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서거, '장준하 의문사'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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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죽음, ‘장준하 의문사’와 닮았다
노무현/김대중 대통령 서거 2009/05/28 14:28 정운현* 그런 와중에 '응급실 근무 의사'를 자칭하는 네티즌이 '자살 결론'은 성급하다며, 부검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나섰습니다. 현재상황에서 보면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와 닮은 점이 적지 않습니다. 수사당국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둘러싼 제반사항을 명쾌히 밝혀내 국민에게 알리고 이를 통해 이번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이 '의문사'라는 딱지가 붙어다니지 않도록 철저히 수사해야할 것입니다... 정운현
인터넷을 중심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배경에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타살설’을 주장하기도 하고, 더러는 ‘의문사’ 주장을 펴기도 한다.
이 모든 논란의 발단은 전적으로 두 곳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즉, 경호관 이 아무개씨의 거짓 진술과 경찰의 부실조사.
추후 이 문제에 대한 책임추궁이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 경호관은 며칠 새 여러 차례 진술을 번복했고, 심지어 허위진술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말로 알려진 “담배 있느냐”도 그의 ‘작문’이라고 한다.
곳곳의 분향소 제단에 담배가 쌓여 있는데, 이는 ‘그 한 마디’ 때문이다.
경찰은 부실조사를 인정하면서도 노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을 강변하고 있다.
그 근거로 노 전 대통령의 ‘유서’를 들고 있다.
그러나 법적 효력이 없는 ‘컴퓨터 유서’에 대해 이미 의문이 제기된 바 있다.
사고 직후 경호관의 응급처치나 (추락)사고자의 일반적 정황과 관련해서도 의문이 적지 않다.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 한 포천 약사봉 골짜기(출처-<장준하평전>)
한편 이번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보면서 필자에게 떠오르는 사건이 하나 있다.
광복군 출신으로,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맞서 싸우다 ‘의문사’로 서거한,
고 장준하 선생의 죽음과 그 양상이 너무도 닮아 있다는 점이다.
우선 장준하 선생의 ‘의문스런 죽음’과 그 내용을 살펴보자. (* 아래 내용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펴낸 <장준하평전>을 참고하여 재구성하였음을 밝힙니다)
1975년 8월 17일 오후, 폭염이 내려쬐는 휴가철 막바지 무렵이었다. 석간 <동아일보>는 이날짜 기사에서 “항일 독립투사이며 전 국회의원인 장준하씨가 17일 오후 2시반경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 3리 약사봉에 등산갔다가 하산길에 벼랑에서 실족, 추락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우연하게도 이날은 장준하 선생이 광복군의 OSS대원으로 일본군의 무장해제 등을 위해 이범석, 김준엽 등과 여의도 공항에 도착한 지 만 3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 무렵 장준하 선생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가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1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건강의 악화로 석방되었다. 두 달 동안 병원에서 신병치료를 받고 퇴원하여 건강은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였다. 그런 그가 경기도 포찬의 한 암벽산에서 하산하다가 실족하여 운명했다는 것이었다.
장 선생의 ‘의문사’는 다음날에야 언론 보도를 통해 사건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경찰은 이 사건을 ‘단순 실족사’로 발표하였는데, 사인에 의문점이 있어 검찰이 재조사에 나섰다. 당시 검찰이 장 선생의 사인에 의문이 있다고 본 점은 ① 추락사고 지점은 산이 너무 험해 젊은 등산가들도 마음대로 오르내리지 못하는 경사 75도, 높이 12m의 가파른 절벽인데 장 선생이 혼자서 아무런 장비 없이 내려 오려한 점 ② 사고현장 벼랑 위에 오를 때는 멀리 등산코스를 돌아 올라갔는데 내려올 때는 등산코스도 아닌 벼랑으로 내려오려 한 점 ③ 사고 직후 당시 같이 등산을 갔다가 현장을 목격한 김 아무개(당시 41, 중학강사)씨가 장 선생의 시계를 차고 있었던 점 등이었다.
