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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북기-5]월북한 미국인 드레즈나크씨 특별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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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슴도치
댓글 1건 조회 5,836회 작성일 12-12-23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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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북기-5]미국인 드레즈나크씨 특별대담

글쓴이 : 노길남특파원 날자 : 2012-12-20 (목) 21:26 조회 : 328 btn_singo2.gif btn_print.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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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곳으로 보내라   아들과 출연

 

[1]

셔만호 사건과  프에불로  사건과 함장  부커 가문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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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평양친선병원 내과 병동에 입원 중인 미국인 제임스 죠셉 드레즈나크 (James Joseph Dresnok. 71) 지난 9 평양친선병원 그의 병실에서 만나 대담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의 아들 테드씨(33)와도 함께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눴다.

 

드레즈나크씨는  50년전 그가 20 되던 해에 미군으로 근무하다가 북으로  넘어가 당시 미군 당국에서 파문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가난 때문에 미군에 입대했고, 미군에 입대한 이후 복무에 대해 회의를 느껴 1962 8 지뢰밭을 피해 3.8 철조망을 뚫고  들어가 북조선으로 망명한 미국인이다.

 

그는 필자가 몇년 만나 특별대담을 가질때의 모습에 비해 몸무게가 많이 줄었다. 그는 심장관계 때문에 단기치료차  4일째 입원 중이라고 말한다. 그의 장남인 테드씨가  마침 문병차 아버지를 방문하고 있었다.

 

우선 그의 근황을 묻자, 드레즈나크씨와 그의 아들들 테드씨, 그리고 둘째 아들 제임스씨(31) 3부자가 내년 봄께 나올 영화 제곳으로 보내라 영화에 모두 출연했다고 소개한다.

새로 나올 영화는 1968 프에불로 사건을 다룬 영화인데 내용은 1866 셰만호 사건과 연결하여 미국이 코리아반도를 침략한 이야기가 줄거리라고 이들은 말한다. 영화에서 프에블로 함장이었던 부커 가문을 반영한다.

 

부커 함장의 선조인 부커1세는 셔만호 만든 장본인으로 그는 미국 남북전쟁때 공을 세워 승리의 기념으로 셔먼호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커 1세는 셔먼호가 대동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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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님의 댓글

고슴도치 작성일

부커 함장의 선조인 부커1세는 ‘셔만호’를 만든 장본인으로 그는 미국 남북전쟁때 공을 세워 승리의 기념으로 셔먼호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커 1세는 셔먼호가 대동강에 들어갔을때 조선사람의 반격으로 조선인이 쏜 화살에 맞아 죽은 것으로  이 영화는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 부커1세의 가슴에 박힌 그 화살을 셔만호에 탄 흑인노예가 뽑아서 미국으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그 화살에 묻힌 피자욱을 미국의 한 대학(프린스턴 대학병원)에서 조사한 결과 부커1세로 판명되었다는 뒷 이야기도 설명해 준다.

 

드레즈나크씨의 장남 테드씨는 이 영화에서 미국 4성장군으로 등장하는데 그의 역할은 주로 프에블로호를 비롯한 미 군사작전을 직접 지시하는 전략가로서 활동하는 배우역이고, 그의 작은 아들 제임스씨는 미국방성 간부로 검열관 역을 맡아 연기했다고 소개한다.

 

드레즈나크씨는 “아마 이 영화가 나가면 국제사회에서 큰 파문을 불러 일으킬 것으로 본다”고 예상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주제는 주로 미제국주의자들이 다른 나라를 간섭하고 침략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북조선 인민들 뿐만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아 온 나라들에게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들 3부자는 우리 말을 잘한다. 아버지 드레즈나크씨는 우리말 발음이 선교사들처럼 하지만 어떤 어휘든 구사하는데는 지장이 없다. 그리고 그의 두 아들은 우리 말을 유창하게 한다. 특히 큰 아들 테드씨는 영어보다 우리 코리안 언어가 더 쉽다는 것이다. 오히려 영어가 서툴다고 고백한다.

 

둘째 아들 제임스씨는 평양외국어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였기 때문에 우리 말, 영어 두 언어를 무난히 구사한다.

