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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별의 세계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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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400회 작성일 22-11-04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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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장

2

그날은 리수진에게 있어서 운명적인 날이였다. 뜻밖의 일들이 미리 정해놓은 시간표대로 기다리고있었던듯 차례로 닥쳐들었다. 처음 그를 찾아온것은 평양에서 《어머니사망, 급래》라는 전보였다. 그는 불시로 심장이 멎은듯 가슴을 움켜쥐며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잠시후엔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어제까지만해도 어머니는 여전히 건강하여 로병선전대활동에 여념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장거리전화로 인민반장을 찾아 거품이 끓는 입으로 소리쳐 물었다.

《오늘 전보를 받았는데… 그게 사실이오? 어머니가, 우리 어머니가 어찌됐다구요?》

《예, 어제밤 끝내…》

그는 인민반장의 다음말을 듣지 못했다. 30대의 녀인이였는데 울음섞인 목소리로 자기가 전보를 치고 직장에도 알리고… 하면서 무어라고 계속하였다.

그의 손에서 송수화기가 떨어져 데룽거렸다. 재빛의 구름이 그를 휘감아 태를 치는듯 싶었다. 귀속이 웅웅거리고 입술이 말라들었다. 한방울 눈물도 없이 두 눈을 찌르는 깔끔거리는 아픔만이 골수에까지 파고들었다.

그를 키워준 어머니, 그 어머니는 함흥에 시집을 간 친딸이 모시고싶어하는것도 마다하고 끝까지 그를 끼고있었다. 아니, 끝까지 그를 지켜주었다고 해야 옳을것이다. 그런데 인제는 모든것이 끝났다. 장년의 그였지만 자신을 부모잃은 어린 고아처럼 느꼈다. 그를 지켜주던 사랑의 휘장이 걷히고 치욕스러운 변절자의 그림자가 그에게 진흙처럼 달라붙고말았다. 그는 정신없이 공장합숙으로 달려갔다.

저물녘이였다. 대한추위가 대마루에서 기승을 부리는 맵짠 날씨였다. 산악도시는 어느새 어둑스레해지고 장자강에서는 얼음장터지는 소리가 대포소리마냥 요란했다.

공장합숙은 비여있었다. 중소형발전소건설을 끝내고 돌아온후부터 한호실에 들어있는 고수머리총각 철남이도 보이지 않았다. 리수진이 처음 고미덕에 도착하던 날부터 소대장과 함께 각별히 친숙해진 멋쟁이총각이였는데… 그한테라도 말해놓고 떠날 생각이였다. 후야근이여서 분명 합숙에서 굳잠에 들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고미덕에서와 발전소건설장에서 친혈육처럼 가까와진 이전 돌격대원들이 각기 자기 직장들에 돌아가있으므로 일일이 알려줄수 없는것이 안타까왔다. 자기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갔다는것을 알면 그들은 몹시 섭섭해할것이다.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는데 습관된 그 소박한 젊은이들을 노엽힐수도 있는것이다.

우두커니 서서 생각을 굴리다가 수첩장을 찢어 사연을 적어놓았다. 철남이가 그를 대신하여 모두에게 알려줄것이다. 서둘러야 했다. 아껴두었던 외출용솜옷을 바꾸어입고 다시 밖으로 나섰다.

북방의 겨울은 혹독하다. 해가 떨어지면 더 심한 추위가 살을 에인다. 면도날같은 강바람이 눈언저리와 귀바퀴를 예리하게 저미였다. 벌써 하늘에는 된추위에 얼어든 별들이 파랗게 눈뜨고있었다.

별안간 걸음을 멈추었다. 뇌리를 찌른 하나의 생각에 숨이 떡 막혔다. 어머니가 왜 그렇게 급작스레 사망했겠는가. 이 못난 양아들때문이 아니였겠는가?… 그 어머니를 병들게 하고 응어리진 마음을 풀지 못한채 눈감게 한것이 과연 누구때문이였는가? 불초한 자식 이 수진이때문이였다. 그러니 이제 무슨 낯으로 어머니앞에 나선단말인가?…

가슴이 졸아들고 이가 떡떡 마주쳤다. 마음속에 드리운 차디찬 고드름이 사정없이 찔러대는것을 참을수 없었다.

그는 입을 벌리고 맵짠 바람을 마시며 정신없이 허덕이였다. 아, 어머니, 어쩌문 좋습니까, 죄많은 이 못난것이 이제 어떻게 어머니를 뵈온단말입니까. 나는 못갑니다. 이대로는 어머니를 찾아뵙지 못합니다. 그렇겐 정말 못하겠습니다, 어머니!…

생전엔 마음을 허비고 눈을 감은 오늘엔 그 우에 눈물을 떨군다면 그 마음의 상처를 얼마나 또 쓰라리게 하겠는가!… 성에 불린 눈섭이 사뭇 떨리여 아무것도 가려볼수 없었다.

