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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별의 세계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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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4,428회 작성일 22-10-2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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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2

그는 피흘리는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속에 있었다. 웃고 떠들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은 대낮에 홰불을 들고도 찾을수 없는 광주포로수용소였다. 죽음과 고통은 늘 곁에 있었고 그때문에 그는 언제나 고통받는 사람들을 더 잘 리해하였다. 그들은 행복을 몰랐다.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았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은 넋을 잃고 신심을 잃고 미래를 잃은 사람들이였다. 최동환과 같은 사람이 바로 그러했다.

1952년 2월 진서는 광주포로수용소에서 형식상의 재판을 받고 20년형으로 선고되였다. 사실대로 불었으면 사형판결이 내려질것이였으나 고등군법회의에서 나이와 경력을 속이고 이름까지도 바꾸었다.

전직 평양시 중구역민청교양지도원

나이 22살

이름 김국홍

그가 평남도맹산군민청위원장, 도민청부위원장, 중앙당학교졸업경력까지 다 밝혔더라면 《악질빨갱이》로서 엄중시되여 리질로 죽어가던 몸을 더는 지탱해내지 못했을것이다. 이번에도 동지들이 그의 가짜경력을 확인해주었다.

그러나 위험은 매일, 매 시각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변절자들이 포로수용소를 쏘다니며 간부들을 색출해냈고 때로는 느닷없이 이름을 소리쳐부르기도 했다.

한번은 진서의 이름도 불렀다.

《김진서동지, 어데 있소?》

그날 그들은 철조망보수작업에 끌려나가고있었다. 수천명의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람루를 걸치고 찬바람에 오그라든 몸을 가까스로 지탱하고있었다. 눈확이 푹 꺼져들어가고 어깨뼈가 망자루같이 삐여져나온 그 사람들속에서 아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김진서동지, 어데 있소?》

그렇게 소리친것은 민청전라남도위원회에서 함께 일하던 한월수(남부군에서 나팔수로 싸운 한월수와는 다른 사람)였다. 하마트면 걸음을 멈추며 그쪽으로 머리를 돌릴번 하였다. 방봉연이 제때에 그의 팔목을 잡으며 《가만 있어요, 국홍동지.》 하고 소곤거렸다. 진서의 죽음을 멈춘 구아니찡 몇알때문에 피투성이가 되여 쓰러졌던 그였으나 의식은 또렷했다. 그들은 머리를 숙인채 서로 부축하며 천만근으로 무거워진 발을 질질 끌고갔다. 여기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면 그는 곧 산 사람들의 명단에서 지워져버리고 만다. 포로수용소 소장 헌병대위 송인섭은 포로들의 최저식비마저 엄청나게 떼여먹고 죽은 사람들의 수자도 10일, 20일씩 산 사람들속에 포함시키는것으로 퇴직후의 밑천을 마련하고있었으므로 하루종일 살기 띤 눈으로 쓰러지는 사람들을 살피고있었다.

쓰러지면 끝장이였다. 어느새 사병들이 달려들어 숨이 붙어있건말건 어데론가 끌어가는것이였다.

동지들이 한사코 막아나서도 소용이 없다. 짚검불같은 그들이여서 총탁판에 맞으면 픽픽 쓰러져 더 많은 죽음만을 가져오는것이다.

그들은 철조망밖으로 나갔다. 사처에 세워진 망루에서 기관총들이 음울한 도끼눈으로 썰렁한 벌판을 노리고있고 등뒤에서는 경비병들이 추워서 몸을 떨며 발을 구르고있었다. 누데기옷을 걸친 포로들은 땅을 팠다. 철조망보수가 아니라 바로 자기들의 무덤을 파고있다는것을 진서는 깨달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것을 바로 이렇게 묻어버린다는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언 땅이 쪼각쪼각 떨어지고 자갈돌들이 불꽃을 튕기며 짱짱 울었다. 한점한점 뜯어내고 허벼내여도 구뎅이는 생기지 않는다. 곡괭이를 쳐들다가 그대로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차라리 죽음을 맞는것이 모진 고통과 굴욕을 참는것보다 더 편했던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값없이 죽어가야만 하는가. 땅바닥에 쓰러져 흐릿해진 눈으로 동지들을 바라보며 애처롭게 웃음짓는 한사람을 그는 억지로 잡아일으켰다.

