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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3-5. 필리핀, 《피플파워》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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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6,287회 작성일 23-01-07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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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피플파워》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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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고 류태영 박사


필리핀의 간추린 력사

 

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한 필리핀땅에는 현재 42개의 종족이 있는데 그중 말라이계와 인도네시아계의 필리핀인이 90%를 차지한다. 그외에 에스빠냐인과의 혼혈인, 모로족 등 기타 소수종족들이 살고있다. 이러한 여러 종족들에 의하여 원시공동체사회, 노예사회, 봉건사회 등 여러 사회발전단계들을 거친 필리핀은 16세기에 이르러 에스빠냐식민주의자들의 침략을 받게 되였다.

A.D. 1521년에 에스빠냐정복자들이 처음 필리핀에 들어왔을 때 필리핀주민들은 에스빠냐침략자들과 싸워 국토를 방위하였다.

하지만 에스빠냐침략자들은 집요하게 침략을 시도하여 결국 1565년-1571년에 루손섬을 비롯한 필리핀의 기본지역을 완전히 정복하고 300년이상이나 통치하였다.

그후 1898년에 미국은 에스빠냐와 전쟁을 하여 필리핀에 대한 식민지통치권을 획득하였으며 오래동안 필리핀을 지배해오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1년후인 1946년 7월 4일에 독립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필리핀은 미국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때로부터 미국은 필리핀을 동남아시아지역에서의 반공의 보루로 삼고 이 나라에 대한 지배와 간섭을 계속해왔다.

 

타프트-가쯔라밀약에 얽힌 조선과 필리핀

 

타프트-가쯔라밀약이란 무엇인가?

이 밀약은 미국과 일본이 1905년 7월 29일에 맺은 비밀협정으로서 그 내용은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고 일본은 조선반도를 점령하여 식민지화하는것을 서로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는다는것이였다. 당시 미국대통령이였던 루즈벨트는 미륙군장관 타프트를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수상 가쯔라와 이 조약을 체결하도록 하였다.

결국 타프트-가쯔라밀약은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침략행위를 시인해주는 대가로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하려는 일본을 미국이 협조하고 조선에 대한 식민지통치를 보장해준다는 비밀조약이였다.

일본은 미국의 시인하에서 마음놓고 조선정부에 강박하여 《을사5조약》을 날조하였으며 1910년에 비극적인 《한일합병》을 조작하였다.

한편 미국은 에스빠냐를 밀어내고 필리핀을 통치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여 떠난 후에도 필리핀에 대한 지배를 계속하였다.

필리핀민중이 이에 항거해나서자 미국은 야만적인 진압작전으로 탄압해나섰다.

그러면서 미국은 《필리핀인들은 아직도 개명되지 못하였다. 이들을 개화시키고 공산화를 막기 위하여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별도리가 없어 강제탄압을 할수밖에 없다.》고 력설하였다.

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변명인가?

사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방금 끝나자마자 랭전체제를 형성해놓고 아시아 전지역을 지배하는 작전계획을 벌써 필리핀과 조선반도에서 시작하고있었던것이다.

1946년 7월 필리핀이 독립을 이룩한 이후에도 미국은 경제협정, 군사원조협정, 호상방위조약 등 일련의 예속적인 불평등협정을 강요하였다. 미국이 필리핀에 강요한 군사기지사용조약만을 보더라도 그 조약은 심각한 군사기지환경오염문제에 대한 조항이 전혀 들어있지 않는 불공정한것이였다.

필리핀민중이 환경오염에 관한 보상을 요구하면서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미국은 군사, 무역, 투자지원 등을 핑게삼아 모든 요구를 묵살하였다.

미국의 이러한 횡포한 행동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필리핀정부의 한심한 태도는 더욱더 미국이 철면피하게 행동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한국정부》가 미군기지환경오염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실패한 이전 필리핀정부의 전철을 따르고있으니 더욱 한심하다.

