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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바로 명성황후가 일본깡패들에게 시해당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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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슴도치
댓글 1건 조회 1,676회 작성일 11-10-08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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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는 일본정부가 주도했다 명성황후 시해범들에게 노고를 치하하는 일왕과 이등박문
영화 '한반도'에서의 명성황후 시해장면

1895년 양력 10월 8일은 명성황후께서 일제에게 시해당하신 날입니다.

아래 글은 “처참하고 치욕적으로 시해당한 명성황후” 시리즈의 제 4부입니다.
(1부) 역사적 사실과 다른 영화의 명성황후 시해장면
(2부) 명성황후를 일제처럼 ‘민비’라 부르는 우리
(3부)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생략한 백과사전
(4부) 명성황후 시해는 일본정부가 주도했다


명성황후를 처참하고 치욕적으로 시해한 범인은 조선에 있던 미우라공사와 일본 깡패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순 행동대원일 뿐이고, 진짜범인은 당시 (伊藤博文)가 총리대신으로 있던 일본정부이다.

상식적으로 이런 어마어마한 사건은 국가가 정부차원에서 개입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시행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웃나라 왕비를 살해하는 일은 일본 외무성의 국장급인
주한공사 정도가 혼자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당시 총리대신인 이등박문이 결정하고, 외무대신출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총지휘를 맡은 사건이었다. 게다가 일본의 군부(軍部)가 적극 개입되었고, 조선에 있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공사는 행동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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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 시해의 주모자들. 본 도표에는 군부가 빠져있다. © 역사복원신문

명성황후 시해사건 바로 한달 전의 주한일본공사가 바로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이노우에는 일본의 내상과 외상을 지낸 정치 실세로 친구인 이등박문과 함께 일본정계를 움직이던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에 관한
전결권을 위임받아 조선에 있으면서 온갖 내정간섭을 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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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무/내무대신을 역임한 이노우에 가오루
그러던 이노우에가 명성황후 시해사건 한달 전 갑자기
사임을 하고, 대신 후임으로는 외교경험이 전혀 없는 육군중장출신의 미우라를 천거해 그에게 명성황후 시해의 행동대장 임무를 맡긴다. 즉 이노우에는 미우라를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배후조정을 한 것이다. 이러한 내막은 미우라가 남긴 수기에 잘 나타나 있다.

미우라와 이노우에는 같은 고향으로 학교 선후배 사이이며, 이노우에는 누구보다도 미우라의 과격한 성격을 잘 알기에 군부(軍部)에 적극 추천했다. 군부는 이노우에게 사건을 직접 맡을 것을 제의했지만, 이노우에는 유혈사태에 직접 관여하는 것을 피하고자 행동적이고 영웅심이 강한 미우라를 추천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일본 군부의 실세들은 조선침략의 걸림돌인 명성황후를 살해한 뒤 무력을 동원해 친일정부 수립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인물은 삼국연의의 장비(張飛)와 같은 저돌적인 돌격대장 미우라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범행의 주역인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한성신보 사장) 자서전에 따르면, 1895년 9월
1일 갑자기 주한 공사로 부임한 미우라는 시해작전의 선봉을 맡은 자신과 만나 명성황후 시해를 의미하는 ‘여우사냥’이란 말을 처음 꺼내는 등 구체적으로 범행을 모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미우라의 수기로 본 일본정부의 움직임

한일관계사를 연구해온 동경 가쿠게이 대학의 이수경교수는 미우라의 고향 도서관에 보관 중인 ‘관수장군 호쾌록(豪快錄·1918)’과 ‘관수장군 영웅론(1920)’, ‘관수장군 종횡담(1924)’과 ‘관수장군 회고록(1925)’ 등을 모두 입수해 명성황후 시해 관련 내용을 발췌해 공개한 적이 있다. (관수장군은 미우라를 의미하며, 이 책들은 대출금지도서이다)

미우라는 호쾌록에서 자신은 주범(主犯)이 아니라 꼭두각시처럼 행동한 ‘종범(從犯)’이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내용을 자신의 수기 곳곳에 남겨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한다. 또한 이교수는 미우라와 관련된 문서 등을 살펴보면 ‘일본정부가 직접 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는 증거들이 여러군데 있다고 풀이했다.

‘관수장군 회고록’에 따르면, 1895년 7월쯤 고향선배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육군대장이 당시 중장으로 퇴역한 뒤 추밀원 고문으로 있던 미우라에게 급히 조선으로 갈 것을 종용하자, 미우라는 “나는 외교에 대해 일체 모르니 조선을 합방 또는 독립시켜야 하는지, 러일 공동의 지배에 두어야 하는지부터 우선 밝혀 달라”고 요구했다.