《일어서오. 쓰러지면 안돼. 이러자고 피흘리며 싸워왔소?… 산에서 싸우는 동지들을 생각해야지. 응?!…》

경비병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많은 동지들이 울바자처럼 그를 막아주었다. 진서를 도와 또 몇사람이 쓰러진 그를 잡아일으켰다. 견디자. 동지들, 서로 부축해서 견디여내자. 그는 풀대같이 휘청거리면서도 계속 중얼거렸다. 그렇게 맥없이 쓰러져버리려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꼬집었다.

그때 경비병들이 그들쪽으로 걸어왔다. 사람들이 긴장해졌다. 쓰러졌던 사람을 끌어가려고 오는것이라고 생각하고 말없이 둘러서며 진서가 부축하고있는 사람을 가리우려고 했다. 순간 진서는 경비병들이 끌고가는 한사람과 눈빛이 마주쳤다. 경비병들은 그저 그들이 일하는 곳을 통과하고있을뿐이였는데… 무엇인가 눈치채고 걸음을 멈추었다. 진서의 두눈에서 불꽃이 일고 끌려가던 사람이 말뚝처럼 박혀버린것이였다.

《최동환?!…》

두눈에서 번개불이 일고 가슴속에서는 뢰우가 터졌다. 이발이 떡떡 마주치고 다리가 후둘거렸다.

최동환도 그를 알아보았다. 왼쪽볼의 흉터와 탄환이 뚫고나간 턱이 경련적으로 움씰거리고있었다. 아래웃이가 부서져나가고 혀가 끊어진 그의 쩍 벌려진 입에서 쌕쌕하는 소리가 새여나온것은 다음순간의 일이였다.

《뭐야, 넌 누구야?》 경비병중의 하나가 소리쳤다. 《왜 쏘아보는거야, 개자식!》

아마도 그자는 진서가 자기들을 무섭게 쏘아보며 폭동을 선동하려는것이라고 생각한듯 날래게 총구를 들이대였다. 그런 일들이 뜨문했던것이다.

삶에 대한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최후의 힘을 짜내여 경비병들을 물어뜯고 총을 뺏으려들다가는 무리죽음을 당하군 했다. 한사람의 절망적인 의기때문에 숱한 동지들이 집중사격을 받는것이다.

그런 일로 하여 수용소안에서는 벌써 여러번 심각한 토론이 있었고 김진서자신이 무모한짓을 한사코 반대해왔었다.

진서는 오직 최동환 그자만을 노려보고있었다. 최동환의 침울한 눈길도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고있었다. 고통과 번민, 치욕과 절망… 오직 눈빛으로만 의사를 전달할수 있는 그였다. 험상궂게 된 얼굴의 시꺼먼 볼따구가 이즈러지고 더더욱 끔찍하게 벌려진 입에서는 소리없는 웨침이 김진서 그를 고발하는듯 싶었다.

《이자는 김진서요. 군정대학책임강사로 있던 놈이요. 도당과 남부군사령부와 련계가 깊던 놈이니 당장 끌어다 문초하시오!》

적들이 간부급에 속한 사람들을 색출하는것은 차일평과 최동환의 변절후 급기야 새로 정한 아지트들과 련락통로를 알아내자는데도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경비병들은 진서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무서운 기세에 위압되여 최동환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총부리를 내대고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쏴갈길테다!》하고 위협하며 최동환을 끌고 멀리로 가버렸다.

진눈까비는 차츰 푸실푸실한 눈송이로 되여 떨어졌다. 맨살을 드러낸 찢어진 옷들이 흠뻑 젖어들고 살을 에이는듯 한 찬바람은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누데기옷들이 꽛꽛해지고 꿰여진 신발앞코숭이로 쑥 삐여져나온 발가락은 퍼렇게 얼어서 짓물러졌다. 그래도 땅을 쪼아내야만 한다. 멀건 소금국에 보리쌀이 드문드문 떠있는 기아급식으로 수염까지 말라가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무덤을 파고있다. 경비병들도 작업을 독촉하지는 않는다. 구뎅이야 깊든 얕든 뼈만 남은 사람들을 묻어버리기엔 족한것이고 중요하게는 포로들에게 고통을 주는것이 기본이기때문이다. 독촉하지 않아도 포로들은 움직인다. 움직이지 않으면 얼어죽고만다.

