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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의 핏빛분쟁과 유엔의 횡포-유태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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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슴도치
댓글 1건 조회 2,145회 작성일 12-02-28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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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시간 2012.02.28 14:56:02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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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86]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의 핏빛 분쟁과 유엔의 횡포

<로마 캐톨릭 전통>과 <그리스정교 문화>가 충돌한 비극의 역사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86번째 나라로 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 를 다뤘다.그는
"유럽의 화약고 라고 말하는 <발칸반도>는 도대체 어떤 곳인가? 발칸반도는 도데체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가? 발칸반도의 원시시대의 민족들과 또 현대의 나라들은 어떤 나라들이며 그들의 문화와 종교의
충돌은 어떤것인가? 발칸반도에 속해 있는 나라들의 역사는 슬라브족이 뿌리를 내린 역사이다". 그 전문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86] 발칸반도의 핏빛 분쟁과 유엔의 횡포

<로마 캐톨릭 전통>과 <그리스정교 문화>가 충돌한 역사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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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유태영 박사
유럽의 화약고 라고 말하는 <발칸반도>는 도대체 어떤 곳인가? 발칸반도는 도데체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가? 발칸반도의 원시시대의 민족들과 또 현대의 나라들은 어떤 나라들이며 그들의 문화와 종교의 충돌은 어떤것인가?

발칸반도에 속해 있는 나라들의 역사는 슬라브족이 뿌리를 내린 역사이다. 본래 고대 슬라브족은 중앙 아시아의 카르파티아 산맥 북방에서 발원하여 3세기까지 살고 있었으나 그 후 부터 동서남의 3방향으로 분산하여 영토를 확대했다.

6세기경에 슬라브족이 도나후 강에 이르렀으며 8세기 까지는 발칸반도에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슬라브족의 전반적 이동은 인도유럽에서 분리해 넓리 퍼져 나갔는데 동방에서는 유럽 러시아 전역까지 진출했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슬라브족은 3대 민족군으로 형성하여 광대한 지역을 차지했으며 정치와 문화종교에 있어서 흥망성쇠를 반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슬라브족의 역사와 분포에 대하여 지역별로 분류해 살펴 본다.

1) 동슬라브족: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루시아, 플레슈크
2) 서슬라브족: 폴란드, 포메라니아, 폴라브, 실레지아, 체코, 슬로바키아, 밀찬, 루시티아, 소르부.
3) 남슬라브족: (발칸반도에 포함된 국가들의 명단)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르, 알바니아, 코소보, 그리스, 루마니아, 터키유럽지역.

발칸반도의 지명은 터키어로 산맥이라는 뜻이며 면적은 78만 800km2 이다. 2000년 현재 통계로 인구는 5690만으로 추산한다.

이 글에서는 발칸반도에 속한 슬라브족 중에서 8개 국가를 중심하여 살펴 보는데 이들 8개 국가들은;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알바니아,몬테네그르, 슬로베니아, 코소보등 국가들이다.

위의 슬라브 8개 국가들 중에서 발칸반도의 동쪽에 처음 정착한 세르비아는 매우강력하고 우세한 민족으로서 히랍정교회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와 정반대로 처음에 발칸반도의 서쪽과 서북쪽 방향에 정착한 민족들은 유럽의 캐톨릭교 문화를 받아들였다.

이와같은 정착의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발칸반도에서 슬라브인들이 3개의 분파로 분리되여 서편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캐톨릭 진영이고, 동편에는 세르비아를 주축으로 하여 강력한 그리스 정교회 진영이 형성됬다.

그리고 중앙동부에 위치한 보스니아는 캐톨릭도 아니고 그리스 정교회도 아닌 무슬림 이슬람교인의 나라이다. 보스니아는 민족종교로 무슬림을 주장하면서 보스니아는 곧 무슬림이고 무슬림은 곧 보스니아 이다 라고 주장했다.


1. 제1차 세계대전의 근원지 발칸반도


제1차 세계대전의 배경 및 원인은 그 당시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한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연합하여 발칸반도에서 침략세력을 이루었으며 이에 맞대항 하여 영국, 프랑스, 러시아등 세 나라가 한 때 동조하여 발칸반도에서 세력다툼의 전쟁을 이르켰다.

그 때 당시 발칸반도에는 남슬라브게에 속하는 여러 민족들이 분산하여 뿌리를 내리고 수백년 동안 살고 있었으며 종교적으로 3파의 양상을 띄고 있었다.

그런데 유럽의 양대 진영이 치열한 세력다툼을 하면서 발칸반도를 저마다 지배하려고 충돌하고 폭파함으로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킨반도에서 시작됬던 것이다.

그리고 유럽의 강대국 양대진영의 세력다툼의 내용은 경제적 이권이 물론 중요한 조건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사실은 정치적으로 발칸반도에 대한 주도권 싸음이 제1차 세계대전의 근원적인 원인이 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발칸반도의 분쟁의 비극 근원은 로마제국의 분렬로 인하여 발생한 <서로마 가톨릭 세력권>과 <동로마 히랍정교의 세력권> 그리고 무슬림의 세력에 대항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근원이 되기도 했다.

