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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마 진상조사단 리화우 사무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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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마 다카사키=노길남 민족통신 특파원]도꾜 우에노 역에서 군마현에 소재한 다카사키시로가는 초특급 열차(신칸센) 표를 4,090엔(약45달러)주고 구입하고 2층으로 된 열차를 탔다. 지정표를 구입하지 못해 자유석표를 구입했기 때문에 여기 저기 다니다가 빈자리가 있어야 앉을 수 있는 열차표였기에 1층, 2층 자리들이 거의 꽉 찬 상태여서 오르락 내리락 하다가 겨우 자리를 찾았다.
100킬로미터 조금 넘는 거리이다. 우리 나라 거리로 따지면 2백50리길 거리였다. 한국의 KTX 같은 초특급열차이기에 45분 가량 걸려 다카사키시 역에 도착했다. 동포2세 리화우선생(50-군마조선인강제연행 진상조사단 조선측 사무국장)이 역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만나는 즉시 일제시대 강제연행, 강제노동으로 끌려가 군마현 다카사키 지역에서 희생된 조선인들(한국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추도비가 있는 군마현 대공원으로 갔다. 일제시대 이지역에만 3천여명의 조선인들이 강제로 끌려가 희생되었는데 공식으로 밝혀진 명단만 3백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군마현 공립공원이라서 그런지 역시 좁은 땅 일본이라고 하는데도 이 공원의 크기는 아주 넓었다. 공원숲을 한참 들어가는 동안 전쟁시기에 군수공장과 화약고와 군수물자를 나르기 위해 설치되었던 비밀 철로길 등 그 흔적들도 발견되었다. 공원 뒤쪽 아늑한 자리에 우리말과 영어, 일본어로 쒸어진 추도비가 보인다.
리화우 선생은 “해마다 4월 마지막 주일 토요일 오전11시에는 이곳에서 조선인들과 양심적인 일본인들로 구성된 진상조사단 임원들과 회원들이 함께 모여 추모회를 진행합니다.”라고 설명한다. 이 추도비에 씌여진 글발은 “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Rememberance, Reflection, and Friendship)”이었다. 추도비 앞쪽에 크게 쒸어진 글발들이 눈에 띈다. 그 뒤쪽에는 2004년 4월24일에 세워진 이 추도비의 설립취지문이 작은 글씨로 우리 글과 일본 글로 적혀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세기의 한시기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하여 지배했다. 또한 지난 대전중에는 노무동원계획에 의해 많은 조선인이 전국의 광산이나 군수공장 등에 동원되었고 여기 군마땅에서도 사고와 과로로 인하여 귀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21세기를 맞은 오늘 우리들은 과거 일본이 조선인에 대하여 크나 큰 손해와 고통을 입힌 역사의 사실을 깊이 기억에 새기고 진심으로 반성하여 다시는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명한다.
<<과거를 잊지 말고 미래를 보며 새로운 상호이해와 우호를 돈독히 할 것을 바라면서 노무동원에 의한 조선인 희생자를 진심으로 추도하여 이 비를 건립한다. 이 비에 담겨진 우리들의 마음을 다음 세대에 계승하면서 아시아의 평화와 우호의 끊임없는 발전을 바라는 바이다.>> 라고 씌여져 있다.
이화우 선생은 그러나 이 추도비가 세워지기까지 양심적인 일본 사회단체 인사들은 이곳 지방정부측과 부단한 투쟁을 벌이면서 노력해 왔다고 설명하면서 “사실상 추도비 취지문에 강제연행이나 강제노동 등의 단어들이 마땅히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말들은 취지문 원문에 들어갔으나 지방정부측 관리들과 실랑이를 벌이면서 밀고 당기는 과정을 거쳐서 그런 것들을 양보하고 이 추도비를 건립하게 되었다.”고 그 동안의 애로점들을 귀띔해 준다.
[질문]비문을 둘러싸고 벌어진 실랑이를 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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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마 공립공원에 세워진 강제연행 희생자 추모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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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화우 조선측 사무국장:이 추도비를 건립하는데 힘써운 단체는 앞서서도 설명했지만 일본 양심인들이 주동이 된 시민단체이다. <<일본 군마현 조선인-한국인 강제연행희생자 추도비를 지키는 회>>의 사무국장인 이노우에 데루오씨가 작성한 그 간의 활동보고서를 참작하여 이 추도비와 관계되는 내용들을 설명해 드리겠다.
