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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별의 세계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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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2,155회 작성일 22-10-25 0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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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3

그때까지만해도 그는 자기가 젊었다는것을 모르고있었다. 젊음은 자기를 잊고 부단히 세월을 주름잡아 달린다. 젊음은 당연하고 변함없을것처럼 여겨지며 출발이 있으면 끝이 있고 탄생과 더불어 사멸도 주어진다는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대전형무소의 1사에서 처음 그는 20명의 동지들과 같이 한방에 있었다. 변기통과 물을 담은 나무통이 차지하고있는 자리를 내놓으면 몸을 펴고 누울 자리도 없다. 뼈가 앙상한 사람들이 다리를 꼬부리고 모로 누워 《칼잠》을 자고 일어나면 반바께쯔정도의 물이 나무통에 부어진다. 20여명이 그것으로 씻고 먹기도 하는데 1인당 고무신짝으로 두번씩 뜰 몫이다. 면회온 사람이 주고간 고무신마저 없었다면 무엇으로 물을 떠먹어야 했을가.… 기아급식에 물까지 부족하여 사람들은 해골마냥 말라빠져 서로 몸을 비벼댈 때마다 우적우적하는 소리가 스산하다.

살아있는 미이라들… 왜 사는가? 왜 살아야만 하는것인가?… 복더위, 강추위, 호흡할 공기마저 부족한 감방, 어둠과 습기, 변기통의 역한 냄새, 굶주림, 질병, 고문… 지옥의 고통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을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살고있다.

죽을 때까지 살아간다. 왜 사는가. 꼭 살아야만 하는가?… 삶 그자체가 모욕이고 고통이다. 죽으면 얼마나 편할것인가. 이미 죽음의 문서장에 도장을 찍은 사람들이여서 언제든 태연히 그것을 맞을 준비가 되여있다. 그래도 아득바득 삶을 지탱해간다. 욕창으로 살이 썩고 문드러지고 이름도 붙일수 없는 질환으로 장기들이 터지고 곪아가는데도 한사코 삶을 놓지 않으려 한다.

진서는 언젠가 구역질나는 하수도구멍에서 살아가는 개구리를 본적이 있다.

시꺼먼 감탕, 구린내나는 썩은 물, 그속에서 사는 개구리는 눈마저 멀어있는것 같았다. 그 자체가 끈적끈적한 오물이였고 구역질나는 배설물이였고 보기에도 끔찍한 욕창이였다. 그런데 그것을 잡아 뜯어먹는 사람이 있었다. 다리하나씩 떼여 진서에게, 다른 동지들에게도 나누어주며 먹으라고 했다. 그때 진서는 하마트면 토할번 했다. 기어이 살아야 한다고 동지들을 고무하던 그자신이 왈칵 치미는 토악질에 입을 싸쥐고 돌아서버렸다.

삶이란 무엇인가. 진정 사람은 왜 사는것인가?… 진서는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할지 자신이 없었다. 한때는 그랬었다. 누가 그렇게 물었더라면 조금 어리둥절해하며 뒤더수기를 긁고말았을것이다. 허나 인제는 그에 대하여 주저없이 말할수 있다.

삶의 궁극의 목적은 사랑이다.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하여 산다. 사랑이 없는 삶,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못하는 삶처럼 허무하고 비참한것은 없다. 바로 김진서의 삶이, 그와 같이 피흘려 싸우다 쓰러진 사람들, 지금도 철창속에서 인간이 겪을수 있는 최악의 조건에서도 버티고있는 그들의 삶이 그것을 증명해주고있다.

그는 사랑하였다. 정든 고향집을, 안해를, 딸들을 사랑하였다. 민청열성자회의에 평남도대표로 자기를 추천한 사람들을 사랑하였고 1947년 5월 모란봉공설운동장에서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진행된 전국청년축구대항경기에 평남도팀을 이끌고갔던 자기의 복받은 삶을 사랑하였고 그 팀이 그해 쁘라하에서 열린 제1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1등을 했을 때 새 조선의 청년된 행복과 기쁨을 사랑하였다.

