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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1] 제3세게의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영국과 프랑스의 제2차 10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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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
댓글 0건 조회 6,201회 작성일 12-09-01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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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편집 시간 2012.09.01 11:10:09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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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1] 제3세게의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영국과 프랑스의 제2차 10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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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1] 제3세게의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영국과 프랑스의 제2차 100년 전쟁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은 11번째 연재글 "제3세계의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
에서는 "제2차 100년전젱의 역사를 살펴보면 제1차 100년전쟁보다 더 치열하게 또 더 넓게 여러 나라들이
관련된 전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럼으로 제2차 100년전쟁이라는 말 의 뜻은 역시 실질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가 중심이 되여 싸운 식민지 쟁탈전의 총칭이라고 볼 수 있다."라고 조명했다. 그의
11번째 글을 여기에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11]제3세계의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

영국과 프랑스의 제2차 100년 전쟁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끝을 모르는 전쟁을 이르키는 서구열강들

거시적 시각으로 보는 영불전쟁의 제2차 100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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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유태영 박사
제2차 100년전젱의 역사를 살펴보면 제1차 100년전쟁보다 더 치열하게 또 더 넓게 여러 나라들이 관련된 전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럼으로 제2차 100년전쟁이라는 말 의 뜻은 역시 실질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가 중심이 되여 싸운 식민지 쟁탈전의 총칭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유럽의 백인들의 세계에서 수 세기 동안 수 없이 많은 전쟁들이 계속하여 발생하고 있었다. 서유럽의 백인들끼리 수 세기 동안 싸운 전쟁들은 왕권의 계승문제, 언어와 문화가 다른 종족들간의 영토와 국경분쟁문제 그리고 종교전쟁등이 중요한 전쟁의 원인과 이유였다.

그런데 제2차 100년전쟁은 서유럽 안에서의 전쟁일 뿌만 아니라 서유럽을 버서난 타지역에서 식민지들을 쟁탈하기 위하여 전개한 전쟁이었다. 그럼으로 제2차 100년전젱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등 해외에서 식민지를 확장하기 위한 식민지 쟁탈전이 포함되여 있다.

제2차 100년전쟁 이라고 하는 용어는 1883년에 지어젔는데 J. R. Silly의 유명한 저서인 에 서 인용한 용어이다. 그는 말하기를 제2차 100년전쟁은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이었으며 전쟁의 주역은 영국이었다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제2차 100년전쟁은 1688년 부터 1815년 까지 127년 동안 계속됬는데 127년의 전쟁을 통하여 영국과 프랑스와의 관게의 변천에 대하여 좀더 심도있게 이해할 수 있다.


<1> 제2차 100년전재의 구성


ㄱ. 9년 전쟁 (1688-1697)

9년전쟁은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대항하여 영국, 네덜랜드,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그리고 사보이 공화국등 5개국이 동맹을 맺고 대프랑스 전쟁을 이르킨 사건이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그때 당시 서유럽에서 강력한 군주로서 스스로 “절대군주” 임을 과시하면서 영토확장에 열중하고 있었다. 루이 14세는 1683-84년에 유럽의 “재결합 전쟁”을 선포하면서 유럽의 본토 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섬 나라까지 침공하는 만용을 부리고 있었다.

이에 분개한 영국은 결국 영국이 주동하여 유럽연합인 대동맹을 형성하였다.

영국이 주동하여 대동맹,Grand Alliance를 결성한 목적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함 이었으며 영국의 목적은 성공하였다.

9년전쟁은 1697년에 <라이스윅 조약>을 맺음으로서 전쟁은 일단 끝났다. 그러나 동맹국인 스페인의 카를로스 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함으로서 스페인 내부에서 발생하고 있는 긴장된 상황에 의하여 프랑스와 맺은 Grand Alliance 관계는 복잡하게 흔선을 이르키고 있었다.

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1714)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왜 시작됬나? 스페인 왕 까를로스 2세는 39세에 사망했는데 아들이 없음으로 그의 후계자로 종손인 필립 부르봉을 스페인의 왕으로 세울 것을 유언으로 남겨 놓고 사망헸다.

