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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지하는 1991년 이미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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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중
댓글 1건 조회 9,036회 작성일 12-12-1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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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13일 오후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토지문화관에서 김지하 시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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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아끼던 이의 사망진단서를 쓰는 기분으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 초기 정신사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던 '선배 김지하'는 진작 죽었습니다. 이제는 '시인 김지하'에게도 사망을 선고할 때입니다."

시인 김지하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지지했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1991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부의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 민족민주운동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정세연구>를 통해 김지하 시인에게 보낸 공개서한의 일부입니다. 

저는 1977년 유신시대 대학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하면서 두 차례 옥고를 치르고, 몇 년간 수배생활을 하면서 세 딸의 아버지가 됐습니다. 저에게 김지하는 민주화운동의 '선배'이자 '시인'이었습니다. <오적>,<황토> 등을 통해 독재세력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서슴없이 내리치던 '김지하'는 민주화운동의 또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유신시대 대표적 저항시인이었던 김지하. 그는 5공화국 출범과 함께 석방됐습니다. 유학성 등 당시 신군부 내의 가톨릭계 실세들과 모종의 묵계가 있었다는 소문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풀려난 저항시인 김지하는 광주학살과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외면했습니다. 단 한 번도 광주학살자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한 적이 없었습니다. 종철이가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또 한열이가 최루탄에 살해된 후 온 국민이 '독재타도'를 외치던 때에도 그는 없었습니다. 

강경대 치사사건 그리고 김지하의 생명사상

1991년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학원민주화 시위 도중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를 '5월 투쟁'이라고 부르는 격렬한 시위를 촉발했습니다. 11명이 분신과 투신, 의문사 사건이 발생했고 성균관대 김귀정양이 경찰의 시위진압과정에서 압사 당했습니다. 민주화의 동토였던 시기였습니다. 

김지하가 다시 얼굴을 드러낸 시기도 1990년경이었습니다. 룸살롱, 퇴폐이발소 등을 전전하며 성매매를 하다가 술집 여자를 두 번씩 임신시킨 뒤 낙태한 사실을 고백하며 '생명사상', '생명운동'을 들고 나왔습니다.

김지하는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군 사망정국 때인 5월 5일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 환상을 갖고 누굴 선동하려 하나'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젊은 벗들을 향해 '시체선호증', '싹쓸이 충동', '자살특공대', '테러리즘과 파시즘의 시작' 등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으며 "당신들의 운동은 끝났다"고 선언했습니다.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글을 발표한 삼일 후인 5월 8일 서강대 건물 옥상에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총무부장이었던 김기설씨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했습니다. 당시 서강대 박 홍 총장은 성경에 손을 얹고 "죽음을 부추기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경원대 윤형근 당시 총장은 자신의 제자였던 고 천세용 학생에 대해 "제비뽑기로 분신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검찰은 신속하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습니다. 잇따른 분신의 배후 수사를 착수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쿠데타 세력의 희생물이 됐습니다. 

첫 번째 희생양은 한국판 뒤레프스 사건이라 불리는'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입니다. 검찰은 김기설씨의 동료인 강기훈 당시 전민련 총무부장이 유서를 대신 써줘 자살을 방조했다며 기소했고 대법원은 유죄 확정판결을 내렸습니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강기훈씨가 유서대필을 하지 않았다며 진실규명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20일 대법원에서 재심 첫 재판이 열립니다. 

"시인께서 깃발을 올린 후 그 뒤를 이어 죽은 이들마저 관 속에서 꺼내어 다시 한 번 죽이는 이러한 광기의 행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 본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발뺌하겠습니까? 시인께서는 돌아가신 분들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으며, 적어도 윤용하 동지의 죽음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기까지 했다는 점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1991년 공개서한 중에서)"

"김지하의 침묵은 우리사회 안정과 변화에 필수적"

김지하는 정보부, 안기부에서 주던 명절 떡값을 늘 받아 챙겼고, 4·19혁명의 날 시위 현장이 아닌 자취방 이삿짐을 날랐습니다. 감옥에 갈 때마다 반성문을 썼고, 1980년대 말 부동산 투기로 일산의 57평대 아파트를 구입했던 재테크의 달인이었습니다. 투기 논란이 일자 부인 탓으로 책임을 돌기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다시 유신독재의 안주인인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박근혜 후보는 "진솔한 말씀에 감동을 느낀다"고 화답했고, 지난 13일 강원도 원주시 선거 유세 중 박경리문학관에서 김지하를 만났습니다. 

"김지하 시인의 뜻을 받들어 100% 국민대통합과 국민행복시대를 열겠습니다."

제가 1991년 <정세연구>를 통해 김지하 시인에게 보낸 공개서한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다시 한 번 "김지하 시인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라고 묻고자 합니다. 그리고 간곡히 요청합니다. 박정희 유신독재와 전두환-노태우 독재정권 시절의 청산하지 못한 현실은 우리의 미래를 발목잡지 마시길 바랍니다. 

"인간 김영일로 다시 태어나십시오. 그리고 다시 시작하십시오. 무엇보다 윤영하, 김기설 동지를 비롯해 돌아가신 분들의 묘소부터 참배해 용서를 빌도록 권하고 싶습니다. 만약 그럴 자신이 없다면 부디 침묵하십시오. 그것이 최선입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시인께서 침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안정과 변화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부디 자중자애하십시오.(1991년 공개서한 중에서)"

덧붙이는 글 | 민주통합당 유기홍 의원(서울 관악 갑)은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1983년 초대 의장을 맡았던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에서 민청련 사무국장, 정책실장을 역임했다. 민청련 의장, 전국연합 정책위원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초대 사무처장 등 재야민주화운동을 지켰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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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팔매님의 댓글

돌팔매 작성일

시를 쓸 수 있는 사람들은 대개 심성이 여리고 고운 경향이 있어
마구 족치면 굴복을 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반대로, 죽음을 불사하는
경우를 내보이기도 한다. 김지하는 전자의 경우에 속한다 하겠다.

이 싯점 김지하의 행태가 문제가 된다는 점을 인식할 수만 있으면 되겠다.
삶에 대한 그의 개인적 선택을 무작정 나무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광경에 무작정 돌을 들어 김지하에게 자신있게 던질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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