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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라남의 열풍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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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123회 작성일 22-09-13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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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편

4

 

씨비리의 밤은 깊어가고있었다.

렬차는 옹근 이틀동안 로씨야의 대지를 달리였다. 태고연한 수림지대와 밀밭이 펼쳐진 농촌마을, 성당의 뾰족지붕과 고대의 성곽이 늘어선 도시들을 번갈아 누비며 수천리를 달린 렬차는 벌써 일란스까야역을 가까이하고있었다.

리명국은 렬차침실벽에 등을 기댄채 인편으로 보내온 서정후의 편지를 읽고있었다. 이미 두번이나 곱씹어읽었다. 원동지구를 자주 드나드는 로씨야담당 외무성일군을 통해 보내온 서정후의 편지는 여러문장이나 되였으나 한마디로 쥐여짜면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는 글이였다.

어째서 새삼스레 이런 편지를 보내오는지 처음에는 잘 리해할수 없었다.

서정후는 편지마감부분에 곽경두문제를 덧붙여썼다. 그가 지금 《HM기》설비들을 해결하기 위해 한몸을 내대고 서방시장에까지 뚫고 들어가고있는데 사업상 편의를 위해서 그를 현재의 부사장자리보다 한등급 더 높은 자리에 끌어올리도록 힘써 달라는 부탁이였다.

그는 끝으로 이렇게 맹세를 다졌다.

《…저는 지금 몹시 격동된 심정입니다. 통신자료를 보니 위대한 장군님의 로씨야방문에 대한 이야기로 벌써 온 세계가 끓고있습니다. 그이의 위대성앞에 세계가 머리를 숙이게 될것입니다.

저는 위대한 장군님을 모신 높은 민족적긍지를 안고 힘을 내여 일하겠습니다. 요즘 서방과학자들의 태도가 달라져서 〈HM기〉의 기술자료를 얻어올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곽경두가 그것만 물어오면 저도 라남동지들의 모범을 본받아 최단기간내에 서방기술을 압도하는 우리 식〈HM기〉를 개발하여 저의 지난날의 과오를 씻으려고 합니다. 만약 물어오지 못하는 경우에도 저의 여생을 다 바쳐 기어이 새로운 형태의 우리 식 〈HM기〉를 개발하겠다는것을 굳게 맹세다집니다.》

칼날같은 날카로운 획으로 길죽길죽하게 박아쓴 서정후의 빨간색 원주필글은 마치 혈서처럼 리명국의 가슴을 자극하였다.

서정후가 라남의 성과에서 자극을 받고 무엇인가 큰일을 해보자고 단단히 결심을 한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도 서방기술자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료를 얻어오면 좋은 일이지만 제국주의자들에게서 환심을 기대해서는 안되는것이다.

리명국은 서정후의 편지를 차창탁에 올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침 이때 김정일동지께서 부관을 데리고 들어오시였다.

리명국이 급히 일어나 차창탁에 널려있는 물건들을 거두고 옷매무시를 바로하였다.

《얼굴색이 좋지 않구만.… 렬차려행하기가 뻐근하지요?》

김정일동지께서 리명국의 안색을 살피며 물으시였다.

《일없습니다. 저희들이야 뭐랍니까. 모두들 장군님의 건강을 념려합니다.》

리명국이 걱정스럽게 말씀드렸다.

그이께서는 렬차운행을 하는 지난 이틀동안도 휴식을 모르고 바쁘게 지내시였다. 수원들을 부르시여 매일 매시각 사업방향을 제시하셨는가 하면 조국에 있는 당과 국가의 책임일군들을 전화로 찾으시여 사업을 료해하고 제기된 문제에 결론을 주시였다. 그리고 중요역을 지나실 때마다 수령님의 외교활동과 교시들을 상기시키며 일군들에게 귀중한 말씀을 해주군 하시였다. 한편 수시로 로씨야 영접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국제문제에 대한 정치담으로부터 조로인민들의 생활풍습에 대한 해학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담화를 나누시였다.

그러시느라 잠시도 휴식하실 짬이 없었다.

《라남지배인은 외국에만 가면 입맛을 잃는다고 하는데 비서동무야 그런 체질은 아니겠지?》

김정일동지께서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씀하시였다.