로마 제국의 분렬의 결과로 인하여 발칸반도에서 슬라브족이 4분5열이 되는 비극이 발생했던 겻이다. 종교적 분렬이 발칸반도의 운명을 점점 더 어둡게 만들고 복잡해 지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발칸 반도는 오랜 세월 동안 터키 투루크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 후에 서유럽 문화권과 동방문화권이 충돌하는 경계선이 바로 발칸반도 였는데 슬라브족들이 발칸반도에 들어오면서 부터 다문화권과 다종교권과의 혼존혼돈이 되여 점점 더 심화되고 있었다.

제1차 새계대전이 발칸반도에서 시작된 직접적인 원인은 대략 다음과 같다.

그때 발칸반도는 터키 투루크의 영향을 오래동안 받고 있었는데 러시아가 점차적으로 발칸반도에 진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러시아에 대항하여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지원을 받으면서 역시 발칸반도 문제에 적극 개입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를 침략하여 지배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를 맨 처음에 공격하고 침략한 이유는 보스니아가 발칸반도 에서 유일한 무슬림 국가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이웃 나라이며 같은 슬라브족이며 또 그리스 정교회의 제일 강력한 나라인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의 침략 행위에 대하여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르비아는 터키 투루크의 지배로 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발칸반도에서 강력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럼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침략행위에 대하여 즉시 크게 반격에 나서고 있었다.

1914년 6월 28일에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 시를 방문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를 침략한데 대하여 분개하고 있던 세르비아는 이 기회를 포착하여 세르비아의 특공대를 동원하여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했다.

황태자 부부가 암살을 당한 오스트리아는 분개하여 세르비아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의 지원을 받으면서 1914년 7월 28일에 세르비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한편 러시아는 오스트리아가 밭칸반도에서 세력확장을 하면서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한데 대하여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러시아는 1914년 7월 30일에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여 러시아 총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은 1914년 8월 1일에 러시아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8월 3일에는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한편 영국은 8월 2일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리하여 발칸반도를 둘러 싸고 유럽의 열강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 모두 다 참전했으며 대전 후반기에는 이탈리아와 미국도 참전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도 직접 혹은 간접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으로 참전했다.

오스트리아가 발칸반도에서 보스니아를 침공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여 세르비아와 전쟁이 시작됬는데 전쟁의 후반전에서는 국제적으로 참전하는 제1차 세계대전이 전개되였던 것이다.

15세기 이래 17세기까지 200년 동안 오스만 투르쿠 제국이 발칸반도를 지배해 왔는데 투르크 제국이 점차 쇠퇴해 짐으로 이를 기회로 삼아 유럽의 열강들이 또다시 저마다 발칸반도에 대한 지배욕을 드러내여 전쟁을 시작하게 된것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연합군에게 항복을 함으로서 1917년 11월 11일에 종전이 됬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대전인 제1차 세계대전 3년 동안의 전쟁으로 인한여 인명피해가 막대했다. 전쟁에 동원된 총수는 6,500만명이며 사망자 570만300명으로 기록됬다. 또 부상자의 수도 약 2000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독일은 전쟁의 역사상 최초로 독가스를 사용한 국가로 기록이 됬다.

여기서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은 발칸반도내에서 민족분규에 의하여 발생한 전쟁이 결코 아니라 순전히 지역문제에 대하여 서구의 강대국이 이권을 위하여 서로 개입 함으로서 발생한 침략전쟁이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후에 발칸번도는 세르비아의 주도하에 재건되였는데 세르비아-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가 연합하여 <세르비아 연합왕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1929년에 세르비아 연합왕국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개칭되였다. 어쨋던 세르비아는 발칸반도를 주도하는 주체적 세력으로 등장했다.

제2차 세게대전에서 발칸반도의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또 다시 나치 독일군과 이탈리아 에게 점령을 당했다. 하지만 1944년에 요시프 티토가 이끄는 유명한 파르티잔 유격대가 출현하여 강력한 전투를 진행하여 나치 독일군과 이탈리아를 발칸반도에서 물리쳤다.

하지만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은 발칸반도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모든 전쟁이 종식됬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됨으로 서방의 침략으로 부터 많은 약소국가들이 해방이 되였으며 발칸반도에서도 역시 해방의 기쁨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2.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창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1943년 11월 29일에 요시프 티토가 발칸반도에서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선언 했다.

요시프 티토는 누구인가?

요시프 티토는 1892년 5월 7일 발칸반도에서 크로아티아 족의 아버지와 슬로베니아 족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 났다. 티토는 어려서 로마 캐톨릭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노동자 생활을 했으며 1912년에는 고향을 떠나 체코,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떠돌이 노동자가 되고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티토는 오스트리아 군에 배속되여 참전하다가 러시아의 포로가 되였다. 티토는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사회가 혼돈속에서 뻐져 있는 기회를틈타 탈출에 성공하여 방랑생활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요시프 티토는 폴카라는 여성과 결혼하여 1920년에 발칸반도의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러시아에서 볼세비키들의 영향을 받은 요시프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비밀활동을 하다가 1928년에 공산주의자로 몰려 수 차레 체포되였으며 5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출옥 후 요시프 티토는 공산당의 지시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에서 정보원으로 활약을 했다.

