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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기(7)독일군대의 세 번째 개선문 행진-반면교사해야 할 역사화해의 선례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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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1,710회 작성일 12-08-31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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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모 나그네 님의 글


유럽여행기(7)독일군대의 세 번째 개선문 행진-반면교사해야 할 역사화해의 선례



과거 찬란했던 로마제국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언제나 외곽의 아피아 거리(20세기초 이

태리의 거장 오토리노 레스피기는 바로 이 거리에 로마제국시절부터 서있던 소나무를

보고 영감을 얻어힘차게 개선해오는 고대 로마의 군단의 모습을 음악으로 형상화해냈습니다.

바로 이 곡이 유명한 교향시 로마의 소나무’ 중 마지막 악장 아피아 거리의 소나무)에서부터

전리품과 포로들을 이끌고 시내까지 개선행진을 벌였다고 합니다.

후일 황제가 된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원정하던 중 로마의 개선문을 보고서 파리로 돌아와

건축을 명한 샹젤리제거리의 거대한 문이 오늘날 잘 알려진 라 포르뜨 드 트리옹프즉 개선문이 되겠습니다.

독일의 문호 레마르크의 대표작 제목이기도 한 파리의 명물 개선문은 사방팔방으로 뻗어있는

파리의 중심부에 서있는 파리의 상징이자 랜드마크입니다.

 

   흔히 파리의 상징으로 에펠 탑을 생각하기 쉽지만실제 와서 보니 에펠탑은 건설 당시부

터 많은 파리시민들로부터 반대의견이 더 많았고 지금도 파리의 풍경에는 좀 생뚱맞게

튄다는 의견에 저도 공감합니다그에 비하면 파리의 중심가에 자리 잡은 이 개선문이야

말로 프랑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영광을 대변하는 아이콘이라 하겠습니다.

여담이지만 개선문의 바로 중심부 아래에는 1차 대전에서 전사한 무명용사의 시신 한구가

매장되어 있습니다장군묘역 따위나 만들어 대는 전근대적 군대의 관념으론 이해가 안가

는 행위일지는 모르겠으나개선문 벽에 새겨진 무수한 장군들과 영웅들의 이름보다 지금

의 프랑스는 이 무명용사의 무덤을 가장 중앙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걸 시사하죠.

각설하고 개선문의 옥상에서 바라본 파리의 전경은 잘 계획된 도시의 아름다움과 세련됨을

대로 보여줍니다특히나 야경이 일품이지요.

 

그러나 나폴레옹의 전성기 이후, 19세기 후반부터 국력이 쇠해가던 프랑스는 이웃나라

독일 덕분에 이 개선문과 관련해 두 번이나 안 좋은 추억과 아픔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첫 번째는 1870년 보불 전쟁의 패전으로 카이저의 프로이센 군대가 백기를 든 파리시내로

진입하면서 바로 이 개선문을 통해서 입성했습니다그리고 화려했던 베르사이 궁의 거울의 방에서

독일의 빌헬름 황제와 비스마르크는 통일된 제제국의 선포식을 가졌으니,

이게 바로 근대 통일독일의 시작입니다프랑스는 처음으로 독일에게 항복하는

굴욕스런 패전과 더불어 30억 프랑의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절치부심했던 프랑스는 1차 대전에서 승전하자독일제국이 선포되었던

베르사이 궁으로 독일대표단을 불러 40년 전의 치욕을 이자까지 물려서 확실하게 되갚아줍니다.

독일이 물어야 했던 전쟁배상금은 1,340억 마르크그것도 금본위제 시절인 당시기준으로

이 천문학적 배상금을 금으로 물어내라는 가혹한 조건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독일은 전쟁에 졌다는 이유로 그냥 죽으라는 소리였죠.

 

그리고 프랑스의 지나쳤던 복수심과 증오는 패전독일을 너무도 비참한 나락으로

내몰아 결국 독일은 히틀러가 이끄는 민족사회주의당(나치)가 득세하고 불과 20년의 불안한 평화 끝에

유럽은 다시 세계대전을 치러야 했습니다철벽요새 마지노선만을 믿었던 '개선문의 나라'는 5백만 대군과

독일보다 더 우수한 탱크와 전투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전격전에 밀려 몇 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굴욕스러운 백기를 들었습니다.

 

 이때 나치독일군이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해 들어오면서 프랑스의 자존심이었던 개선문을 다시 유린합니다.

개선문의 두 번째 굴욕이었습니다히틀러는 1차 대전의 패배를 설욕하는 의미에서 베르사이 궁에서

항복조인식을 체결했습니다. 1차 대전 때 독일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던 장소로 쓰였던 열차의 차량 역시

독일로 끌고 가 흔적도 없이 분해해버립니다보복의 악순환은 이렇게 극에 달해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이후 프랑스 민중은 분연히 저항했고 그들의 레지스탕스와 연합국의 도움으로 프랑스는 결국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하지만 이후의 역사는 조금 다른 방향과 방식으로 흘러갔습니다동서냉전의 여파이기도 했지만,

잦은 유럽국가간의 반목과 갈등은 전쟁으로는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본 이후의

유럽 열강들은 점점 하나의 유럽이라는 이상과 대의에 주목하게 되었고 점차 경제공동체에서

문화공동체 그리고 정치와 군사공동체를 추구하며 화해와 공존을 통한 새로운 생존방식의 경험들을 축적했습니다.

그리고 동서냉전의 종식과 통일독일의 출범이후 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의해 유럽연합(EU)’가 탄생하게 되었죠.

 

  동시에 1994년 통합군의 시발점이 된 유로군단을 창설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터전을 삼습니다.

프랑스독일,벨기에와 스페인이 참가한 이들 유로군단으로 과거 수백 년 동안 반목과 대립을 일삼았던

유럽의 열강들은 마침내 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한걸음을 더 나갔습니다.

