비무장 평화의 섬, 제주도'를 꿈꾸는 승리의 화산이 될 것이라 했다.

"강정마을은 해군기지가 아니라 평화 공원이어야 해요. 같이 놀고 노래하고 춤추며 평화를 배우는 곳. 그날이 오면, 그때가 오면 저는 또다시 떠날 것입니다."

언제든 아프고 슬픈 이들 곁에 함께 할 채비를 하고 있는 사람, 언제나 '자발적 평화 유배'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그러고 보니 그의 미소는 지극히 순하고 낙천적이다, 노리치의 성녀 줄리안의 기도처럼.

"잘될 것입니다. 잘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입니다. All shall be well, and all shall be well, and all manner of things shall be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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