1935년에 요시프 티토는 유고슬로비아 대표단원으로 모스크바 회의에 참석하여 각국의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했다. 1937년에는 유고슬로비아 공산당의 임시 서기가 되였으며 1939년에 정식 서기로 취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요시프 티토는 독일에 항전했으며 1941년 4월에 유격대 “파르티잔”을 조직하여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요시프 티토는 파르티잔 유격대를 지휘하면서 한편으로 “유고슬라비아 국민해방 평의회”를 소집하여 정치문제를 논의하였으며 같은 슬라브 종족들간의 분규와 종교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요시프 티토는 만난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독일군과 싸워 승리를 쟁취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국과 러시아의 눈치를 살피면서 독일과 싸워야하는 정치적으로 모순된 어려움을 격고 있었다.

어쨋던 요시프 티토는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슬리로 끝나는 시점에서 영국과 러시아등 강대국의 의심과 압력속에서 꾸준히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독자적 노선의 입장에서 독립국을 설계하고 있었다.

요시프 티토에게 또 다른 하나의 무거운 짐은 유고슬로비아 내부에 있는 반공주의적 우파 세력과 싸워야하는 어려운 문제들이 또 있었다.

이와 같은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대항하여 투쟁한 요시프 티토는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였다. 1943년 11월 29일에 요시프 티토는 드디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서 하나로 통합된 민족국가들은 다음 6개 국가들 이다.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미케도니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등 6개 국가들이 요시프 티토가 창건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통합됬던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로 통합된 6개 국가들이 종교적으로 3개 종파로 분열되여 있는데 통합된 연방공화국이 성사됬다고 해서 종교문제가 해결된 것은 절대로 아니였다.

발칸반도에서 3개 종파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있어서 불치의 암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세르비아를 주축으로 하는 <동방 그리스 정교회>가 튼튼히 자리잡고 있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주축으로 하는 <서방 로마 캐톨릭교>가 뿌리 깊게 버티고 있다. 또 보스니아는 발칸반도에서 유일한 <무슬림 이슬람교> 국가이며 마케도니아는 오스만 투루크 제국의 마지막 유럽영토로 남아 있던 국가다.

이와 같은 3개의 정치적 배경이 뒤섞인 발칸반도에서 원초적으로 갈등과 분쟁의 불씨를 품고 있으며 종교적으로도 역시 3파로 분열된 발칸반도에서 요시프 티토의 지도력에 항상 큰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어쨌던 요시프 티토가 창건한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동유럽과 중앙유럽의 여러 공산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바르샤바 조약에도 가입하지 않고 또 북대서양 조약기구에도 가입하지 않는 요시프 티토가 주장히는 독자적인 지도력에 추종하여 시종 <비동맹 운동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요시프 티토의 비동맹 정치노선을 일명 “티토주의”라고 부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요시프 타토는 “티토주의”를 제창하며 1945연 3월 7일에 <유고슬라비아 민주연방공화국>이라고 하는 국호를 다시 정식으로 채택했다.

요시프 티토는 영국을 비롯한 서방의 외세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고 공산당 일당 체제를 공고히 했다.

티토는 파르티잔 유격대 시절에 동지였던 옛 전우들을 대폭 등용하여 정권의 요직을 채웠다.

요시프 티토는 1948년에 러시아 스탈린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하여 반쏘노선을 주장하면서 유고슬라비아의 독자적인 공산주의 국가노선을 주장했다. 러시아의 스탈린은 유고슬라비아의 독자적 노선을 반대하여 코민포름 회원국의 자격을 박탈했다.

하지만 니키다 흐르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한 이후 헝가리 봉기와 프라하에서 발생한 자유화 물결의 과정을 지켜 보면서 요시프 티토는 공산주의를 수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재인식하개 됐다.

요시프 티토는 사회주의 노선의 견고성을 주장하면서 대외와 국내에서 반공주의 세력을 경계하면서 일부 반공주의자들의 망동에 대한 탄압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유고슬라비아 민주연방 공화국>의 내부에서 카르델즈로 대표되는 “서방 자유개방파”와 란코피치로 대표 하는 “사회주의 보수파”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이 점차로 표출되고 있었다.

요시프 티토는 반대파들이 모략과 중상으로 티토의 통치력에 도전하는 것에 대해 비상대책으로 그들을 체포하여 투옥하고 또 정권에서 실각시키는 강경한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1974년에 요시프 타토는 헌법을 새로 제정하여 종신 대통령직을 획득하였다.
요시프 티토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바라보면서 공산주의 정권의 군부 통치권과 외교권은 보다 더 튼튼하고 확고히 장악하기 위하여 신헌법을 제정했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요시프 티토는 동시에 6개 자치 공화국들이 <유고스라비아 연방공화국> 정부에서 이탈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고 이점에는 강경했다.

