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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66]북 음악예술 통해 북을 알아본다/전시가요《문경고개》1950년 리면상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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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
댓글 0건 조회 12,357회 작성일 12-06-23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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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편집 시간 2012.06.23 17:51:50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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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66]북 음악예술 통해 북을 알아본다/

전시가요《문경고개》1950년 리면상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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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66]북 음악예술 통해 북을 알아본다/

전시가요《문경고개》1950년 리면상 작곡



리준무 지휘자(뉴욕 우륵교향악단 단장)은 66번째 연재 '북 음악예술통해 북녘을 알아본다'에
전시가요《문경고개》를 선정했다. 그는 "가요 문경고개는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리면상이
조기천의 시에다 곡을 붙인 것인데 이 노래는 전시가요의 특성인 전투적 기백이 넘치는 행진곡조가
아니라 철학적인 심오한 사색을 요구하는 노래로 민중들에게 이 전쟁이 주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며
왜 이 처절한 싸움에서 기어코 승리해야 하는가라는 엄숙한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무겁고 침통한
선율로 시작되는 이 가요는 제국주의와의 싸움에서 왜 승리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듯 풀어나간다"고
설명하면서 자신의 어린시절을 함께 또 올린다. 이번 글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66]북 음악예술 통해 북을 알아본다/

전시가요《문경고개》1950년 리면상 작곡




*글:리준무 지휘자(뉴욕 우륵교향악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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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리준무 지휘자
문경고개를 소개하는 북조선 동영상에서 “관현악 문경고개는 1973년에 창작되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보충설명을 하였다. “전시가요 문경고개를 소재로 한 이 음악은 양악기를 우리음악에 옳게 이용할 데 대한 우라 당의 주체적 음악건설사상이 빛나게 구현된 성과적인 작품입니다”라고 평가하였다.

가요 문경고개는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리면상이 조기천의 시에다 곡을 붙인 것인데 이 노래는 전시가요의 특성인 전투적 기백이 넘치는 행진곡조가 아니라 철학적인 심오한 사색을 요구하는 노래로 민중들에게 이 전쟁이 주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며 왜 이 처절한 싸움에서 기어코 승리해야 하는가라는 엄숙한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무겁고 침통한 선율로 시작되는 이 가요는 제국주의와의 싸움에서 왜 승리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듯 풀어나간다.

문경고개를 거쳐 낙동강으로 진출하던 조선인민군은 대전에서 미24사단을 만나게 된다. 조선인민군과 맞닥뜨리게 된 미24사단은 이 전투에서 사단장이 포로로 잡히고 연대장•대대장 등 여러 명의 지휘관들이 사살되고 실종되는 등 참패를 면치 못하였다. 미24사단은 이 전투에서 조선인민군에게 부대 자체가 와해될 지경으로 굴욕적 참패를 당했으며 조선인민군이 이 전투에서 이룩한 전과는 세계 전쟁사상 전무후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미 24사단 병력은 작전이 개시될 당시 1만5000여 명에 달하던 병력은 대전전투가 종료되었을 때에는 겨우8660명에 불과했다고 위키리크스는 기록하고 있다.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는 6.25전쟁에 대해 김일성주석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미제 침략자들은 저들의 방대한 병력과 비행기, 땅크 등 현대적인 군사기술기재들을 조선전쟁에 대량적으로 투입하였을 뿐 아니라 유엔의 간판 밑에 15개 추종국가 군대까지 끌어들였습니다. 그러나 미 제국주의자들은 이러한 방대한 무력을 가지고도 우리인민을 굴복시킬 수 없었으며 조선인민의 완강한 투쟁에 의하여 참패 당하고 자기들이 처음 전쟁을 도발하였던 계선에 주저앉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6.25전쟁을 누가 먼저 쳐들어오고, 누가 먼저 쳐들어 갔는가 하는 식의, 해답도 없는 소모적인 논쟁은 피하고 싶다. 그런 논쟁들은 한결같이 객관적인 연구가 결여된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6.25전쟁을 민족자주노선과 미국을 위시한 제국주의 패권전략의 충돌로 일어난 전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950년에 조국반도에서 벌어졌던 6.25전쟁으로 4백만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들이 거의 민간인이었고 사망자의 대부분이 38선 이북에서 일어났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6.25전쟁


전쟁이 일어난 그 해에 나는 일곱 살이었다. 전라북도 시골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학교 국기게양대에는 큰 별이 번쩍이는 남홍색 공화국 깃발이 펄럭이었고 아이들이 부르는 “아침은 빛나라’와 ‘장백산 줄기줄기,의 노래소리는 선생님이 치는 풍금소리를 따라 교실 밖으로 낭랑하게 퍼져 나갔다. 어린 나이였던 나도 무언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햇볕이 쨍쨍 쬐는 무더운 여름에 인민군대가 우리학교에 왔다. 인민군대가 언제 우리고장에 들어왔는지는 확실히 몰라도 학교운동장에서 행진하는 모습은 정말로 멋이 있었다.