작업장에서 얼어죽든 천막안에서 얼어죽든 죽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최후의 단말마적몸부림으로 가까이 다가온 경비병을 물고늘어지며 경비병들은 포로들속에 들어서기를 겁내는것이다.

경비병들 대여섯이 진서쪽으로 오고있었다. 변절자 최동환이 자기에 대해서 다 분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말은 못해도 손으로 쓸수는 있는것이다. 진서를 족치면 남부군의 중요간부들 혹은 도당의 련락선을 알아낼수 있다고 고발했을것이다. 김진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것을!…

《동지들.》하고 진서는 긴장하여 굳어지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가만들 있으시오. 아까 그 변절자가 나를 고발한것같은데… 어떻게 하든 견디여내겠소. 괜히 희생을 내지 않게 해주시오. 부탁이요.》

어느새 헌병장교를 앞세운 놈들이 다가왔다. 아까 진서의 가슴팍에 총부리를 들이대고 겁에 질려 으름장을 놓던 병졸이 진서를 가리켰다.

《저놈입니다, 대위님.》

그제야 진서는 수용소장 송인섭이 직접 나타났다는것을 알았다. 랭담하고 잔인하기로 유명한 헌병대위 송인섭, 그런데 그자의 얼굴은 류달리 창백했을뿐 그 어떤 포악성도 찾아볼수 없었다. 추위때문인지 엷은 입술을 바르르 떨며 녀자같이 째지는 소리로 그자는 말했다.

《끌어갓!》

그는 반항하지 않았다. 동지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도 부질없이 소동을 피워서는 안된다. 물론 매 순간 적들과 맞서 욕설을 퍼붓고 뼈가 으스러지면서도 항거하는 동지들도 있다. 그들의 담찬 기개, 불굴의 정신이 동지들을 고무하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옆의 동지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화김에 집단적인 학살도 서슴지 않고 감행하는 적들이다.

3개월여의 포로수용소생활이 바로 그에게 이것을 교훈으로 새겨주었다. 개별적항거가 아니라 집단적항의투쟁이 필요한것이다. 그러자면 조직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그 조직을 뭇게 된것은 이후 대전형무소로 옮겨갔을 때였다.

눈발이 굵어졌다.

진서는 작업장에서 멀리 떨어진 개울가로 끌려갔다. 그런데 그곳엔 통역을 데리고 서있는 한 미군장교가 있었다. 멀찌감치 떨어진 소로길에 찦차가 서있는것을 보면 포로수용소에 급히 볼 일이 있어 달려온게 분명했다. 저 미국놈은 왜 여기로 왔을가. 나를 저놈에게 끌어온것일가?… 진서는 두눈을 쪼프리고 자기쪽을 유심히 살피고있는 미군장교곁을 스쳐갔다. 금시라도 《스톱!》하고 소리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놈은 그저 묵묵히 쏘아볼뿐이였다. 돌덩이같이 랭담하고 무표정한 놈이였다. 그런자들이 더더욱 포악스럽다는것을 진서는 경험에 의하여 알고있다. 도대체 어쩌자는걸가?… 그냥 걸어갔다. 그런데 그를 멈춰세운것은 미군장교가 아니였다.

《서라!-》

가는 웨침소리, 진서는 멎어섰다. 개울가의 징검돌들이 얼음버캐로 덮여있고 지난해의 쑥대며 원추리들은 어인 일인지 마구 짓이겨져있다. 점점이 널려진것은 피자국이나 아닌지?… 여기서 누군가를 잔인하게 취조했던것 같다.

세찬 눈발이 그 모든것을 덮어버리고있다.

수용소장이 쿨럭쿨럭 괴롭게 기침을 깇고나서 중얼거렸다.