야마가타는 재차 “당신이 밝히라고 한 것은 중대하고 심사숙고해야 할 사안이라 머지않아 어떤 형태로든 결정될 것이니 하루빨리 조선으로 건너가라.”고 했고, 미우라는 “정부의 방침대로 조선에 온 이상 내가 할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다”고 자신의 수기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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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오 히로부미의 동상
또한 미우라는 1896년 1월 형식적으로 수감됐던 히로시마 형무소에서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 후, “이등박문(伊藤博文)이든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든지 야마가타가 나를 조선에 가도록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나를 고생해 불쌍한 놈으로 여기고 있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수경교수는 “미우라가 사건 몇 달이 지나자 스스로 꼭두각시로 농락당했다는 점을 자각한 상태로,
미우라를 직접 추천하고 사건을 모의한 이노우에나 당시 총리였던 이등박문이 면회를 오지 않았던 것을 불평하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미우라는 호쾌록에서 석방 직후 이등박문이 축하사절로 보낸 다나카(田中)궁내대신(왕실장관)에게 “이등박문이 그렇게 친절하다면 관계 대신 한두명을 보내 내가 한 짓(시해사건)을 듣는 게 어때?”라면서 불편한 속내를 내비치기도 했다고 한다. 미우라의
수기만 보아도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10월 8일 오전 9시 20분에 주한일본공사관의 니이로(新納) 해군소좌는 본국 육군참모부에 한 장의 전문을 보냈다. 극비(極秘)라는 붉은 도장이 찍힌 이 전문에는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는 문구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이것은 일본 정부의 공식 라인을 통해 명성황후 시해의 성공을 알린 보고서였다.
이것도 일본이 정부차원에서 개입한 증거라 하겠다.

형식적인 히로시마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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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년 프랑스 리용프와어 신문에 실린 명성황후 시해사건 삽화. 진실에 많이 접근되어 있다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를 자신들이 저지른 짓임을 철저하게 숨기려 했다. 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에 벌어진
권력다툼에서 비롯된 사고로 선전했다. 그러나 명성황후 시해는 외국인 목격자들이 많았다. 목격자들은 각자 본국으로 이 사건을 보고해 서방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특히 1895년 10월 31일자 노스차이나 헤럴드 신문의
보도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숨기고 작게하려는 일본 측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일본을 비판하고 범죄자 처벌을 요구하는 여론이 세계적으로 들끓자, 일본 정부는 살해범으로 지목된 48명의 용의자를 모두 동경으로 소환한다.

사건을 히로시마 재판소에 넘기고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 뒤 가담자 전원을 ‘증거불충분’이라는 어이없는 이유로 석방한다. 범죄자들은 석방된 뒤 구국의 영웅으로 일본 전 국민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일본 국왕도 시종대신을 보내 시해범들에게 수고했다고 하면서 노고를 치하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일본 정부는 살인범들을 처벌할 의도가 없었다. 왜냐하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일본 군.관.민과 정부의 합작으로 만들어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현장 목격자가 있고 증거가 많이 있는데도 살인범들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후 모두 출세가도를 달린다.
이것이 일본이 정부차원에서 저지른 짓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핵심 인물이었던 시바 시로우는 정치소설가로 더 큰 명성을 얻고 국회의원에 여러차례
당선되며, 건달 동원책이었던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 겐조는 내각의 내무부장관에까지 오른다. 그 밖에도 명성황후 시해범 대부분은 정치요직에 발탁되거나 사회적인 부와 명성을 얻게 된다.

또한 당시 시해가담자 중 한명이었던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도 “왕비 살해를 일본의 모든 이들이 생각하고 있었다.”는 문구를 머리에 적었고, “왕비 살해의 필요성은 미우라도 일찍부터 생각해 오고 있었다.”고 말한 점과, 일본의 수비대가 시해작전의 주력이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봐도 일본정부가 깊숙이 개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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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혀주고 있는 에조 보고서. 명성황후의 처참하고 치욕적인 마지막이 잘 묘사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 회에 연재한다) © 역사복원신문

명성황후 시해의 원흉은 이등박문

명성황후께서 시해당한 해로부터 14년 후인 1909년 대한의 육군중장 안중근은 할빈역에서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을 처단한다.(이등박문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하늘의 응징을 당한 것이다) 안중근장군은 재판과정에서 이등박문을 처단한 까닭을 15가지 죄목으로 들었다. 그 중 첫 번째 이유가 바로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이다.

1. 대한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
2. 대한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대한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대한사람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대한사람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현재 대한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일왕을 속인 죄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일본왕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안중근장군은 이등박문을 처단한 죄로 여순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주검조차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황후를 무참하게 시해한 일본놈들은 아무도 처벌되지 않고 오히려 영웅으로 추대되어 부와 권력을 모두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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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화폐의 초상인물인 이토오 히로부미. 우리 입장에서는 조선침략과 명성황후 시해의 원흉이므로 원수 중의 원수이다. © 역사복원신문

이등박문은 현 일본의 1,000엔짜리 지폐의 인물이며, 이노우에 가로우의 탄생지에 있는
 타카다공원에는 이노우에의 동상이 서있다. 공원의 처음 이름은 이노우에의 업적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이노우에공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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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노우에 공원(타카다 공원)에 서있는 이노우에의 동상 © 역사복원신문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명성황후의 처참했고 치욕스러웠던 죽음조차 잘 모르고 있다.
오직하면 명성황후와 호위무사와의 사랑이야기를 그리면서, 고종과의 베드신까지 들어가는 ‘불꽃처럼 나비처럼’이란 영화까지 곧 개봉된다고 한다. 제작진이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어떻게 명성황후를 주제로 이런 저질 삼각관계 로맨스 영화를 만들 수 있겠는가!

참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의 역사인식이 큰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이는 올바른 역사가 정립하지 못하고, 아직도 일제가 만들어준 식민지사관을 바탕으로 역사를 국민들에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올바르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려면 역사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들이 역사를 통해 현실을 살아가고 미래를 설계하는 눈을 뜨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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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식님의 댓글

역사의식 작성일

역사를 제대로 알게 한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잘못된 역사를 알고있는 국민들은 얼이 빠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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