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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군 정곡면 국민보도연맹 학살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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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민
댓글 2건 조회 1,686회 작성일 12-02-06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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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군 정곡면 국민보도연맹 학살 현장

경남 의령군 정곡면 양강마을에 거주하는 당시 13세였던 차학근 할아버지(75세)는 산에 소를 먹이러 갔다가 학살현장을 숨어서 보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애초에 당시 의령경찰은 이들을 마을 계곡에서 사살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마을 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인민군이 마을까지 왔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경찰은 정찰대를 피하려고 약 1km 떨어진 야산으로 국민보도연맹원을 태운 군용트럭을 이동했다. 경찰은 3명이었다. 

산길과 접한 도로에서는 한동안 실랑이가 벌어졌다. 경찰은 인민군이 왔을지 모르니 여기서 풀어 줄 수 없으니 산속에서 풀어준다고 말했다. 등 뒤로 손이 묶여 굴비처럼 엮어진 민간인들은 어쩔 수 없이 산으로 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명의 경찰만이 그들을 데리고 올랐고, 한 명은 기다리다 갓 길로 올라갔다. 

겁이 난 차 씨는 그 길로 소를 몰고 산길을 올랐다. 그리고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간에 콩을 볶는 듯한 총소리가 메아리로 울렸다. 잠시 후에는 다시 총소리가 울렸다. 잔뜩 겁을 먹은 차 씨는 한참을 산에서 머물다 소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카빈총 탄피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약 20미터에서 30미터의 거리를 둔 묘지 위에는 피로 물든 흰옷 사이로 사람들이 뒤엉켜 쓰려져 있었다. 대부분 머리에 총을 맞아 형체를 알 수 없는 주검들이었다. 

차 씨는 이후에 난 총소리는 중학생을 쏜 것으로 추정한다. 묘지보다 약간 낮은 곳에서 쏜 총은 어른들의 머리에 맞았지만, 중학생은 키가 작아 총탄이 비켜 나간 것이라는 추측이다. 신방 쪽에서 왔다는 이 중학생은 도망간 아버지 대신 붙들려 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은 트럭에서 굴러떨어져 살아난 사람의 이야기로 전해졌다. 당시 집안이 부유했던 이들은 돈을 써서 가족을 살릴 수 있었다. 

경찰은 “너는 독한 놈이니까 뒤에 죽인다.”며 발로 걷어차서 군용트럭 밖으로 떨어뜨렸다. 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는 담배 심부름을 시키며 풀어줬다고 한다. 

며칠이 지난 후 산에서는 온통 통곡소리로 가득 찼다. 

경남 의령군 민간인학살

의령군 정곡면 차 모 할아버지와 성 모 할아버지가 당시의 학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하루만 빨랐더라도 살릴 수 있었는데...

경남 의령군 유곡면 구송산 마을. 당시 21세였던 성 모 할아버지(84세)의 형(당시 24세)도 이곳에서 학살당했다. 그는 형이 어떻게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단지 농사를 짓고 있었다고 했다.

가족들은 형이 의령경찰서에 갇혀 있는 동안 돈을 주면 빼낼 수 있다는 소리를 뒤늦게 들었다. 그래서 형수인 서 씨와 논 3마지기를 팔아서 의령경찰서를 향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형은 그날 아침에 군용트럭에 태워져 어디론가 끌려갔다. 점심을 먹은 이후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 사람들이 비료를 가지고 오다가 총소리를 듣고 현장을 본 것이다. 

그날 가족과 함께 찾은 감나무골 묘지 인근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시신들이 뒤엉켜 있었다. 

숨이 끓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체온도 남아 있었다. 어린 중학생의 신분증이 있었고, 시신들 주위에는 타다 남은 담배가 흩어져 있었다. 그들이 생을 마감하는 최후의 순간에 태운 담배였다. 이날이 1950년 음력 6월 18일이다. 중학생의 시신은 가족이 수습해 갔다고 한다. 

형의 시신은 3번째 줄에 있었다. 얼굴은 형체를 알 수 없었지만 입었던 옷과 고무신으로 형수가 찾을 수 있었다. 경찰서에 갇혀 있는 동안 굶주리고, 맞아서 엉망이 된 모습이었다. 

가족은 굴비처럼 엮어진 형의 시신을 풀어서 묘지 바로 옆에 따로 묻었다. 며칠이 지나자 사람들이 가족의 시신을 찾으려 야산으로 모여들었다. 무더운 여름철이라 시신은 부패하고 있었다. 이후 도착한 사람들도 옷가지와 신발로 가족을 찾았다. 일부는 시신을 수습해 가기도 했지만, 묘지 인근으로 돌로 임시 매장한 이들도 많았다. 

이곳에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지 4~5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 감나무골 묘지의 주인은 임시 매장한 시신을 옮겨달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성씨의 가족은 형의 시신을 다시 이장했다. 하지만, 가족이 찾아가지 못한 시신은 여전히 묘지 주위로 부패한 상태로 놓여 있었고, 임시 매장 묘도 그대로 있었다. 

결국, 시체로 얼룩진 조상 묘를 볼 수만 없었던 묘지 주인은 시신을 50여 미터 떨어진 금굴 입구로 옮겨 놓았다. 금굴은 일제강점기 금을 캐기 위해 뚫었던 길지 않은 동굴이다.

그리고 62년이 흐른 2012년 1월 27일 현재, 무너져 내려 동굴 입구를 막은 흙더미는 참혹한 과거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단지, 외부로 드러난 희생자의 낡은 고무신 파편 조각만이 당시의 참혹한 현장을 알리고 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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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님의 댓글

갈림 작성일

일단 수틀리면 현장에서 그대로 자꾸 죽여버리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다 보면 원한이 생기고 분노가 생기고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상처와
갈림이 생기게 된다. 조금만 불을 붙여 선동하면 다시 격렬한 싸움이 일어난다.

그런 볼러타일한 바탕위에서 아주 여유자적한 식민통치가 가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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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님의 댓글

역사 작성일

그렇다.
역사를 바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를 모르고
그저 세뇌된대로 저쪽에서 이쪽을 학살했다고 믿는다면
바로 세상에서 가장 바보 천치가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지랄을 떨고 있는 되먹지못한 것들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다가 세상을 뜨는 그런
하찮은 존재로 살 것인가?
그대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개나 소가 되려거든 그렇게 계속 믿고 살아라.

그렇지만 역사는 바로 원글처럼
증언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속혀서 살아왔다고.
육십여년을 쉬쉬하며 살아왔고
아직도 본인의 얼굴은 저렇게 사진에 나오지 않도록
모자이크 처리해야 하는 시절을 살고 있다고.

그것 하나로 그대가 아는 모든 것은
거꾸로 된 것임을 모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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