내가 처음 보았던 조선인민군은 동네 형이나 누나들과 나이가 비슷한 10대들이었다. 그들은 고압적이지도 않았으며 동네어른들을 예절 바르고 깍듯하게 대했으며 동네청년들과도 친절하게 지냈다.

그들은 농촌의 바쁜 일손도 도와주고 글 모르는 어른들에게 공부도 시켜주었다. 인민군이 우리동네에 와있는 동안에 벌떼처럼 날아드는 B-29폭격기의 공습을 빼놓고는 비교적 평온하였다.

인민군이 어디서 잠을 자고 어디서 밥을 해먹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우리동네 형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인민군들 속에는 나 어린 누나들도 몇 명 끼어있었다. 누나들은 가끔씩 우리 집에 놀러 와 우리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 가곤 하였다.

우리어머니도 그땐 삼십대의 젊은 나이이었으니까 누나들과 말 붙이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도 누나들에게 친절히 대해 주었다. 우리 집에는 어머니가 쓰는 손 재봉틀 하나가 있었는데 인민군누나들도 무슨 옷을 만드는지 가끔씩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인민군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행진하던 멋있는 그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 섭섭해 하시는 것처럼 내 마음도 섭섭하긴 마찬가지였다. 인민군들이 떠나버린 우리고장에는 무서운 겨울이 들이닥쳐오고 있었다.


동네아저씨들은 산속으로 들어가고


그 해 가을에는 지리산자락에 있는 우리동네에도 황금나락 풍년이 들었다. 황금물결이 넘실대는 들녘을 바라보면서도 어른들은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전쟁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예측할 수도 없는데다 가을걷이를 할 일손도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만일 산으로 들어가버린 동네 형들과 아저씨들이 들판에 잘 익은 곡식물결을 보았더라면 마음이 타 들어가기는 마찬가지 이었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가을이었다.

우리 집안도 한때는 좌와 우로 갈라져 있었다 그래도 서로간에 갈등도 없었고 서로 걱정도 해주는 사이로 지냈다. 이씨인 우리집안과 최씨인 외가댁이 동산을 사이에 두고 한 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연유인지는 몰라도 셋째와 넷째 외숙은 국방경비대에 나갔고, 좌익활동을 하던 작은집형님들은 토벌대들의 검색이 심해지자 모두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외숙들은 경비대에서 제대하고 집에 돌아왔다. 외갓집을 찾아온 경찰들은 어쩐 일인지 막내외숙을 경찰서로 끌고 갔다. 정읍에 있는 경찰서로 이송되었다는 것은 죄값이 가볍지 않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외숙은 죽게 얻어맞고 몇 달 만에 폐인이 되어 돌아왔다. 외할머니는 외숙에게 장독을 풀어주지 않으면 죽는다고 똥물을 먹이며 울고 계셨다.

여기서 나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하나 있었다. 경찰이 왜 국방경비대에서 제대한 막내외숙을 왜 저렇게 초주검이 될 때까지 뚜드려 팼을까?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몇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그 연유를 설명해 준 것이다. 막내외숙은 빨찌산들에게 수류탄제조기술을 가르쳐주었다는데 그 사실이 탄로나버렸다는 것이다.

한편 빨찌산대장을 하던 준철이 형님, 클라리넷을 기가 막히게 잘 불던 멋쟁이 음악선생님인 준홍이 형님, 소년단 대대장으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십대의 작은집 형식이 조카가 모두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경찰대에게 사살당한 준철이 형님을 빼놓고 준홍이 형님과 형식이 조카는 지금까지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을 모르고 있다. 산에서 얼어 죽었다는 풍문이 있었으나 확인된 것은 아니었다.

한밤중에 소근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면 아버지는 산에서 내려온 준철이 형님과 무슨 이야기인지 심각하게 주고받는 것 이었다. 한밤중에만 찾아오는 준철이 형님은 아버지보다 나이가 조금 아래였는데 일본에 유학까지 갔다 온 지식인이었다. 먼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형님은 울타리를 뛰어넘어 산쪽으로 황망히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그 후, 대나무 밭으로 에워 쌓인 외딴집에 빨찌산서너명이 산에서 내려왔다. 이 집은 그들의 아지트로 되었다. 이 외딴집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밖에서는 전혀 알 수가 없는 비밀스런 곳이었다. 이렇게 민가에 내려온 빨찌산들은 동네사람들과 다른 투쟁의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다음해가 되었다. 그날은 땡볕이 뜨겁게 내려 쬐는 여름날 오후였다. 무장경찰대 1개중대가 그 외딴집을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그전에 산에서 같이 투쟁하던 그 집주인 최씨가 경찰에 밀고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지트에 있던 빨찌산은 포위망을 좁혀오는 경찰대에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그 많은 토벌대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콩 튀듯 한바탕 요란하던 총소리는 한참 후에야 그쳤다. 시끄럽던 그 자리엔 무서운 적막감만 감돌고 있었다. 이 치열하고 처참했던 전투에서 빨찌산은 모두 사살된 것이다. 물론 경찰 측에서도 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하였다. 시체는 어디로 치웠는지 보이지 않았고 외딴집 옆에 있는 콩밭에는 빨찌산들의 피 묻은 소지품들만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문경고개


