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북기-8]’태권도 성지중심’ 현지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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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 작성일
그런데 이 건물 바로 위에 ‘태권도 성지중심’이라는 거대한 3층건물이 김일성 주석 탄신 100주년을 맞아 금년 4월20일에 세워져 세계태권도계 뿐만 아니라 세계 체육계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 건물은 태권도를 포함하여 이와 관련된 우리 민족 무술역사를 집대성하여 놓았다.
기자를 안내해 준 박성호 대외사업국 간부와 류선화 안내 강사는 새로 지은 ‘태권도 성지중심’에 대해 건축면적 6,500 평방메터,연건축면적 12,000 평방메터인데 이를 짓는데 총 투자액은 조선돈으로 3억6천39만원이었다고 설명하면서 “이 건물안에 있는 역사관은 1,700평방메터, 과학연구소가 890 평방메터, 다기능홀이 945평방메터, 훈련식부분이 1,300평방메터, 태권도 지식보급실이 425평방메터이며 도서실에는 도서실에 는 관련 영상물과 노작들이 25만여편 정도 비치되어있다”고 밝힌다.
이 건물 전시관에는 민족무술 사료와 관련된 그림들과 함께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 그리고 김정은 제1위원장의 교시들이 부착되어 있다.
김일성 주석은 “태권도는 조선민족의 억센 기상과 넋이 깃들어 있는 고유한 운동입니다”라고 지적하는 한편 “고구려 사람들은…. 무술을 배우는 것을 남자들의 의무로 여기고 어려서부터 달리기와 발라기, 활쏘기와 칼쓰기를 배웠으며 민간오락과 경기들도 모두 무술을 기본으로 하였습니다”라고 언급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태권도의 뿌리 택견은 평양에서 나온 것입니다”라고 지적한 글발을 포함하여 김정은 제1위원장은 “태권도는 우리나라가 응당 세계적으로 제일 앞서 나가야 합니다”라고 강조한 글발들이 전시관에 부착되어 있다.
전시관에는 또 국제경기 성과들(트로피, 상패)을 포함하여 이름 날린 선수들 사진들과 이름들이 전시되어 있고, 김일성 주석과 태권도 관련 일화들과 추억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태권도 관련 사진들, 평양 날파람-역사적 사료들 전시관, 가야, 백제, 신라 등 무술 발전사와 그림들, 천년강국 고구려 무술자료, 민족무술의 시조-단군과의 관련 자료 및 그림들, 최홍희 선생의 애국열사릉 묘지 사진과 그의 부인 한춘희 여사의 모습 등도 보인다.
태권도 관련 사진들 가운데에는 특히 카나다 동포이며 남녘사회에서 태권도를 위해 한 생을 바쳐온 체육인 최홍희 선생과 북녘의 영도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고, 그가 지은 태권도 백과사전들도 전시관에 비치되어 있다.
[사진]김일성 주석과 최홍희 선생,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최홍희 선생이 함께 기념촬영한 사진들
*최홍희 선생의 업적과 그의 생애
최홍희 선생은 1918년 11월 9일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나 2002년 6월 15일 평양을 방문 중 운명하여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그는 국제 태권도 연맹의 태권도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한생은 파란만장으로 점철되었다. 항일 투쟁하며 일본 주오 대학 법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4년 1월에 징용되어 평양의 42부대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조선 학병을 중심으로 전국 반일동맹 조직을 도모했다가 검거되어 6년형을 선고받아 평양 형무소에서 수감되었고 해방과 함께 풀려났다. 해방 후1955년 남녘에서 청도관의 손덕성 관장 명의로 명예 4단증을 받았고, 1955년부터 3군관구 사령관으로, 1960년부터 제2훈련소장, 1961년부터 6 군단장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에 예편했다. 1962년 4월 말레이시아 한국대사로 발령받았고, 1966년 3월 22일 에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립하고 총재로 취임하였다.
그 이후 그는1972년 3월 캐나다로 망명한 후 유신체제 반대 운동을 펼쳤고 북조선을 몇 차례 방문했고, 2002년 6월 15일 평양방문 중 사망하여 ‘혁명열사릉’에 안장됐다. 북부조국에서 만든 다부작 영화 《민족과 운명》제6부~제9부는 최홍희 선생의 삶을 다루고 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