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레커링=민족통신 손세영/노길남 특파원]독일 중부지역의 보흠시 근처에 위치한 레이커링에 거주하고 있는 통일운동 인사 김대천 선생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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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천 선생의 뒤에 남북최고지도자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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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최근 대형 자동차 사고를 입어 병원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주변 인물들과 해외동포 통일인사들에게 걱정이 되어왔다.
그러나 기자가 그의 자택을 방문하였을때에는 두차례의 뇌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한달간의 치료를 받는 과정에 잠시 집으로 돌아와 요양을 받는 기간이었다. 기억력도 생생했고, 때로는 농담도 하며 멀리 미국에서 자신을 찾아 준데 대해 그의 부인과 함께 무척 고맙다고 반응했다.
그의 집에 들어서자 뒷 정원에 높은 깃발대에 꽂힌 한반도 통일기가 바람에 날려 휘날리고 있었다. 이 동내에서는 김대천 선생 하면 두개의 조국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열열인사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것 같다. 처음 깃발을 올렸을 때부터 주변 독일인들이 저 깃발이 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통일운동에 열심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에는 이 가정에 이종현 선생, 이한경 선생부부, 선경석 선생부부도 병문환차 방문하고 있었다.
김대천 선생 부인은 맥주와 안주를 대접하며 그의 병원생활과 지난 두달 동안에 일어났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병문환 온 통일운동 인사들은 다소 안도의 마음을 갖는 표정들이었다. 이들은 김대천 선생이 뇌를 다쳤기 때문에 무슨 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하고 무척 걱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달만에 가정으로 돌아 온 김대천 선생은 두차례의 뇌수술을 받은 결과가 좋은 것으로 드러났다. 부인에 따르면 첫 뇌수술을 할 때 부분 마취를 하여 통증이 심했던지 수술을 끝내고 병실에 있는 동안 그것을 견디기 어려워서 인지 남편은 소리를 치며 머리에 연결한 주사기들을 모두 뽑아 버리고 병원측의 허락도 없이 어디론지 나가버렸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도 병원측이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여 그를 찿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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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현선생 댁에서 김대천선생 퇴원을 축하하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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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나간 그날 오후 늦게 거리를 배회하는 김대천 선생을 발견한 경찰들은 그를 태워 병원으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뇌수술을 받아 그 경과가 좋아지고 있다고 그의 부인이 기뻐하고 있다.
평소 때 그렇게 씩씩하고 정열적이던 김대천 선생은 최근에 병원생활을 한 탓인지 말 수도 적어지고 말소리도 낮아진 것 같다는 것이 요즘에 그를 만난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이라고 한다.
그는 특히 괄괄한 성격이면서 사회정의 운동이라면 만사를 제치고 참가하는 것이 그의 독특한 기질이었다. 그래서 광부출신으로 독일에 온 이후 초기부터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무엇 때문에 이역만리에서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환경속에서 조국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
김대천 선생은 1944년 7월22일 경북 상주 출생이다. 자신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무학자라고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는 아는 것이 많다는 주위 사람들의 평가이다. 그는 특히 부부관계가 좋아 가정에서는 1남1녀를 둔 ‘잉꼬부부’라고 불리울 정도로 부부금슬이 좋다. 벌써 결혼생활 47돌이 되는 해를 맞고 있다. 이들은 지난 1965년 한국의 충북음성에서 중매에 의해 결혼했다. 결혼한 이후 12년만인 1977년 9월9일에 광부모집 광고를 보고 신청하여 독일에 오게되었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싫은 것도 이유가 되었고, 부정부패로 서민들의 불만이 많았던 것도 이유가 되었다.
그는 초기에 한국의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열열사 돕기를 비롯하여 그 이후 1989년 한국노동자지원운동과 함께 한국의 민주화운동, 그리고 조국통일운동에 가담했다. 1989~91년에 재유럽민족민주운동협의회(민협)에 가담했고, 1990년 8.15범민족대회이후 고조된 통일운동에 가담하면서 28차례 이북을 방문하면서 범민련 유럽본부 중앙위원으로 활약하며 남과 북, 해외동포 3자연대운동에 참여했다. 그래서 2005년 8.15 서울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광부로 온 이래 28년만에 최초로 남녘의 고향땅을 밟을 수 있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는 북을 적으로 보는 한 통일은 요원하기 때문에 친북소리를 들어도 동요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에 불타고 있다. 남과 북이 하나의 조국이기에 독일 땅에서 살면서도 그의 집 정원에는 언제나 통일기가 펄럭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서재에는 김대중-김정일 두 정상이 만난 사진을 표구에 넣어 벽에 걸어 놓았다.
김대천 선생은 이날 방문한 여러분에게 감사하다고 말한다. 한편 그를 방문한 손님들은 수술한 자리가 많이 치료되었고, 큰 교통사고였지만 두번의 수술이 잘 되어 다행이라면서 다시 한번 위로하고 멀지 않은 날 자주, 민주, 통일운동의 현장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작별인사를 나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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