요시프 티토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1941년에 반외세 반독일 유격대 파르티잔을 조직하여 항쟁했으며 해방 후 1943년에 11월 29일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선언했으며 1945년 3월 7일에는 <유고슬라비아 민주연방 공화국>을 정식 국가의 명칭으로 제정하고 발표했다.

그런데 1974년에 요시프 티토 대통령이 새로 제정한 헌법에 의하면 6개의 자치공화국들에게 국방과 외교권을 제외하고는 다른 분야에서 느슨한 형태의 자치권을 허용하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새로 제정된 헌법에 느슨한 형태의 자치권을 허용한다는 문구가 들어 있는데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소리가 있다.

요시프 티토 대통령이 연방제 6개국들에게 자치권을 허용하는 문구를 새 헌법에 넣은 것이 훗날에 궁극적으로 <유고슬라비아 민주연방 공화국>의 해채를 가속화 시킨 계기가 됬다고 보는 견해가 있었다.

어쨋던 요시프 티토는 1980년 5월 4일에 8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의 집권 기간은 1941년 부터 1980년 5월까지 40년의 긴 세월동안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연방 공화국을 통치했다.


요시프 티토는 6개족 공화국과 3개의 종교 분파, 4개의 언어 집단 그리고 2개의 문자를 사용하는 상이한 집단들이 연합된 특이한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40년 동안 통치했다.

뿐만 아니라 발칸반도는 역사적으로 독일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의 여러 국가들이 항상 발칸반도를 지배할여고 경쟁적으로 침략해 온 수난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요시프 티토는 서구의 침략과 음모에 시달였으며 슬라브족 내부의 분렬과 종교적 분쟁으로 인한 정치적 공백과 한계등 다양한 난관에 직면하여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경험하면서 40년 동안 통치했다. 하지만 요시프 티토는 그의 공산주의 통치 이념에는 한치의 변함이 없었다.

요시프 티토는 1980년 5월에 80세의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나갔다.

3. 요시프 티토의 40년 통치 이후에 발칸반도는 어디로가는가?


1980년에 요시프 티토가 죽은 후 9명의 “대통령선출위원회”가 발족하여 교대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집단지도체제가 시작됬다. 하지만 ”대통령선출위원회”의집단지도체제는 오래 가지 못하고 1986년에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인 밀로세비치 가 어지러운 상황속에서 정권을 잡고 대통령이 됬다.

밀로세비치는 요시프 티토가 건설한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계승할 꿈을 품고 대통령이 됬던 것이다. 밀로세비치는 열렬한 세르비아 민족주의 자로서 다른 민족의 피가 섞이지 않은 <위대한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정통민족주의자 세르비아인 이였다.

그런데 밀로세비치가 꿈꾸고 있는 요시프 티토가 창건한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계승자가 되곘다는 그의 꿈은 10년이 지난 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91년 6월에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인 밀로세비치를 반대하는 로마 케톨릭 국가인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두 나라가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탈퇴를 주장하면서 독립국의 창설을 선언했다.

벌서 이 때에 서방의 공작과 압력으로 인하여 밀로세비치의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계승에대하여 반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밀로세비치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를 주축으로 하여 발칸반도의 새로운 지도세력으로 등장하여 연방제를 유지할것을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밀로세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이라고 하는 요시프 티토가 창건한 오래된 국가 명칭을 포기하고 새로운 명칭으로 개칭하였다.

밀로세비치는 새로운 국가 명칭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두 나라가 주축이 되여 만든 <신유고슬로비아 연방> 이라고 하는 단순한 국가의 명칭을 새로 제정했다. 짧게 <신유고연방>이라 부른다.

요시프 티토가 1943년에 창립 선언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이 지구상의 지도에서 완전히 살아져 없어 졌다.

밀로세비치는 <신유고연방>의 군대를 급히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 급파하여 두 나라의 독립을 저지하려고 전투를 개시했다.

하지만 UN은 재빠르게 개입하여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두 나라가 주장하는 분리독립선언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UN은 신유고연방의 해체를 뒤에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6개월 동안의 치열한 전투로 인하여 수천명이 죽었다. 그 후에 UN은 강압적으로 개입하였으며 1992년 1월에 밀로세비치 대통령은 UN의 압력에 굴복하여 할 수 없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두 나라의 분리 독립을 승인하고 말았다.

동시에 그때 마케도니아도 전쟁 없이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 연방>에서 분리하여 독립을 선언했다. 요시프 티토가 창건한 6개 나라의 연방은 3개 나라가분리되여 독립을 했다.

그런데 그것으로서 발칸반도의 분쟁의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였다. 그것은 오히려 발칸반도에서 이른바 <유고내전>의 서막이 오르고 있을 뿐이였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그리고 마케도니아 세 나라가 세르비아-몬테네그로가 주축이 되여 새로 창건한 <신유고연방>에서 분리하여 독립을 쟁취했다.

하지만 사실은 독립을 선언한 크로아티아 내부에 살고 있는 다수의 세르비아게인 들이 독립을 반대하는 군대를 조직하고 믈라디치 사령관이 지휘를 하면서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반대하여 내전을 이르켰던 것이다.