천천히 돌아섰다. 누군가 소리쳐부르는것도 알지 못하고 정처없이 걷기 시작했다. 고수머리 철남이가 달려와 그를 붙들었을 때에야 걸음을 멈추고 귀가 먼듯 멀거니 쳐다보았다.

《내가 부르는 소릴 못들었시오? 사방 헤매면서 아바일 찾았는데…》

《나는 왜?》 하고 그는 목이 잠긴듯 중얼거렸다.

《아, 오늘 설미가 붕대를 푼다고 하질 않았나요. 생각안나세요?》

《그래! 그랬지.》

별안간 가슴을 뜨끔하니 깨무는듯 한 충격에 눈을 꽉 감았다. 그걸 잊다니, 북천강돌격대전체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설미, 설미가 도병원에서 눈수술을 했는데 오늘 바로 붕대를 푼다고 했었다.

고수머리가 그를 잡아끌었다.

《빨리 가자요. 북천강돌격대가 다 갔는데… 빨리, 빨리요!》

그는 허둥거리며 고수머리가 잡아끄는대로 걸음을 빨리 하였다. 이렇게 가는것이 옳은 일인지 분간할 새도 없었다.

병원에 이르렀을 때엔 날이 완전히 어두웠다. 안과병동의 복도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북천강에서 볕과 추위에 타고 굶주림에 허덕이며 물길굴을 뚫고 언제를 쌓던 사람들, 전날의 돌격대소대원들이 전부 몰려온듯 하였다. 귀여운 설미의 눈을 싸맸던 붕대를 푸는것이다. 앞 못 보던 설미, 웃음과 노래로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주던 귀여운 소녀, 그애가 광명을 찾기를 그토록 바라던 사람들이였다.

어느새 고수머리는 창유리쪽의 이전 돌격대소대장에게 달려가고 수진은 사람들의 뒤쪽에 홀로 남았다. 설미가 나올 유리문 맨앞에 서있는것은 털보 장윤보였다. 거쿨진 체격에 마음씨 고운 털보- 윤보… 그가 눈에 띄자 웬일인지 수진은 다시금 무엇인가 가슴한끝을 깨물어놓는것을 느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50고개를 바라보는 이 나이에 질투를 하는것인가?… 불시로 치미는 애수에 못이겨 슬그머니 눈길을 돌리고는 복도벽에 어룽거리는 그림자를 얼없이 바라보았다.

많은 생각들이 엇갈리며 밀려들었다. 장윤보와 한봉숙, 설미와 윤보… 털보- 윤보야말로 그들의 친오빠, 친아버지가 되여준 사람이였다. 고미덕에서, 북천강발전소건설장에서 돌격대식당일을 맡은 한봉숙을 위해 나무를 해오고 얼음을 까고 물을 길어주었다. 설미가 앓아누웠을 때엔 어데선가 애기손바닥만 한 잉어까지 잡아왔었다. 그 한 마리 잉어때문에 온통 찢기고 긁히고 옷은 얼음갑옷처럼 꽛꽛해졌는데 동상을 입은 발은 퍼렇게 부어있었다.

설미의 눈수술을 위해 발벗고 나선것도 장윤보였다. 처음엔 그가 무엇때문에 자주 없어지군 하는지 알지 못했다. 소대장은 물론 전체 소대원들이 알고있는것을 수진이만은 모르고있었다.

윤보는 일을 끝내고 잠시 말뚝잠을 자다가도 철남이나 다른 녀석들과 수군거리고는 어데론가 달려가군 했다. 한밤중에 병원의 유리문을 쾅쾅 두드려 직일의사, 간호원들을 깜짝 놀래운 일도 많다고 한다. 하여 병원에서는 장윤보를 설미의 아버지로 알고있었다. 진정 그야말로 설미의 아버지로 불리울만 했다. 때 이른감은 있지만 끝내 설미의 눈수술을 결정했을 때 그애를 병원에 업고간것도 바로 그였다.

그날 수진은 발전기실 설비들을 조립하고있었다. 장윤보가 설미를 업고 와서 거무스레한 입술을 혀로 추기며 말했다.

《아바이, 병원에 가는 길이우다. 끝내 설미의 눈수술을 하게 됐어유.》

그걸 왜 수진에게 《보고》해야 했던지?… 문 저쪽엔 목도리를 풀어놓은 한봉숙이 서있었다. 수진이와 눈길이 마주치자 머리를 숙이며 입술을 깨무는것이 알렸다.

