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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별의 세계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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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400회 작성일 22-11-14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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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5

《주간동아》2000년 8월 17일

《포로되기 전 지역으로 조건없이 보내야》

6. 15《남북공동선언》은 남과 북은 올해 8. 15를 즈음하여 리산가족방문단을 교환하고 비전향장기수문제를 해결한다고 돼있다.

이에 따라… 남북적십자대표는

ㅡ 남측은 북으로 갈것을 희망하는 비전향장기수전원을 2000년 9월 초 송환하고

ㅡ 이 명단과 실태자료를 송환 15일전 북측에 통보하며

ㅡ 북측은 이 명단을 확인해 송환 10일전에 남측에 통보한 뒤

ㅡ 송환절차는 93년 관례에 따르며 송환경로는 륙로 또는 항공로로 한다고 합의했다.

90대 초반부터 비전향장기수송환을 주장해온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는 장기복역량심수를 형법 제98조…를 적용받거나 국가보안법, 반공법에 의해 7년이상 형을 선고받은 량심수로 규정하고 이들중 전향서에 서명하지 않은 사람을 비전향장기수라 했다.

이들은 휴전협정 제3조 51항 C목에 표시된 《송환》(Repatriation)에 따라 단순한 리산가족 재결합차원이 아닌, 당사자의 자유의사에 따라 포로가 되기 전 소속지역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는 《당위성》을 갖는다고 민가협측은 주장해왔다.

×

《한겨레》신문 2000년 ×월 ××일

《비전향장기수 김진서씨 한나산려행》

김씨는 지난 7일 광주기독교련합회 인권위원회의 도움으로 2박 3일간 제주도려행을 다녀왔다. 동행한 비전향장기수 5명(김동길, 리홍순, 리세룡, 김병택, 리성찬)은 한나산까지 올랐지만 그는 산언저리에서 북쪽 고향을 응시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김씨는 이날 몹시 수척한 모습이였다.

제주도청에선 숙소를 잡아주고 차를 내주고 도의회에선 환영만찬을 해주고 돌아오는 날 공항까지 배웅을 나왔다.

…관청으로부턴 처음인 후한 대접이였다.

×

그렇다. 어델 가나 《후한 대접》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보안관찰법》에 따라 정기적으로 동태를 보고하게 하고 다른 보안관찰대상자(출소장기수, 량심수)와 만났을 때엔 날자, 시간, 장소, 대화내용까지 관할경찰서장에게 신고하도록 덫을 씌우고있던 그들이였다. 그네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상냥하고 친절하고 곰상스러운 표정으로 미구에 북으로 갈 비전향장기수들을 반겨 맞았고 줄곧 따라다니며 아낌없이 미소를 선물했다. 하기에 제주행을 마치고 오는 길에서 김동길은 《완전히 칙사(임금의 어명으로 파견된 사신)대접을 받고 오누만.》하면서 껄껄 웃었다.

하지만 그《칙사대접》이 놀라운것도 아니다. 6. 15공동선언에올라있는 비전향장기수들이 아닌가. 경애하는김정일장군님께서 바로 그들 한사람, 한사람을 조국통일문건에 명기하시였으니 《칙사대접》이야 당연하지 않겠는가!… 김진서의 생각이였다. 이전처럼 자기의 격동된 심정을 열변으로 웨칠수 없는것이 안타까왔다. 하여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철학가마냥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것을 두고 생각하였고 그 의미를 파고들려고 애썼다. 《한겨레》신문이 《김씨는 이날 몹시 수척한 모습이였다.》라고 쓴것이 결코 우연한것이 아니였다. 제주행의 매 순간순간 그는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였고 가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군 하였다.

잠시후 그는 주차장쪽으로 절름거리며 갔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그를 잡아끌고있었다. 보슬비에 머리칼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어쩐지 몸이 오스스 떨려나고 잘 쓰지 못하는 한쪽다리가 뻣뻣해졌다. 그래도 걸어간다. 주차장 맨끝의 어둠속에서 반디불 같은것이 번뜩이고있다. 그를 살피는 랭혹한 눈빛이다. 그것이 그를 부르고있는것이다.

퍼릿한 외등이 비에 젖어 흐릿해진 빛발을 가까스로 던지고있었다. 실오리같은 비줄기가 거의 아무 소리도 없이 차고와 포석을 깐 바닥을 적시고있었다. 고요와 적막, 밤의 어둠을 울리는것은 포석에 마치는 지팽이소리뿐, 갑자기 진서는 흠칫했다.