이 크로아티아 내전에 세르비아 <신유고연방>의 대통령인 밀로세비치 대통령과 크로아티아 내전을 직접 총지휘를한 믈라디치 사령관이 튼튼히 서 있었다.

믈라디치 사령관은 훗날 보스니아 내전에도 참전하여 보스니아 내란을 총지휘를했다.

그런데 이 크로아티아 내전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이른바 브코바르 대학살 사건과 스카브르나 대학살 사건이 서방 언론을 통하여 전세계에 보도됬다.

서방의 언론들은 <유고내전>의 핵심적 역사적 배경과 맥락은 일절 모른척 하고 오직 민간인 사망자의 수만 늘여서 보도하며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이 저지른 무차별 폭격등 만행을 옹호하는 “패거리 언론”의 본성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었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발칸반도를 지배하려는 전략에 있어서 방해가되는 세르비아의 <신유고연방>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고내전의 모든 책임을 세르비아 <신유고연방>에게 뒤집어 씨우고 사상자의 수를 제도화한 편견으로 제멋대로 확대 시켜 보도하면서 세르비아 신유고연방을 악마화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발칸반도에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로마 캐톨릭 국가이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제일 먼져 요시프 티토가 창건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서 이탈하여 독립국이 됐다.

세르비아, 몬테네그르,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정교회의 나라들이다. 그리고 보스니아는 발칸반도에서 유일한 무슬림 이슬람교의 나라이다.

요시프 티토의 영도하에서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40년간 평화를 누린 후에 이제는 다시 메울 수 없는 깊은 골이 패여져 있다.

20만영이 숨진 <보스니아 전쟁>은 어떻게 시작됬는가?

보스니아는 발칸반도에서 화약고로 알려진 복잡하고 위험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보스니아는 발칸반도에서 유일한 무슬림 이슬람국이지만 사실은 인구 450만명 가운데 44%만이 무슬림 이슬람교도들 일뿐이다. 그외에 세르비아계 유고슬라비아 인이 31%이나 된다.

그럼으로 총인구의 1/3 되는 다수의 세르비아계인들이 보스니아에 살고 있는데 이들의 본심은 세르비아 <신유고슬로비아 연방>편에 소속되기를 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다수의 세르비아계인들은 비밀로 세르비아가 제공해 주는 무기를 공급받아 보스니아 내에서 세르비아의 존엄성에 도전하는 보스니아 무슬림 이슬람 교도들을 상대로 오래 동안 분규상태에 처해 있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분리독립을 하는것을 보고 그 뒤를 따라 1992년 2월에 보스니아도 역시 유고연방에서 분리독립을 선언했다.

보스니아의 분리 독립선언을 게기로하여 보스니아의 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됬다. 편협한 민족의식과 종교적 배타주의가 보스니아 내전의 도화선이 되여 내전이 시작됬다.

보스니아 내전이 3년째인 1995년 7월 11일에 세르비아 총사령관 믈라티치 장군이 이끄는 <신유고연방군>은 보스니아 내부지역의 이슬람인들의 거주지역에 대하여 전면적 공격을 하려고 육박했다.

이러한 위기에 UN 평화유지군은 믈라티치 장군에게 평화를 제안하면서 무기반납과 평화회담을 약속하면서 휴전을 제안했다. 하지만 UN 평화유지군이 제안한 휴전은 말뿐이고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세르비아 <신유고 연방>군과 UN 군과의 전투는 제2차대전 종식 후 최악의 전쟁으로 기록됬으며 양측의 인종청소로 인하여 5일 동안 전투에 8천명이 살해됬다.

보스니아 내전은 1995년 12월에 데이튼 평화협정을 맺음으로 양측에서 20만명이 숨진 후에 내전의 막을 내렸다. 보스니아 내전으로 인구 450만명 가운데 40%가 난민이되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보스니아 내전이 종식된 후 UN은 “유고전범재판소”를 개설했다.
크로아티아 내전과 보스니아 내전등 두 곳에서 양측의 무죄한 민중들 수십만명이 인종청소에 의하여 살해됬다.

UN이 주도하는 유고전범재판은 59명을 기소하고 밀로비치 대통령 외 9명에 대하여 전범재판을 시작했으나 재판은 말뿐이고 10년 동안 아무 결론 없이 세월만 지나갔다.

양민 대학살의 명목상 총책임을 지고 있는 세르비아의 믈라티치 사령관은 세르비아 정부의 암묵적인 도음을 받아 10년 동안 도피중에 있으면서 UN이 주도하고 있는 전범재판을 무력화 하고 있다.

밀로세비치 세르비아 신유고연방 대통령은 2006년 3월까지 미결수로 감옥에 수감되여 있다가 원인을 모를 의문사로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의 의문사는 살해된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UN이 설정한 유고전범재판의 이와같이 지지부진한 재판 결과에 대하여 세계는 미국의 정치재판의 음모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한편 밀로세비치 대통령의 사망에 대하여 미국의 전법무장관 램시 클락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유능한 불가리아 인권 변호사 발칸노 그리고 영국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핀터등이 일제히 비난의 포문을 열어 UN과 미국의 침략행위를 비난했다.