 

큰 아들 테드씨는 결혼 대상자를 찾기에 힘들었다고 말한다. 중학교 동창생과 인연이 되어 결혼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중학교 시절에는 아는 정도였는데 중학교를 졸업하고 우연히 거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테드씨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버스를 기다리던 그 동창생을 발견하고 자전거 뒤에 그녀를 태우고 집으로 데려다 준것이 계기가 되어 연애로 연결되었는데 실제로 결혼문제가 대두되었을 때에는 여자 집안에서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아 당분간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테드씨의 아버지 드레즈나크씨가 자필로 우리말 편지를 써서 그 여성에게 보내 “내가 나이가 많은데 손자, 손녀를 보고 싶으니 내 아들과 결혼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문제를 국가에 호소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문제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까지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 당시 “김정일 장군님께서는 누구든 마음에 맞으면 결혼하면 되지 않겠는가. 능력대로 당사자들이 서로 결정하여 가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대답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드레즈나크씨는 며느리 될 사람의 동네 유지들에게 그러한 사연을 설명하면서 설득한 결과 장남을 결혼할 수 있게 했다고 회고한다.

 

둘째 아들 제임스씨 경우는 그의 직장의 간부인 실장의 중매로 결혼이 이뤄졌다고 말한다. 단지 둘째 며느리 될 여성이 결혼시기를 늦춰 달라고 요구하는 것 때문에 시간이 좀 걸렸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두 사람의 결혼을 양가 어른들이 합의하여 이뤄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두 아들의 결혼과정은  초기에는 간단치 않았으나 결혼 이후 이들의 가정생활은 아주 행복하다고 이들의 아버지 드레즈나크씨는 말한다. 큰 아들 테드씨는 1녀(3살), 1남(2살)의 아버지가 되었고, 둘째 아들 제임스씨는 2살짜리 딸을 낳아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드레즈나크씨의 세째인 막내 아들인 토니는 13살로 지금  중학교 1학년이다.

 

드레즈나크의 두 아들은 암으로 세상을 떠난 독일계 부인의 자식이고, 막내 토니는 둘째 부인(아프리카 외교관의 딸)의 자식인데 그의 둘째 부인도 이미 세상을 떠났다. 

 

북녘동포들 대부분은 드레즈나크씨(조선 영화계에서 홍철수라는 이름으로 등장)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그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평소 때 잘 알지 못하였으나 이들이 결혼할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께서 결혼선물상(예장을 포함하여 옷장, 침대, 소파, 냉장고, 테레비존, 녹화기, 부엌살림등 생활도구 등 일체)을 내려주어  북녘동포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막내 아들 토니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고한다.

 

기자는 잠시 휴식을 취하고 계속해서 드레즈나크씨가 북조선에서 지낸 50년과 그의 아들 테드씨가 생각하는 정체성 문제에 대해 질문해 보았다.(다음에 계속…)

 

[2]

 

기자는 드레스나크씨의 장남, 테드씨에게  그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하여 물었다.  그 때 그는 “나의 핏줄은 아버지 때문에 미국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체성은 조선사람”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평양에서 태어나서인지 우리말을 구사하는 능력이 완전했다. 말하는 것, 듣는것, 읽는 것 등 조선에 대한 이해는 100%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드레즈나크씨는  1941년 11월24일 미국 버지니아 노포크에서 태어나 고아로 자라나면서  미국에서 소학교만 졸업하고 가정이 파탄나는 바람에 산전수전 겪다가 20대 초반에 남한에서 미군에  복무하다가 월북하였기 때문에 우리 말 언어를 터득하는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하지만  6개월 정도 지나서 쉬운 말은 하기 시작했다. 그의 사고방식과 철학은 이미 조선사람이 되었다. 그는  읽는것, 쓰는 것은 완전하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조선말 발음이 좀 신통치 않다고 고백한다.

 

기자는 그에게 우리말에 대한 발전과정을 물었다.

 

그는 자신의 조선말 발전 과정에 대해 처음 10년간은 북조선에 온 미국인들 4명(62년 5월에 월북한 Larry Allen Abshier,  그 다음 8월에 나 자신, 62년 겨울에 Jerry Wayne Parish 등)이 한집에 살았기 때문에 영어를 주로 사용하다가 테레비죤, 방송, 신문 등이 주로 조선말이어서 답답하였다고 밝히면서  자신이 스스로 조선말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혼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씩 언어 소통이 가능했지만 완전하지 못했다.  “미국서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배우는 요령도 없었다”고 솔직하게 밝히면서 “우리 김일성 수령님 서거하신 시기, 그러니까 1994년 7월8일 이후부터 조선말을 제대로 구사하기 시작하여 영도자의 선집이나 노작들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위대한 김일성 수령님 선집과 노작은 아주 쉽게 묘사되었으나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의 노작들은 아주 수준이 높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어떻게 북조선으로 오게 되었는지 그 배경과 원인이 무척 궁금해서 물었다. 그는 어린시절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그 누구도 드레스나크  두형제(자신과 동생)를 돌보지 않아서 각기 혼자 독립적으로  살아야만 했다. 이 때문에 어린시기부터고아원 생활을 하면서 보냈다. 그리고 부자집 닭공장에서 5천마리 먹이를 주는 일과 잡일을 하며 숙식만 제공받으며 봉건시대 머슴처럼 지낸적도 있었다. 그는 그 굴레, 즉 구속과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던중 17살이 되어 생각해 낸 것이 고작 미군에 입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돌아보면서 그 때의 삶을 이야기 하자면 책 한권을 쓰고도 남을 사연들로 가득차 있다고 말한다. 