타프트-가쯔라비밀조약이 체결되였던 때로부터 100여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하지만 오늘도 미국과 일본 두 나라는 서로 공모결탁하여 조선반도의 평화통일을 방해하고있다. 그런데 리명박은 이를 론증하는 산 증거가 나타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친미친일외교에만 매달리고있다.

 

이라크에서 김선일의 피살과 필리핀인 크루즈의 구출

 

2004년 5월 이라크에서는 미국군수회사의 하청업체의 직원으로 일하던 김선일이라는 사람이 반미무장단에 의하여 랍치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김선일은 그로부터 얼마후 비참하게 살해되였다.

그런데 사람들의 경악을 더욱 자아내게 한것은 미국이 저들의 리해관계를 위해 의도적으로 랍치문제를 숨기도록 함으로써 그를 죽음에로 떠밀었다는것이다.

당시 김선일이 속해있던 업체의 사장은 그가 랍치된 사실을 미군당국을 통해서 알았으나 미군당국의 요구에 따라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미국이 어째서 김선일이 랍치된 사실이 알려지는것을 막았는가 하는것이다.

여기에는 미국이 노린 정치적목적이 있었다.

이 시기 서울-워싱톤정가에서는 《한국》군의 이라크추가파병을 위한 교섭이 한창 진행되고있었다.

미국은 만일 이러한 때 김선일이 랍치된 사실이 알려진다면 《한국》사회가 시끄러워질것이고 이것은 나아가서 《한국》군의 이라크추가파병을 위한 교섭에 장애로 될수도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은 우선 김선일이 랍치된 사실을 비밀로 처리해놓고 이라크와 《한국》을 분주히 오가면서 《한국》군의 추가파병을 공식발표하였다.

이렇게 되자 김선일을 랍치한 반미무장단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김선일을 살해하였던것이다.

그런데 이라크에서 랍치되였던 필리핀인 크루즈의 경우는 김선일의 경우와 너무나 대조되는것이였다.

2004년 7월 7일에 이라크의 반미무장단은 필리핀인 크루즈를 랍치하고 이라크에 주둔하고있던 필리핀군대를 사흘안으로 완전히 철군시킬것을 요구하였다.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된 필리핀민중들은 즉각 필리핀정부에 이라크에 파병된 필리핀군을 곧 철수시켜 랍치된 크루즈를 구출할데 대한 요구를 제기하였다. 필리핀의 《피플파워》는 마르코스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력사를 가지고있었다.

필리핀정부는 《피플파워》가 제기하는 요구를 다 수용하여 즉각 행동으로 실천하기로 하였다. 정부는 우선 민중을 안심시켰고 가족 식구들에게도 굳게 약속하였다. 그런 다음 파병된 필리핀군을 이라크에서 철수하기로 결단을 내리였으며 이를 이라크무장단에 공식통고하고 필리핀언론을 통하여 전세계에 발표하였다.

결국 랍치되였던 크루즈는 2004년 7월 하순에 귀국하여 마닐라에서 열광적인 민중의 환영을 받았으며 안해와 아들딸이 눈물로 기다리고있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필리핀국민은 정부와 대통령의 용단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한편 미국은 필리핀군대의 철수와 크루즈석방을 두고 비인도주의적이며 패권주의적본성을 그대로 드러내였다.

미국은 필리핀주재 미국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하고 필리핀정부에 대한 적대감을 로골적으로 표시하였으며 당시 미국무장관이였던 포웰은 한사람을 위하여 너무 비싼 대가를 지불한것은 잘못이라고 력설하였다.

또한 미국은 필리핀이 무장단체에 잘못된 신호를 주어 랍치에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였다느니, 필리핀에 대하여 매우 실망한다느니, 테로범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한국》의 용단을 필리핀은 모범으로 배워야 한다느니, 앞으로 필리핀을 주시해야겠다느니 하면서 비난과 위협공갈을 하기도 하였다.

