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영국이 과거 식민지 나라들에게 대하여 뻔뻔 스럽게
묶어 놓은 영국 연방제 54개국가들
히틀러보다 덜한게 없는 영국의 잔인한 역사
|
|
글:유태영 박사 |
|
17-18세기에 있어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라고 하는 지상에서 최고의 강대국이 되고 있었다. 그때 당시 영국은 엄청난 해군력을 보유하면서 전 세계를 상대하여 무역과 식민정책을 감행하여 막대한 부를 축척하고 있었다. 그때 대영제국은 오늘의 미국과 중국을 합한 것만큼의 강력한 경제력을 가추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대영제국은 기독교 국가인 것을 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기독교는 정치적으로 권력과 유착되여 있었음으로 교회는 종교적 권위주의에 빠져 있었으며 영국의 하층계급의 민중들의 삶은 종교로 인한 하등의 변화가 없었다.
대영제국이 정치적으로 세계 최고의 권위에 이르고 있었지만 노동자들은 불공정한 사회의 제도하에서 빈부의 격차로 열약한 가난속에 살고 있을 뿐이었다. 가난한 민중들은 종교적인 이념과는 거리가 먼 슬럼가에서 폭력과 술주정과 도박과 음란으로 가득차 있었다.
영국의 가장 큰 죄악은 노예제도를 법적으로 정당화하는데 있었다. 영국은 아프리카에서 6백만명의 흑인들을 노예로 붓잡아 미국에 팔아 넘겼다. 그런데 어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 살아 남아서 백인들의 노예가된 아프리카 노예들의 수는 적어도 2백만명이상 이었다고 한다. 수 없이 많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태평양에서 항해도중에 죽임을 당했으며 또 학살과 질병으로 죽임을 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영국은 히틀러에게 학살당하고 살아 남은 유태인들을 불상히 여겨 그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 보내는데 있어서 국제적으로 큰 공로를 세웠다. 그런데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간 유태인들은 히틀러보다 더 무섭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2, 3천년 동안 살아온 정든 땅에서 강제로 쫓아 낼 뿐만 아니라 그들은 마구 총격으로 학살했다.
그런데 영국은 어찌하여 유태인들이 히틀러보다 더 무섭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강제로 추방하고 또 학살하는 악행을 자행하고 있는데 대하여 아무 말이 없는가?
영국은 역사적으로 기독교국임을 깨끗이 포기해야 마땅하다. 영국은 무종교국도 아닌 보다 더 사악한 악마의 나라가 되고 있다.
영국의 격언과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악평을 받게된 사람은 반 교수형을 받은 것과 같다> 이 영국의 속담이 가리키는 말의 뜻에 의하면 영국은 세계의 여론상으로 악평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영국은 이미 반 교수형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영국이 세계 역사 속에서 악평을 받고 있는데 대하여 이모저모를 살펴 본다.
1. 영국과 아일랜드의 역사적 관계영국과 아일랜드와의 관게는 12세기 말에서 시작ㅤ됬는데 아일랜드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것은 1541년부터이며 그 때 영국의 왕은 아일랜드의 왕도 겸하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아일랜드인들을 깔보면서 어린애 같이 약하고 추잡한 족속이라고 모욕하는 종속관계로 오랜 세월동안 지내고 있었다. 1800년에 아일랜드는 영국과 완전히 합병되고 말었다.
아일랜드는 오랜 독립을 위한 투쟁 끝에 1921년에 식민통치를 끝장내고 영국으로 부터 드디어 독립을 쟁취했다. 하지만 아릴랜드가 독립 할 때 단 한 주만은 영국이 끝내 붙들고 있음으로 그 한 주를 여전히 영국령으로 남겨 놓는 불완전한 독립을 했다. 그런데 그 남겨 놓은 한 주는 Ulster주 인데 오늘은 이 Ulster주를 영국령 <북 아일랜드> 라고 부른다.
아일랜드는 영국에 합병된 후에 121년만에 영국으로 부터 독립을 쟁취하기는 했지만 독립을 성취할 때 <북 아일랜드>만은 영국령으로 그대로 빼았긴채로 남겨 놓고 독립을 했다. 그때 당시 <북 아일랜드>에는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에 속한 강력한 기독교 인들의 집단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아일랜드는 역사적으로 강력한 캐톨릭 국가이었다. 아일랜드가 독립할때 아일랜드의 일부인 <북 아릴랜드>를 영국의 종속령으로 남겨 놓고 독립을 한것이 결국 역사적으로 분쟁의 불씨로 시작 되고 있었던 것이다.
