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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미 가수, 내년 봄 평양 공연” /박문재 박사(의사)가 주선해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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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슴도치
댓글 1건 조회 1,661회 작성일 11-11-21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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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시간 2011.11.21 02:07:43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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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미 가수, 내년 봄 평양 공연”

박문재 박사(의사)가 주선해 추진



세계적인 성악가 조수미씨의 평양 공연이 추진되고 있다고 재미동포 의사들로 구성된 재미동포단체인
'조미의학과학교류촉진회'(회장 박문재)가 19일(현지시각) 밝혔다. 1999년부터 매년 북한을 방문해
의학 학술대회 참석 및 의료지원 활동을 펼쳐온 교류촉진회는 이날 “남북화해를 목적으로 하는 조수미씨의
평양 초청공연이 내년 4월 말 또는 5월 초에 열릴 것”이라며 “조수미씨와 북한 쪽이 모두 이를 구두로
약속한 상태”라고 말했다.


“조수미 가수, 내년 봄 평양 공연”

박문재 박사(의사)가 주선해 추진




재미동포 의사단체가 주선해 “북쪽도 구두 약속”
북서도 ‘인기 성악가’ 알려져…정부 승인하면 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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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가 조수미 가수
세계적인 성악가 조수미씨의 평양 공연이 추진되고 있다고 재미동포 의사들로 구성된 조미의학과학교류촉진회(회장 박문재)가 19일(현지시각) 밝혔다.

1999년부터 매년 북한을 방문해 의학 학술대회 참석 및 의료지원 활동을 펼쳐온 교류촉진회는 이날 “남북화해를 목적으로 하는 조수미씨의 평양 초청공연이 내년 4월 말 또는 5월 초에 열릴 것”이라며 “조수미씨와 북한 쪽이 모두 이를 구두로 약속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번 공연은 공식적으로는 교류촉진회의 상급기관인 재미동포연합과 북한 당국이 공동추진하고 있으며, 조씨와 개인적 친분이 있는 박문재 회장의 주선으로 진행되고 있다. 박 회장은 “지난달 조씨가 북한 공연 개최 취지에 선뜻 동의했고, 북한 쪽에서도 조씨의 공연을 환영하고 있다”며 “조수미씨는 북한에서 일반대중들에게도 남한의 세계적인 성악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공연 윤곽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나, 조씨의 단독공연, 평양교향악단과의 합동공연, 북한 오페라 성악가들까지 동참한 합동공연 등 세 가지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또 선곡은 정치적 논란을 피하고 남북화해의 취지를 높일 수 있는 우리나라 전통민요, 가곡 또는 고전음악 등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이전에도 비공식적으로 조씨를 초청해 북한 공연을 열고 싶다는 뜻을 전한 바 있다.

그러나 조씨의 북한 공연이 성사되려면 북한의 공식초청서와 함께 우리 정부가 대한민국 국적인 조씨의 방북을 허가해야 한다. 박 회장은 “내년 1월까지 구체적인 방안을 최종 확정한 뒤, 한국 정부에 조씨의 방북 허가를 요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워싱턴/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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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문재 회장이 진료실 앞에 놓인 중국의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루쉰 조각상 앞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루쉰은 일본의 의과대학에서 공부했으나, 이후 “중국인의 신체가 아닌 정신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며 문학가로 활동했다. 로체스터/권태호 특파원


[한겨레가 만난 사람]

북한 의료지원 재미 의사 박문재씨




» 박문재 회장이 진료실 앞에 놓인 중국의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루쉰 조각상 앞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루쉰은 일본의 의과대학에서 공부했으나, 이후 “중국인의 신체가 아닌 정신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며 문학가로 활동했다. 로체스터/권태호 특파원


미국 미시간주 로체스터에서 내과의사로 일하고 있는 한인 의사인 박문재(78) 조미의학과학교류촉진회(재미동포연합 산하) 회장은 1999년부터 해마다 재미동포 의사들을 인솔해 5월 초 북한에서 열리는 의학학술대회에 참석하고 있다.

재미의사들은 이때마다 의약품과 의료기기 등을 북한에 전달한다. 학술대회에서는 재미의사들이 새로운 수술법과 치료 성과 등을 발표하고, 북한도 한의학과 서양의학을 접목한 분야 등에서의 연구실적을 소개한다. 학술대회가 끝나면 재미의사들은 제3인민병원 등 평양의 병원과 의과대학 등을 방문해 북한의 젊은 의사들에게 의료기기 사용법 등을 가르치고, 직접 환자들을 진료하기도 한다.

