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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라당 벗겨 고무호스로 후려치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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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1,669회 작성일 12-05-14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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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라당 벗겨 고무호스로 후려치는디..."
[인터뷰] '울릉도사건' 고문피해자 최규식 선생 "진실 규명 하루빨리 돼야"
12.05.03 20:58 ㅣ최종 업데이트 12.05.03 22:38icon_artman.gif 장윤선 (sunnijang) / 유성호 (hoyah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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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박정희 유신시절 이른바 '울릉도 사건'으로 고문 피해를 당한 최규식씨가 지난 20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 암센터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중 "김대중-노무현 민주정부 10년간 과거사 청산작업이 시작되긴 했지만 아직도 제대로 된 과거청산은 멀었다고 생각하는 그는 억울한 조작간첩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이 어서 돼야 한다"고 말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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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47명이 재판을 받고 있다. 이 사건은 박정희 유신정권에서 만든 최대 조작간첩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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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3일 오후 10시 39분]
 
"이번 총선은, 음. 박근혜 때문이여. 박근혜가 웃음을 팔며 전국을 돌아다니니까 사람들이 거기에 속아 넘어갔어. 그 박근혜가 어떤 사람의 딸인지 알아요? 대한민국 사람들이 세계적인 문화국민으로 평가받으려면 가장 먼저 박정희 과거사를 완전히 청산해야 해요."

 

1974년 박정희 유신시절 이른바 '울릉도 사건'으로 고문피해를 당한 최규식(76) 선생. 그는 울컥했다. 몇 마디 이어가다 복받치는 설움을 참을 수 없었던지, 폭포수처럼 솟구쳐 흐르는 눈물을 거북이 등딱지처럼 크고 둔탁해진 손등으로 연신 닦아냈다.

 

평생 한으로 점철된 탓일까. 말기 위암으로 복수까지 차올라 언제까지 생을 이어갈지 알 수 없는 시한부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그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기고픈 기록이 있는 것 같았다. 꼭 하고픈 말이 있으니 만나자고 기별이 온 까닭도 그 때문이리라.

 

지난 4월 20일 서울 신촌세브란스 암병동 35동 3503호. 점잖은 노신사는 밝게 웃으며 누웠던 상반신을 일으켜 기자와 악수를 나눴다. 낯빛만 보면 여느 노인과 다름없는 아주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왼쪽 다리는 퉁퉁 부어올라 있었고, 부축해야 걸을 수 있을 만큼 힘겨운 상태였다. 그런데도 주변에서 그를 돕는 인권의학연구소 관계자들은 "이 병원에 오신 뒤로 저렇게 밝은 모습은 처음 본다"며 "어쩌면 기자가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러 온 것만으로도 치유의 한 방편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최씨는 병실 옆에 마련된 작은 방 검정소파에 앉았다. 모든 게 평화로운 봄날이었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38년 전 이야기는 차마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생면부지의 여기자 앞에서 38년 전 이야기를 꺼낸 그는 종종 눈물을 훔치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가 <오마이뉴스>와 꼭 인터뷰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이번 4·11 총선 결과 때문이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울릉도 간첩단 사건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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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박정희 유신시절 이른바 '울릉도 사건'으로 고문 피해를 당한 최규식씨가 지난 20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 암센터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중 과거를 회상하며 복 받치는 설움에 눈물을 훔치고 있다.
ⓒ 유성호
icon_tag.gif 최규식
 

1974년 박정희 유신정권은 독재의 극단에 서서 긴급조치를 발령하며 민주인사를 탄압했다. 1973년부터 최종길 교수 사망사건을 비롯한 간첩사건들이 수시로 발표됐는데, 그 중 하나가 '울릉도 간첩단 사건'이다. 이 '울릉도 간첩단 사건'은 박정희 유신시대에 저질러진 대표적인 공안조작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의 다른 피해자는 지난 2011년 대법원으로부터 국가 배상 판결을 받기도 했다. 진실과화해를위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도 불법구금과 가혹행위에 대한 진실규명을 했다.

 

당시 이 사건으로 구속돼 조사를 받았던 이성희씨는 "전북대 교수로 일본에 유학하던 중 재일교포 이좌영에게 포섭돼 북한에 다녀왔고, 귀국한 뒤에는 군 장성인 동생으로부터 미군철수문제 등에 대한 군사기밀을 탐지했다"는 등의 혐의를 시인하라고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법정에서 이씨는 모진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진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슬 퍼런 유신독재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최규식씨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재일동포 이좌영씨를 통해 북한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좌영씨와 사업관계로 알고 지내던 김용득의 사돈들이었던 울릉도 사람들을 포함해 총 47명이나 체포됐던 '울릉도 간첩단 사건'. 정부는 이들이 북한에서 내려온 지령과 공작금을 받아 정부전복을 획책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세 명이나 사형에 처해졌다. 그 정도로 끔찍한 간첩단 사건이다. 이좌영씨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남은 이들은 그 조작간첩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해 지금도 뛰고 있다.