<북 아리랜드>의 분쟁의 이유는 바로 종교문제 이었다. <북 아일랜드> 사람들은 개신교 기독교인들의 집단이기 때문에 독립된 캐톨릭 나라인 아일랜드에 속하는것 보다는 오히려 기독교국인 영국에 예속되기를 더 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민족과 나라보다 종교를 더 중요시하는 어처구니 없는 민족반역자들이 되고 있 었다.
코리아 반도가 8.15 해방이 됬지만 남과북, 북과남으로 갈라진 것과 꼭 같은 비극이 90년전에 <아일랜드>와 <북 아일랜드>사이에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북 아일랙드> 내부에서 또 다시 둘로 갈라져서 개신교 친영파와 반대로 친아일랜드파인 IRA 무장세력이 팽팽히 맛서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IRA 무장세력과 친영국 기독교인들이 충돌하는 NEWS가 자주 전해지고 있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영국판 38선분쟁”을 90년 동안 계속하여 싸우고 있는 것이다. 영국인들은 정말 지독한 독종의 나라의 사람들이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왜 암살을 당했는가? 케네디 대통령은 영국인이 아니라 그는 아일렌드계 미국인이다. 영국인들은 옛날부터 아일랜드인을 깔보고 미워한다. 미국은 <백인 앵글로 색슨 개신교, WASP>가 지배하고 있는 나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뒤에서 지배 하고 있는 세력이 WASP 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영국인이 아닌 아일랜드의 촌 사람인 케네디가 미국의 대통령이되여 우쭐대면서 극성을 부리는 것을 보고 WASP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범에 대하여 미국은 끝내 밝히지 않고 오리무중으로 오늘까지 처리하고 있다.
오늘 WASP는 중동과 아시아 그 어느 곳에서든지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 눈에 보이지 않게 막강한 세력으로 음모를 공작하고 있다. 2012년 12월에 치려지는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도 WASP는 분명히 어떠한 공작을 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2. 영국의 국교 성공회 (Episcopal Church) 에 대하여중세기 유럽의 전성기에 영국은 로마 캐톨릭 나라이었다. 하지만 헨리 8세가 영국의 왕이 되여 1509년 부터 1547년까지 38년 동안 집권하는 시기에 있어서영국의 역사는 명암이 엇갈리는 혼돈의 역사가 전개되고 있었다.
영국은 멀리 6세기 부터 로마 캐톨릭의 지배를 받으면서 캐톨릭 로마 교황에게 충성하는 나라 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인가? 헨리 8세가 왕이 되여 영국을 통치하는 38년 동안 영국은 로마 캐톨릭 교회에서 탈퇴하였으며 헨리 8세는 로마 교황 대신 자기자신이 영국교회의 우두머리 자리에 올라 앉고 있었다.
헨리 8세는 영국의 강력한 왕권을 주장하면서 그의 통치기간에 여섯 번이나 결혼을 하여 로마 교황으로 부터 파면을 받은 종교법상 중대한 죄인이 되고 있었다.
헨리 8세가 로마 캐톨릭 교회를 탈퇴하고 스스로 자기자신이 영국 교회의 우두머리 자리에 올라 않은 이유와 동기는 바로 헨리 8세의 무질서한 여섯 번의 이혼과 재흔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역사는 밝혀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헨리 8세는 영국의 종교개혁을 강행함으로서 로마 교황으로 부터 파면을 당한데 대하여 반항했다.
전통적인 기독교 역사학자들은 영국의 종교개혁을 미화하여 교리적으로 로마 캐톨릭 교회에 대한 개혁운동이었다고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역사의 일부분만 보는 소경 코길이 등만 만저 보는 역사학자들 이다.
그러면 영국의 종교개혁은 어떻게 발생하여 전개되었는가?
헨리 8세가 다혈적인 정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6명의 왕비를 교체하는 이혼과 재혼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중에는 결혼이 성립될 수 없는 가까운 친척과의 결혼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로 인하여 로마 교황이 정치와 종교적인 문제를 근거 삼아 헨리 8세를 파면했던 것이다.