차고의 한 귀퉁이에서 시꺼먼 그림자가 나와선것이였다. 유령같이, 소리없이 외등빛을 피해 나와 서있다. 비에 젖은 농립과 꺼부정한 등허리, 문득 하나의 기억이 진서의 뇌리를 찔렀다.

언젠가 이렇듯 소리없이 불쑥 눈앞에 나타난 괴물같은 늙은이가 있었다. 그가 아닐가, 그자가 지금껏 나를 좇고 살피고있은것은 아닐가?…

《누구요?》

거쉰 웨침이였다. 지팽이를 틀어쥔 손에서 우드득소리가 났다. 바로 그 순간 현관문앞에서 누군가 그를 소리쳐 불렀다.

《김선생님, 어데 계십니까?》

피끗 머리를 돌린 진서는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총무이기도 한 남규선기자가 우산을 들고나오는것을 보았다.

《아, 선생님! 거기서 뭣 하세요?》

그가 달려오자 어둠속에 나와섰던 검은 그림자는 종적없이 사라졌다. 주차장아래 어둠속에서 웬 녀자의 기겁한 웨침소리가 났다. 남규선기자가 우산을 넘겨주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진서는 우산을 받았지만 그것을 손에 드리우고 꼼짝하지 않고있었다. 눈은 졸고있는듯 반쯤 감고있었는데 그것은 자기의 머리속에 번개친 기억을 재빨리 더듬고있기때문이였다.

믿기 어려운 일이였다. 원한에 사무친 자기의 신경이 어떤 환영을 만들어낸것만 같았다.

남규선이 애젊은 녀자를 데리고 왔다. 무릎우에까지 올라간 미니스카트를 입은 호텔안내양이였다.

《선생님도 농립을 쓴 늙은이를 보셨지요?》

남기자의 물음에 진서는 말없이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 늙은이가 선생님께 접어들진 않았어요?》

또 말없이 머리를 저었다.

《이상하잖아요. 그가 여기엔 왜 나타났을가요… 이 안내양의 말이 미친 늙은이라던데요.》

《그래요. 미친 늙은이죠.》 안내양이 재빨리 끼여들었다. 《아유, 혼났네요. 갑자기 어둠속에서 불쑥! 그래서 비명을 지른거예요.》

《그가 어디로 사라졌어요?》

남규선은 아직도 찜찜해하는 기색이였다.

《바다가로 갔겠죠.》 안내양이 별로 생각지도 않고 말했다. 《매일 바다가를 헤매는걸요. 해수욕하는 녀인들만 골라가며 살펴보죠. 한달전부턴가 어데서 나타났는데 경찰에서도 놀랐다해요. 이 유명한 관광지에 늙다리거지가 웬말이냐 이거죠. 그러면서도 쫓아버리지 않는건 그가 어떤 녀인때문에 실성했기때문이라나요.》

《녀-인?》 처음으로 진서가 그 말을 되받으며 급해하였다. 《어- 어떤 녀자를 마- 말하는거요?》

《어머- 선생님, 그걸 어떻게 알아요? 실성한 늙은 거지의 일을… 한데말이죠. 혹시 그게 그 녀인의 이름은 아닐가요?》

《어- 어떤 이름?》

《아- 라!》

《뭐?》

《그래요. 아- 라! 그게 뭘가요? 해녀들만 보면 붙잡고 찬찬히 들여다 본다죠. 〈아라?…〉하고는 흑흑 흐느껴 울고… 밤이면 바위벼랑에서 〈아- 라- 아!-〉하고 외치는데 꼭 짐승이 울부짖는것 같은게… 아유- 무시무시하기란!…》

진서는 입을 벌린채 굳어져있었다. 밤의 어둠만 아니라면 그의 얼굴에 줄달음치는 시퍼런 경련에 보는 사람들이 깜짝 놀랐을것이다.

남규선이 그의 손에서 떨고있는 우산을 당겨 머리우에 씌워주었다.

《선생님, 그만 들어가십시다. 괜한 일때문에 비만 맞으시네요.》

그에게 부축되여가면서 진서는 자꾸만 무엇엔가 발을 걸채인듯 비청거렸다.

샐녘까지도 잠들지 못했다. 창가에서 금도금처럼 누렇게 번쩍이는 손잡이를 부여잡고 먼 바다쪽을 점도록 바라보군 했다. 그 밤따라 파도소리는 거칠고 사위스럽게 커졌다 작아졌다 하였고 간혹 가다 짐승의 울부짖음소리 같은것이 섞이군 했다. 진정 그것은 늙은이의 통곡소리였던가, 아니면 밤바다로 떠가는 기선의 고동소리였던가?…

《아- 라- 아!-》

그 소리가 울려올 때마다 그는 진저리를 치며 몸을 떨었다. 그 짐승같은 놈에게도 자식을 그리워하는 정이 있는것일가?… 놀라운 일이지만 피붙이에 대한 몸부림치는 정이 있었다. 그것이 없다면 벌써 두번씩이나 진서를 찾아오진 않았을것이다. 그리고 그렇듯 무섭게 통곡을 하진 않을것이다.