야속한 사나이, 소심하고 비겁한 사나이, 수진은 바로 그러했다. 그러나 장윤보는… 설미를 업고 가던 윤보, 허우대 큰 그와 보폭을 맞추려 애쓰던 봉숙이 … 그 녀자는 발그레해진 볼에 웃음을 띄우고 무어라 잰말씨로 말하며 가고있었다. 장윤보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였고…

그들이야말로 젊고 다정한 한쌍의 남녀였다. 한봉숙은 비로소 윤보에게서, 거쿨지고 소박하고 인정많은 사내에게서 자기가 의지할 새로운 삶의 기둥을 찾은듯 싶었다.

그날 그들이 멀어져가는것을 보며 수진은 손에 쥐고있던 기름걸레만 계속 비틀어 짜고있었다. 삶이란 기다리는것이 아니며 맞받아가는것이라는 소박한 철학이 머리에 새겨진것도 그 시각이였다. 삶이란 곧 사랑이며 사랑이란 바치는것이다. 바치는것만큼 더 큰 보답이 오기마련이다. 바치는것이 없이 사랑을 바라지 말라, 저절로 와주려니 생각지 말라.

대신 수진은 여기서 피땀을 바치며 일하였다. 발전기조립을 맡아하면서 밤낮을 몰랐다. 시운전을 할 때 피대에 감겨 팔목이 으스러지기도 했다. 한 녀인의 사랑은 눈물속에 자취를 감췄어도 돌격대전체가 그를 사랑해주었다. 말없는 아바이를, 과오를 범한 이전 국장을, 자기들보다 10년, 20년 더 나이많은 사람을 스스럼없이 아바이로 부르며 사랑해주었다.

드디여 유리문이 열리며 밝은 불빛이 어둑시그레하던 복도에 백광의 비단필을 쭉 깔았다. 한봉숙이와 녀의사 한명이 설미의 손을 잡고나왔다. 두눈을 깜박거리며 가득 몰켜선 사람들을 놀라서 둘러보는 설미,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맨처음 누구를 알아볼것인지, 누구를 불러볼것인지 타는듯 한 기대를 품고 기다리고있었다. 그러나 설미는 꼼짝하지 않고 험상궂게 둘러선 사람들을 공포에 질려 살피다가 소스라치며 뒤걸음쳤다.

한봉숙이 그애를 꼭 안으며 속삭이였다.

《설미야, 왜 그러니? 너를 사랑해주던 돌격대아저씨들이야.》

설미는 머리를 저었다. 뾰조롬히 내밀고있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아니야. 엄마, 그 아저씨랑… 아바이랑… 없어요. 털보아저씨랑…》

누군가 코를 훌쩍거렸다. 털보- 윤보가 《얘야.》하면서 팔을 벌리자 설미는 기절할듯 했다. 그애가 지금껏 등에 업히고 목에 매달리던 마음씨 후한 아저씨가 아니라 눈섭이 시꺼멓고 턱수염이 수밤송이같이 내돋은 《청석골의 림꺽정》이 자기를 안으려 했던것이다. 그애가 어찌나 기겁했던지 윤보도 어마지두 놀라며 움츠러들었다.

한봉숙이 바들바들 떨고있는 설미를 부둥켜안으며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속삭이였다.

《설미야, 장아저씨다. 너를 제일 고와하던 아저씨!… 눈을 똑바로 뜨고 봐, 응?》

그러나 설미는 어머니품에 더 깊이 파고들뿐이였다. 녀의사가 눈물을 참으며 귀띔해주었다.

《눈을 감아요. 설미, 그럼 다 알게 돼.》

순간 수진은 가슴이 에이는듯 했다. 어째서 또 눈을 감아야 하는가, 이렇듯 소박하고 인정깊은 사람들, 도토리밥 한술이라도 차례지면 설미부터 찾던 이 뜨거운 사람들을 눈을 감고서야 알아본단말인가?!…

연암 박지원이 쓴 서화담의 이야기가 머리를 쳤다. 서화담이 길을 잃고 우는 아이를 만나서 물었다는 이야기… 왜 우느냐? 하니 5살적부터 앞을 못보다 갑자기 눈이 떠져서 천지만물을 환히 보게 됐으나 자기가 살던 집을 찾지 못해 운다고 했다. 서화담이 말했다. 《도로 네 눈을 감고 찾아보아라. 그러면 곧 집으로 갈수 있을것이다.》

그렇게도 할수 있을것이다. 그렇지만 그처럼 정든 사람들을 눈을 감고서만 알아보다니… 눈과 귀로만 사람을 알아보는것은 아니다. 체취도 있고 심장의 느낌도 있다.

마침 장윤보가 자갈씹는 소리를 내였다.

《설미야, 내가 털보- 윤보, 장아저씨다.》

설미의 두눈이 앙증스럽게 반뜩이였다.

다시 장윤보가 팔을 벌리자 천천히, 한발 두발 내짚더니 별안간 와락 달려들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아저씨!-》

한봉숙이 손으로 입을 싸쥐며 터져나오는 오열을 씹어삼켰다. 녀의사가 눈물짓고 고수머리도 눈굽이 축축해졌다.