1949년 5.1절행사에 참가하여 역전광장주석단에 계시는김일성장군님을 우러러 목청껏 만세를 웨치고 고향마을에 돌아왔을 때 밤늦도록 자기를 둘러싸고 기쁨을 같이 나누던 민청원들, 늙은이들, 아낙네들, 동네애들 모두를 사랑하였다.

이렇게 그는 광복후의 보람찼던 삶을 사랑하였고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 장흥에서, 지리산에서 피흘리며 싸워온 지난 날을 그리고 기어이 오고야말 승리의 래일을 사랑하였다.

사랑이 크고 뜨거웠으므로 쉽게 죽을수 없었다. 동지들이 놈들의 고문과 병마에 시달리다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면 가슴이 저려나 참을수 없었다.

이렇게 죽자고 목숨바쳐 싸워왔던가. 끝까지 살아야 한다. 지금은 사는것이 이기는것이다.

끝까지 살며 싸우기 위해서 그들은 《생포자동맹》을 무었다. 《생포자동맹》은 끝까지 살기 위해 싸우는것을 기본목적으로 삼았다. 모든 동지들에게 신심을 주고 용기를 주기 위해 진서는 선전사업을 맡았다. 총집교(전체 수감자들을 위한 설교모임)에 모일 때, 운동시간을 리용하여 사별로 정해진 책임자를 만나 구두선전내용을 통일시키기도 했다. 김장군님께서 펴시는 정치, 조국통일의 전망, 새 수감자들을 통한 공화국북반부의 사회주의건설성과… 선전효과는 컸다. 통방신호로 새 소식을 받을 때마다 사람들이 달라졌다. 하여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단식투쟁에는 전체 수감자들이 참가했다.

놈들은 당황했다. 배경이 있고 조직자들이 있다는것을 눈치채고 지하실로 한사람씩 끌고들어가 조겨대기 시작했다. 누군가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분것 같았다.

진서를 끌고가서 고문한것은 안가성을 가진 간수부장이였다. 사람들이 그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것은 《안목고채》라는 별명으로만 통해있었기때문이였다. 별명그대로 무자비하고 포악했다. 그자의 손에서 죽어나간 사람만도 수십명에 달한다고 한다. 진서를 끌어내간것은 당시 형인 간수부장 오영환과 같이 형무소에서 간수로 있은 오영선이였다. 들창코에 마마자욱이 흉하게 난 그를 사람들은 《대전미인》이라고 불렀다.

《나를 왜 끌어가는가?》 진서가 물었다.

《뼉다귀운동 시키자능기여.》

《누가?》

《안목고채락꼬.》 《대전미인》은 두툼한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벼르고있구매. 까죽(살가죽)을 벗겨놓는닥 하더구마.》

그자도 잔인했지만 《안목고채》라면 못난 얼굴을 찡기며 두려워서 몸을 떨었다.

소문그대로 《안목고채》는 무자비했다. 다짜고짜 뼈가 분질러지게 조겨대였다. 살가죽이 터져나가고 어깨가 부서져나간듯 했다. 불꼬치로 지져댈 때엔 살이 타는 냄새에 창자가 끓어오르며 싯누런 열물이 쏟아져나왔다. 몇분도 걸리지 않아 진서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얼마후 그는 독거수형처분을 받았다. 《먹방》으로 널리 알려진 0.75㎡의 작은 독방, 해빛 한줄기 스며들지 않는 콩크리트굴속에서 앞수정(손목을 앞으로 묶어 머리뒤로 비끄러매는 형벌), 뒤수정(뒤로 묶어 목에 맨다.)의 지독한 고문이 계속되였다. 그렇게 10분만 있으면 가슴이 우그러들고 목이 비뚤어지며 온몸이 땀으로 젖고 숨도 크게 못쉰다. 혈압이 높은 사람들은 1시간도 견디지 못하고 뇌출혈로 쓰러져 숨지고만다. (이러한 장기독거는 사람의 육체를 여지없이 오그라뜨리고 정신이상에 걸리게 하는 야만적인 처우로써 일제때에도 6개월까지로 한정했었다. 그러나 많은 비전향장기수들은 20여년을 독거수형의 극악한 형벌속에 처해있었다.)