박 회장은 내년 5월 북한 행사를 위해 벌써부터 방문을 원하는 의사들과 기금을 모으는 등 준비작업에 나섰다. 또 학술대회와 의료지원에 국한했던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성악가 조수미씨와 함께 방북해 북한 음악인들과 합동공연을 여는 문화행사까지 추진하고 있다. 로체스터의 진료실에서 지난 10일(현지시각) 박 회장을 만났다.


■ 북한 지원 활동 박 회장의 북한 돕기는 1997년부터다. 96년 기독의료선교회의 일원으로 인도 쪽에 의료지원을 갔다 오자, 소식을 들은 북한 유엔대표부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우리도 좀 도와달라”는 요청이었다. 박 회장 등 재미동포 의사들이 이에 화답했다. 당시 북한의 식량위기로 재미동포 사회에서도 ‘북한 돕기’ 분위기가 형성돼 교회 등에서 모은 돈으로 의료기기와 약품을 구입해 직접 전달했다. 그리고 99년부터는 이를 공식화해 매년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학술대회를 연다. 지금까지 응급차, 엑스선·초음파·심전도·내시경 장비 등을 전해줬고, 빌 클린턴 행정부 때에는 젊은 북한 의사들을 미국에 초청해 한달 정도 머물게 하면서 심장수술 등도 가르쳤다.

그러나 조지 부시 행정부 이후 북한 주민들에 대한 비자 발급이 엄격해지면서 북한 의사 초청이 여의치 않다. 박 회장은 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한 의사들이 함께 방북할 수 없게 된 것에 대해서도 무척 안타까워했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남한 의사들과 함께 학술대회와 의료지원 활동을 폈으나, 지금은 한국 정부가 방북 허가를 내주지 않아 남쪽 의사들이 동참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북한 지원 분위기도 달라졌다. 그는 “이명박 정부 이후 동포사회도 분열됐다. 이전에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사람들과 함께 북한도 방문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갈라져 버렸다”며 “교회 모금에도 어려움이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박 회장은 새 힘을 내고 있다. 최근 북-미 관계가 개선될 조짐을 보이면서 유화적 분위기가 형성된데다, 재미한인의사협회 등을 통한 홍보활동 강화로 매년 20여명이던 방북 참가 의사들의 수가 내년에는 50명을 넘어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1.5세와 2세 등 젊은 의사들의 동참이 눈에 띈다. 그는 “지금까진 주로 북한에 친지를 둔 1세대 재미의사들이 가족방문을 겸해 참가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2세 이후로 내려가면 한 민족이라는 의식도 옅어지는데, 내년 방북을 계기로 북한 돕기 바람이 2세 재미의사들에게까지 퍼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97년 북한 요청으로 시작뒤 기기·약·의술 전달
“이명박정권선 남한의사들 함께 못해 안타까워”
‘남한에 대한 태도 바꿔야 한다’며 북에도 일갈



■ 시급한 대북지원 박 회장은 북한에 결핵이 많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북한은 70년대에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결핵 등 전염병을 극복한 모범국가로 인정받은 나라였다. 그는 “식량이 부족하다고 해서 굶어죽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영양이 부족하면 면역력이 떨어져 병에 잘 걸려 전염병이 돌게 된다. 북한에 결핵·폐렴 등 세균성 질병이 늘어나는 것이 식량부족과 연관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결핵은 6개월은 계속 약을 먹어야 낫는 병인데, 의사들 일부가 지원하는 정도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갈 때마다 좌절감을 느낀다. ‘이렇게 미약한 부분에서 조금 돕는 게 무슨 도움이 되는가? 자기 위안만 삼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북한 사람들은 약을 많이 쓰지 않아 약이 잘 듣는다”며 “남쪽 정부가 항생제 공장을 북한에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최근 북한군 병역 신체검사에서 대상자의 상당수가 입대 자격미달이었는데, 지적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라며 “두뇌 발달 시기인 4~5살 때인 96~97년에 대기근으로 영양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세대다. 그 시기가 지나면 영양공급이 이뤄져도 늦춰진 두뇌 발달이 회복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연간 100만t의 식량이 있으면 한 사람도 굶지 않는다”며 “돈으로 환산하면 4억달러 정도인데, 남한에서 식당 쓰레기 치워주는 회사들의 연간 예산 합계가 4억달러”라고 비교했다.