《전 아무거나 다 잘 먹습니다.》

리명국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을 올렸다.

《그러면 됐소.》

그이께서는 차창에 눈길을 돌린채 잠시 묵묵히 계시다가 무거운 어조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오늘 원동련방구 대통령전권대표 뿔리꼽스끼와 원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라남에서 생산하는 유압식종합채탄기 말이 나왔습니다. 공업지대와 멀리 떨어진 원동변방 산골탄광들에선 채탄기가 없어 고생한다고 합니다.》

그이께서는 안색을 흐리고 오래동안 생각에 잠겨계시였다.

(장군님의 기분이 왜 저렇게 무거우실가?)

리명국은 은근히 불안을 느끼였다.

한동안 말씀이 없으시던 그이께서 차창탁에 손을 얹으며 조용히 뇌이시였다.

《그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로씨야에선 원동변방사람들의 생활조건이 제일 불리한것 같습니다. 그곳엔 조선사람들도 있지요. 여기 씨비리대지엔 조선사람들의 유골이 많이 묻혀있습니다.》

리명국은 심각해졌다. 그는 불현듯 긴장해진 마음으로 그이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였다.

《원동변방뿐아니라 씨비리의 여러 도시와 농촌들엔 오랜 옛날에 원동으로 넘어온 조선이주민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있습니다. 나는 지금껏 최강철동무 생각을 하다가 왔습니다. 라남의 기사장말이요. 그 동무의 중조할아버지가 리조말기 씨비리로 이주해온 사람이라고 했지요. 생각이 나지 않소?》

리명국은 부지중 긴숨을 내그었다. 그도 씨비리대지에 깃든 조선이주민들의 수난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있었다.

10여년전 최강철의 간부사업문제로 주혁민책임비서가 그의 자서전과 가계문건을 당중앙위원회에 올려보낸적이 있는데 거기에 우리 인민들의 해외이주력사의 일단이 깊이 씌여있었다.

먼 옛날부터 로씨야 연해주에서 조선사람들이 살고있었지만 원동으로 넘어가는 조선이주민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것은 리조말기부터이라고 한다. 당시 쇄국정치를 하던 리조봉건정부는 두만강을 넘어서는 월경자들에 대해서 례외없이 극형에 처하였다고 한다. 최강철의 자서전에는 이렇게 씌여있었다.

《우리 집에는 누구인가 쓴 해외이주실록이 있다. 거기에는 〈1864년 봄, 무산사람 최은실, 경흥사람 양응범 두 사나이가 기근을 이기지 못해 금령을 무릅쓰고 은밀히 도강하여 중국의 훈춘을 거쳐 로씨야 연해주로 넘어갔다.〉고 기록되여있는데 최은실이가 바로 나의 증조할아버지이다.》

최은실은 그때 앉아서 굶어죽느니 차라리 목숨을 내걸고 월경하여 빈땅이 많은 원동에서 황무지라도 개척하여 보려는 생각에서 씨비리에로의 이주를 결단하였던것이다.

그후 1869년 대흉년이 들어 함경북도 6진일대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월경하여 최은실을 찾아갔다.

사람들이 갑자기 밀려들자 최은실은 당황하게 되였다. 그들을 거처시킬 집이 없고 먹일 쌀이 없어 추위와 굶주림의 무서운 시련을 겪어야 했다.

1년사이에 이주민이 100여호로 늘어나 자연히 추장격으로 된 최은실은 할수 없이 로씨야관리를 찾아가 겉보리 몇섬을 꾸어 100여호 인가에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이듬해에 농사를 망쳐 이주민들은 굶주림과 함께 빚단련에 시달리게 되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헤여지고 부부가 생리별하고 인가가 전멸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중국인 토호들과 로씨야관리들이 얼마간의 식량을 주고 조선의 부녀자들을 사갔다. 이때문에 딸과 안해를 동시에 팔아서 집안의 목숨을 이어가는 일도 있었다.

최강철의 자서전에는 계속하여 이렇게 씌여있다.