앞수정, 뒤수정의 형벌속에서 취조가 계속되는데 전향공작도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당시 형무소에서는 300명 직원들이 갑부, 을부로 나뉘여 150명씩 24시간 근무하므로 취조를 맡은 간수부장(후에는 교무과장 또는 보안사놈들)은 시간을 아낄 필요가 없었다.

《김국홍, 너는 바보다. 너희들 모두 바보야.》

큰 취조만 맡고있는 간수부장 김익수가 말했다.

《그렇게 살아선 뭣해. 산 송장처럼 썩어가면서.》

그러면 진서는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뻑뻑한 손바닥으로 훔치며 말하군 했다.

《간수부장, 당신이야말로 바보요. 어떤게 산 송장인지 모르니까.》

《어떤거지? 말해봐!》

《당신같은게 산 송장이요. 일생 무덤굴속에 앉아있는 주제에 누굴 비웃어!》

《이 새끼, 아직 혀바닥이 물크러지진 않았구나. 죽어봐라!》

그자들은 말보다 악착스러운 고문을 더 즐겼다. 그러나 이후 형무소가 교도소로 이름을 바꾸고 《전향공작전담반》의 전향테로가 강화되면서부터는 물리적폭행과 정신적회유가 하나의 쇠바줄처럼 꼬여져 매일같이 비전향자들의 육체와 정신을 조겨댔다. 바로 그 시기 변절자들과 이미 전향한 사람들까지(소수이긴 하지만) 《전향공작전담반》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세월은 이렇게 갔는가?… 1968년 4월 대구로 옮겨가 한방에 든 류은혁과 6년전에 체포된 최하준을 만났을 때 진서는 소스라치듯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류은혁과는 17년만의 상봉이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그들은 17년세월을 떨어져있었다. 사실은 그리도 가까이 있었건만… 대전교도소에서 16년이나 하나의 담벽안에 갇혀있은것을 그때에야 알았다.

몰라보게 달라진 상대의 모습에서 비로소 자신의 모습도 보았다. 한때 그들은 젊고 씩씩하였건만 그새 50살을 전후한 늙은이들로 되였다.

누렇게 뜬 살가죽은 마치 재를 뿌려놓은듯 검버섯이 돋았고 귀에까지 내려덮인 머리엔 소금발이 허옇게 퍼져갔다. 움푹 꺼져든 눈확에서 까맣게 타고있는 준엄한 눈빛만 아니라면 그야말로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참혹한 정상이였다.

《어느새 이렇게?》하고 그들은 서로를 뜯어보며 중얼거렸다. 《이리도 늙었는가?…》

젊음은 어느새 저 멀리로 사라져가고 그들은 로년기에 들어섰다. 암흑속에서, 시궁창속에서 추위에 얼고 무더위에 느즈러지고 무서운 기아와 고문에 시달리면서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섰다.

《그래도 살아있었구만, 진서동지.》

《예, 살아있지요. 정말 죽고싶을 때가 많았지만… 죽을수 없었습니다. 우리야김일성장군님의 전사들이 아닙니까.》

《옳은 말이요. 나도 늘 그렇게 생각해왔소.》

그들의 상봉을 지켜보고있던 최하준도 말했다.

《동지들, 동지들과 함께 있으니 백배로 힘이 납니다. 우리 다같이 조국통일의 그날까지 살며 싸웁시다.》

살며 싸운다!…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산다는것이 그처럼 무서운 고통을 동반하기에 그 말은 그저 례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옳습니다.》 진서가 말했다. 《끝까지 살며 싸웁시다!》

동지들이 부르짖었다.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선 안돼.》

《그래도 그런 경우가 있지.》

《그건 옳지만 당면한 목표는 살며 싸우는것이요. 그렇게 결정합시다, 동지들!》

《당세포결정이요?》 최하준이 물었다.

《그렇소!》 류은혁의 대답이였다.