비문은 2002년 3월15일 양심적인 일본인 단체가 같은 해 4월에 제출했다. 10월28일 군마현 지방정부로부터 답이왔다. (1)신청단체명을 <조선인.한국인 강제연행희생자 추도비를 세우는 회>를 <<노무동원 조선인희생자추도비를 세우는 회>로 고칠데 대하여, (2)강제연행이라는 어휘는 삼가해 달라, 일본외무성하고 의논하였는데 <모집>, <관알선>, <징용>의 표현인즉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강제연행인지, (3)<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를 단순하게 <조선인 추도비>로 하면 어떤가, ‘반성’이란 과거 일본국책에 대한 비판의 측면을 품고 있어 정부가 조약적으로 해결할 문제이다. (4)’강제연행’이란 용어는 정부도 인정안하고 있다, 무라야마 오부찌(이전 수상들) 담화의 범위내에서 표현하도록 고치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담당자와 여러 번 격론을 벌이면서 2003년 3월 수정안을 제출했다. 7월10일 군마현 당국에서 재검토결과가 나왔으나 우리 생각하고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이 같은 추도비를 공립공원에 세울수 있는데 대해 큰 의의를 부여하여 다음과 같은 재수정안을 내놓고 현정부 당국자들과 의사일치를 보았다. 그 결과는 (1)신청단체명을 <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의 추도비를 세우는 회>로 한다. (2)시(노래)는 새기지 않는다. (3)비문은 축소하며 <강제연행>을 (노무동원>(당시에 일본정부가 쓰던 용어)으로 바꾸지만 건립취지의 기본정신은 견지한다. (4)완공후의 유지관리단체로서 <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의 추도비를 지키는 회>를 조직하여 회칙을 정비한다. 그래서 같은 해 8월28일 당국과 시민단체간의 최종합의가 이뤄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 군마현 지사는 2003년 11월13일 건설용지 제공 결재에 서명(수표)했다. 그 결과 우리 요구가 100% 실현된 것은 아니지만 일본에서 최초로 공유지에 추도비가 건립되는 역사를 이뤄냈다. 그리하여 추도비 건립에 온 힘을 기울여 온 일본인 양심단체 ‘액션50’ 회원들은 추도비 건립을 시작하여 9년이 지난 2004년 4월24일 35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군마조선초중급학교 학생들이 부르는 <고향하늘>이 메아리치는 속에 1만여명의 뜻이 깃든 <<군마현 조선인강제연행 희생자 추도비>>제막식이 내외의 커다란 관심속에 진행되었다.
[질문]추도비를 건립하기까지 일본인 양심인들의 시민단체 <<액션50>>이라는 조직이 주동역할을 했는데 이 단체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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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라는 글발이 새겨진 추모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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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화우 조선측 사무국장:<<액션50>>이라는 일본인 시민단체는 1995년 3월25일 조직되었다. 이 명칭의 이름은 본래 <<전후50년을 추궁하는 군마 시민행동위원회>>이었는데 이것을 약칭 <<액션50>>이라고 불러왔다. 이 조직에 참여한 군마지역의 일본시민들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소속과 신앙의 차이를 넘어선 순수한 시민들의 모임이다. 창립 첫해인 95년 7월5일 근 한달간 “일본은 아시아에서 뭘했나?”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아시아 침략사를 담은 사진전시회를 개최했고, 이듬해인 1996년에 <<조선인 강제연행, 강제노동>>을 주제로 강연회 및 진상조사활동을 시작했고, 해마다 <<군마평화전>> 행사를 주최하고 한국 평화단체들과 교류활동도 전개해 왔다.
[질문]’추도비를 세우는 회’ 라는 명칭의 조직도 있는데 이 단체에 대하여 알고싶다.리화우 조선측 사무국장:’추모비를 세우는 회’라는 단체는 <<액션50>>이 1998년 9월6일 결성 3년을 맞아 <<군마현 조선인-한국인 강제연행 희생자추도비를 세우는 회>>로 개칭된 조직이다. 그 이유는 명치시대 이후 일본이 미국을 비롯한 서구라파 제국주의 열강들과 패거리가 되어 아시아 나라들을 침략하면서 특히 조선을 식민지 지배하에 막대한 손해를 입혔지만 이에 대한 반성은 커녕 사죄와 보상도 안하고 있는데 대한 양심인들의 분노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1965년 일한조약을 이유로 종군위안부, 강제연행 및 원폭피해자를 비롯한 전쟁희생자들에 대한 사죄, 보상요구를 거부해 왔다. 일본당국은 또 대북적대시 정책으로 일관해 왔고,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사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일본 내 반동들에 의해 우리 동포들이 폭행사건의 희생자들로 되어 왔다. 일본 정부와 일본인들이 자행한 과거죄행을 직시하며 정확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과거사의 진정한 반성과 보상없이는 일본의 민주주의나 인권확립 같은 문제는 요원하다고 생각한다.