그런데 큰 문제는 사망한 왕의 유언대로 스페인의 왕이 된 필립 부르봉 왕은 프랑스의 “절대군주” 라고 큰소리를 치고 있는 루이 14세의 외손자가 되는 혈연의 관계가 있는 왕 이었다. 그럼으로 스페인 왕과 프랑스 왕과의 관계는 할아버지와 외손자의 혈연관계가 되는 기이한 관계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당시 스페인은 어떤 나라였는가? 스페인은 유럽의 여러 나라의 왕족들과 많은 결혼을 했음으로 혈연관계를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은 캐톨릭 국가로서 신성로마 제국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어디 그것 뿐인가? 그때 당시 오스트리아 왕 레오폴드 1세는 스페인의 사망한 왕 까를로스 2세와의 사촌 형제의 관계에 있었다.

또한 스페인은 돈 많은 부자 나라였으며 남아메리카에 광대한 식민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외에도 사방에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고 있는 명실공히 부자 나라 였다. 이러한 부자 나라인 스페인이 프랑스를 할아버지 나라로 모시게 되였던 것이다.

영국은 프랑스와 스페인 두 나라의 혈연 관계에 대하여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사실은 영국뿐만 아니라 독일, 네덜란드, 그 외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줄줄이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한 동맹을 형성했으며 오스트리아 까지도 반프랑스동맹에 가담하고 있었다.

이른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유럽 전체를 뒤흔들어 놓는 혼돈속에서 다음과 같이 3단게로 진행됬다.

*초기전투(1701-1703) *중간 단계(1704-1709) * 최종 단계(1710-1714)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결국 프랑스의 패전으로 끝났다. 프랑스와 스페인의밀접한 관계는 끝장이 나고 말었다.

스페인이 유럽에서 소유하고 있던 많은 식민지를 영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에게 빼았기는 수모를 당했다. 그리고 스페인은 남아메리카에서 30년 동안 소유하고 있던 식민지 스페인령과 노예무역권도 영국에게 모두 다 빼았겼다.

프랑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서 다양한 식민지를 이미 많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영국에게 그 일부를 빼았겼다. 한 때 전 유럽을 뒤흔들고 있던 프랑스의 헤게모니는 유럽 전 지역에서 쇠퇴하고 있었다.

ㄷ.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1748)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샤를르 6세는 당대에 아주 유명한 황제이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함스부프크 왕가의 수장이였으며 또한 헝거리의 왕, 보헤미아의 왕, 크로아티아의 왕 그리고 슬로바니아의 왕이라고 하는 엄청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샤를르 6세는 아들이 없음으로 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오스트리아의 왕위를 물려주기 위한 궁리로 <국사조치>를 발동하여 여성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합법화 조치를 취했으며 그때 당시 유럽의 대부분의 군주들이 샤를르 6세의 <국사조치>에 서명하여 여성의 왕위게승을 합법화 했다.

샤를르 6세의 배경으로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의 왕위를 게승하기는 했지만 1740년에 샤를르 6세가 사망했다. 샤를르 6세가 사망한 후에 유럽의 여러나라들은 <국사조치>에 서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의 여성왕위를 반대하여 이른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1740-1748년에 이르켰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이르킨 주동 세력은 프랑스와 스페인 이였으며 주로 영토분쟁 때문에 주변의 많은 나라들도 프랑스와 스페인 세력에 합류하여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왕국을 공격했다.

하지만 영국은 프랑스를 대항하여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왕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를 놓고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정세하에서 프랑스는 인도와 북아메리카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영국과 벌리고 있었는데 영국에게 항상 주도권을 대부분 빼앗기고 있었다.

영국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는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정권은 결국 분명한 승패가 없는 “엑스라샤펠 조약”을 1748년 10월에 맺음으로서 9년여에 걸친 전쟁쟁은 종결됬다.

“엑스라샤벨 조약”을 맺음으로 유럽의 얼키고 설킨 전쟁은 끝났는데 러시아의 출병이 오스트리아를 도와준 힘도 전쟁을 종결하는데 큰 도움이 됬다.