 

"나는 울릉도에 가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 이 사건에 연루돼 무려 17년이나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유신헌법이 발효되고 이 사건이 발표됐는데, 당시 정부는 '간첩단 일망타진'이라고 이렇게 밝혔죠. 나도 일본 유학을 가지 않았다면 여기에 연루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안경 너머 그의 동공엔 44년 전 그날이 비춰졌다. 퍽 오래 전의 일이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최규식씨의 고향은 전북 부안이다. 그런데도 그가 이 사건에 연루된 것은 일본 유학 때문이다. 전북대에서 수의학을 전공한 그는 1968년 야생동물의 계절번식을 연구하기 위해 동경대에 입학했다.

 

"내가 일본에 갔을 때는 베트남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을 때였어요. 당시에 우린 철저한 반공교육을 참 많이도 받았지. 주로 김일성 머리에 뿔났다 뭐 이런 식이여. 일본에 유학을 갈 때도 북한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만나면 큰일 난다, 이렇게 교육을 받았고. 또 내 전공 자체가 사회과학이 아니고 생물학이니까 사실 관계는 별로 없었지요.

 

내 전공은 생물 중에서도 내분비 계통이에요. 야생동물의 계절번식. 섹슈얼 호르몬을 분비시키는 것은 어느 어느 부분에서 작용하는가, 또 뇌하수체 어느 부분에서 되는가, 뭐 이런 게 내 연구의 목적이었지요.

 

그런데 다만 동경대학 중앙도서관과 의학부 도서관, 학부마다 있는 도서관엘 가면 그냥 궁금한 거야. 뭐냐, 과연 이북에도 내가 연구하는 학문분야가 있을까? 관심이 생기더라고. 동포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 아닌가요? 그런데 없더라고. 아마 그짝(북한)은 막 천리마운동이 끝날 무렵이었던 것 같아. 내가 저짝(북한)에 가볼 수는 없을까. 그 생각을 하긴 했었지."

 

운명을 바꾼 청진에서의 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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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 간첩단 사건으로 체포된 사람들이 집단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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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는 단순 호기심이었다고 말했다. 단순 호기심으로 1968년 여름방학 때 조총련 관계자의 소개로 청진 구경을 가게 됐다고 전했다.

 

"방학 때 낚시질 갔다 온 게 전부예요. 게가 청진이더군. 딱 1주일 머물렀지요. 놀러 가자, 그래서 따라나선 길이에요. 그런데 말이야. 나는 지식인으로서 캐피탈(자본주의)과 소셜(사회주의)의 차이를 꼭 보고 싶었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뭐가 다른가. 사회주의 해서 잘 살면 공산주의 사상을 가져도 좋지만, 못 살면 천만금을 준다한들 나는 공산주의 안 한다, 그 생각이었지.

 

청진에서 1주일 머문 뒤에 이제 그만 가야겠다고 하니까 그짝(북한)에서 날 더러 좀 더 쉬어가지 왜 가냐 그래요. 마침 내 실험동물들에게 줄 사료 부탁을 안 해놔서 그거 하러 가야 한다고 했어요. 난 정말 추호도 돈 뿌리고 사람 죽이고 그런 일을 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렇게 다녀온 북한 방문 1주일은 그의 삶 전체를 뒤바꿔 놓았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지식인의 단순 호기심을 그냥 봐줄 리 만무했던 것이다.

 

"1974년 2월, 시작은 이문동이었어요. 안기부에 갔는데 무조건 패. 남산에서 조사받았던 것은 떠올리기도 싫어요. 지하조사실로 날 감금하더니 잠을 안 재우기 위해서 그런 건지 주로 밤에만 조사를 했어요. 부인하면 각목으로 온 몸을 때리고, 무릎 사이에 각목을 끼운 채 꿇게 하여 장딴지를 밟았지. 남산 이틀째부터는 물고문을 했어요.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건 발가벗겨놓고 고무호스로 때리는...."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흐느껴 울었다. 좌중엔 정적이 흘렀다. 38년 전 끔찍한 고문만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 내려 앉는지 그는 마치 어린 아이처럼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전 생애 그만큼 끔찍한 기억은 없는 모양이다.

 

"그놈들은 인간도 아니여. 나를 고문하면서 뭐라 했냐면, 여기서 최종길 교수도 죽어나갔어, 네가 여기서 난리쳐도 너 하나 굽어다 보는 놈 있나 봐라, 이 자리에서 네가 이북 세 번 갔다 온 걸로 만들 수도 있어. (울음) 매에는 장사가 없었어. 홀라당 벗겨 물을 찌끄려 가면서 후려치는디. 대가리를 그냥 개대가리 패듯이 패니 사람이 어떻게 되겠어."

 

절절한 육성이 흘렀다. 마치 시계를 거꾸로 돌려 1974년 그 현장으로 자리를 옮겨놓은 듯 그는 고문관들로부터 얻어터지던 그때 속으로 씹어 삼키던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당시 상황을 그림 그리듯 설명했다.