 

그는 미군에 입대하여 미국본토에서 1년, 독일에서 2년 근무하고  제대했다. 제대했지만 그를 맞이하는 고향에는 연고자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버지니아  리치몬드로 돌아갔다. 그 때 강을 잇는 다리공사장에 노동치는 일자리가 있어  일하다가 죽을 고비도 넘겼다.  일하던 중 몸을 다쳐 지속하기도 어려웠다. 몇달 되지 않아 미군에 재입대하는 것을 결심했다. 남한에서 근무하기로 하고 미군에 입대하여 근무처로 가기 위해 일본을 향했다. 요꼬하마까지 민간비행기를 타고 갔지만 그곳에서 남한의 부산까지는 배로 가야만 했다.

 

그는 배를 타고 가는 동안 갑판에서 입대한 미군들과의 대화가 있었다. 한편에서는 대학나온 미군들이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한 구룹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열띤 토론이 전개되어 관심을 갖고 옆에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려운 어휘들을 섞어 토론이 진행되었지만 소학교를 졸업한 나로서는 그 대화들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단 한가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사는 사람들은 빈부의 격차가 없고 ‘평등하다’는 이야기만은 이해할 수 있었고, 그 대목에 그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1962년 5월 남한 부산에 도착하여 곧바로 최전방 근무에 배치 받았다. 그는 최전방 중에서도 북조선 군대를 감시하기 위한 초소에서 근무했다. 하루 하루 일과에서 실망과 좌절만이 쌓여 온 , 드레즈나크씨는 3개월이 흐른 후 더 이상 미군에 근무하는 것 조차 짜증스럽기만 했다. 그래서 사회주의 나라 북조선으로 넘어가기로 결심하고 주변의 지형지물과 지뢰지역에 대한 사전 정보를 얻고, 그리고 3.8분계선을 넘어가는 길을 알아낸 다음에 1962년 8월에 월북을 단행했다. 분계선을 넘어 가는 동안 전방 미군 전망대의 스피커를 통해 “드레즈나크 병장, 돌아오라!, 드레즈나크씨 어서 돌아오라!”는 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반복하여 분계선 일대에 울려퍼졌다.  그러나 그는 분계선을 넘어 사회주의 땅으로 넘어오는데 성공했다.

 

그 때로부터 이제 50년이 돼 간다.  그의 조선에 대한 이해를 알고 싶어 물었다. 반세기 가량 이곳 북녘 땅에 살고 있는 미국인, 드레즈나크씨가 조선에 대하여 가장 인상 깊었던  세가지가 무엇일까? 

 

드레즈나크씨는 북조선의 가장 훌륭한 점들은 많다고 전재하고 첫째로 위대한 영도자라고 꼽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되 물었다. 이민위천 정치라고 대답한다. 다시 말하면 최고지도자의 정치철학은 인민을 하늘처럼 생각하는 풍모라는 것이다. 둘째로는 지도자와 군민이 주권을 생명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 주권을 수호하고 지키기 위해 선군정치가 훌륭하다고 꼽는다. 세째로는 영도자의 인덕정치를 꼽는다. 그 뜻이 무엇이냐고 되묻자, 그는 이 나라의 영도자는 인민의 이익을 첫 자리에 두고 정치를 한다고 말하고 요즘에는 김정은 원수님께서 인민생활을 위한 복지를 위해 그리고 문화적 정서 생활을 위해 기념비적 각종 시설들을 건설하여 어린이를 비롯하여 청년학생, 연로자 등 각계각층 인민들에게 혜택이 되는 사업들을 많이 건설하여 놓았다고 설명한다. 

 

기자는 잠시 휴식을 취하고 예민한 문제들을 포함하여 9가지 질문을 던졌다. (다음에 계속…)

 

[3]

 

[질문-1]미국인으로 살다가 20세에 북조선으로 망명하여 북조선의 공민이 되어 반세기 가까이 산 사람으로서 미국 당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  이에 대해 설명해 주기 바란다.


