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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숙 상임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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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겨레의 간절한 염원이고 소원인 조국의 통일에 관심과 성의를 갖고 이렇게 시간을 내어 참석하신 재 유럽 동포 여러분,
백 년 전 아니 더 오래 전 조상의 뿌리를 찾아, 민족의 한 줄기를 찾아 천신만고 멀리 모스크바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여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고통련 대표단 여러분!
지구의 다른 끝, 멀리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우리가 한 민족임을 선언하기 위해 이 자리에 참석하신 재미 대표단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오늘 오랜 세월 고국을 떠나 살아온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했습니다.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이 고향의 소중함을 알고 고국을 떠나 사는 사람은 고국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낍니다. 오랜 세월 우리 얼마나 우리나라가 잘 되길 소망했습니까? 내 자녀, 손녀, 후손들에게 바로 너희들이 자랑스런 우리 민족의 자식임을 당당히 보여줄 수 있기를 얼마나 간절히 염원했습니까?
지난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두 분의 6.15 공동선언은 이러한 우리의 기나긴 염원을 담아낸 선언이었습니다. 남과 북의 통일을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 우리 민족의 평화와 조국의 번영을 일궈내겠다는 자랑스러운 선언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고국을 떠나 살아온 해외동포들은 이러한 자주적 선언이 참으로 자랑스러웠습니다.
올해 615 선언 12돌이 되었습니다. 너무 안타깝게 근년 남북관계는 안정과 평화가 아닌 불안과 전쟁의 긴장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손에 잡힐 듯했던 민족의 통일이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민족의 평화를 탄탄히 다지기 위해, 일신을 아낌없이 바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장관 두 분이 열어놓은 6.15 공동선언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합니다.
진정 평화와 통일이 번영의 주춧돌임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갈등과 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남북 정세를 되짚어보고 대화와 화해 길을 찾고자 합니다.
수십, 수백 년 조국을 떠나 살아온 우리가 이렇게 만남의 자리,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듯이 남과 북도 만남의 자리,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고 서로 이해하고 화해하고 더 나아가 협력할 방안을 기어코 찾아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신 재 유럽, 재 러시아, 재미 동포 여러분! 우리 민족의 화해와 통일, 조국 번영의 한길에 우리 해외 동포들이 할 일이 무엇이 있는지 함께 찾아 봅시다.
우리 이제 어렵게 만든 만남의 자리에서, 대화를 꽃피우는 통일운동의 모범을 세워봅시다. 서슴없이, 주저 없이 가슴을 열고 대화의 장, 축제의 장을 마련합시다.
감사합니다.
615 공동실천 유럽지역위원회 상임위원장 이지숙 ...................................................................
러시아 동포 김팰릭스 박사의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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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동포 김펠릭스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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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 펠릭스 페트로비치입니다. 외과의사입니다. 나이는 예순 살입니다. 아들이 세 명 손자 둘 손녀 넷. 우리가족은 6대 째 러시아에서 살고 있습니다. 함경북도에 사시는 제 4대조 할아버지께 1882년에 러시아 술찬지방으로 이주하셨습니다. 그 할아버지께서는 아들 둘을 두셨습니다.
고조 할아버지 아들 넷, 딸 둘을 두셨습니다. 증조할아버지는 아들 둘을 두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들 넷, 딸 둘 아버지는 아들을 넷을 두셨습니다. 현재 친척이 60, 70명의 자손이 늘어났습니다. 지난 120년 동안 60,70명의 할아버지의 자손이 러시아에 살고 있습니다.
1938년 스탈린 정권하에서 제 할아버지께서는 자손을 모두 데리고 술찬에서 타쉬켄트로 강제 이동 당하셨습니다. 스탈린은 전체 조선인 28만 명을 우즈베즈키스탄으로 강제이동을 시켰습니다. 나는 할아버지와 친척들에게 그 당시 어려웠던 상황을 많이 상세히 들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이주 당할 당시 사람들은 손에 들고 갈 수 있는 것만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기차로 떠나면서 베게 속에다 쌀을 담아서 사셨습니다. 할아버지 가족들은 짐칸에 실려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얼마나 오랫동안 가는지도 모르고 며칠 후 내리라는 허허 벌판 모래밭에 내렸습니다.
그 곳에 내린 고려인들은 땅을 파고 굴속에 살기도하고 절반이 굶어 죽었습니다. 28만 중 기차에 죽거나 굶어 죽거나 병이 나서 죽어서 반 이상이 죽었습니다. 우리는 할아버지는 이를 예상하고 벼게 속에 쌀을 넣어간 덕분에 가족이 굶어 죽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고려인이 정착하신 곳은 모래밭인 누쿠스시나 아니면 갈대밭인 타쉬켄트입니다. 이리, 승냥이, 모기까지 많아 말라리아로 죽은 사람도 많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인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고려인들은 서로 돕고 의지하는 고려인 공동체를 단단히 굳혔습니다. 이렇게 74년 전 고려인은 우즈베스키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갈밭에 갈대를 뽑아내고 농지를 만들었습니다.
우리 고려인들은 조선인 농촌마을을 이루고 생업을 시작하고 조선말을 하고 조선풍속을 유지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학교를 만들어 조선어를 가르치고 조선노래도 가르쳤습니다. 그 학교는 1958년까지 유지되었어요. 20년 전 우즈베스탄이 소련에서 독립할 때 우리 타쉬켄트에 살았는데, 약 5000 조선인 중 젊은 사람들 절반이 러시아로 건너갔습니다. 세 번째 이주입니다. 현재 우즈베스키탄에는 20만 조선인이 살고 있습니다. 20년 전에 러시아도 건너온 조선인들은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큰 도시로 나간 조선인들은 조선말을 많이 잊어버려 조선말을 잘 못합니다. 난 어릴 적 조선인 농촌마을에서 살았기 때문에 조선말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들이 셋인데 맏이가 40입니다. 나는 자식들이 말을 귀를 알아들을 때부터 우리 조상 할아버지가 장손에게 전하시고 또 그 장손에게 그분의 장손에게 전했듯이 가족사와 민족의 이민사를 말로 전했습니다. 내가 5살 때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할 아버지가 고향을 못보고 간다 하시면서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너무 많아 우시는 걸 봤습니다. 어린 나는 따라 울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다시 내가 고향을 못보고 간다고 해서 또 많이 울었습니다. 나는 내 아들에게 우리가 고려인임을 잊으면 않된다. 저는 전주 김씨다. 손자를 무릎 앉히고 또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는 나이가 60입니다. 나는 내가 죽을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말씀하셨듯이 내가 고향을 못보고 죽는 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 아들과 손자는 이런 슬픔을 전해주기 않기 위해 한반도가 평화롭게 통일된 나라로 살기를 바랍니다.
제가 2009년에야 처음으로 함경북도 조상의 고향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갔다 돌아오니 남쪽 안기부에서 그 때부터 김필릭스를 만다면 안된다는 소문이 퍼뜨렸습니다. 친구들에게 고통련 모임에 가면 안된다 가지 말라고 남쪽에서 얘기를 합니다. 나는 러시아동포에게는 우리에게 조국은 하나라고 말합니다. 고향을 남북으로 갈라서 생각하지 말라 우리에게 조선반도하나이고 조국은 하나라고 합니다. 러시아의 동포들이 평화롭게 살기 위해 조선반도의 통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고통론이 615공동선언을 실천하는 이유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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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보도자료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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