전술적으로 낙동강에 진출하자면 문경고개를 거쳐야 되었는데 그때 인민군들이 메었던 총 중에는 자그마한 따발총도 있었지만 딱꿍총이라고 하는 장총이 대부분이었다. 장총의 길이는 인민군들의 키보다 더 커서 총을 질질 끌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다. 총을 들쳐메고 문경고개를 넘어가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노래는 암시해 주고 있다.

김길학은 전시가요 “문경고개”를 관현악곡으로 편곡하는 작업을 착수 하면서 작사자의 시적 감정 과 철학적 사상을 잘 살리려고 많은 연구를 하였다. 온 근로대중들이 침략자들에게 참패를 안겨줄 전쟁승리를 위하여 일심단결하는 것과 제국주의 침략군들의 공격을 맞받아 거족적으로 싸우는 장면들을 눈으로 보는 듯하게 써 나갔다.

호른, 트럼팻, 트롬본 등 금관악기군은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사생결단으로 맞받아치는 모습을 격렬하고 실감나게 그렸으며 미군과의 접전을 묘사하는 부분에 나오는 타악기의 활약은 그때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었는가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승리의 그늘과도 같은 전쟁의 상처를 달래는 클라리넷솔로는 상실의 아픔을 절절하게 표현하였다.

김길학은 통쾌한 승전보를 최고사령관에게 보고하는 우렁찬 주제선율을 끌어내오면서 장엄한 그랜드튜티로 음악을 종결한다. 관현악”문경고개”는 서양악기를 민족관현악 발전에 가장 효과적으로 도입한 음악대표적인 관현악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는 관현악작품중의 하나이다.


1. 문경고개는 얼마나 높던고
오르면서 칠십리 내리면서 칠십리
저녁부터 오르던 가벼운 안개도
힘겨워선가 무거워선가
높을 령 중턱에서 잠들고 말았다오

2. 사람들이야 높으든 괴롭든
원쑤들을 부시며 그 고개를 넘었네
이 나라 행복을 자유를 부르며
쓰러지면서 피흘리면서
높은 령 험한 길을 단숨에 넘었다오


<<승리의 노래여, 크게 울려 퍼져라>>


오늘도 미국은 동북아시아지역에서 군사적 패권을 틀어쥐고 나가려는 새로운 지배전략을 수립하고 실현하려는 패권주의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 이남에 끊임없이 군사력을 증강시켜 나가고 있으며 미국, 일본, 남한 사이의 3각 군사동맹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전쟁연습을 해상, 육지, 공중에서 다각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오늘도 신문과 방송에 보도되는 기사를 보면 역대 최대규모의 통합화력전투훈련이 미군과 합동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전쟁연습의 장면장면들에는 최신무기들이 총 출동하여 나와 자기들의 화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 합동훈련을 하는 의도가 이북을 침공하겠다는 것인지 흉흉해진 남한의 민심을 달래보겠다는 것인지는 불분명해 보였지만 이렇게 무모하게 벌이는 전쟁연습으로 북의 기를 꺾어보겠다고 생각했다면 크나큰 오산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은 북조선의 숨통을 조여 항복이라도 받아 내자는 것인지1988년부터 지금까지 《테러지원국》, 《수출관리법》,《대외지원법》,《무기수출통제법》,《국제금융기관법》 등 갖가지 제재법을 만들어 놓고 이북의 기업과 개인을 제재 대상에 올려놓고 이북이 손들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더군다나 UN이 결의한 1718호와 1874호의 제재 법안까지 통과시켜놓아 현재는 수십 가지나 되는 제재법안들로 북을 꼼짝도 못하게 옭아매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법들이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데에 더 큰문제가 있다. 이북의 경제지표는 2000년부터 매년 상승곡선을 타고 있으며 국제무역의 교역량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첨단과학기술을 기초로 막강하게 발전한 이북의 군사력은 이제 아무도 건드릴 수 없게 되었고 국토건설의 새 바람은 전국적 판도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각가지 제재 법들은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이북을 제재하는데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유엔(UN)과 미국측의 체면만 실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일련의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 일까?.

전시가요”문경고개”를 부르며 승리만을 쟁취해온 북조선은 21세기의 걸출한 젊은 지도자를 모신 긍지의 노래 소리가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지고 있으며 강성국가건설과 인민생활향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오늘도 전체 근로대중들의 총 진군이 벌어지고 있다.

*노래 동영상 보기


전시가요《문경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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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리준무 지휘자 2012-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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