ㄹ. 영국과 프랑스 인디언 전쟁 (1689-1763)


유렵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제1차 100년전쟁을 계속한 것을 “개와 고양이의 앙숙” 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은 싸움의 장소를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하여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전개한 인디언 전쟁의 초창기 부터 75년 동안 치열한 전쟁을 이르켰는데 “윌리엄 왕 전쟁” “앤 여왕 전쟁” “프랜치 인디언 전쟁” 등으로 3기간으로 분류한다. 유럽인들이 북미 대륙에 처음 상륙하여 약 백년 동안은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1750년대 부터 정착지 분쟁으로 전쟁이 발생했는데 치열한 전쟁의 주역은 주로 영국과 프랑스 였다.

영국과 프랑스 전쟁은 캐나다 퀘백에서도 진행됬다. 프랑스는 인디언의 지원을 얻어 영국의 식민지 음모를 공격했다. 영국도 역시 인디언의 한 부족을 포섭하여 프랑스와 격전했으나 쌍방의 승산 없이 “리조웍 조약”을 맺고 말었다.

영국은 프랑스인들이 인디언들과 손을 잡는데 대하여 분개하여 프랑스를 아메리카 대륙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영국군 육군 23,000명과 해군 14,00명을 1757년에 파견하여 프랑스와 싸웠으며 항상 영국이 승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인디언들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영국군과 싸웠으나 실패로 끝났으며 프랑스는 미국의 거의 전지역을 영국에 넘겨 주었다. 프랑스를 물리치고 아메리카 대륙을 탈취한 영국인들은 <자기 자신들은 영국인 이다>라고 생각하고 자만심을 품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인디언들을 사나운 늑대로 여기고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 한 예를 들면 1750년에 캐롤라이나에는 인디언 6만명, 흑인 노예 4만명인데 영국인은 2만 5천명 뿐이었다. 6만명 인디안들이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인디안 분파가 1천개가 넘기 때문에 백인들은 인디안의 분파를 이용하여 서로 싸우게 하여 인디언들의 씨를 말리게 했다. 그리고 영국인들은 인디언에게 술을 무진장 마시게하여 알코을 중독으로 중환자들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영국인들은 최고로 사나운 사냥개를 대량 풀어 놓아 인디언들을 물어 뜯어 먹게 했는데 1624년에 쓰여진 한 편지에 의하면 <여러가지 방법으로 무력을 사용할 수 있으나 사냥개들이 인디안들의 검은 벌거 벗은 몸뚱이들을 물어 뜯어 먹게할 수도 있다>라고 기록했다.

그런데 그때 당신 영국인 한 목사의 말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 모든 전쟁은 선전포고가 있어야 하는데 만일 인디언들이 선전포고도 없이 무지막지하게 도둑처럼 영국인에게 싸움을 걸어 온다면 인디안들은 늑대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늑대 처럼 다루어야 한다> 라고 한 영국인 목사는 주장했다고 한다.

영국과 프랑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놓고 식민지 쟁탈전쟁인 프랑스 인디언 전쟁을 이르킨지도 어언간 250년이 지나갔다. 그후에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미국땅에서 태어난 영국인 후손들의 수는 미국에 가득하다.

그런데 오늘 미국 땅에 생존해 있는 인디안 후손들의 수는 한 줌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한 줌에 불과한 인디언 후손들을 영국인들은 단지 귀찬은 존재로만 여기 면서 기회만 있으면 인디안 혈통 씨도 완전히 제거해 없애 버리기를 바라고 있다.

오늘 미국의 백인 기독교인들의 사고방식은 옛날 영국인 목사가 말한것 처럼 아메리카 인디안들을 늑대와 같은 존재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다.