웬일인지 진서는 숨이라도 막힌듯 자기의 속적삼깃을 쥐여뜯으며 지꿎게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실로 진저리나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제새끼를 잃은 승냥이가 숲근처에서 돌아치며 아츠러운 소리로 통곡을 하던 일이 떠올랐다. 진서가 열한살 났을 때 사냥군이 승냥이새끼를 잡아왔던것이다. 온 동네사람들이 련 사흘밤 잠을 못잤다. 사냥군에게 새끼를 놔주라고 떠들썩했다. 승냥이는 닥치는대로 동네의 집짐승들을 물어뜯고 찢어발기다가 끝내 옹노에 걸리고말았다. 악에 받쳐 가릉가릉 하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이발을 드러내던 승냥이. 그런데 그 승냥이의 살기띤 퍼런 눈에 피방울같은 눈물이, 원한과 증오의 눈물이 고여있는것을 보았을 때 소년 김진서는 몸서리치지 않을수 없었다. 그처럼 흉악무도한 승냥이에게도 눈물이 있다는것이, 제 새끼를 구하려 필사적으로 날뛰는 모성애 비슷한것이 있다는것이 그를 놀라게 하고 몸서리치게 했던것이다.

그리하여 진서는 소년시절의 그때처럼 으시시해서 몸을 웅크리고있었다. 가증스러운 변절자, 먹이를 던져주던 주인에게서도 버림받고 쫓겨다니며 숨어살던 추악한 늙다리개가 컹컹 짖어대는 소리엔 살가죽이 떨려나는듯 했다. 참으로 그자는 승냥이족속도 아니였다. 승냥이무리속에 끼여들어 길잡이를 해주다가 늙고 병들어 맹수들에게 물어뜯기기 시작하니 도망쳐나온 비루먹은 수개였다. 그런데 그것이 통곡하고있다. 최후의 피신처를 찾아 구원을 부르며 목놓아 짖어대고있다. 그 소리가 그처럼 진저리를 치게 할줄이야 어이 알았으랴!…

승냥이같이 흉포한 야수를 몽둥이로 때려잡을 때엔 피가 끓는 결기라도 있었다. 그런데 저 비루먹은 늙다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추악한것일수록 더 끈질기며 혐오스러운것일수록 더 문적문적한 법이다.

송충이를 짓밟았을 때의 넌덜머리나는 징그러움… 진서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구역질나는 변절자를 짓밟아버리며 바다의 흐느낌소리와 등대의 고동소리 그리고 비에 젖고있는 항만도시의 온갖 소음을 죽어가는자의 마지막통곡소리로 듣고있었다.

다음날 그들 일행이 남제주군 서귀포의 정방폭포(20메터의 절벽우에서 수백메터 폭으로 크게는 네갈래의 물줄기가 바다로 맞떨어지는 동양유일의 폭포)와 동양최대의 송당목장(북제주군), 《삼성혈》(량을나, 고을나, 부을나 세 조상이 나왔다는 땅구멍) 등을 돌아보고 왔을 때였다. 지난밤 주차장앞에서 만났던 안내양이 진서를 보자 달려왔다.

《선생님, 어제밤 제가 실성한 로인얘길 해드렸지요? 글쎄 그가 아침나절에 투신자살을 했지 뭐예요!》

《자- 살?!》

《예, 벼랑에서 떨어졌는데 바위에 짓쪼아서 형체도 알아볼수 없이 됐네요. 지금두 거적대기를 씌워놓은채 내깔려두고있어요. 경찰이 신원을 확인해줄 사람 찾는다나요. 아유, 끔찍해!》

비전향장기수 로인들을 안내하던 구청장이 수다스러운 안내양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선생님들 곤하신데 무슨 쓸데없는 소릴!… 자, 선생님, 고만 들어가 쉬셔요.》

진서는 그가 끄는대로 말없이 걸어갔다. 거적대기를 씌워놓은 피투성이 시체가 벼랑밑 돌바위들짬에 버려져있는것을 눈으로 보는듯 했다. 파리떼만이 왕왕거리며 장송곡을 울릴것이다. 신원을 확인해줄 사람조차 없는 시체, 인생에서 버림받은 자의 주검… 한방울 눈물의 배웅도 없이 악취만을 풍기며 파리떼의 장송곡과 더불어 가버리는 인생이야말로 얼마나 비참한것이랴!