《좋습니다.》 김진서도 동의했다. 《우리 그렇게 결정합시다. 적구의 당세포결정이요.》

《감옥안의 당세포지.》

최하준이 걸걸한 목소리로 주를 달았다.

모두 웃음을 터쳤다.

피골이 상접한데다가 수염까지 더부룩한 세사람, 비전향장기수들은 서로 볼을 비볐다. 너무도 기력이 쇠진한 탓에 맘껏 소리쳐 웃어댈수는 없었으나 늘큰하니 허해진 몸을 서로 부축하고 의지하며 웃고있었다.

살아야 한다. 살며 싸워야 한다. 사는것이 곧 투쟁이다. 우리의 피어린 삶이 조국통일의 홰불을 지피는 밑불로 되여야 한다.

일부 동지들은 자결로써 항거하며 싸움을 마무리짓기도 한다. 고통스러운 삶, 지지리도 오래고 무서운 삶에 대한 회의감때문만이 아니다. 때로는 놈들의 비인간적인 악행에 대한 분노의 폭발로서, 자신의 죽음으로 동지들에 대한 고문을 약화시키려고 그 편을 택하기도 한다.

물론 피할길없는 죽음도 있다. 고문치사, 병사, 아사… 그러나 어쨌든 이겨내야 한다. 조직적으로 뭉치면 그것도 이겨낼수 있다.

통방신호들이 오고갔다. 참으로 삶을 위한 투쟁, 조국통일을 위한 우리의 투쟁은 얼마나 많은 피의 서사시를 담벽에 새겼던가. 통방신호는 일제에 항거한 애국자들, 혁명가들도 사용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손으로, 돌로 때리는 소리만이 아닌 유리로 긁는 소리까지 혁명의 언어로 채용되였다.

《루진처우규정에 항의하는 투쟁을 벌리자.》

《엄정독거에 한성일 페병악화, 교도소촉탁의사 치료거부, 항의단식투쟁 벌리자.》

《4호동에서 김룡길 전향.》

전향자들이 계속 생겼다. 동지들이 전향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가 제일 견디기 힘들었다. 고문과 병고에 더이상 참을수 없어 량심만은 버리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며 전향서에 지장을 찍은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그들이 감옥안에 남아있는 동지들에게 준 좌절감과 뼈저린 아픔은 심대한것이였다.

혁명가들이 제일 무서워하는것은 치욕이다. 그런데 전향한 사람들이 《전향공작전담반》에 협력하면서 가져오는것은 치욕이였다. 동지라는 이름에 치욕을 끼얹고 혁명이라는 대의에 치욕을 들씌우는것이다.

최동환도 그무렵에 나타났다. 오랜 세월 종적없이 사라져 소식을 알길 없더니 별안간 나타나 자기와 안면이 있는 장기수들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처음 눈앞에 나타난 최동환을 보았을 때 진서는 몸서리쳤다.

《알만한 사람이지?》 교무과장이 말했다. 《어제날의 혁명동지를 몰라볼탁이 없지. 안그래요? 김국홍씨, 자, 똑바로 봐요. 최동환동지란말요!》

줄무늬 간 양복을 입고 중절모까지 쓴 최동환이 얼굴의 흉터를 실룩거리는데 그새 어떻게 살아왔는지 거무데데하고 앙상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교무과장실의 낡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있었다. 밖에서는 소나기가 쏟아질듯 우뢰소리가 우릉거리고 세찬 바람이 창유리를 때리며 윙윙거렸다. 진서는 이발을 사려물고 가증스러운 변절자를 쏘아보기만 했다. 그런데 최동환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듯 했다. 풀무처럼 씩씩거리며 버둥거릴 때마다 쇠고랑소리가 절그럭거렸다. 놈들에게 복무하면서도 진서와 꼭같이 쇠고랑을 차고있는것이다.

진서는 갑자기 《핫-》하고 토막웃음을 터쳤다.

《변절한 값이 고작 그거야? 수갑도 벗겨주지 않더란말이지. 하하…》

교무과장이 발끈했다.