로마 교황으로 부터 파면을 받은 핸리 8세는 결코 한 발자욱도 뒤로 물러 서지 않고 오히려 보다 더 강력하게 영국의 독자성을 주장하면서 그때 로마 캐톨릭 교회의 부패성를 오히려 역공격하는데 총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핸리 8 세가 주장한 영국의 종교개혁 이었다.
이와 같은 원인과 과정을 거치면서 영국의 종교개혁은 헨리 8세 사망후에도 24 년 동안 후계자들을 거치면서 지속ㅤ됬으며 1571년 경에 이르러 영국의 종교개혁은 거의 완성단게에 이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당시 로마 교황 비오 5세는 영국이 계속하여 교황청에 반항하는데 분개하여 영국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를 또 다시 파문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은 오히려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것 처럼 강력하고 신속한 대응책으로 영국 내에 잔재하고 있는 케톨릭의 모든 흔적을 일소해 벌이먼서 유능한 캐톨릭 성직자들을 가혹하게 화형에 처하는 잔인하고 무지막지한 정책을 강행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영국은 독자적인 성공회, Anglican Episcopal Church를 확립하여 영국의 국교로 선포하는 역사적 변혁이 발생했다. 영국이 로마 케톨릭 교회 전통을 물리치고 개신교인 성공회를 국교로 창설하는데 성공을 했다. 하지만 영국은 이로 인하여 오히려 더 뿌리 깊은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다.
그것은 영국과 아일랜드와의 관계인데 아일랜드는 뿌리 깊은 캐톨릭 국가이며 <북 아일랜드>는 캐톨릭계와 개신교계로 양분되여 서로 영국과 아일랜드를 종주국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것이 오늘에도 영국이 당면하고 있는 큰 문제이다.
<북 아일랜드> 는 13,843km2에 불과한 좁은 땅이며 인구는 170만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좁은 땅에서 영국계 개신교 (장로교)와 아일랜드계 캐톨릭 IRA가 서로 대립하여 극한 분쟁을 계속하고 있다. 아일랜드가 1921년에 영국으로 부터 독립을 할 때 영국이 <북 아일랜드>를 분렬시켜 따로 때어 놓은 과오로 인하여 오늘에 있어서도 큰 분쟁이 계속되고 있으니 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영국에게 있다.
3. 스코틀랜드의 분리독립 국민투표에 대하여오늘의 영국은 4개의 지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잉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 그리고 스코틀랜드등 4개 지역이 있다. 그런데 이 4개 지역중에서 스코틀랜드가 영국에서 분리하여 독립국이 되기 위한 찬반 국민투표를 2014년에 실시하기로 확정되여 있다.
투표의 결과는 분리독립이 확정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지만 또 어떤 변수가 전개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시점에서 스코틀랜드의 길고 긴고난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 봄으로서 제3세계의 눈에 비친 서구열강들의 침략 근성을 살펴 본다.
잉글랜드의 주민들은 앵글로색슨족이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주민들은 켈트족인데 켈트족은 스코틀랜드에서 오랜 역사를 통하여 자체적인 문화와 독립성을 간직하고 있는 우수한 민족이다.
그런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침략과 독립투쟁의 역사는 12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 백년 동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 크고 작은 전쟁들이 수없이 계속되었는데 지면상 제한으로 다 기록할 수 없다.
1299년에 스코틀랜드가 로마 교황에게 탄원하여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침략하는 것을 저지시켜 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있었다. 그 때 당시 스코틀랜드에는 윌리엄 월레스, William Wallace가 선두에 서서 스코틀랜드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잉글랜드를 대항하여 싸우다 죽임을 당한 역사가 있다.
한편 잉글랜드도 역시 로마 교황에게 탄원하여 스코틀랜드는 고대로 부터 잉글랜드에 예속된 땅이라고 허위의 주장을 했다. 민족의 기원설을 놓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끝이 없는 논쟁을 하고 있었다.
1707년에 이르러서 두 나라는 연합법을 채택하여 상호 자치권을 보장하는 조건하에서 병합했다. 자치권의 보장하에서 잉글랜드는 성공회를 국교로 정하였고 스코틀랜드는 장로교를 스코틀랜드의 국교로 정하는데 합의했다.
두 나라는 1706년 12월 31일까지 각각 독립국들 이였으나 1707년 1월 1일 부터 두 나라는 연합왕국을 이루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1707년에 병합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기는 했지만 그 후에 1715년과 1745년에 잉글랜드에 대한 큰 반란이 있었으며 결코 평화로운 왕국은 아니였다.