밤이 되자 김동길을 비롯한 동료장기수들은 제주도의 력사에 대하여 담론하고있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말이요.》하고 김동길이 말했다. 《처음 제주섬은 탐라로 불리웠다더군. 오- 제주섬의 제15대주인형제가 신라에 도착하여 탐진이라는 곳에 머물러있은것이 빌미가 되여 탐라라는 국호를 하사받았다는지…》

옆에서 듣고있던 안내양이 탄성을 질렀다.

《아유, 선생님들은 언제 그런것까지 다 아세요? 여기 사는 우리도 모르는걸… 참 력사에도 무척 밝으시네요.》

《력사란 과거라는 의미만이 아니야. 래일을 위해서 더 필요한것이지.》

김동길이 자기의 주장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제주도인민들의 4. 3봉기에 대하여, 그 력사적의미에 대하여 또 력설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김진서는 그런 담론에 끼여들 여가가 없었다. 전화에 매달려 하정례를 찾으려고 애쓸뿐이였다. 그러나 하정례의 편지에 씌여있는 번호를 수십번 눌렀어도 응답이 없었다. 밤이 깊어갔다. 이윽고 동료들은 김동길이 쓴 수기의 내용으로 화제를 돌리고있었다.

리인모의 수기가 《말》지에 나간이래 비전향장기수가 쓴 최초의 책 《새는 앉는 곳마다 깃을 남긴다》는 모든 비전향장기수들의 일치한 관심사중의 하나로 되였다. 그 책이 곧 출판된다고 한다. 이제 광주로 돌아갈즈음에는 책을 받아보게 될것이다.

그쪽의 이야기에는 무관심하게 김진서는 또 한번 전화번호를 눌렀다. 추악한 변절자를 복수하려고 10여년을 추적했던 하정례가 오늘 있은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가?… 물론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하리라. 오물은 버리기마련, 오물이 찬 웅뎅이도 메워지기마련이다. 이제 와서 하정례는 동지들곁에서 아득히 떨어져나간것같은 자신의 처지에만 고심하며 몸부림치고있으리라.

그는 번호를 누르던 손을 멈추었다. 편지를 받은 그때부터 계속 전화를 걸어도 대답이 없는 하정례, 그처럼 모진 정례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있을가?…

김병택이 다가왔다. 심각한 기색이였다. 총탄에 뚫린 한쪽눈에 안대를 대고있는 그여서 언제나 한눈을 지릅떠보군 하였다.

《진서형.》 그가 낮게 말했다. 《이자 생각해보니 접때 우리가 최동환동지 묘에 갔을 때 먼저 꽃을 갖다놓은 사람이 있었지요?… 그가 누군지 알만합니다.》

《?!…》

진서의 놀라는 표정에 그는 킁킁 코를 울리며 자신있게 말했다.

《하정례지요.》

진서는 여전히 의혹이 실린 눈길로 자기의 오랜 동지를 마주 보기만 했다.

×

끝내는 전화가 걸려왔다.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이 서울에서 판문점으로 출발하기 직전이였다. 진서를 찾는 목소리는 병들어있는것 같았다. 전날의 하정례와는 판판 다른 가늘고 숨차하는 목소리가 《김진서선생이세요?》하고 물었다.

《하정례예요. 안녕히 가십시오. 그립던 처자들과 함께 부디 행복하시길 빕니다. 그럼 전…》

그 목소리에 비낀 비통한 억양과 피로에 지친 미약한 숨결이 그의 가슴을 찔렀다. 그는 저쪽에서 전화를 끊을가봐 덤벼치며 부르짖었다.

《정례, 끊지 마오. 내말 좀 듣소!》

뇌졸중후유증때문에 말을 더듬던 그같지 않았다. 거칠게 숨을 내뿜고나서 그는 소리쳤다.

《부탁이요. 제발!… 힘을 내시오. 저- 절대 맥을 놓지 말고! 모진 생각을 하면 저-절대 안되오. 알겠소?… 우리 장군님께서 이제 꼭… 정례동무도 불러주시오. 이걸 알아야 해. 우리 기어이 만나게 된다니까. 그걸 믿지 못하면 정롄… 우리 동지가 아니요. 내말 듣소?》

《…》

가느다란 숨소리, 흐느껴우는듯 했다.