《이건 싸움이 붙지 않게 하자는거야. 오손도손 얘길 나누란말이지.》

최동환은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듯 했다.

진서를, 교무과장을 험상궂게 노려보는가 하면 자꾸만 꺼져드는듯 머리를 떨구기도 했다.

교무과장이 담배를 꺼내여 진서에게도 권했다.

《피워요. 사양마시구. 난 본시 악한 사람이 아니였다구요. 거기같은 사람들하구 20년째 씨름질하다 보니 좀 사무럽게 된거죠.》

담배를 모르고 살아온지 하도 오래여 아무런 미련도 없는게 다행이였다.

담배를 거절하고 그자가 펴놓는 사진도 묶이운 두손으로 밀어버렸다.

교도관의 얼굴에서 주근깨들이 금시 살아나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이건 뭐야. 너 금치 세번받은 악질빨갱이지. 응?》

금치란 독감방에서 일체 차입물, 치료, 운동까지 금지처분을 받는것을 말한다.

진서는 어벌쩡하게 웃어버렸다.

《그래 또 금치를 주겠소?》

《뭐야?!》

《왜 소래길 지르오. 전향공작을 하려문 좀 살살 얼릴줄도 알아야지. 오늘은 좀 달라지나 했더니만… 이보우, 교무과장님, 그렇게 해가지군 승급을 못하오.》

《…》

그자는 터져나오려던 욕설을 참는듯 했다. 충혈진 눈에 서리던 독기가 차츰 사라져갔다.

《사실은… 말 못 하는 최동환을 대신해 국홍씨를 설복하게 돼있어요.》

《누가 그렇게 시켰소? 보안과장? 그야 동급이 아니요. 권한은 더 많지만.》

《내 억지루 참는줄 알라구요.》 교무과장이 또 으스러지게 틀어쥔 주먹을 풀었다. 《그러지 않아두 보안과장이 제가 주릴 틀겠다구 하더랬소. 그자가 단단히 벼르고있다는걸 알아두어요.》

《뭐 한두번 겪었다구. 그건 그렇구 변절자는 왜 끌어왔소?》

《김국홍씨, 당신 이제 살면 몇해나 더 살겠어요, 여기서 그만 썩어문드러지겠… 아, 그만 또 말버릇이…》

《괜찮소. 그게 더 좋은걸!》

《난 보다싶이 말재간이 영 없어요. 대신 이 사진들을 보시오. 최동환씨가 얼마나 멋들어지게 사는지… 자, 어서 봐요.》

진서는 먼저 흐리멍텅해진 최동환을 치떠보았다. 저주받을 변절자, 숱한 동지들의 생명과 지리산빨찌산의 유일한 희망을 팔아먹은 대가가 이 사진 몇장이 전부란말인가?… 그 사진들이 어떤 모양으로 되여있을지 그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화려한 저택, 승용차, 호들갑스럽게 아양떠는 계집, 술상과 역겨운 잠자리모양… 그러나 실상 변절자는 개처럼 취급될것이다. 차일평과 같이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걸핏하면 발길에 채울것이다. 비굴한 삶, 벌레같은 생명, 얼마나 추악하고 비참한 운명인가.

《자, 보라구요.》 교무과장이 사정하듯 했다. 《보구서 말해봐요.》

진서는 고쳐 생각하고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교무과장이 살가운 웃음을 지었다.

《이런 기막힌 맛을 못봤을테지. 자, 이것두 봐요. 얼마나 화사한가!… 일없어요. 이제라도 늦진 않았으니까. 인생이란 휘딱 지나가버리면 그만인걸. 김국홍씨, 생각없어요? 고운 계집, 카페, 술과 도박, 일사불란한 려행… 머리만 끄떡하면 당장이래두 따뜻한 잠자리와 계집있어요. 아, 물론 목욕부터 해야죠. 한상 차려먹구 힘도 돋구고…》

진서는 목에 걸린것을 칵 소리내여 넘기고나서 천천히 말했다.