ㅁ.프랑스 혁명 전쟁 (1792-1802)


프랑스 혁명전쟁은 어떻게 일어 났는가? 프랑스 혁명으로 인하여 프랑스에 처음으로 공화제 정부가 들어섰다. 그런데 그때 당시 프랑스의 공화제 창건에 대하여 영국을 비롯하여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등 유럽의 군주 국가들은 모두 다 프랑스의 공화제 혁명을 반대했다. 그리고 프랑스 안에서 왕당파 까지도 혁명으로 인하여 탄생된 공화제 혁명정부를 반대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현대적인 국민 개병제도를 도입하는등 여러가지 개혁운동에 모범을 과시했다. 유럽의 각지역에 숨어 있던 공화주의자들도 프랑스의 공화제의 활동에 자극을 받아 활발해 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 전쟁은 1792년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전쟁이 처음 시작ㅤㄷㅚㅆ으며 1793년에는 영국을 중심하여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됬다. 프랑스는 국내와 외부에서 반란이 발생하여 한때 위기에 있었다. 1797년에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임시로 종전이 됬다.

프랑스 혁명으로 탄생된 공화제에 대하여 군주국가들과 귀족들이 일제히 반대하여 프랑스는 한때 풍전등화 처럼 위기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공화제 정권은 구사일생의 노력으로 징병제 군인 120만명을 모집하여 기적적으로 성공했다. 군주제 국가에서 용병으로 군대를 뫃는 것과는 상상도 못할 일 이었다.

영국을 비롯하여 왕정 군주제를 고수하는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일제히 단결하여 프랑스의 공화제 혁명을 반대하는 동맹에 가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네덜란드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이탈리아 원정에서 승리 했다. 그리고 1798년에는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을 시도했으나 영국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실패했다.

프랑스와 영국의 적대관계는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고 그대로 계속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제2차 100년 전쟁을 싸웠는데도 서로 아주 망하지는 않었다.

<2> 영국과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쟁탈


영국과 프랑스는 인종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결코 먼 너라가 아니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는 문화적인 유사성과 혈연의 천연적인 관계의 근접성으로 인하여 두 나라의 유사점은 너무나도 절실하다. 그럼으로 우리가 유럽인을 처음 대할 때 영국인인지 프랑스인 인지를 밝히기는 거의 불가능 하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인 “서방 유럽” 서구라고 할 때 우선 떠올리는 것은 영국과 프랑스 이다. 영국은 한 때 “팍스 브리타나카”의 영광을 과시하면서 앵글로 색슨패권으로 전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다.

한편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알짜배기 땅을 독차지하고 있으면서 강력한 로마 캐톨릭 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함으로서 풍부한 역사문화를 과시하여 영국과 맞서고 있었다.

유럽의 역사에 있어서 영국과 프랑스의 관게는 충돌과 전쟁으로 점철되고 있었다.

영국은 프로테스탄트, 개신교의 나라인 반면 프랑스는 유럽에서 로마 캐톨릭교의 강국으서 유럽의 패권을 좌우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관계는 1700년대에 이르러서 북미 대륙으로 대립의 장소를 옮기는 역사가 전개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식민지쟁탈전을 바탕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있다.

영화 감독 마이클 만이 제작한 “The last of the Mohicans (1992넌)” 는 증언하기를 현재 북아메리카 대륙을 앵글로 색손족이 점령하고 있지만 원래 이 대륙의 주인공은 엄연히 인디언 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분명히 말을 해 주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가 1689년 부터 1763년 까지 74년 동안 북아메리카에서 전쟁을 했는데 역사는 이른바 <영불 북아메리카 식민지 쟁탈 전쟁>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74년 동안의 영불 식민지 쟁탈전은 다음의 4단게로 구성되어 있다.

ㄱ. 윌리엄왕 전쟁 (1689-1697)


이 전쟁은 프랑스의 팔츠 공가의 왕권 게승문제에 대하여 독일과 스페인 그리고 스웨덴등 이웃 나라들이 영토문제와 관련된 이권때문에 “아우크스부르크동맹”을 조직하여 프랑스에 반기를 들었다. 그런데 영국의 윌리엄 왕이 이 동맹에 가입함으로서 전투는 프랑스에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됬다.

그런데 유럽에서 프랑스를 대항하였던 영국은 유럽에서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의 식민지에서도 영국은 프랑스에게 불리하게 전쟁을 이르켰으며 이 전쟁을 미국판“윌리엄왕 전쟁”이라고 한다.