《난 이런 날씨가 질색이락꼬.》

그자가 무엇때문에 그리고 누구 들으라고 한 소리인지 알수 없었다.

진서는 두 병졸에게 억지로 끌려오다싶이 했으므로 찬 공기를 삼키며 한숨돌렸다. 어쨌든 심상치 않다. 눈두덩이 내려덮인 미군장교가 뒤쪽에서 뭐라고 했다. 그러자 수용소장이 그한테 다가서며 또 괴롭게 기침을 깇었다.

《몹시 춥지 않능겨?》 그자가 경상도말투와 어중간인 소리로 물었다. 《추워요. 여긴 몹시 추워, 그러니 오래 끌것 없지 않능기?… 차일평동지 알제?… 최동환은 당신을 알아봤닥 하늬더.》

진서는 아무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척 했다. 꾸며대고 흉내를 내는 경상도 말투, 추위에 바들바들 떨고있는 창백한 얼굴, 째지는듯 유리를 긁는듯 한 아츠럽고 가는 목소리, 그것들 모두가 넌덜머리나게 한것이였다. 어느새 그자의 입술은 퍼렇게 질려있었다. 가는 손가락으로 연송 귀뿌리를 주물러대고 버릇처럼 발을 굴러보기도 했다. 이따위 녀석이 어떻게 헌병대위까지 됐을가.

도대체 이자는 무엇을 노리는것일가?…

《당신 이름?… 이름이 뭐락꼬?》

애처롭게 들리기까지 한 그자의 물음에 진서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김국홍.》

《아- 국홍! 나이는?》

《스물둘.》

《입산해선 뭐 했능겨?》

《정치교양지도원.》

《정치교양? 빨찌산도 그런거 하능겨?》

《하구말구.》

《어떻게?》

《혁명의 진리를 깨우쳐주지.》

《좋아요. 참말루 좋아.》

얼어드는 귀뿌리를 만지던 가늘고 하얀 손이 진서의 어깨를 정답게 다독이였다. 진서는 꿈쩍 놀라며 입을 벌린채 페병환자같은 헌병대위를 쏘아보았다. 이건 대관절 뭐야. 어떻게 된 셈판이야. 최동환 그자가 무얼 고발했다는말인가?…

《좋아요.》 송인섭이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하였다. 《그럼 불쌍한 녀빨치 한사람 여기서 교양해보락꼬. 응?!》

그자가 뒤쪽을 돌아보았다. 통역이 옮기는 말을 귀담아 듣고있던 미군장교가 여전히 무표정한 낯빛으로 눈을 끔벅했다. 무엇인가 어서 시작하라는 암시였다.

《그 녀자 끌어왓!》 송인섭이 빽하는 소리를 질렀다. 《날래 날래!》

그리하여 믿을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개울 건너쪽 퍼붓는 눈발속에서 두 병졸이 회초리같은 녀자를 끌고오는것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차츰 가까이 올수록 자기가 꿈을 꾸고있는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저 녀자 알지로?》

송인섭이 히죽이 웃었다.

한순간 진서는 눈을 흡뜨고 숨을 죽였다. 예리한 비수가 흉곽을 찌른듯 했다.

하정례가?!… 그것은 풀대같이 마르고 기진해진 하정례였다. 머리조차 들 힘이 없어 기다란 팔우에 떨구고 끌려오고있다. 병졸들이 멎어서자 개울가의 얼어붙은 조약돌우에 무릎을 꺾으며 무너져버리는데 바지가랭이가 너펄거렸다. 찢어지고 으깨여진 무릎에서는 피가 흐르고있었다.

《정례!》하고 소리쳤으나 목구멍이 꽉 멘듯 했다. 《정례동무, 하정례!… 어떻게 된 일이요, 응?!》

정례도 그를 보고있으나 한동안은 알아보지 못하는듯 했다. 가까이에서 콜록거리던 헌병대위가 목깃을 잡아올리며 오리처럼 몸을 털었다. 지독하게도 추위를 타는 놈팽이였다.