다음은 코소보의 옛 역사와 오늘의 내전에 대하여 알아본다.

코소보는 1389년까지 세르비아 왕조의 중심지였다. 코소보에는 비잔틴 그리스 정교회의 화려한 문화와 정교회의 유서 깊은 수도원들이 가득하여 발칸반도에서 막강한 세르비아 왕국의 위세를 정치와 종교적으로 세계에 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르비아 왕국의 위세에 대하여 공포심을 느낀 비잔틴 황제는 세르비아의 번창하는 위세를 꺽기 위하여 치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비잔틴 황제는 비잔틴의정교회와 정반대가 되는 소아시아 이교도의 나라 터키의 오토만 세력을 보스니아에 끌어 들였다.

세르비아 왕국은 기독교권의 나라로서 최선봉에서 이슬람교의 터키와 격돌하는 전쟁을 치루지 않을 수 없었다. 1389년에 터키 이슬람군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세르비아의 지도자들을 생포하여 처형함으로서 세르비아 왕국은 붕괴되고 말았다. 세르비아 왕국의 패망으로 인하여 코소보는 터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502년 동안 받고 있었다.

세르비아는 1881년에 이르러서 터키 오스만 제국이 쇠약해지는 국제정세에 틈타 독립국으로 회복됬다. 독립국이 된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세르비아의 중요한 땅으로 여기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 세르비아의 옛날의 역사적 유물들과 또 그리스 정교회의 유서 깊은 수도원들의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코소보 땅 이다.

요시프 티토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창설한 후에 코소보는 세르비아에 소속된 영토로서 <자치구역>으로 용인하는 정책을 승인했다.

하지만 요시프 티토가 죽은 후 세르비아의 대통령이 된 밀로세비치 대통령은 강력히 주장하기를 < 코소보는 그 어떤 이유로도 세르비아와 떨어질 수 없는 한 나라이며 한 민족이다> 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오늘 UN과 미국은 코소보의 독립을 세르비아에게 강요하고 있다. UN과미국이 코소보외 독립을 주장하는 구실은 현재 코소보에는 알바니아계가 90%이고 세르비아계는 10%뿐이라는 구실이다.

UN과 미국은 알바니아의 인구비례가 절대적 다수라는 이유를 구실삼아 코소보를 세르비아에서 분리시켜 독립국이 될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 미국에게 중동문제에 대하여 질문을 한다.

이스라엘의 유대인의 인구 수 보다 팔레스타인의 인구 수가 비교도 안되게 절대 다수이다. 그런데 미국은 절대 다수인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UN과 미국은 중동정책 처럼 절대 다수를 과시하는 알바니아인들의 독립을 거부하여야 마땅하지않은가?

중동문제를 선과 악의 대결로 보지 않고 서구 강대국들의 이권문제로 본다. 이와 마찬가지로 코소보 내전의 문제도 흑백의 문제로 단순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보지 않는다. UN과 미국은 오직 무력과 군사력 해결 방법으로 코소보에 대한 폭격부터 퍼부었다.

코소보에서 왜 느닷없이 전쟁을 벌이게 되었는지 종잡을 수 없으며 그것도 선전 포고도 없이 무차별 폭격부터 퍼부었으니 너무나 경악스럽다.

터키 오스만 제국이 502년 동안이나 세르비아를 통치를 하다가 떠나갔다. 하지만 세르비아가 독립을 쟁취한 후에도 그 후유증으로 남아 있는 문제는 세르비아의 매우 중요한 부분의 땅인 코소보에 알바니아인들이 떠나 가지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문제였다.

알바니아 인들은 오스만 제국에 예속되여 있는 무슬림 이슬람교 사람들이다. 그들은 코소보에 그냥 남아 있으면서 오히려 코소보의 주인 행세를 할 뿐만 아니라 코소보의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형국이다.

알바니아인들은 남의 땅 코소보에서 오히려 민족해방을 웨치고 있는데 미국의 태도는 알바니아인들의 요구를 들어 주면서 세르비아를 육박하고 있었다. 미국을 믿지 말라는 말이 아마도 그때 세르비아에서 시작된 말인가 싶다.

현재의 미국은 지난 날에 독일의 히틀러가 세르비아를 침공하면서 세르비아에서다른 슬라브족을 해방시키기 위함이라고 억지 주장을 했던 히틀러의 악행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미국과 서구 열강들의 발칸반도에 대한 태도는 일관성이 전혀 없으며 발칸반도 에서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세르비아에게 이래라 저래라 강요하고 있다.

코소보 내전에 대하여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미국이 지원하는 나토군이 코소보 원주민들과 알바니아인들 간에 중재를 한다는 명목으로 무차별 폭격을 감행 했으니 이것이 미국의 중재 방법인가?

그 때 당시 미국의 클린턴은 코소보 폭격를 승인했다. 승인한 지 단 2시간 후에나토의 사령관은 일사불란한 명령을 내려 무차별 맹폭이 계속됬다. 이와 같이 무차별로 투하된 폭탄들이 코소보인과 알바니아인들을 분간하겠는가?