박 회장은 또 “북한도 감사할 줄 안다”며 “개성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도로변에서 15살쯤 된 예쁜 소녀가 양떼를 몰고 가다 우리를 보고 ‘어디서 오셨습니까?’라고 물어 ‘미국에서 온 동포’라고 했더니, ‘아, 이 양들이 미국 동포들이 보내준 양들의 새끼들’이라고 하며 무척 반가워하더라”는 일화를 전해줬다. 그는 “‘식량을 보내면 군에 다 들어가 시민들에게는 돌아가지도 않고, 김정일이 하사한 줄로만 알고 남쪽이 지원한 건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북한 사람들도 알 건 다 안다. 받으면 고마워한다. 그렇게 벽을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가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박 회장은 지난해 학술대회 축사에서 “꽁꽁 묶어놓고 있으면 되느냐? 개방을 해야 한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뒤 지금까지 (북한이) 뭘 했느냐. 북한도 태도를 바꿔야 한다. 금강산 관광객 사망에 대해서도 사과하고. 남한 대통령을 향해 ‘역도’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지나치다”, “남한이 식량을 보내면 북한의 철광석을 포항에 보내거나 하는 성의 표시라도 하면 대북지원을 강조하는 남쪽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북쪽 당국자들을 꾸짖다시피 했다. 나아가 그는 북한 당국자들에게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며 국방비 5%를 매년 줄이겠다고 먼저 말할 순 없느냐”고 다그치기도 했다.

박 회장은 “북한도 이명박 정부 들어서 혼이 나, 남북관계에 적대적인 정부가 들어서면 어떻게 되는지 제대로 경험했다”며 “그래서 이제 남쪽에 유연한 정부가 들어서면 태도가 이전과는 많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나타냈다.

■ 독특한 북한 사회 박 회장은 북한 사회는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독특한 체제라는 점을 들면서 “북은 절대로 쉽게 붕괴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평양에 가면 대학생들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건설 노동현장에 가서 노력봉사를 합니다. 공장에 전기가 나가 가동되지 않자, 노동자들이 모여 ‘전기가 들어오는 이웃 공장에 가서 일을 도웁시다’라고 결의해 그쪽으로 갑니다. 이게 다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라고 박 회장은 말했다. 박 회장은 이를 “조선민족의 독특한 가족적 유대감이 사회주의와 결합한 게 북한식 사회주의”라며 “서구의 시각으로는 북한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고 정의 내렸다.


연 4억달러만 있으면 북주민들 굶어죽지 않아
유화적 관계로 북 변화시키는 게 평화통일의 길
“남북이 잘살아야 해외동포들도 더 당당히 살것”



또 북한 주민 대부분이 남한이 잘산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박 회장은 전했다. 평양에 현대자동차·삼성전자 제품이 심심찮게 보이고, 암암리에 접하는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박 회장은 “그러나 북한 사람들이 남한을 부러워하지 않는다”며 “드라마를 통해 잘사는 모습뿐 아니라, 남한 사회의 불평등한 모습 등도 함께 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평등 사상이 뿌리깊은 북한에선 식당 종업원을 부를 때도 ‘접대원 동무, 물 좀 더 주시오’라고 할 정도로 예의를 차려야 한다. 4성 장군이나 광부나, 은퇴를 하면 사는 게 비슷해진다. 또 현재 절대부족 현상에 시달리지만, 의료, 노후보장, 자녀교육 등을 사회가 모두 책임지는 구조여서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걱정과 경쟁에 따른 스트레스가 적어 북한 사람들 대부분이 체제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중국의 제도를 따라하지 않는 이유도 우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최고위층의 붕괴를 우려하기 때문이지만, 중국이 사실상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면서 극심한 빈부차로 사회가 불안정해지는 것을 보고 그런 사회를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박 회장은 설명했다.

■ 남북 융합 박 회장은 북한을 방문하면서 통일에 대한 고민이 더욱 커져 별도의 논문을 펴내는 등 북한 사회와 통일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를 계속해왔다.

“북한 고려호텔에서 아침에 잠이 깨면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들리는데 모두 다 우리말입니다. 택시를 부르면 약속시간보다 15분쯤 늦게 옵니다. 북한에도 ‘코리안 타임’이 있는 것이지요. 남과 북이 60년간 많이 달라졌다고 하나, 우린 같은 핏줄이고 비슷한 점이 너무 많아 합치기만 하면 금세 융합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그는 자신했다. 박 회장은 “그러나 흡수통일이나, 북한의 갑작스런 붕괴로 남한이 점령군처럼 북한에 들어간다면, 더 많은 문제와 사회불안이 생겨날 겁니다.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고”라고 우려감을 나타냈다. 박 회장은 “평양 인민대학습당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미국이 우리를 치면, 2400만의 자폭자를 각오해라’라는. 그 말이 그냥 하는 이야기로 들리지만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평양은 한국전쟁 때 미군의 공습으로 초토화가 돼 평양 주민들 대부분이 가족이나 친지를 잃은 경험이 있다”며 “그래서 북한에선 미국의 침공에 대한 불안감이 상상 이상으로 커, 한-미 군사훈련을 할 때는 직장인들이 총을 메고 출근하며, 공군은 전투기에 앉아 대기상태를 유지하고, 대포에는 장전이 돼 있다”고 전했다.