 (원래 프랑스와 독일 스페인 각 1개 사단과 벨기에의 1개 여단을 중심으로 구성된 유로군단은

점점 세를 불려 이탈리아와 폴란드터키와 그리스와 오스트리아가 연락장교단을 파견하고 있습니다.

NATO의 전력을 약화시킨다는 미국과 영국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로군단은 미래 더욱 통합될

유럽의 주축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로군단이 창설되던 해, 1994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기념일에 독일연방군은

세번째로 철십자 마크를 단 탱크와 병력을 이끌고 개선문을 지나 샹젤리제 거리로 보무도 당당히 걸어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외면하거나 분노에 찬 침묵으로 이들을 맞았던 앞서 두 번의 방문과는 달리 파리지앵들은

 이들에게 박수와 갈채를 보냈습니다유로군단 창설 기념으로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유로군단의 주축이 된

독일연방군을 초청했고 콜 독일 총리가 이를 수용해 실로 50여년 만에 독일군은 개선문을 다시 지났습니다.

물론 프랑스 국내에서 일부 극우 보수층이 반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이미 프랑스의 대다수 여론은

독일군대의 개선문 행진에 대해서 더 이상 의심하거나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을 적이 아니라 이젠 친구로 바라보게 된 것이었죠최근의 여론조사에서도 이제 프랑스인들은

영국과는 해묵은 감정이 남아 있어도 독일에 대해서는 과거와 같은 극단적인 적개심보다는 오히려

친근감을 가지고 있을 정도니까요그만큼 전후 양국은 변했고 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지난 근세 이백여년간의 악연과 보복과 복수의 악순환을 끊고 마침내 화해하는 아름다운 모습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일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2차 대전 이후 독일은 한없이 자세를 낮추고 철저한 반성의 모습과 진심어린 사죄의 행위와

배상작업을 통해 유럽각국의 마음을 샀고 특히 인접한 이웃국가 프랑스의 반감과 의구심을 해소하는데

전력을 다했던 때문입니다과거사 문제에 있어서 독일의 엄격한 전후처리와 과거사를 있는 그대로 가르치는

철저한 교육정책으로 프랑스의 악감정을 누그러트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통일 독일에 대해서 누구보다 반대가 심했던 과거의 프랑스와는 달리 냉전이 끝나자 프랑스는

흔쾌히 독일통일에 손을 들어줬고 결국 독일은 분단 수십 년만에 다시 통일의 기쁨을 맛봤습니다.

이는 분명 서로가 상생하고 윈윈하는 사례였지요.

  이러한 과정에 이르기까지 패전국 독일은 부단한 노력을 했었고 또한 프랑스 역시 1차대전

이후 베르사이 조약의 교훈을 살려 아량과 관용 그리고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의 결실이

바로 94년 독일연방군의 개선문 행진으로 결실을 맺었던 것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역사화해의 선순환 사례는 분명히 존재하며 많은 노력과 인내와 관용이 필요함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지금 우리네 광복절날 일장기를 휘날리며 광화문 네거리를 행진해오는 일본자위대를 상상하는 일은

매국노들이나 하는 망상임이 분명한 대한민국의 현실은 참으로 착잡합니다.

 

개선문의 옥상에서 저는 세 번째 독일군 행진의 장면을 반추하면서 하나의 유럽이 된 그들과

과거사와 화해한 프랑스와 독일이 너무도 부러웠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독도와 과거사 문제로 일본과 우리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껄끄럽기 그지없습니다.

패전국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의 전쟁교훈을 망각하고 선순환으로 재통일과 유럽연합 내에서의 주도적인 지도국

역할을 하고 있는 독일의 과거청산노력과 화해의 정신을 철저하게 간과하고 있습니다.

전후 7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이 그저 돈많은 이웃인 이유도

그리고 그들 나라를 진정 위하는 진정한 친구국가가 없는 이유 또한 대부분 그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의 망언과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고 있노라면 과거 전간기 패전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독일우익들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합니다역사에서 배우는게 없는 민족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지

그리고 그로 인한 손해와 희생은 전부 그들 스스로가 떠안아야 한다는 냉엄한 사실을 저들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일본 스스로가 먼저 손을 내밀고 달라지지 않는다면 동북아와 태평양과 아시아의 안정이나

평화는 요원한 길임에 분명합니다러시아와는 쿠릴열도를 놓고중국과는 다오위 다위를,

우리와는 독도문제로 여전히 으르렁대고 있는 일본의 모습은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털어버릴 것은 털어버리고

흔쾌히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한 자세로 상대의 이해를 구했던 독일의 전후모습과는 너무도 대조됩니다.

일본이 과거와 진정 화해한다면 아마 우리의 광복절에 일본의 정치지도자가 방문해 축사를 할 수 있는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분노나 악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우리 여론의 성숙함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긴 이러한 일본과 군사협정을 추진했던 대한민국의 일부 정치인들과 정신나간 국방부의 인사들 역시도 역사에서

쇼와일본만큼이나 배운 게 없다는 사실이 우릴 더 암울하게 하네요.

우리 내부의 청산되지 못한 친일부역과 잘못된 역사교육의 문제 역시 심각하기만 하니까요.

과거사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의 장래는 어둡기만 합니다.

 

   사통팔달한 샹젤리제의 거리에 우뚝 선 개선문의 옥상에서 한일 과거사와의 화해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생각해보다보니마음이 점점 더 레마크르의 소설 개선문의 주인공

라빅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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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윗글에서 계속)주인공
라빅처럼 어두워집니다.
  하지만 라빅이 그랬던 것처럼 개선문을 보면서 더 힘차게 마음을 다잡으려 내려왔습니다.
역사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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