《교무과장, 당신이 무슨 돈이 많아서 그렇게 해준다는거요?》

《아, 내가 아니죠. 정부에서…》

《중앙정보부는 아니고?》

《아 국홍씨, 자꾸 비틀지 말아요.》

《그런데 왜 이런게 필요하오? 돈을 쓰면서 우릴 꼬여서 뭘 얻자는거요?… 왜 벙어리가 됐소? 그럼 내가 말해주지. 우릴 다 없애든가 전향시켜서 반동적인 체제를 굳히자는게 아니요?

그래서 여기 남조선땅에 정의의 불씨가 하나도 없게 만들자는거지. 그렇지만 교무과장씨, 당신은 너무 어리석소. 다른 교회사들은 그래도 수가 높던데…》

《뭐야?》

《어쨌든 이것만은 똑똑히 알아두시오. 불은 타오른지 오랬소. 태백산, 지리산투쟁때부터 오늘은 서울, 부산, 마산… 4. 19봉기만이라도 상기해보구려.》

《닥쳐!》

그자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틀어쥐는데 우드득 소리가 날 지경이였다.

《너 이제 보안과서 뼉다구를 꺾어놓으문 이자 한 말을 후회할거다.》

진서는 수갑을 찬 두손을 쑥 내밀었다.

《제 처지부터 생각하구려. 그래가지구 중앙정보부가 좋아하겠소? 쓸모없다구 떼버리면 다요.》

《…》

그자는 앙다물고있는 이새로 신음소리를 내였다. 진서가 계속했다.

《그럼 한가지 묻겠소. 이 사진 언제 찍은거요?》

《그런건 알아뭣해?》

《유치해서 그러오. 당신들 우릴 아직두 다 모르겠소?… 정말 구역질이 나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몽둥이찜질을 하는수밖에… 안그래?》

《그게 더 낫지. 변절자와 마주 앉혀놓기보담야. 그럴수록 분노만 커진다는걸 알아야지.》

《그래도 넘어가는 사람들 있지 않아. 진저리나는 감옥에서 벗어나니까.》

이번엔 진서쪽이 격해졌다. 될수록 보지 않으려 애쓰던 최동환이쪽에 비수같은 눈길을 던졌다.

《그럼 변절자한테 묻겠다. 더러운 목숨을 부지하니 맘이 편하던가. 나보다 네 처지가 썩 나아보이던가?》

《아, 국홍씨.》 교무과장이 끼여들었다. 《최동환씨야 말을 못하지요. 게다가 이 녀석 그만큼 그만두랬는데 계속 계집과 술만 퍼먹더니… 이봐요, 영 말이 아니죠.》

비로소 진서는 그자가 왜 자꾸 구겨박힐듯 했는지 리해되였다. 그것이 더더욱 몸서리치게 했다.

《이 더러운 변절자, 구역질나는 똥개! 너를 보면서 더 잘 알게 됐다. 너를 보면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알게 됐다는거야. 내가 뭘 말하는지 알겠니, 개자식아!》

최동환의 게슴츠레해진 두눈이 초점을 모으려 애쓰는것 같았다.

《이놈아, 너두 지리산을 잊지 않겠지.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믿구 끝까지 싸우는지 알겠지?

여기 앉아있는 교무과장은 몰라두 네놈은 알구 있어. 그렇지?… 그런데두 네 더러운 몰골루 날 돌려세워보겠다구?》

교무과장이 씩씩거리며 탁자를 내려쳤으나 진서는 더 어성을 높이며 준렬하게 내질렀다.

《우린 끝까지 버리지 않아. 이놈아, 나를 키워준 사랑, 나를 믿어준 사랑, 그걸 지키구 있어. 이전엔 사람값에 못가던 우리가 광복후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각해봐. 이따위 사진 몇장과 바꿀수 있겠어? 땅을 주시구 새집을 주시구 자식들 공부시켜주시는 사랑, 그걸 지키는거야. 그런데 넌 그걸 저버렸지. 그래서 얻은게 뭐야. 네놈은 자기에게 생명을 준 어머니를 배반했어. 제가 마시며 자란 우물에다 침을 뱉았어. 너를 낳은 어머니도 너를 저주할게다. 지리산빨찌산이 다 네 낯짝에 침을 뱉구 있어!》

최동환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이제야 진서를 알아본것인가? 지리산빨찌산이라는 말이 창끝처럼 가슴을 찌른것인가?… 벌려진 입안에서 끊어진 혀가 떨리기 시작하고 가래끓는 소리가 꾸르륵거렸다. 흉터에서 절망과 죽음의 그림자가 얼씬거린듯… 진서는 진저리를 치며 무섭게 부르짖었다.