《어- 추워. 할 얘기들 날래 하이소. 빨찌산동지들, 어로무꼬(겨우) 만났는데…》

비로소 하정례도 그를 알아본듯 싶었다. 과연 그들은 얼마나 몰라보게 변했는가. 서로를 알아볼수 있는것은 그들이 무덤속에 들어갈 때까지 변치않을 눈빛뿐인듯 했다. 눈빛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는 여전히 굳게 믿을수 있는 동지이다. 죄를 지었거나 마음을 달리 먹었다면 그는 벌써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 보지 못하듯이 동지나 련인을 주저없이 보지 못하는것이다.

《진서동지!》

하정례의 입놀림이 전하는 불같은 속삭임이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살아계셨군요. 예?! 난 그때 잘못된줄만 알구…》 이번엔 예전의 하정례답게 분명히, 또렷하게 말하였다. 《아라와 같이… 울었어요.》

《아라는? 어떻게 됐소?》

《잘 있어요.》

《그런데 정례는 언제 체포됐소?》

《그저께요. 들으셨죠? 놈들의 2차 대공세가…》

수용소장 헌병대위가 기침소리를 터치더니 싸늘하게 웃었다.

《인젠 본론을 말하이소. 난 추워서 못견디겠능기여?》

하정례는 그자의 말엔 귀도 기울이지 않고 앞으로 한발 내짚었다. 그러나 어느새 병졸들이 그 녀자의 가슴팍에 총부리를 박았다.

《2차 대공세가.》 하정례가 계속했다. 《시작됐어요. 그래서 놈들은 나를 써먹으려 하죠. 체포된걸 비밀로 하고 다시 산에 들어가 자기네가 시키는대로 사람들을 대성골로 데려가라는거예요. 리현상사령관이 거기서 소부대들을 집합하게 했다고 말하라는거죠. 무서운 꿍꿍이가 있어요.》

《꿍꿍이?》 수용소장이 또 싸늘하게 웃었다. 《좋아요, 참말로 좋아. 고운 목소리 참 좋아.》

진서는 그자가 무엇을 좋다고 하는지 알수 없었다. 그자가 왜 그렇게 친절을 보이는지도 알수 없었다. 썩 후에 가서야 알게 되였지만 하정례의 짐작처럼 무서운 흉계가 꾸며지고있었다. 적들은 1차 대공세때와는 달리 맹목적인 포위, 추격을 피하고 전체 지리산빨찌산을 대성골로 몰아갔던것이다.

대성골은 칠성봉밑에 연 40리에 걸쳐 펼쳐진 깊은 골안이다. 적들은 모든 통로를 봉쇄하고 대성골로 통하는 길만 열어놓았다. 그리고 하정례를 회유한것처럼 변절자들을 리용하여 대성골에서 리현상사령관이 전체 빨찌산을 집결시킨다는 헛소문도 퍼뜨렸다. 결국 적들의 검질긴 추격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리고 리현상부대와 합치려는 일념으로 전 지리산에 분산되여있던 부대들, 새로 도착한 경남유격대까지 1 000여명이 대성골로 흘러들었다. 리현상은 무서운 흉계가 있다는것을 간파하고 남부군과 경남유격대 지휘성원들을 모여놓고 분산돌파를 결정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세발의 신호탄이 동과 남, 북 3개 방향에서 오르더니 골안을 둘러싼 릉선들에서 총포탄의 일제사격이 터지며 천지를 진동하였다. 삽시에 대성골은 무수한 주검으로 뒤덮이고 내물은 피로 물들었다. 수천발의 박격포탄이 숲을 뒤집어엎고 언땅을 물어뜯으며 앙칼진 소리로 밤을 찢었고 기총소사와 소총들의 일제사격에 무수한 철의 반디불들이 아우성쳤다.