미국과 나토군의 코소보 폭격은 어떻한 합리성도 없다. 코소보에서 인종청서를 종식시키기 위해 <신유고 연방>과 싸우며 코소보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맹폭을 퍼부었다는 미국의 주장은 너무나도 앞뒤가 맞지 않는 악의적인 억지 주장이다.

미국은 코소보인-알바니아인들 사이에서 중재의 역활은 하는척하면서 내심으로 그 누구를 위함이 아니라 코소보를 미국의 보호령으로 만들어 놓고 발칸반도를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코소보의 피의 내전은 199년 3월에 시작하여 3개월 동안에약 1만명 죽임을 당했고 86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나토의 무차별 폭격으로 인하여 더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하지만 서방의 패거리 언론들은 제국주의의 침략행위를 옹호하고 오직 세르비아의 무지막지한 인종청서로 인한 인명피해라고만 외곡 보도를했다.

사실에 있어서 미국과 서방 언론들은 아프리카 수단 다르푸르에서 발생하고 있는 4년간의 극악한 인종쳥소 사건으로 인하여 20만명이 죽임을 당한 사건에 대하여서는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런데 미국과 유럽의 나토국들이 코소보에서는 사뭇 다른 태도를 취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코소보 내전 3개월 동안에 공습 출격이 무려 38,000번 이였으며 실제로 폭격수는 10,500번 이였다고 한다. 10,500번 폭겨에 투하된 폭탄수는 천문학 수일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코소보 내전에서 20만명이 죽임을 당했는데 나토의 무차별 폭격 10,500번으로 인한 인명피해에 대하여서는 아무 말이 없다.

그보다 더 늘라운 것은 코소보 내전 3게월 동안에 38,000번 출격과 10,500번 폭격을 감행 했지만 미군과 나토군의 인명피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힌다.

코소보 내전은 1999년 3월에 시작하여 1999년 6월 9일에 3개월만에 <신유고 연방>과 나토가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일단 폭격은 중지됬다.

밀로세비치 <신유고연방> 대통령이 UN 전범재판에 미결수로 감옥 수감되여 있는 동안 세르비아에는 5명의 임시 대통령들이 등장하여 UN의 감시하에서 임시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2004년 7월에 미국의 각본에 의하여 이른바 민주선거를 실시하여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두 명의 후보자 중에서 보리스 타티치가 당선되여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2008년에 또 다시 재선되여 현재 세르비아를 통치하고 있다.

보리스 티타치 세르비아 대통령의 아버지는 요시프 티토 대통령의 집권시절부터 유명한 반공주의자로서 요시프 티토 대통령을 반대하는 반체제 운동가 이였다. 그럼으로 오늘 세르비아의 대통령이된 보리스 티타치 대통령은 의심의 여지 없이 친미적 가정의 출신으로서 “뱃속까지 친미적이다” 라는 말에 꼭 들어 맛는 대통령이다. 보리스 티타치 대통령의 선거공약이 “우리는 유럽으로 간다” 였으니 오늘의 세르바이의 정치 방향이 어다로 가고 있는지 가히 짐작 할 수 있다.

요시프 티토가 제2차 세게대전 후 1943년 11월 29일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구>을 선포한지 55돐이 된다. 오늘 세르비아는 미국제국주의 거센 침략의 폭풍이 불어 닥치는 바다에서 이리저리 떠 밀리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폭풍이 거치게 될것이며 풍랑의 바다를 헤쳐나가 새 길을 찾아 가게 될것이다.

4. 요시프 티토의 사회주의 이념과 주체사상의 공통점과 차이점


요시프 티토의 인간성과 정치적 능력 그리고 그의 사회주의 이념에 대하여 필자는 무한한 존경심과 지지찬동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하지만 필자의 이 글은 유고와 조선에 대한 비교연구와 논문의 글이 절대로 아니다.

이 글은 <신유고 연방>과 <북조선>이 과고에 처해 있었던 민족적 처지에 대하여 극히 간략하게 요점을 살표 보는것 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요시프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창건하면서 러시아 스탈린에 대하여 종속이 아닌 평등한 사회주의 국가창건을 밝힘으로서 한 때 소원해진 경험을 했다.

1950년 6.25 전쟁 때 요시프 티토는 조선 전쟁을 민족해방 전쟁으로 인식하고 유고슬라비가 처해 있는 입장과 비교하면서 열열한 지지를 표명했다고 한다.

유고와 조선 두 나라는 냉전시대에 강대국들의 이익에 의하여 체제가 흔들리는공통된 문제의 요소를 가지고 있었음으로 두 나라의 지도자 김일성 주석과 티토 대통령과의 관계는 그들의 통치이념과 통치능력에 대하여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었다.

두 지도자는 미국과 소련으로 인한 동서진영에 끼여 있었고 자주의 길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꾸준한 투쟁의 역사로 인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냉전시대의 한 복판에 처해 있으면서 두 지도자는 각각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하여 제 3세게라는 새로운 투쟁의 노선을 제시한 점에서 크게 보면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티토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과 공통점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두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요점을 지적해 본다.