 

"맞는 것도 지치지만, 정말 그것도 고역이지만, 때리는 놈도 정신이 멀쩡해서는 그렇게 못 때릴 것이여.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때릴 수가.... 저희들은 튀김 닭에 소주 처먹으면서 우릴 때렸다고. 맞다 지쳐 쓰러지면 또 다시 물을 찌끄려 가면서 '자, 이제 시작하자, 혀.' 그럼 또 그렇게 시작을 혔지. 그렇게 맨든 사건이 '울릉도 간첩단 사건'이여."

 

긴 울음 끝에 속이 후련해진 탓일까. 그는 긴 한숨을 토했다. 모진 고문으로 정신상태가 얼마나 황망해졌는지도 말했다. 그는 더 이상 맞지 않고 감옥으로 옮겨졌을 때는 '아, 이제야 살게 됐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했다. 그 정도로 얻어맞는 것은 참혹했다. 그만큼 고문의 고통은 그 누구도 감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고작 1주일간의 여행이었지만 그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첫 재판에선 사형을 언도받았고, 재심에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로 줄곧 '장기수'가 되어 감옥에서만 17년을 살았다.

 

사형, 무기징역 그리고 17년형... 출옥후에도 간첩 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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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암 말기로 투병중인 최규식씨가 지난 20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 암센터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마친 뒤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병실로 향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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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사회는 그를 더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세상은 바뀌었지만, 간첩 낙인은 여전했다. 공부를 계속할 수도 없었고, 근 20년간 사회와 단절된 채 살았기 때문에 적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사였던 아내는 일본 유학 시절 사라호 태풍 때 사망했고 아들 셋은 감옥에 간 아버지를 대신해 할아버지가 키워 주셨다. 역사인식이 깊고 사회운동에 큰 관심이 있었던 아버지는 그의 출옥 3개월 전 사망했지만, 그의 아들 3형제를 잘 길러주었다.

 

"감옥에서 나온 뒤 사회에 적응하려고 무진장 노력했어요. 돈을 안 써봤기 때문에 지폐에 대한 개념이 없었어요. 이게 500원짜리인가 100원짜리인가 감각이 없었어요. 가장 불편했던 것은 건널목 건너가는데 차의 속도와 내 속도를 잘 몰라서 가면 부딪칠까 봐 한참 동안 멈칫하고 서 있곤 했었죠. 그걸 극복하려고 자전거를 샀어요. 자전거로 옛날 골목길을 다니면서 이런저런 옛일을 기억해내고 그랬어요."

 

부안에서는 알아주는 집안이었고 그래서 일본 유학까지 다녀올 수 있었던 엘리트였지만, 60년대 1주일간 북한에 다녀온 뒤로 그의 인생은 산산조각이 났다. 출옥 후 원불교 교무의 소개로 만난 새 아내도 그의 삶만큼 고단을 함께 짊어져야 했다.

 

"남편은 애비간첩이고, 마누라는 새끼간첩이랴. 부안의 한 지역신문 기자는 공공연히 우리들의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써댔어요. 한 번은 하도 심해서 우리가 먼저 재판을 걸었고 승소했지요. 제가 감옥에서 나온 뒤로 부안에 '민주주의 기본질서 모임'이라고 만들었는데, 그 수장은 간첩이고, 마누라는 새끼간첩이다 이런 막말을 했거든요. 그것이 몇 해 전 일입니다."

 

생애 딱 한 번, 그것도 지적 호기심으로 가본 북한 방문이 그의 평생을 좌우하게 될 줄은 그도 몰랐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지만, 아직도 그 낡은 색깔론이 인간의 지식세계를 지배한다는 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그도 답답한 눈치였다. 무엇보다 그는 아직도 낡은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새누리당이 이번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것을 보고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단 하나, 잊지 않는 것이 있다고 했다. 사회발전에 대한 확신이었다.

 

"나는 사회발전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수학교사였던 내 아버지는 민족의식이 강했습니다. 당시 아버지가 읽던 <동아일보>는 정치적으로 우리를 개화시켰던 신문입니다. 지금은 뭐 전혀 아니지만. 당시엔 책 살 돈이 없을 정도로 궁벽했지만 우리는 늘 약소민족의 해방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중국 5·4운동과 무산자 해방운동에 대해 말이지요. 세상은 참 많이 변했습니다. 아직도 더 많이 변해야 하지만, 나는 사회발전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최씨는 아주 또렷하게 말했다. 1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 내내 통증을 호소하면서도 무엇인가 분명하게 메시지를 던져야 할 때는 힘을 주어 강조했다. 김대중-노무현 민주정부 10년간 과거사 청산작업이 시작되긴 했지만 아직도 제대로 된 과거청산은 멀었다고 생각하는 그는 억울한 조작간첩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이 어서 돼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간첩이 아닙니다. 내가 왜 오늘 기자 선생을 뵙자고 했냐면, 바로 그 점을 꼭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지금 제가 관여된 소위 '울릉도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재판이 개시되지는 못했어요. 저는 꼭 죽기 전에 제 재판에 개시되는 걸 보고 싶습니다. 악착 같이 투병생활을 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저는 그저 수의학자였지, 간첩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꼭 입증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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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어떤 땅에서 살아왔는지 한 번 잘 되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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