수진은 가슴이 저려나는것을 참을수 없었다. 귀여운 설미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더이상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기쁨과 애수, 지근거리는 모진 애수… 저도모르게 꽉 부르쥔 손아귀도 저려나기 시작했다. 하여 그는 아무도 모르게 가만히 돌아섰다. 설미야, 그 아저씨품에 꼭 안겨라, 정말로 좋은 아저씨다. 너를 위해서라면 산도 허물 아저씨이다. 다시는 너와 어머니를 모욕하지 못하게 지켜줄것이다. 누구도 천대하지 못하게!…

발걸음소리를 죽이며 걸었다.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일시에 몸을 돌린것도 장윤보가 《아바이!》 하고 거칠게 부른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순간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사람들에게 가리워있던 백광의 주단이 먼 복도끝까지 쭉 뻗어왔던것이다. 시꺼먼 그림자, 그자신의 그림자만이 불빛을 막고 흐느적거리고있었다.

《아바이!》

이번엔 여러사람이 그를 불렀다. 설미를 안은 장윤보가 다가왔다. 수진이 머리를 돌리자 낮고도 거친 속삭임이 그의 귀전을 마구 후려쳤다.

《왜 그냥 가시우? 설미 엄마가 얼마나 괴로와하는지 정말 못보시우?… 우린 그래도 아바일 존경해왔는데… 그렇게 용렬한줄은 몰랐수다. 이 기쁜 날… 그렇게 가버리면 설미 엄마는 또 어떻게 되겠수? 밤새 설미를 안고 울게하고 싶으시우. 예?!…》

울다니, 설미 엄마가 왜 운다는것인가?… 수진이 코를 찡기며 입을 열려고하자 장윤보가 또 거칠게 속삭이였다.

《우린 그렇게 생각지 않수다. 국장아바이처럼 속으루만 끙끙 앓는걸 질색한단말이우. 우린 막돼먹은 로동자들 같애두 마음은 깨끗하우다. 과오를 범했으면 범했지 그게 뭐 어쨌단말이요. 고치면 되는거지. 그래서 여기 와서 뼈빠지게 일하지 않았수? 진심으로 일하는걸 우린 다 아우다. 그래서 존경해주구… 그런데 아바인 뭐요. 우리 마음도 모르구… 설미엄마 생각도 모르구…》

사람들이 다가왔다. 돌격대소대장, 고수머리총각 그리고 함께 일하며 굶주림과 무서운 추위를 이겨가던 사람들… 돌격대소대장이 말했다.

《아바이, 여기서 우리랑 같이 삽시다. 우린 벌써 당위원회에 제기했습니다. 고지식하구 성실한 일군이라구요. 장윤보동문 자기 집을 내놓았구요. 아바이한테… 아니 설미랑 다같이 살게 하자구…》

장윤보가 설미를 내려놓았다.

《설미야, 인젠 네가 말해봐. 너 나하구 약속했댔지?… 그럼 그대로 말해야지. 응?!…》

설미의 겁먹은듯 한 까만 두눈이 그를 올려다보고있었다. 너무도 뜻밖의 충격에 얼어붙어버린 수진이를, 낯선 사나이를 말끄러미 지켜보고있었다.

수진은 여전히 말뚝처럼 박혀선채 가쁘게 숨쉬고있었다. 그애가 무슨 말을 하려는것인지 애타게 기다려졌고 또 무서워졌다.

장윤보가 설미의 잔등을 어루쓸며 어서 말하라고하자 돌연 설미는 울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가… 어머니가…》 눈물에 젖은 목소리가 숨막히는 흐느낌속에 가까스로 이어졌다. 《내가 눈을 뜨면… 아버지를 본다구 했어요.…》

순간 수진은 후려맞은듯 흠칫거리며 신음소리를 삼켰다. 별안간 목이 칵 메고 눈물이 끓었다.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두팔을 벌렸다. 그리고는 소리없이 다가드는 그애를 꽉 껴안고 흐느꼈다. 설미가 울고 고수머리도 울었다. 장윤보가 끌어오는 한봉숙의 두볼도 눈물에 즐펀해져있었다.

《참 별난 사람들이야.》 돌격대소대장이 솜동복팔소매로 눈굽을 찍으며 부아가 나는듯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정이 들문 그만이지 울긴 왜 울면서… 에 참 나까지 울리면서…》

진정 《별난 사람들》이다.

남의 아픔에 울고 남의 기쁨에 울고… 때로는 거칠게 어성을 높여 싸우기도 하는 사람들, 무섭게 욕하고 뒤집어엎기도 하건만 때로는 동지를 위해 얼음물속에 뛰여들고 자기의 피를 서슴없이 뽑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고마와 수진은 울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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