첫째. 독립쟁취 투쟁역사에 있어서 치열한 항일 외세와의 투쟁과 만주 땅에서와 백두산 밀영의 투쟁 같은 전투의 경력이 티토에게는 전혀 없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정권장악과정의 정당성을 논이함에 있어서 외세와의 투쟁역사는 중요하다.

둘째, 정권의 체제확립에 있어서 ”우리식 사회주의”를 발전확립시킴으로서 소련과 중공의 변화에도 하등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 처럼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더 튼튼한 자주하는 사회주의 나라를 세워 나아갈 수 있었다. 이점이 큰 차이점으로 평가된다.

세째, 요시프 티토는 사회주의 통치이념으로 ㄱ) 유고슬라비즘 ㄴ)비동뱅주의를주장한 것은 높이 평가된다. 하지만 ㄷ)에 있어서 6개 연방국들에게 내부적으로 “자주관리제도”를 허용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티토 대통령의 이러한 개방정책은 서방의 침투와 분렬세력에게 대문을 활작 열어 놓고 어서 “들어오십시요”하는 것과 꼭 같은 정책이였다.

요시프 티토 대통령은 이와 같은 잘못된 어리석은 개방정책을 1974년에 발표한 후에 1980년 사망했다. 티토 대통령이 사방한 후에 즉시 연방국은 외세의 침입으로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네째, 요시프 티토 대통령이 40년간 통치하는데 있어서 줄곳 시달린것은 종교적 분파의 종교적 분쟁문제 였다. 김일성 주석의 사회주의 통치이념은 종교우선 주의가 아니라 “사람제일주의” 적인 통치이념 이다. “사람제일주의”는 뿌리깊은 종교적 분파의 부패성과 종교적 분쟁을 초월할 수 있다.

사람이 종교를 위해서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종교가 사람을 위해서 있을 뿐이라고 “사람제일주의” 는 주장한다.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와 문화의 발전도 역시 “사람제일 주의”에 근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조선 인민 공화국의 통치이념으로 알여진 “주체사상”사상이다. 조선 인민공화국은 “주체사상”으로 단결되 민족의식으로 외세의 침투와 분렬책동을 능히 막아낼 수 있다. 유감스러운 것은 요시프 티토의 40년 통치에 있어서 종교성은 풍부했지만 오히려 종교의 그늘에서 사람을 위주로 하는 사람제일주의 사상은 매우 빈약했다.

다섯째, 요시프 티토 대통령의 40년 통치에 있어서 완전히 전무한 것은 국방을 담당할 군사력이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국방력이 전무한 증거는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 연방공화국>40년 역사를 언급하고 논의하게되는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 <군사력>이나 <군부>라는 언급을 전혀 들어 볼 수 없으며 어떤 문건에도 나라의 국방을 위한 문건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자주 국방>과 <선군정치>라는 용어들의 개념은 요시프 티토 대통령이 주장한<사회주의 연방공확국>의 40년 역사와는 거리가 너무나 멀고 아득한 소리로만 들릴 뿐이다. 티토의 40년 사회주의 역사와 주체사상의 통치이념의 차이점을 간략하게 살펴 보았다.

이 글을 끝 맺으며,


2011년 5월 26일에 세르비아 군부 사령관 이었던 믈라디치 사령관을 16년만에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UN이 극악한 <인종청소학살자>로 지명한 중범죄자를 도대체 16년후에야 체포를 했다니 이것이 말이 되는가?

세르비아에서 서방이 저지른 대량 학살사건을 무조건 <인종청소>로 뒤집어 쒸워 놓고 발칸반도의 지배권을 강탈한 미국은 책임회피용으로 믈라디치 사령관을 살인자로 지명하고 16년 동안 지명수배 하에서 방치해 놓고 있었다.

이제는 이용가치의 시효가 다 지났기 때문에 체포된 믈리디치 사령관이 무슨 말을 토해낸다 한들 미국이 아무 염려를 할 필요가 없게 됬다.

미국이 아무 염려가 없기 때문에 이제야 믈리디치 사령관을 <인종청소>의 범죄자로 16년만에 체포의 소동을 부리고 있다. 그것도 현재 휘청거리고 있는 친미적 세르비아 보리스 티타치 대통령을 도와주기 위한 꼼수라고 생각이 된다.

서해의 천안함 사건, 박근헤 정수학원 사건을 비롯하여 숱한 숨겨진 비밀 사건들이 아직도 미국의 입장에서 시인하는 유효한 시간이 다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할수 없이 숨겨진 상태에서 그대로 덮어 두고 2012년 4월 총선을 치뤄야만 할것으로 여겨 진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오늘의 젋은 세대들이 천리의 안경을 통하여 역사를 꿰뚤어보는 시각들이 굉장히 발전되여 있기때문에 2012년 4월의 총선에 대하여 희망을 갖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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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유 태영 박사 2012-02-27]

민족통신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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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님의 댓글

역사 작성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근세 역사를 조견하는데 많은 도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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