박 회장은 “어느 사회에서나 군은 보수적입니다. 흡수통일이나 미국의 침공에 대한 불안감은 군이 가장 큽니다.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군의 목소리가 커지고, 이는 또다시 남북관계 경색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게 됩니다”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유화적인 남북관계를 형성해 북한 내 온건론자들의 힘을 키우고, 미국의 원조와 대외교역을 통해 북한의 경제를 발전시켜 국민소득도 높이는 것이 북한 사회를 변화시키고 ‘평화통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그는 “북한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현재 남한의 20분의 1인데, 3분의 1 정도까지 끌어올리면 남북 융합이 쉬워집니다. 한민족이 원래 부지런하고 똑똑해 남한이 도와주면 쉽게 됩니다. 요즘 남한의 일부 젊은이들은 ‘디엠제트(DMZ·비무장지대) 아래에서 우리만 잘살자’고 한다는데, 북한이 못살면 남한 혼자 잘살 수 있습니까? 또 북한이 저 상태로 계속 있으면, 한국(코리아)의 위상이 올라가는 데도 한계가 있고 우리 같은 동포들이 좀더 당당하게 살기도 힘들어집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얼마 전 골드만삭스 보고서를 보니 ‘20~30년 뒤에 한반도 통일이 이뤄지며, 또 통일 뒤 40~50년 뒤에는 국방비 감소와 지하자원 활용 등으로 인해 한국의 국내총생산이 일본을 능가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저도 그렇게 봅니다”라며 “다 떠나서 우리 동포 아닙니까?”라는 말로 오랜 인터뷰를 끝맺었다.


인터뷰-로체스터/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 박문재 박사:

남·북·미·일에 가족이산…현대사 아픔 고스란히 겪어


박문재 회장이 북한 돕기에 발벗고 나서는 배경에는 아픈 가족사가 깔려 있다. 박 회장 일가에는 한국 현대사의 상처가 그대로 새겨져 있다.

박 회장의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고향인 제주를 떠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살았고, 거기에서 박 회장의 아버지를 길렀다. 박 회장의 아버지는 해방 뒤에도 일본을 자주 방문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일본에 머물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온 뒤 노래를 잘하던 당시 여고 3학년 누나는 인민군 교향악단에 들어갔다가 가족과 헤어졌다. 박 회장의 어머니는 남은 4남매를 데리고 시가가 있던 제주로 피난을 떠났다. 중학생이던 박 회장은 군수공장에서 수류탄 포장공으로 일하다 우연히 미군 통역병이 되어 1년 반 동안 미군 포로수용소에서 일했다. 미군과의 생활은 어린 박 회장에게 정서적 불안과 민족적 모욕감을 안겨줬다. 그는 제주 강정마을에 미군 해군기지가 들어오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강정 해군기지는 중국과의 대결에서 헤게모니를 잡으려는 미 국방정책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박 회장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도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일본에서 총련의 신세를 졌기 때문이다. 전쟁 전엔 북한으로부터 ‘반동’ 소리를 들었던 아버지는 이번엔 남한으로부터 ‘빨갱이’로 몰려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아버지는 결국 일본에서 생을 마쳤다.

1961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박 회장은 미국 정부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네소타주립대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리노이주립대와 미시간주 오클랜드대학에서 교수를 하면서 어머니와 동생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였다.

북한에서 유명 성악가가 된 누나와는 헤어진 지 43년 만인 1993년 평양에서 상봉했다. “순안비행장에 내렸는데, 저 멀리서 날 보고 막 뛰어오는 사람이 있더라. 한눈에 나도 누나인 줄 알아봤다”고 그는 말했다. 10대였던 남매는 백발 노인이 되어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출처:한겨레신문 2011년 11월21일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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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겨레신문 2011-11-19]

민족통신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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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조수미의 북한공연은 남북이 서로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잘 성사되어 통일의 물꼬를 틔우는 행사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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