1999년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합병한지 292년째 되는 해이다. 그런데 강제로 병합한지 292년째되는 1999년에 스코틀랜드는 그동안 강제로 페쇠되었던 스크틀랜드의 의회를 다시 복귀하는 구시대의 변화가 시작ㅤ됬다. 다시 복귀된 스코틀랜드의 의회는 2014년에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위한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고 선포했다.
어찌하여 스코틀랜드의 독립찬반 국미투표를 <2014년>에 실시하기로 했나?
그 이유는 1314년에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군과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침략군이 스코틀랜드의 백너번에서 격투를 하였는데 스코틀랜드 군이 잉글랜드 군을 물리친 큰 승리를 한 역사가 있다. 그런데 2014년이 그 승리한 날에 700주년이 되는 해가 된다. 그러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의회는 700년전의 승리의 날을 기념하기 위함이다.
1960년에 로이 윌리엄슨이 작사와 작곡을 한 스코틀랜드의 애국가가 있는데 이 애국가도 역시 700년전인 1314년에 스코틀랜드 백너번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군이 승리 한 그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애국가의 작사와 작곡을 했다.
1707년에 잉글랜드가 강제로 작성한 통합법에 의하여 <대브리튼 연합왕국>이 창설되여 흡수통합이 됬던 스코틀랜드가 흡수통합 된지 292년만에 민족주의 정신으로 페쇠됬던 옛날의 스코틀랜드의 의회를 다시 복귀했으며 그 복귀된 의회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위한 찬반 국민투표를 2014년에 실시할 것을 선포했다. 그럼으로 2014년에 실시할 국민투표는 1707년 부텨 307년만에 역사적인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위한 찬반 투표를 하게된 것이다.
스코틀랜드인들이 잉글랜드의 영국인들에 대하여 평가하는 말이 유명하다.
<잉글랜드의 영국인들은 겉으로는 정중하고 예의바른척 하지만, 속은 알 수 없는 치사하고 간교한 야비한 사람들이다>
어쨋던 2014년에 치려지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위한 찬반 국민투표에 대하여 분단된 코리아 반도의 우리들에게는 결코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4. 영국이 뻔뻔 스럽게 묶어 놓은 연방국가들미국의 독립전쟁 (1775-1783)에서 패배한 영국은 광대한 식민지 븍아메리카 대륙을 신생국 미국에게 몽땅 빼았기고 빈손으로 영국 섬나라로 돌아 갔다. 영국이 1600년대에 세운 “동인도 회사”도 페쇠됬으며 뿐만 아니라 100년동안 붙들고 있던 홍콩마저도 중국에게 돌려주고 말었다. 하지만 24시간 해가 지지 않는 과거 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은 이른바 <영연방>만은 끝까지 붙들고 있기를 원했다.
캐나다는 프랑스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영국의 연방제를 굳건히 맺고 있다. 뿐만 아니라 캐나다는 바로 옆애 있는 미국에 대한 일종의 경계심 때문에 캐나다는 역시 영국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캐나다는 영국과 연방관계를 굳건히 맺고 있는 것이다.
호주는 어떤 나라인가? 1877년 이래 계속하여 영국의 중범죄 죄수들을 호주로 유배시킨 역사에 의하여 창설된 나라가 호주이다. 그러기 때문에 영국과 호주는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 영국의 연방국이 되고 있다.
오늘 영국이 전 세계에 묶어 놓은 영연방국들은 약 50여개 국가들이 있다. 캐나다와 호주는 영국의 여왕을 같이 모시는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영국과 정치적으로 아무 구속이 없는 조건하에 친선과 우방의 관계를 맺고 있다.
아일랜드와 짐바브웨, 파키스탄등 여러 나라들이 영연방에서 정식 탈퇴 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계속될 전망이다.
그런데 영연방에 그대로 남아 있는 군소 국가들에게 무슨 이유가 있을가? 그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
ㄱ) 영연방제는 국제법 상으로 국가연합이 아니고 또 동군연합이 절대로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극히 자유로은 연방국들 사이에 우호협력의 관계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인도의 경우 영국 엘리자벧 여왕이 인도 방문을 원했는데 인도의 민중들은 엘리자벧 여왕의 방문을 절대로 반대한 예가 있다.