북아메리카 식민지 전쟁은 영국의 개신교 교도인 윌리엄 3세와 프랑스의 캐톨릭 교도인 제임스 2세와의 식민지 쟁탈전이 전개됬던 것이다. 한편 프랑스는 캐나다 퀘백에서 세력을 강화하여 인디언의 지원을 얻어 영국과 대항하여 싸웠다. 하지만 영국은 캐나다에서도 역시 프랑스를 맞대결 하였는데 쌍방이 모두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결국 “리츠윅 조약”을 맺음으로서 일단 싸움이 끝났던 것이다.

ㄴ. 앤 여왕 전쟁 (1702-1713)


스페인에서 왕위 게승문제로 인하여 유럽 대륙이 전쟁에 휘말리고 있는데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이해관계에 연관된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전쟁을 앤여왕전쟁이라고 한다. 앤여왕전쟁은 뉴잉글랜드 주변에서 전개 됬는데 프랑스는 항상 현지의 인디언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영국군과 싸웠다.

한편 뉴잉글랜드에서의 전쟁과 병행하여 영국과 프랑스는 서인도 제도에서 무역패권 때문에 그곳에서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북아메리카 전쟁에서도 영국은 프랑스가 이미 점령하고 있는 허드슨만 지방과 뉴펀들랜드 지방을 모두 다 빼았는 강자가 되여 프랑스를 물리치고 있었다.

ㄷ. 조지왕 전쟁 (1744-1748)


영국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계승을 적극 지원하면서 프랑스와 싸운 경력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런데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영국은 또 프랑스와 격전을 했는데 이 전쟁을 조지왕 전쟁이라고 부른다.

조지왕 전쟁은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와 교전을 했는데 아카디아 북부 뉴잉글랜드의 경계를 둘러싸고 전쟁을 했다. 식민지 쟁탈전에서 영국이 항상 우세를 유지했는데 1745년에 영국은 루이부르크를 점령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아헨화약"을 맺음으로서 전쟁은 서로 화해로 끝났다.

ㄹ. 프랜치 인디언 전쟁 (1754-1763)


유럽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유명한 7년전쟁을 이르키고 있었는데 북아메리카에서는 같은 시기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은 오하이오 강 상류 지역 버지니아와 펜실베니아 지역에서 식민지 정착을 위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 쟁취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하지만이 전투의 근본 목적은 북아메리카의 중심부를 누가 먼저 차지하는가 하는 중대한 전쟁이었다.

영국은 이미 타지역에서 중요한 땅들을 독차지 하고 있었으며 수적으로는 영국이훨신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인디언들과 유대를 튼튼히 하는는데 있어서는 앞서고 있었다. 어쨋던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밀고 당기는 전쟁을수십년 동안 계속하고 있었다.

결론으로 말하자면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과 캐나다 퀘백에서 대결전을 수십년 동안 계속하여 싸웠는데 프랑스는 영국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었다. 1763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파리 조약”을 맺음으로서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서 모든 군사적 기득권을 포기했으며 정치적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영구적인 종전에 합의했다. 영국은 북아메리카를 독점하는 승리자가 되고 있었다.


<3> 오늘의 영국과 프랑스 어디로 가는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앙숙관계는 11세기 노르만족의 영국정복까지 올라가 제1차 100년전쟁과 제2차 100년 전쟁에 이르는 장대한 적대국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적대적인 역사적 배경으로 인한 원수지간 때문에 영국인들은 성병을 가리켜서 “프랑스인의 병”이라고 부르면서 프랑스 남자들을 “호색한”으로 여겼다. 이에 정면 대항을 하여 프랑스인들은 “영국 요리”라는 말로 영국인들이 맛대가리가없는 저속한 인간들이라고 비방했다. 프랑스는 영국을 “미국의 꼭두각시”라고 비방하기 까지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영국과 프랑스가 수 백년 동안의 앙숙관게가 돌변하여 두나라는 1904년 4월 8일에 <영국 프랑스 화친협정, Entente Cordiale>을 맺었다.