(답변)국제사회는  미국이 일제시대 이후 조선반도를 둘로 갈라 그 남쪽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식민지로 지배하여 온 것으로 말하는데 실제로는 세나도(Shenadoah) 사건을 포함하여 1866년  셔만호를 몰고 대동강까지 올라와 침략행위를 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니깐 그것까지 합치면 거의  150년 가량된다고 본다.  미군의 침략행위를 살펴보면 참으로 잔인하였다.  학살행위,  약탈,착취행위의 연속이었다. 코리아분단이후에도 미군은 북조선 뿐만 아니라 남조선 인민들에게도 가혹하였다. 미군 탱크로 남조선 여학생 두명(효선이 미선이)을 깔아 죽이고도 무죄가 되어 미군병사들이 재대로 재판도 받지 않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는가. 그리고 조-미회담이라고 여러차례 하였지만 미군당국이 얼마나 허위와 날조로 회담을 파탄시켜 왔는가를 생각하면 미군당국의 처사는 올바르지 못했다. 6자회담도 있었지만 미국 당국의 입장이 얼마나 부당하였는가를 알 수 있었다. 미국 당국의 대북정책은 한마디로 기만정책이었다.

 

[질문-2]그러면 북조선의 대미정책에 대한 의견은 어떠한가?

 

(답변)내가 보기에는 조선은 미국과 진정으로 관계정상화를 원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은 외교를 구걸하지 않는다. 주권대 주권국으로서 평등외교를 바라는 것이 조선의 외교노선이다. 알다시피 자주, 평화, 친선 3대원칙이 조선의 국제관계 방침이다. 이러한 노선은 미국 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등 국제사회 모든 나라들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이 노선은 확고하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이 조선의 내정간섭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질문-3]미국을 비롯한 일부 서방나라들은 북조선을 향해 ‘개혁-개방’을 요구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변)이 문제는 우선 내정간섭이다. 다른 나라가 어떤 노선을 택하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나라의 자체 문제(Internal  Affairs)이지 다른 나라가 이래라 저래라 말할 권리가 없다.  ‘개혁,개방’을 요구하는 미국의 의도는 사실상 불순하다.  잡아 먹겠다는 것, 다시말하면 망하게 하자는  음모가 깔려있다.

 

[질문-4]미국과 서방 일부 나라들, 그리고  남한이  북조선을 향해 ‘인권’을 말하는데 이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변)이것도 내정간섭에 해당된다. 미국은 툭하면 중국이다, 북조선이다, 그리고 다른나라들을 향하여 인권을 말하는데 이건 주제넘는 행위이다. 개인이 제멋대로 하게 하는 사회가 인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도둑질하고, 마약하고, 강간하고, 개인 멋대로 하게 하는 사회가 인권이 있다고 하는 건 말이 안된다. 그리고 미국이 조선을 향해 감옥소 문제 운운하는데 이것도 말이 안된다. 미국이나 어느 나라나 감옥이 있다. 죄수가 가장 많은 나라가 미국인데 어떻게 조선에게 감옥을 말할 수 있나?  인권의 본질은 자주성을 실현하는가 아닌가에 그 기준이 있는데 조선은 자주성 실현의 가장 모범국가이다. 그리고 주권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회인데 이런 나라에게 인권문제를 운운하는 건 정말로 웃기는 행위이다. 남조선은 군사주권, 경제주권도 없는 사회인데 이런 나라의 구성원들이야 말로 인권이 없다. 국가보안법이란 말도 안되는 법이 그게 인권있는 사회인가.  인권이란 문제를 거론하는건 지극히 정치적 압박 수단으로 나오는 선전에 불과하다.

 

[질문-5]미국과 서방 일부나라들이 북조선을 가리켜 독재국가라고 말하고 지도자 문제를 세습제라고 비난한다. 이 점에 대한 의견은 어떠한가?

(답변)내가 알기로는 사회주의 단계에서 프로레타리아 독재란 말이 있다. 이때의 독재란 의미는 인민을 위한 독재라는 뜻이다. 인민의 이익을 위해 정치하는 형태인데 이것을 미국이 말하는 독재의 개념과는 다르다. 그리고 세습제라고 비방하는데 조선의 영도자 계승문제는 혁명의 승계자이지 왕조시대의 세습과는 그 본질과 내용이 전혀 다르다.  이런 문제들은 미국의 조선에 대한 비방중상에서 나오는 생트집에 불과하다.