《최은실,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로령에 넘어온 젊은 과부와 관계를 맺어 아들을 보았다. 그 아들이 나의 할아버지이다. 원동땅에서 조선이주민들이 얼고 굶으며 죽어갈 때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왼땅을 보아서 얻은 제 자식 하나도 살릴 길이 없어 로자를 변통하여 증조할머니를 조선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렇게 되여 다시 은밀히 조선으로 건너온 증조할머니는 어린 자식을 데리고 지주집드난살이로, 어물장사로, 음식점 식모로 별의별 고생을 다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열다섯살때 어머니를 잃은 나의 할아버지 또한 그때부터 품팔이군으로 함북, 함남 일대를 정처없이 떠돌아다니였다. 그 고달픈 방랑길에서 어떤 녀인과 인연을 맺어 아들을 보게 되였다. 그 아들이 나의 아버지이다.

할아버지는 그후 처자를 먹여살리기 위해 품팔이도 하고 행상도 하다가 1926년 어느 추운 겨울날 어대진바다가에서 객사하였다. 그무렵 할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졸지에 고아가 된 아버지는 문전걸식하며 방랑하다가 라남제19사단에서 양마사관리공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15살 어린 나이에 그 소굴로 찾아들어갔다. 나의 아버지는 일본병정들에게서 인간이하의 천대를 받은 가장 불행한 피착취계급, 피압박자였다. 하지만 악명높은 라남제19사단의 마사원인것으로 하여 나는 늘 떳떳치 못하였다. 일부 사람들이 당신의 아버지가 기른 일본군마의 발통밑에 숱한 조선사람들이 짓밟혀 목숨을 잃었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오한에 온몸을 떨군 한다.

나의 아버지는 1944년 원인 모를 병으로 급사하였다. 나는 1945년 봄, 조국광복을 몇달 앞두고 유복동으로 이 세상에 태여났다.

이것이 어머니에게서 들은 나의 가계이다.

털어놓고 말하여 나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대한 애착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웬일인지 증조할아버지에 대해서만은 련민과 혈육의 정을 가지고 자주 생각하게 된다.

그는 씨비리 어디에서 어떻게 숨졌을가? 해외이주실록에는 그것이 밝혀져있지 않다.

아, 씨비리광야의 무주고혼이 된 증조할아버지, 생각하면 가슴이 찢기는듯 하고 눈물이 난다.》

이것이 10년전 리명국이 김정일동지께 올린 최강철기사장의 자서전의 한 대목이였다.

리명국은 씨비리려행을 하는 지난 이틀동안 최강철의 자서전과 씨비리땅에 묻힌 조선이주민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이께서는 씨비리대지에 깃든 민족의 수난사를 오래도록 생각하다가 아픈 가슴 묵새기지 못해 여기로 오신것 같았다.

렬차는 여전히 어둠이 깃든 씨비리광야를 달리고있었다. 철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봇나무숲의 푸른 잎사귀와 상아빛 줄기들에 달빛이 부서져 차창밖은 마치 흰 눈발이 날리듯 끊임없이 희뜩거렸다.

먼 하늘에 띠염띠염 널려있는 별들과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상현달과 언뜻언뜻 차창을 스치며 지나가는 은빛 봇나무들… 리명국은 그 모든 씨비리의 밤풍경에 우리 민족의 어제와 오늘을 비쳐보며 생각하였다.

(옛날과는 달리 오늘은 우리모두가 자기를 보호해주고 사랑해주는 위대한 어머니조국을 가진 민족적긍지를 안고 씨비리대지를 자랑스럽게 려행을 하고있다.)

리명국은 가슴이 뿌듯이 부풀어올랐다.

김정일동지께서 창탁을 짚으며 일어서시였다.

《모스크바로 가는 도중 우리는 옴스크에 내려 참관사업을 하자고 하는데 그 도시에도 조선사람들이 적지 않게 살았습니다. 시인 조기천이 거기서 사범대학을 다녔지.

정말 가도가도 끝이 없는 씨비리대지로군. 허허허… 과연 넓은 대지 씨비리요.》

그이께서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그전에 최강철의 증조할아버지는 빈몸으로 몰래 강을 건너가 갖은 고생을 다하다가 씨비리의 고혼이 됐소.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도 수난의 민족력사와 함께 비참한 운명의 길을 걸었지. 하지만 최강철의 대에 와서 밝은 세상을 맞이했소. 그때문에 그는 수령님의 은덕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깊이 알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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