그래도 빨찌산들은 출로를 찾았다. 리진범부사령관이 남부군의 용감한 전투원들로 결사대를 뭇고 동남방향의 칼릉선을 덮쳤다. 그뒤로 살아남은 사람들, 들것에 실린 부상병들, 부축없이는 걷지 못하던 동상자들이 물밀듯이 따라섰다. 도중에 들것들은 죄다 버려졌다. 부상병들이 자폭했거나 릉선에 떨어져 최후의 몇방을 쏘면서 주력부대의 포위돌파를 엄호했던것이다. 영웅적지리산빨찌산의 수백명 용사들이 피흘리며 쓰러지고 수백명이 포로되였는데 놈들은 포로의 반수이상을 현장에서 무참히 학살했다. 녀대원들은 더 참혹하게 학살했다. 후날 목격자들에게서 그에 대하여 들으면서 진서는 치를 떨지 않을수 없었다.…

200명 미만의 전투원들이 포위를 뚫고나갔는데 리현상과 리재명, 리진범, 김흥복과 같은 남부군의 중요지휘원들도 그들속에 들어있었다. 그들이 살아있음으로 하여 지리산의 영웅서사시는 사령관 리현상이 장렬하게 전사한 1953년 9월까지 1년 7개월이상 더 계속되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1952년 2월, 피의 격전 대성골의 참화를 닷새 앞둔 때이다. 수용소장 송인섭헌병대위는 더 이상 추위를 참을수 없는듯 증을 내기 시작했다. 퍼렇게 얼어든 엷은 입가에 떠올리던 싸늘한 웃음도 사라졌다. 하정례 네가 꽃다운 청춘을 살릴수 있는 마지막기회이다. 김국홍 당신이 교양지도원의 솜씨를 발휘하면 20년형에서 절반은 덜어줄수 있다고 했다.

진서는 입을 꾹 다물고 하정례를 지켜보기만 했다. 이제 무서운 고문이 시작될것은 틀림없다.

하정례가 과연 그 모진 고통을 이겨낼수 있을가. 여기 눈내리는 벌가운데의 개울가에서 놈들은 무엇을 하려는것일가?…

헌병대위는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그자가 손짓하자 병졸 한놈이 총창을 꼬나들고 정례의 옷자락을 꿰여들었다.

《악!-》

몸서리치는 비명, 눈발날리던 어둑스레한 하늘이 소스라치며 얼어붙고말았다.

진서는 뜻밖의 충격에 못이겨 몸을 비틀며 고함을 쳤다.

《이놈들아!-》

그러자 뒤쪽에서 병졸 한놈이 그의 겨드랑이짬으로 총창을 박았다. 너덜거리는 옷을 꿰여 멈춰세우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옆구리를 스쳐간 총창이 살점을 뜯어놓은 상처에서 살을 지지는듯 피가 흘러나왔다.

미군장교가 소리쳤다. 송인섭에게 칼끝같은 눈빛을 던지며 고아대는데 진서는 무슨 일로 그자가 분노하는것인지 리해할수 없었다.

맞은편에서 입술을 악물고있던 하정례가 진서에게 소리쳤다.

《보세요. 저놈이, 저 미제놈이 우릴 다 얼궈죽이라구 하구 있어요. 당장 죽이지 말구 오래오래 고통을 받게 하라구요.》

《정례!》 진서도 소리쳤다. 《견뎌내야 해. 동무야… 그때두 견뎌내구 이겨냈지. 응? 미제놈들이 세균탄을 뿌렸을 때… 이 짐승같은 놈한테 보여주자구. 미국놈들이 절대 우릴 꺾지 못한다는걸말이요!》

헌병대위 송인섭이 그들가운데로 나섰다.

《좋아요, 동지들. 견뎌 보락꼬.》

그자는 몸을 떨며 발을 굴렀다. 그를 괴롭히고 참을수 없게 하는것은 오직 추위뿐인듯 했다.

《동지들, 빨찌산동지들, 이제 온몸에 물을 부어놓으면 어찌될는지 아능겨?… 동태처럼 꽛꽛!… 그래두 견뎌본다구여?… 괜한짓이제. 그러지말구 날래 결심하이소.》

정례가 피섞인 가래를 내뱉았다. 그것으로 대답을 대신한것이였다.

진서는 부득부득 이를 갈며 거칠게 내쏘았다.

《미제놈의 개!》

헌병대위는 추위를 참지 못해 이발을 떡떡 맞쪼으며 병졸들에게 손짓했다.