《콱 썩어버려라, 이놈아!-》

어느새 최동환의 펑 뚫린 량볼에서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단말마적인 몸부림으로 탁자를 밀치며 수갑을 찬 두손을 앞으로 내뻗쳤다. 교무과장이 뛰쳐일어나는것과 동시에 진서는 더이상 참을수 없어 그자의 면상에, 찢어진 볼따귀에 퉤! 하고 침을 뱉았다. 다음순간 뒤통수에 가해진 무서운 타격에 그만 앞으로, 최동환이 내뻗친 수갑에 머리를 쪼으며 쓰러져버렸다. 교무과장이 그를 후려친것이다. 미리 준비해둔것인지 각목으로 때려눕혔다…

이때부터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전향공작전담반》이 비전향장기수들을 맡아나섰다. 육체적으로 꺾을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향했거나 지독한 고문을 피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은것은 물리적인 힘보다 정신적, 심리적충격을 더 견디기 괴로와하는 사람들이였다. 하여 《전향공작전담반》은 심리학자들, 목사들, 대학교수들까지 교회사로 채용하여 육체적고문과 심리적고문을 병행하였다. 진서의 기억에 의하면 매질밖에 모르는 우악스러운 교무과장은 그자가 마지막인것 같았다.

그는 오래동안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밖에서는 비가 퍼붓고있었다. 꽈르릉! 천둥이 터졌다. 무심한 하늘도 그를 깨우려 고함치는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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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고문이 계속되였다. 놈들은 이 기회에 기어이 그를 꺾어놓던지 죽여버리려 했다. 의식을 차릴 때마다 깡패들 서넛이 교대로 땀을 뿌리며 매질을 했다. 진서의 온몸에 성한데라군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무섭지 않다. 혼수상태에 빠지는 일이 더 많았으므로 고통도 심하지 않다. 사람들이 죽음을 택하는 리유가 어디에 있는가? 육체적 및 정신적고통을 참기 어렵기때문이다.

그런데 그에게도 그러한 막다른 경우가 찾아왔다.

70년대 초부터 그악스러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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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70년대 초부터 그악스러워진 전향테로의 횡포가 80년대 초에는 더 심화되였다. 사소한 반항, 교회사와의 론쟁, 처우완화요구, 금기위반에도 가혹한 형벌이 뒤따랐다. 그때 진서를 제일 괴롭힌것은 동지들과 떨어져 독거처분을 받고있는 그것이였다.

짱!-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누군가 들어와 그를 발길로 걷어찬다.

《일어나- 이 악질빨갱이, 일어낫!》

그는 눈도 뜨지 않는다. 될대로 되겠지. 살아있는게 기적이다. 그리고 더이상 살고싶지도 않다. 바라는것이 있다면 동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떳떳하게 죽고싶은 그것뿐이다.

그를 끌어내간다. 무어라고 씨벌거리며 사정없이 끌고간다. 밤인가, 낮인가… 지리산에서도 이렇게 끌려간적이 있다. 그때 왜 놈들이 총창으로 가슴을 찌르지 않았는가. 고통을 더 주기 위해서였던가?…

그를 웅뎅이에 처넣는것 같다. 지독한 악취, 썩은 물이 가득 고인 구뎅이, 문드러진 풀줄기며 진거름같은 감탕, 내장까지 뒤집히는듯 했다. 그를 거꾸로 썩은 물속에 잠그었다가는 숨이 넘어갈것 같으면 또 꺼낸다. 구린내나는것들이 입안으로 쓸어들고 잠시후엔 울컥울컥 토한다. 나중엔 열물까지 죄다 쓸어나온다. 그런데 어째서 죽어지진 않는가. 살점이 뜯기우고 뼈가 으스러질 때엔 의식이라도 잃군 했는데 가물가물 흐려지면서도 왜 끝은 나지 않는것인가?… 그런데 이것이 전부는 아니였다. 또 어데론가 끌어간다. 차디찬 바닥, 물을 들붓는다. 더러운 오물로 그의 정신을 역겹게 휘저어놓고 취조를 시작하려는 잡도리이다. 누가 이걸 고안했는가. 아직까지는 말한마디 없었다.