 

[질문-6]내가 알기로는 미국서 소학교만 나온줄 알고 있는데 북조선에 온 이후 어떤 일을 해 왔는가? 그리고 국제정세나 역사에 대한 지식들은 어떻게 터득하였는지 궁금하다.

(대답)솔직히 말해 나는 학벌이 소학교 밖에 없다. 그러나 조선에서 살면서 정치적 교양, 계급적 교양을 많이 받아 왔다. 그리고 그 동안 주석님, 장군님(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가리킴), 원수님(김정은 제1위원장을 의미)의 노작, 선집, 논문 등을 많이 배웠다. 그러면서 조선의 영도자들의 인덕정치, 선군정치, 인민사랑에 대하여 생활을 통해, 출판물을 통하여 많이 체험했다. 사실은 로동신문만 제대로 숙독하여도 그 진실을 알 수 있다. 조선인민들의 지적 수준은 미국 국민들의 지적 수준에 비하여 월등하게 앞서 있다. 

 

[질문-7]이번에는 가정적인 생활문제를 묻고 싶다. 누구와 함께 사는지? 그리고 자녀들과 손자와의 상호 교류는 어떻게 하시는지도 궁금하다. 

(답)나는 큰 아들 테드 집에서 며느리, 손자(홍보검-2살), 손녀(홍보답-3살)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손자 이름과 손녀 이름은 내가 지어주었다. 보검이란 이름을 지을때는 영도자를 잘 보필하고 결사옹위하라는 뜻으로 지었고, ‘보답’이란 이름의 뜻은 장군님의 은혜와 배려를 잊지 말고 보답하라는 뜻으로 내가 이름을 지었다. 우리는 매 식사때 마다 테드, 큰 며느리, 보검이 보답이 넷이 함께 식사를 하며 오손도손하게  시간을 지낸다. 내 큰 며느리는 요리사는 아니지만 요리사 이상으로 음식을 잘한다. 그리고 아이들 교육은 아주 엄하게 다룬다. 그렇지만 보답이와 보검이 는 할아버지와  아주 가까운 동무가 된다. 손자,손녀는 나를 아주 좋아하고 나도 애들을 아주 사랑한다. 작은 아들 제임스는 옆 아파트에 살기 때문에 자주 본다. 작은 며느리는 로동당 당원이고 머리가 똑똑하다. 작은 며느리는 명절 같은 때 나에게 장갑도 뜨개질하여 만들어 주고, 웃도리도 손수 만들어 준다. 내 아들 둘다 장가를 잘가 기쁘다. 그리고 손자, 손녀와 지내는 시간도 무척 행복하다.

 

[질문-8] 선생이 음악으로 말하면 이제 71세가 되었는데 인생의 4악장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인생에 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말해주면 좋겠다.

(답변)나의 인생은 한마디로 산전수전을 겪는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은 생애에 나의 인생행로를 책으로 만들고 싶다. 그러나 조선말 구사력이좀  능숙하지 못해 방조자가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의 생을 (1)미국에서의 머슴생활, (2)월북해서 살아온 반세기 생애를 총화, (3)새삶을 갖게된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하여 쓰고 싶다. 왜냐하면 지구촌 서방나라들은 조선을 너무 모른다. 그래서 조선을 올바르게 알리는 내용을 담고 싶다.  그래야 조선의 영도자, 내 자식들, 손자손녀들에게 내가 겪은 인생체험담을 선물로 남기고 싶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소망이다.

 

[질문-9]귀중한 시간을 내주어 고맙다. 마지막으로 조선에서 반세기를 산 사람으로 아쉬운점도 듣고 싶다.

(답변)여기도 사람사는 사회인데 왜 아쉬운 점들이 없겠는가. 지구상에서 가장 고생해 온 사람들이라면 조선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조선 혼자서 미국과 같은 큰나라와 그의 동맹들과 맞서 60여년 대결하여 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 고난의 행군은 값진 삶의 역사로 생각한다. 조선은 역사적으로 큰 나라에 침략을 받아 왔지만 주체사회주의가 건설된 이후에는 그 어떤 강대국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군사강국을 이뤘다. 그 배경에는 영도자들의 지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지도력은 사상체계, 영도체계에 비롯된다. 다시 말하면 주체사상과 주체철학에 의해 이룩된 일심단결은 이 세상 그 어느나라도 흉내내지 못한다. 지난 해 12월17일 대국상을 당하여 조선 땅이  눈물바다가 되었지만 주체사회주의 나라 조선의 앞날은 창창하다. 왜냐하면 주석님과 장군님과 똑같으신 영도자 김정은 원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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