ㄴ) 영연방국 중에 어떤 나라들이 1600-1700년대의 식민통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그들의 조상들과 영국인의 조상들이 같은 혈통을 공유하고 있는 인연이 밝혀 졌다고 한다. 다순히 혈통 때문에 영연방에 묶여저 있는 경우도 있다고 본다.
ㄷ) 1930-40년대에 있서서 영국의 오랜 식민지에서 해방된 신생국들이 자동적 으로 영연방국이 되었다. 왜냐하면 <영어권>에 속하는 이득과 또 서구문화권에 속한다는 자부심으로 인하여 영연방에 속하는 것을 절대로 반대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경향도 있다고 본다.
ㄹ) 오랜 세월 동안 영국의 식민지하에서 기독교 서구문명에 완전히 세뇌된 피지배 국들이 제2차 세계대전후 냉전 시기에 들어서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무신론적 독재정권이라고 하는 선입견에 쉽게 순응하여 영국이 강요하는 영연방제를 반대하지 못하고 안주하고 있는 나라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의 영연방에 묶여 있는 약소 국가들을 언젠가는 영국이 헌신짝 버리듯 내던져 버릴 시기가 반드시 올 것이다.
1926년에 처음으로 영연방 이라는 개념을 공식화허여 영국은 그동안 영연방을 잘 이용했다. 그런데 오늘 영국은 영연방 보다는 <유럽연합, EU>이 영국의 사활을 거는 시대에 접어 들고 있다. 영국은 <유럽공도체>에서 보다 주요한 위치를 확보할 것을 원하고 있다. 그럼으로 영국은 영연방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있을 증표가 여기저기에서 보이고 있다.
이 글을 끝 맺으며,영국 역사의 일부인 아일랜드와 스코트랜드에 대하여 고찰하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도저히 견딜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나 보다 더 많은 아픔을 느끼면서 막대한 돈을 투자하여 영국의 비극적 역사를 파헤친 사람이 있는것을 알게되여 큰 위로가 됬다.
그 사람은 <브레이브 하트>라는 영화를 제작한 영화 감독 멜 깁슨 이다. 그가 제작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는 1299년에 스코트랜드의 자유해방을 위하여 잉글랜드군과 용감히 싸우는 전투에서 죽임을 당한 William Wallace에 대한 전설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를 통하여 영국의 죄상을 낱낱히 세상에 알리고 있다.
이 영화를 통하여 영국의 침략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해외에서 뿐만 아니라 영국 안에 예속되여 있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착취와 학살을 수 백년 동안 감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됫다.
스코틀랜드의 William Wallace가 죽으지 715년이 되는 2014년에 스코틀랜드는 영국으로 부터 독립을 하기위한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하게 된다.
영국의 기독교 왕정들이 브레이크 없이 마구 앞으로 질주하고 있는 위기에 대하여 stop을 크게 위친 사람이 영구의 칼 맑스 였다는 사실도 이 글을 쓰면서 새삼 알게 되었다. 1865년에 맑스는 영국이 아일랜드에서 저지르고 있는 추악한 죄상에 대하여 분노했다.
아일랜드 농민들이 악덕 지주들에 의하여 쫓겨나 영국으로 뫃여들게 되고 뫃여든 농민들은 저임금 노동자들이 되고 만다. 영국의 노동자들은 아일랜드에서 밀려 들어온 농민들을 증오했으며 인종적인 편견으로 그들을 학대한 역사를 알게 됬다.
영국은 종교개혁을 하여 영국성공회를 영국의 국교로 삼고 있는데 아일랜드 촌사람들은 캐톨릭교의 전통을 고지식하게 믿고 있으니 이것도 역시 큰 충돌이다.
맑스는 이와 같은 사실을 목격하면서 영국의 귀족게급을 타도하고 왕정과 교회가 무진장 소유하고 있는 자본들과 그들의 자본주의 제도를 전복시켜야 한다고 강 하게 느끼고 있었다. 끝.
//////////////////////////////////
*관련 보도자료 보기
한국 정부가 자칭 <자유민주주의>라고 선전하면서도 알권리를 차단해 왔습니다. 남측 당국은 한국에 거주하는 독자들이 이 보도 자료들을 볼수 없도록 인터네트 열람을 봉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민족통신>은 한국 독자들이 twitter 와 facebook을 통하여 이 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 주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www.facebook.com/kilnam.roh
혹은
www.twitter.com/#!/minjoktong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