제1차 세게대전이 발발하기 전 10년 동안에 독일은 유럽에서 위협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와 프랑스가 연합하여 독일을 견재하고 있었다. 영국은 이에 질세라 재빨리 러시아-프랑스연합에 가담하여 독일을 견제하기 위한 세력에 합세했다.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가 힘을 연합해야만 할 절대적 필오를 느끼고 있었다. 급변하는국제정세 하에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우군으로 변화되고 있다.

<영국 프랑스 화친협정>체결후 부터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는 유럽에서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이집트와 모로코에서, 기니와 나이지리아 그리고 감비아등지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정책에 있어서 서러 양보하면서 합동작전을 펄치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는 타이와 미얀마를 비롯하여 인도차이나 여러 지역에서 두 나라의 경쟁관계는 협력관게로 완화하는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1906년에 알레시라 회담과 1911년에 모로코 위기등을 통하여 두 나라시이의 협력관게는 더욱 공고히 됬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서구 유럽의 맹주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냉전 시기가 지난 오늘에 있어서 영국과 프랑스, 독일 관계는 유럽의 3대국으로 자리매김이 확실해 젔다. 영불독 3국 중에서 영국은 미국 과의 관계로 인하여 3국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는 지적도 있기는 하다.

또 다른 한편 중국과 러시아가 동반자 관계로 떠오르고 있는 오늘에 있어서 유럽에서 영불독 3국의 유대는 어떻게 다양하게 전개될걱인가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정치 학자들은 다양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 와 영불독 3국의 관계는 얼마나 지속될것인가? 동서 양 진영의 유사성과 차이점에 대하여 모두 다 불확정한 상태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수상의 말 실수 한 마디를 하여 프랑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건이 최근에 발생했다. “프랑스의 기업인들이 세금을 피해 영국에 온다면 영국은 레드카펫을 깔고 그들을 환영하겠다” 라고 영국의 수상이 말했다.

영국 수상의 발언에 대하여 프랑스의 올랑드 대통령을 “유럽의 연대가 강해져야하는데 그의 말은 유럽의 연대를 깨뜨리는 말이다” 라고 대꾸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 말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하는데 일국의 수상으로 큰 실수를 했다. 영국의캐머런 수상은 나중에 내 말은 “영국식 농담”이었다라고 변명을 했다고 한다.

영국은 EU 내에서 영국의 국익을 챙기기 위하여 독일과 프랑스 두 나라를 분주히 오가면서 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다. 하지만 영국은 EU에서 주도국이 되지 못 하고 추종국의 신세로 전략했다. 영국의 과거의 “영화”가 오히려 영국의 미래를“흑암”으로 만들고 있다.

이글을 끝 맺으며,


축구경기 에서 프랑스와 영국이 경기를 할 때 스코틀랜드는 영국을 응원하지 않고 프랑스를 응원한다. 영국과 스코트랜드가 경기할 때 프랑스는 영국을 응원하지 않고 스코트랜드를 응원한다고 한다. 영국과 프랑스의 국민감정은 옛날이나 오늘 하등의 변화가 없이 자존심과 적대감정으로 그대로 대립되여 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제3세계를 참략하고 이권을 갈취하는데 있어서는 백인들끼리의 집단의식을 충분히 발휘하여 영불의 구별을 모루고 제3세계에서 욕심을 서로 채우고 있다. 그러면서도 영국과 프랑스는 종교적으로 로마 캐톨릭 교회와 영국은 국교로 성공회라고 하는 독특한 교회를 고집스럽게 주장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가 핵개발을 하여 핵무기를 소유하는데 있어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약간의 마찰은 있었으나 큰 소동은 없이 양국이 모두 동시에 핵무기 보유국이 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수 세기 동안 적대관게로 앙숙인데도 불구하고 어느 시기에는 두 나라의 필요에 따라 “화친협정”을 맺고 과감하개 화해와 헙력을 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영불처럼 “화친협정”이 아닌 “화친통일” 을 하게 될것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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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유태영 박사 2012-08-31]

민족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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