병졸 한놈이 먼저 개울의 얼음을 총창으로 마구 찔러 구멍을 냈다. 그러자 두세놈이 달려가 얼음이 떠있는 물을 철갑모로 퍼왔다. 처음엔 진서, 다음은 정례의 목덜미에 얼음물을 쏟아부었다.

다음부터는 두 병졸이 륙상계주에 나선것처럼 철갑모를 들고 뛰여다녔다.

진서는 온몸이 무수한 바늘끝에 찔리운듯 하더니 차츰 감각을 잃어가는것을 느꼈다.

《정례, 이겨내야 하오.》 그는 혀가 굳어져서 겨우 말했다. 《산에서 싸우는 동지들을 생각하오. 박종하, 강사령을 생각하오.》

정례는 총창이 꿰지르고있는 옷자락때문에 겨우 지탱해서있는듯 했다.

머리우에, 얼음버캐가 앉고있는 어깨우에 눈이 한벌 덮이고있었다.

련속 배허벅으로, 잔등으로 퍼부어지는 뜨거운 물, 차디찬 물, 어느쪽이 더 뜨겁고 어느쪽이 더 찬것인지, 얼어든 몸뚱아리인지 타는듯 한 가슴인지 분간할수 없었다.

날이 어둡고있었다. 멀리서 작업을 끝낸 포로들이 시꺼먼 구름처럼 떠오고있었다. 그쪽을 돌아보던 헌병대위가 유리를 긁어대는듯 한 소리를 질렀다. 또렷하고 째지는듯 한 서울말씨였다.

《이제 저것들앞에서 발가벗길테다. 하정례 이년, 어디 그것까지 견디나 보자!》

헌병대위의 연기는 끝난것이였다. 서슬푸른 잔인성이 그자의 가늘게 좁혀뜬 눈에서 빛을 뿜었다.

《김국홍 네놈도 같이 구경하게 해주지. 눈을 똑바로 뜨고봐!》

발걸음소리가 차츰 가까와졌다. 진서는 몸서리쳤다. 가까와오는 동지들을 이렇듯 무서워한적이 언제 있었던가. 입이 타들고 속이 타들고 눈앞에서도 불길이 타올랐다. 퍼붓는 눈송이들은 화염과 함께 뿌려진 재개비인듯… 헌병대위가 소리쳤다.

《벗겨라. 그년을 홀랑 벗겨!》

놈들이 하정례에게 달려들었다. 처녀보다 더 기괴한, 야생적인 소리를 지르며 한꺼번에 넷이나 달려들어 덮치고 비틀어대고 너털대면서 넝마같은 옷자락을 찢고 마구 헤덤비였다. 진서의 옆구리짬에 총창을 찌르고있던 적병마저 그쪽의 미친듯 한 희열에 정신이 팔려 입을 벌리고 신음했다.

진서는 그 총창을 힘껏 당겼다. 그리하여 자기앞으로 쓰러지는 적병을 딴딴한 머리로 들이받는것과 동시에 이발을 드러내고 울부짖으며 처녀에게 달라붙은 놈들을 향해 돌멩이처럼 날아들었다.

싸움터, 지리산자락의 전투장에서도 이처럼 사납게, 미친듯이 날뛰여본적이 없었다. 닥치는대로 쥐여박고 물어뜯고 걷어찼다. 제 한몸도 가누기 힘들어 비틀거리며 구겨박히던 포로라는것을, 죽음의 문지방에 한발을 들이밀고있던 병자라는것을 믿을수 없었다.

뒤통수에 드센 타격이 가해지고 오른쪽 팔의 관절이 꺾이여나간듯 했다. 무릎을 꺾으며 쓰러졌으나 어느새 또 일어나며 목청껏 소리쳤다. 자기로서도 믿을수 없는 단말마의 웨침이, 무서운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동지들- 놈들이 녀동무를 모욕하고있소. 빨찌산 녀동지를… 모욕하고있소!》

다음순간 그가 들은것은 우릉-우릉- 하는 먼 우뢰소리였다. 시꺼먼 구름더미가 가까이 왔고 그 구름장들에서 무시무시한 뢰우가 울고있었다.