<장준하평전>의 저자이자 사고 현장을 몇 차례 답사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높이 12미터, 75도 경사의 바위, 거기에 여름철의 장마로 바위는 물기에 젖어 있었다. 그런 곳에서 추락사했다는 데 (장 선생은) 외상이 거의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죽여서 실족사를 가장하여 현장에 옮겨놓았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유신귀신’이 설치던 시절이었다.”라고 쓴 바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2002년 9월에 작성한 ‘장준하관련 보고서’에서는 “귀 뒷부분에 위치한 후두부 부위의 함몰골절상, 손바닥 부위의 열상, 양쪽 겨드랑이 안쪽의 멍자국, 왼쪽 둔부의 쓸린 흔적을 제외하고는 다른 외상이 없어 외관상 추락사고로 보기에 깨끗한 편이었고, 장준하가 당시 착용한 의복에도 미끄러지거나 긁힌 흔적이 전혀 없었다...사체 주변에는 안경, 등산모자, 등산가방, 보온병 등이 놓여져 있었으나, 깨지기 쉬운 물건인 안경, 보온병이 깨지거나 위 물건에 긁힌 흔적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 현장에 동지, 후배들이 돌비석을 세운 후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출처-<장준하평전>
한편 김삼웅 전 관장은 평전에서 장 선생의 의문의 죽음을 두고 <‘실족사’로 볼 수 없는 10가지 의문점>을 제기했다. (* 참고로, 김 전 관장은 사고 현장을 수 차례 답사했고, 또 1993년 민주당에서 ‘장준하 선생 사인규명 조사위원회’ 위원들과 함께 현장조사를 벌인 적도 있다.)
첫째, 약사봉은 경사 75도, 높이 14m 70cm의 가파른 암벽산으로, 등산코스가 아닌 낭떠러지 지역을 아무런 등산장비도 하산코스로 잡은 점.
둘째, 14m 높이의 암벽에서 온몸이 크게 다쳤어야 하는데 전혀 외상이 없고, 다만 오른쪽 귀 뒤쪽에 약간의 함몰 부분만 발견된 점.
셋째, 당일 장 선생은 커피 보온병을 갖고 등산하였는데 시신 옆에서 발견된 보온병은 깨지지 않은 채 말짱하였으며, 입은 옷도 단 한군데도 찢겨진 곳이 없었다는 점.
넷째, 사고현장의 유일한 증인인 김 아무개씨가 67년 국회의원선거 때 장 선생 선거운동원으로 잠시 활동 후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사고 당일 갑작스레 모습을 나타난 점.
다섯째, 사회 저명인사의 ‘의문사’임에도 불구하고 사고 후 검찰이나 경찰이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을 대동하고 현장검증을 실시하지 않은 점.
여섯째, 장 선생 시신을 염을 한 사람은 10년 경력을 가진 그 방면의 전문가인데, 결코 추락사한 것이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는 점.
일곱째, 장 선생 시신을 검시한 의사(개업의)가 ‘결정적인 사인은 귀 뒤쪽의 후두부 함몰로 볼 수 있고, 추락사라는데 이상하게도 전신에 골절상이 하나도 없으며, 오른쪽 머리 귀 바로 뒷부분에 가로 2cm 세로 2cm 정도의 푹 꺼져 들어간 상처는 쇠나 돌에 의한 충돌로 생겨난 상처이기 쉽다’고 설명한 점.
여덟째, 목격자 김 아무개씨가 검찰조사에서 ‘장준하가 소나무를 잡았다가 놓쳐서 추락사했다’고 한 소나무는 높이가 4~5m 정도여서 장 선생이 설혹 잡았었더라도 밑등걸 부분일 터인데 그런 소나무가 결코 휘어질 수 없다는 점.
아홉째, 사고 당일 오후 1시 경 신원불명의 남자가 “장 선생이 산에 올라갔다가 떨어졌으니, 서울에서 사람들이 많이 와야 모셔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전화를 장 선생 아들에게 걸어온 점.(사고 연락을 받고 인근 군부대 위생병이 도착한 시각이 오후 5시반경임)
열 번째, 사고 직후 목격자 김 아무개씨가 언급한 ‘군인 2명’의 존재 여부에 대한 조사나 참고인 진술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점.
사고 발생 35년이 지난 지금도 장 선생 사고의 진상은 속시원히 밝혀진 것이 없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건을 두고 ‘의문사’라고 부른다. 아직 당시의 관계자들이 생존해 있는만큼 진상이 밝혀지려면 어쩌면 더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할지도 모른다.
위 내용들이 이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고'와 꼭 같은 것은 아니지만,
유사한 점이 여럿 있다고 보여진다. 몇 가지를 간추려보면,
높은 지점에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외상이 많지 않은 점,
목격자(동행인) 진술의 부정확성과 잦은 번복 사례,
또 제3의 목격자(증인)에 대한 신원 미확인 등을 들 수 있겠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현장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출처-오마이뉴스)
27일에는 ‘응급실 근무 의사’라고 자기를 소개한 한 네티즌이 다음 아고라 토론방에
'의사가 본 노통 추락 이후의 의문점들'이라는 글을 올려 화제가 되고 있다.
필자도 읽어보았는데, 글의 전개나 용어 등으로 봐 ‘의사’인 것은 확실해 보이며.
그는 사고 직후의 현장상황이나 사고자의 의료적 상황만을 한정해 언급하고 있다.