《정례!》

《예, 듣고있어요, 선생님.》

《우리가 무얼 믿고 하- 한생을 바쳐왔소. 응? 우리 장군님께선 한번 믿으시면 끄- 끝까지 믿어주신다는걸 저- 정례도 들었겠지?… 우린 이 하늘같은 사랑과 믿음때문에 사- 살아온게 아니요? 내가 어떻게 살아났는지 그- 그것만이라도 생각해보오.처- 철창속에서 있은 일은 그만두고라도 뇌졸중에 걸려 쓰러졌던 내가 어- 어떻게 일어났는지… 정례도 들었겠지? 우리 장군님께서 멀리 외국에까지 비행기를 날려 보약들을 보내주셨소. 새- 생각해보오. 나같은게 다 뭐겠소. 그런데도… 잊지 않으시구… 이걸 알아야 해, 정례, 내말을 듣소?》

공명판이 지릉지릉 울렸다. 목메인 흐느낌소리가 커지고있는것이였다.

《예, 듣고있어요. 선생님.》

《정례.》 그는 목깃을 헤치며 또 힘들게 말을 이었다. 《이걸 잊으문 안돼. 우리 장군님의 이 사랑과 믿음을 저버리문 저- 절대 안돼. 주- 죽은 목숨이란말이요, 알겠지? 힘들구 외로울수록 우리 장군님만 생각하오. 그리구… 장군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기 위해서 힘쓰구… 아는껏 사람들한테 말해주구… 부탁이요. 그래야 통일이 빠- 빨리 오게 돼. 이남민중모두가 장군님을 잘 알면 토- 통일이 되는거요. 그걸 위해서… 노력해주.- 호- 홀로 남았다는… 외롭다는 생각 싹 걷어치우구 우릴 대신해서 더많이 힘써주.- 그래야만 해. 왜 대답이 없소?》

《듣고있어요. 선생님, 좀 더 말씀해주셔요. 계속 듣고싶어요.》

《하정례, 귀중한 도- 동지, 어제두 오늘두 저- 정례는 우리의 동지요. 우린 다김정일장군님의 전사들이구… 이걸 명심하시오. 응?!…》

끝내 정례는 울음을 터뜨리고야말았다. 얼마후에야 신음소리처럼 속삭이였다.

《고마와요. 선생님, 좋은 말씀 해주셔서… 부디 안녕히 잘 가세요. 절대 잊지 않겠어요. 동지들에게 저의 이 마음을 전해주셔요.》

전화가 끊어진지 오랬어도 그는 꼼짝하지 않고 수화구에서 울리는 미세한 소음에도 귀를 강구고있었다. 생활의 온갖 음향이 그 수화구를 울리고있는듯 싶었다. 경적소리, 승용차바퀴의 쓸림소리, 지긋지긋한 쇠사슬소리, 미친 늙은이의 통곡소리… 소리로 충만되여있는 생활, 온갖 음향과 소음들로 꽉 차있는 인생… 그는 무수한 소리들가운데서 오직 하나의 눈물어린 목소리만은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것은 하정례의 목소리였다. 뒤를 이어 말 못 하던 최동환의 거센 숨결소리도 울려왔다. 그들, 뒤에 남는 사람들이 웨치고있었다. 정대천, 강동찬, 최남규, 최주백, 김규호, 양봉순, 최한석… 지리산의 호랑이 박종하, 박영발, 박신규, 방봉연… 그들모두가 웨치고있었다.

《잘 가시오, 동지들!-》

그는 저도모르게 목메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눈물이 끓고 가슴이 타고 눈앞에서는 무수한 불꽃들이 아물거렸다. 그처럼 담차고 용맹하던 동지들, 깨끗하고 열정적이던 동지들, 그처럼 훌륭한 동지들을 땅에 묻고 저혼자 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나 견딜수 없었다.

피타는 목소리로 부르짖고싶었다. 광주와 대전, 대구, 청주의 교도소, 보안감호소의 담벽들에 피로 쓰고 손톱으로 새긴 동지들의 이름을 부르며 웨치고싶었다. 지리산과 백운산, 력기산, 설악산과 태백산줄기의 수많은 릉선과 골짜기에 묻힌 동지들께 목청껏 웨치고싶었다.

《동지들, 우리는 죽지 않소. 죽지 않을것이요. 혁명에 몸바친 이상 죽음이란 없습니다. 동지들, 내 말이 들립니까. 나도 인젠 자신있게 말할수 있습니다. 죽음이란 없습니다. 없습니다!-》

그는 쩍 벌린 입으로 더운 공기를 들여마시며 거쉰 소리를 토했다. 출발을 앞둔 차들이 그를 재촉하는듯 부릉거렸다. 그는 송수화기를 걸고 주먹으로 눈굽을 찍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75살의 비전향장기수 김진서는 50년에 이르는 기나긴 세월 치렬한 삶을 지켜온 조국의 남녘땅을 떠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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