움씰거리며 밀려온 구름, 거친 숨소리와 발걸음소리, 사방에서 총소리가 터졌으나 물결치는 사람들의 흐름을 막을수는 없었다.

그들은 포로였다.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들이였고 거지반 죽은 사람들이였다. 매일, 매 시각 얻어맞고 모욕받고 총알을 받으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무리인양 쫓기우고 몰리워온 부상자들, 환자들, 허약자들이였다. 그러나 하나같이 거칠게 숨을 내뿜자 그것은 뢰우처럼 황야를 휩쓸었다. 망루우의 기관총들도 한데 범벅이 되여 밀려가는 사람들의 무서운 기세에 얼어붙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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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수많은 포로들이, 이름모를 동지들이 진서와 정례를 떠메다싶이 하고 흘러갔다. 땅거미진 황야에 발구름소리만 가득찼다. 그 우에 눈이 내렸다. 누군가 가래끓는 소리를 뱉더니 웅얼웅얼 노래를 떼였다.

 

태백산맥에 눈내린다

총을 메여라 출진이다

 

단박에 수천명사람들이 격동되여 흐느꼈다. 이 노래와 함께 무수한 산과 골짜기, 피의 싸움터를 헤쳐온 사람들이였다. 태백산, 소백산, 지리산, 백운산… 그들이 눈발을 헤치고 나가던 싸움길은 멀리 있지 않다. 노래소리는 더 커지고 사나와졌다. 거쉬고 찢어지는듯 한 소리가 있는가하면 목메인 흐느낌소리가 노래구절을 삼켜버리기도 했다.

 

눈보라는 밀림에 우나

마음속에 피끓는다

높은 산을 넘고넘어

눈에 묻혀 사라진 길을 열고

 

피나는 가슴의 격렬한 호흡에 눈발이 흩날리고 어둠이 흐트러졌다.

진서도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며 노래를 불렀다. 그와 멀지 않게 동지들이 껴안고가는 정례도 머리를 들고있다.

 

빨찌산이 령을 내린다

원쑤를 찾아 령을 내린다

 

그들은 보고있었다. 공화국을 부르며 죽은 그 얼굴이 떠오르고 기어이 오고야말 승리의 그날이 눈앞에 그려졌다. 북받치는 오열에 눈시울이 떨려나고 숨결이 가빠졌다. 피와 고통과 죽음속에도 사무치는 격정이 있고 장쾌한 희열이 있다는것을 누가 상상이나 할수 있으랴. 죽어가는 포로들의 흐름속에도 뜨거운 사랑이 숨쉬고 희망이 있다는것을 원쑤들은 알지 못할것이다. 차일평, 한월수, 최동환과 같은 변절자들 역시 그 참뜻을 알지 못하며 알수도 없다.

진서의 생각이였다.

눈은 계속 하염없이 쏟아져내렸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그처럼 아낌없이 퍼붓는것일가. 축복이라고는 말하지 말자. 그렇다고 불행한 인생을 차디찬 무덤속에 영영 묻어버리기 위해서도 아니다. 산뜩하고 정겹고 따스한 눈송이들… 그 설레임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있노라면 벅찬 흥분에 목이 메이는것을 어쩔수 없다. 하여 진서는 노래속에 퍼부어지는 눈송이들을 맞으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사랑한다, 고통받는 이 뼈저린 삶도 사랑한다, 눈물과 아픔, 슬픔과 굴욕에 스스로 자기의 신상을 가엾게 여기거나 한탄한다면 그것은 곧 버림받는 생으로 될것이다.

몸부림치며 이 삶을 사랑한다. 진정 사랑하기에 이 삶을 버리지 않으며 피를 물고 끝까지 이겨나간다. 고통속에서도 보람과 긍지를 찾는다면 그것이 곧 행복이며 기쁨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고통받는 자가 꼭 불행한것은 아니다.

웃고 떠드는 자가 꼭 행복한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그는 또 죽지 않고 삶을 앙버티였다.

두달후인 1952년 4월 그는 광주포로수용소에서 대전형무소로 이송되였다. 그후 대구에서 또 최동환을 만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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