그의 주장의 요지는 충분한 조사결과가 없는 현재로선 '의문사'라고 결론짓고 있는데,
그의 글은 정치적 의도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의사의 '전문가적 견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주장 가운데 몇 군데를 발췌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노통이 부엉이바위에서 추락한 이후 산위에 있던 경호원은 20분만에 산을 내려와 쓰러져 있는 노통을 찾은 후 환자를 들쳐업고 인근의 세영병원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양산부산대병원장의 발표를 보면 ‘두정부의 11cm 정도의 열상이 관찰’되었으며 ‘두개골의 골절과 기뇌증이 확인되었는데 두부의 외상이 직접적인 사망원인으로 판단’된다고 한다. 간략하게 머리쪽은 해부학적으로 바깥쪽에서부터 시작해서 두피, 두개골, 경막, 지주막하 공간, 뇌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 의학적 관점에서 '두정부의 11cm 정도의 열상'과 '두개골의 골절 및 기뇌증이 확인되었다'는 것을 살펴보자. ‘두정부’는 머리의 정수리 부근을 의미한다. '열상'이란 피부가 찟어져서 생긴 상처를 의미하고 기뇌증이랑 두개골 안의 공간에 공기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어의 의미와 발표문에서 나온 환자의 상태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두부의 두정부 부위로 엄청난 외력이 작용하면서 두피를 파열시키고 두개골을 골절시킨다. 두개골 골절이 발생하면서 찟어진 피부를 통해 외부의 공기가 그 틈을 통해 두개골 안으로 들어간다.(기뇌증의 발생) 그런데 두개골 골절이 있다고 모두 기뇌증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기뇌증이 발생하려면 경막이 뚫려야 하고 경막이 뚫리면 지주막하공간이 손상을 받는다.(두개골 골절이 생기더라도 경막이 뚫리지 않으면 경막외출혈이 되고 이 경우 기뇌증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면 지주막하출혈이 발생하게 되는데 외상에 의한 두개골 골절이 동반된 지주막하출혈은 엄청난 양의 출혈을 야기한다. 영화에서 보셨을거다. 등장인물들이 땅에 떨어지거나 서로 싸우다가 땅에 머리 부딪힌 경우 땅에 쓰러진 등장인물의 머리 뒤로 서서히 피가 흘러나와 동심원이 커지는 모양으로 땅을 적시는 모습을...
결론은... 추락한 부위의 혈흔을 찾을 수 없다는 건 말이 안된다!! 또한 그런 상황에 처한 환자를 들쳐업고 뛰었다? 머리에 피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무의식적으로 지혈부터 하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뭐 물론 지혈을 하려고 노력해도 지혈은 잘 안된다. 저정도 출혈이면.. 양손으로 눌러막아도 지혈은 안된다. 어쨌거나 그 상황에 진짜로 일단 데리고 내려가자는 생각에 들쳐업고 뛰었다면 그 경호원은 온몸에 피칠갑을 했을거다.
- 밝혀야 할 문제점 1
노통이 추락한 지점을 찾아야 한다. 혈흔이 없을 수 없다.!! 혈흔이 없다면 그건 노통이 추락사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 밝혀야 할 문제점 2
당시 경호원이 착용했던 의복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 피칠갑된 의복의 상태를 보면 경호원이 어떤 방식으로 노통을 옮겼는지 알 수 있다. 경호원의 의복은 어디 있나? 설마 빨아버린 건 아니겠지??
- 밝혀야 할 문제점 3
의식 잃은 대통령을 들쳐업고 내려와 경호차량으로 세영병원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당시 경호차량은 어떤 차였고 탑승했던 사람은 전부 몇명이었나? 차량 내 좌석은 어떤 식으로 배정되었고 노통은 어떤 좌석에 어떤 자세로 태워졌나?
-> 차량탑승자에 대한 개별조사가 필요하다. 또한 차량 내부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다. 차량에서 분명히 혈흔과 함께 추락지점의 흙이나 나무조각, 풀 등이 나와야 한다. 현재 경찰은 목격사 조사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서둘러 자살로 결론후 내일 모레면 화장 일입니다.
28일 <매일경제>가 노무현 대통령의 '혈흔'이라며 보도한 사진
28일 <매일경제>가 '1차 낙하지점'이라며 보도한 사진
세영병원에서의 가상기록1
응급실로 노통 내원 -> 즉시 환자 상태 확인 및 당직의사 콜 -> 바이탈싸인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 상태였다면 바이탈 유지하면서 즉시 뇌CT 및 X-ray 촬영 시행 -> 뇌CT상 심한 두부손상 관찰되어 상급병원 전원 필요하나 환자 상태 점차 나빠짐 -> 심장기능 정지하여 즉시 심폐소생술 실시 -> 지속적인 심폐소생술 시행에도 환자 상태 호전 없음 -> 이후 환자는 세영병원에서 사망하거나 혹은 사망가능성 경고하고 상급병원 전원. 이송도중 사망가능성이 아주 높으나 세병병원에서는 더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음.