[질문]추도비 건립운동 과정에서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모금하려던 목표액은 1천만 엔으로 알고 있다. 이 과정에서 희생자 조사횔동은 어떻게 해 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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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비 뒤쪽에 취지문이 적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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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화우 조선측 사무국장:일본인 시민단체는 1992년 2월에 이제까지의 조사활동으로 수집한 군마현 내 강제연행, 강제노동의 실태를 자료집으로 수록, 편집하였다. 이들은 또 매월 정보지를 발간하여 이 운동의 지지자, 후원자 수와 모금액의 집계를 비롯한 추도비 건립의 추진정형을 알려 나갔다. 정보지는 20호까지 발간했다. 조사활동 과정에 강제연행장(나까지마 비행기 지하공장-당시 일본군용비행기의 30%를 제조)과 증언자들을 새로 찾아내었으며 조선인강제노동자들의 새로운 싵태도 파악하였다. 조사활동은 오늘도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질문]’추도비 지키는 회’와 희생자유가족들과의 관계, 그리고 강제연행 희생자들의 유골조사는 현재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리화우 사무국장:<<추도비 지키는 회>>는 희생자들을 계속 찾는데 힘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유가족들도 지속적으로 찾고 있으며 또한 유골조사활동고 계속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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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화우 군마현 사무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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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이 단체가 강제연행, 강제노동 희생자 최삼범씨의 차남인 최규식씨 부부를 한국 전라도에서 초청하여 지난 일제강점시기 일본으로 강제연행되어 군수지하공장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린 현장(군수지하공장)을 구경시켰다. 이 희생자의 아들은 3살 나이에 아버지와 헤어졌다. 그느 ㄴ바로 그의 아버지의 삶을 빼앗아간 현장에 초대되어 뜻깊은 행사에 참가했다. 이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눈시울을 적셨다. 이 유가족은 <<추도비 지키는 회>>대표들에게 “장기간에 걸쳐 제 아버님을 비롯한 숱한 조선인 강제연행자들을 찾는데 노력을 기울이고 이렇게 저희를 불러 준 뜻있는 분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하는 한편 "아버님을 폭력으로 끌어가서 죽이고 60여년 간 아무 소식조차 하지 않는 일본정부에 대해 진상규명과 공식사죄를 촉구한다.”고 분노를 터뜨리며 외쳤다.
현재 <<추도비 지키는 회>>는 강제연행 희생자들의 유골조사활동도 전개하고 있다. 강제노동현장 근처의 매장기록, 유골존재 등의 조사의뢰를 통하여 희생자들의 소재를 계속해서 찾고 있다. 비록 군마현 정부당국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비협조적일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의 문의에 대해서 희생자들과 유골의 출처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문의에“우리 현은 해당없다”는 식의 자세를 보이고 있어 양심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일본 군마현 조선인-한국인 강제연행 희생자 추모비를 지키는 회>>의 이노우에 데루오 사무국장은 추도비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마지막 맺는 말에서 “추도비를 세우는 운동은 이나라(일본)에 진짜배기 민주주의와 인권을 확립하고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과 진정한 우호와 연대를 맺는 평화구축의 기초를 닦기 위한 운동이다. 이는 일본 정부의 정책을 전환시킬 힘을 갖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기본정신과 뜻이 완전히 비문에 새겨질 그날까지 또한 희생자들의 유골이 유가족들에게 모두 돌려지게 될 그날까지 계속 매진할 것이다.>>라는 결의를 다졌다.
[노길남 민족통신 특파원]:바쁜데에도 많은 시간을 내주어 안내해 주며 정성을 다하여 대담에 응해준데 대하여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이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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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마현 공립공원 내부에 위치한 아늑한 곳에 강제연행 조선인들의 희생자 추모비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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