쨍그랑거리는 바께쯔소리, 찬물을 들붓고는 또 뜨거운 물을 쏟는다. 또다시 울컥!… 인제는 더 토해낼것도 없다.

별안간 강렬한 불빛이 그의 눈을 찌른다. 이제 전향서를 내밀것이다.

말을 듣지 않으면 송곳으로 손톱사이를 찌를것이고… 그런데 그의 앞에 다가선것은 취조관이 아니다. 하얀 위생복을 입고있는 유령, 그런데 사람의 목소리를 가지고있다.

《여보시오, 난 여기 촉탁의사요. 내가 당신을 썩은 웅뎅이에서 꺼내주었소. 당신은 강한 사람이죠. 그렇게 오물통에 처넣어 묻어버린다는건… 너무 끔찍해. 내 말이 들려요?… 난 당신을 설교하지 않아요. 그런건 내가 할 일아니죠. 다만… 당신을 마지막으로 돕자는것뿐… 자 여길 보세요. 내가 도울수 있는건 이것뿐이죠.》

눈을 뜰수가 없다. 저놈의 찌르는 불빛을 막아줄순 없는가. 촉탁의사가 그의 손에 작고 예리한 무엇을 쥐여주었다.

《이거면 편히 죽을수 있어요. 피줄을 끊어요.》

짓물린 입술로 신음소리가 새여나왔다. 어쩌자는건가. 전향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건가?… 그의 손에서 차디찬 메스가 떨어졌다. 그러자 시꺼먼 형체들이 달려들어 그의 목에 바줄을 걸었다. 또다시 밖으로 사정없이 끌고간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지꿎게 따라 오며 지껄여댄다.

《오늘 너 마지막야. 알갔니? 죽어두 더럽게 죽게 할테야.》

그를 처넣었다. 역시 그 지독한 웅뎅이속이다. 진구렁이감탕속에 구겨박힌다. 그리하여 모든것이 끔찍한 악취속에서 끝나고만다. 다시는 그를 꺼내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죽음을 의식할새도 없었다. 끝장이 났다.…

사람의 의지력에도 한계가 있다. 피할길없는 죽음앞에서는 공손해진다. 발버둥질하는것은 죽음을 겁내는 비굴한자들뿐이다. 강렬한 불빛만이 살아있다. 그의 죽음을 지켜주는 따갑고 눈부신 불빛, 지옥에도 불빛이 있다는 말을 들은적 있던가?… 지옥행이 이리도 멀고 또 먼것인지…

죽어서도 그처럼 오랜 시간을 가야만 했다. 드디여 부드러운 목소리… 촉탁의사도 여기 왔는가?

《자, 내가 도와드리죠. 하필이면 더럽게 죽을건 뭐예요. 동지들 보기 부끄럽구… 안그래요? 자, 슬쩍! 하기만 하면 되는걸. 영웅남아답게… 그럼요, 꼭 쥐구서… 찔러요!》

누가 피줄을 끊었는가. 촉탁의사인가, 그자신인가?… 혼미해지는 의식속에서도 그는 자기를 지탱해주던 뜨거운 피의 흐름이 빠져나가는것을 느낀다.

생명이 빠져나가고있다. 한생이 끝나고있다. 치렬했던 한생이, 부끄러움없이 살아온 한생이 그 어떤 고통도 없이 조용히, 평온하게 막을 내리고있다.

물결에 실려, 구름에 싸여 멀리 아득히 사라져간다.…

이렇게 그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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