세영병원에서의 가상기록2
응급실로 노통 내원 -> 즉시 환자 상태 확인 및 당직의사 콜 -> 바이탈싸인 좋지 않아 즉시 심폐소생술 실시 -> 심폐소생술 시행에도 불구하고 심장기능 정지 상태를 유지 혹은 잠깐씩 심장박동 돌아왔다가 얼마 안가 심장기능 정지 상태로 회귀 -> 이후 환자는 세병병원에서 사망하거나 혹은 사망가능성 경고하고 상급병원 전원.
내 생각엔 '가상기록1'이 더 신빙성 있어 보인다. 이유는 노통이 입은 환자복 및 세영병원에서 시행한 X-ray 기록 때문이다. 언론보도를 보면 양산부산대병원 내원시 노통은 세영병원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한다. 응급실로 이송되어 온 그 상황에 환자 상태가 좋지 않다면 환자복으로 갈아입히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다. 또한 3차 진술에서 의사는 노통에게 두부외상 외에 척추 및 오른발목 골절 등이 있었다고 한다. 두부외상과 골절 여부를 알았다는 것은 CT와 X-ray를 촬영할만큼의 생체징후는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세영병원 의사는 인터뷰에서 심폐소생술을 시행했었고 호전기미가 보이지 않을만큼 상태가 위독했었므로 상황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결론>
1. 증거를 토대로 결론을 내리십시오. 사건의 중대성에 비해 도무지 증거가 없습니다!!!! 수사당국은 증거부터 수집하십시오. 길가에 떨어진 머리카락 하나까지 수집해야 합니다! 현재증거는 컴퓨터 파일 하나뿐입니다.
2. 노통의 시신은 부검해야 합니다. 전신의 상태에 관한 정확하고도 객관적인 자료가 필요합니다.
3. 사고현장감식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현장에 대한 증거 없이 자살로 결론내리면 안됩니다. 모든 증거를 총괄하여 자살이라는 결론이 도출되기 전까지 노통의 죽음은 의문사입니다.
4. 사건관련자들은 모두 다 재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유일한 목격자인 경호원의 진술이 번복되는 상황입니다.
5. 상기 2,3,4에서 나온 자료들을 토대로 사건 발생 당시의 상황을 시뮬레이션해야 합니다. 몇시에 어디서 어떤 자세로 어떤 바위들에 충격 후 추락했는지까지 모든 상황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6. 의혹을 제기하는 주체들이 납득할 수 있는 누군가가 수사 전체를 감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사를 맡은 경남지방경찰청은 유일한 목격자인 경호원의 진술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채 수사를 종결하려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인 전면 재조사와 화장 연기를 주장하는 28일자 <경향신문> 광고
한복차림을 한 노무현 대통령의 생전 모습
위에서 보듯 이 '의사'는 응급환자 대응조치 및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의문투성이며, '자살 결론'은 이르다는 겁니다.
따라서 화장을 하기 반드시 부검이 필요하다는 것이 의사인 그의 결론입니다.
그 이전에 사고현장 감식부터 각종 관계자료와 관계자 조사가 선행돼야한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이 ‘의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유족과 장례위원회에 정중히 권고합니다.
"장례식을 미루더라도 일단 부검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이 장례 일정의 차질로 빚어질 피해나 혼란보다 더 중요합니다.
장례식 이후 사인을 둘러싼 논란은 그야말로 고인을 두번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앗보다, 만에 하나 그간 제기된 의혹이 사실(‘타살’ 등)이라면,
이건 그 이후의 사태를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대한 사안입니다.
또 유족과 당국은 씻을 수 없는도덕적 책임마저 지게 될 것입니다.
내일 장례식을 강행할 경우 ‘물리적 저지’에 직면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정부도 불필요한 의혹을 사느니 차라리 부검에 나서는 좋을 것입니다.
유족측도 이런 상황을 깊이 인식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할 것입니다.
한 점의 의혹도 없이 하려면 제3국의 부검의를 초빙하는 것이 졿을 것입니다.
유족과 장례위원회의 신중한 검토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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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님의 댓글
선구자 작성일
자살이라고 알려지게되는 그 전반적 여건이나 과정에
적지않은 공통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중에 가장 큰 공통점은, 이들은 국민들이 깨어나 보다 주체적인
인식과 사고력을 제대로 가져야 한다는 점을 평소 강조하고 계몽하려
했다는 사실이겠습니다.
해방후 60여년의 한국역사에서, 이와같은 선구적 인물들은 거의
모두가 제 수명대로 살아오지를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