미국의 이와 같은 억지주장은 《한국정부》의 저자세외교에 대한 승리감을 여지없이 드러내보인 반면에 미국을 무조건 따르던 필리핀이 이제는 《피플파워》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였다는것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미국은 변화된 필리핀민중들에 대하여 불안을 금치 못하고있다.

친미반공주의자 막사이사이 필리핀은 1946년에 형식상독립을 한 후에도 미국의 강력한 영향밑에 놓여있었다. 미국은 필리핀과 군사기지협정, 호상방위조약 그리고 군사원조협정 등 여러 조약을 맺어 필리핀을 미국의 방위체제안에 묶어놓고 꼼짝달싹도 못하게 만들어놓았다.

그러면서 미국은 필리핀의 정치체제를 미국의 헌법을 그대로 모방하여 보수량당체제로 되도록 하였다.

1946년에 아누엘 로하스가 필리핀제2공화국의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1948년에 카리노가 제2대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 당시 필리핀에는 일본군과 싸웠던 항일게릴라조직을 모체로 하고있는 후크단게릴라가 반외세투쟁을 전개하면서 사회주의로선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친미예속적인 카리노대통령의 퇴진을 웨치고있었다.

카리노대통령밑에서 6년동안 국방상을 지낸 막사이사이는 카리노 대통령을 밀어내고 1953년에 제3대대통령으로 취임하였는데 그는 필리핀에서뿐만아니라 아시아전역에서 유명한 반공, 친미주의자로서 필리핀의 사회주의게릴라들을 진압하는데서 주되는 역할을 놀았다.

그때 필리핀이 독립을 쟁취하였다고 떠드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미예속과 미국의 원조에 만족해하는 친미와 친일세력들이였으며 이런 세력들은 필리핀에서 외세를 위해 대리통치자의 역할을 하고있을뿐이였다.

막사이사이는 바로 이러한 대리통치자들의 우두머리로서 무자비한 폭정으로 사회주의게릴라들과 무고한 민중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막사이사이가 미국에 얼마나 요긴한 인물이였던가 하는것은 그가 죽은지 한달뒤 미국의 록펠러재단이 필리핀정부에 서신까지 보내여 그의 치적을 찬양한것만 보아도 가히 짐작할수 있다.

 

독재자 마르코스의 운명

 

막사이사이대통령이 죽은 후에 부대통령이던 가르시아가 제4대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임기를 채웠고 1961년-1965년에 제5대대통령으로 마카파갈이 집권하였다. 우의 두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전임 막사이사이가 닦아놓은 친미의존일변도의 정치적로선을 그대로 따랐다.

이러한 속에 필리핀민중의 불만과 항의는 점차 높아졌고 민중은 친미의존을 끝내고 자주적이며 자립적인 정권을 요구하였다. 마카파갈정권은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민중의 투쟁은 드디여 친미의존적이며 무능한 정권을 무너뜨리였다.

이때 기회주의적정치의 명수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필리핀민중의 소요와 전임대통령의 친미의존일변도정책의 약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1965년에 필리핀의 제6대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마르코스는 집권초기에 친미일변도적인 외교정책에서 벗어나 외교정책의 다변화를 추구하고 일부 사회개혁들을 실시하는듯 하여 국민들의 환심을 얻음으로써 1969년에 재선되여 제7대대통령으로 재집권에 또 성공하였다.

하지만 마르코스는 1976년에 《새로운 사회건설》이라는 미명하에 대통령에게 모든 권한을 집중시키고 대통령이 군부의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였으며 국무총리직까지 겸임하고 처 이멜다를 마닐라 시장으로 임명하였으며 아들을 대통령보좌관으로 내세우는 등 족벌독재체제까지 구축하였다.

결국 그가 집권초기에 민중에게 약속하였던 시민위주의 정치풍토와 미국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는 정치로선은 거짓에 불과한것으로서 순진한 민중들의 신뢰와 지지에 대한 배신행위였다.

이러한 마르코스가 20여년간이나 집권할수 있은것은 정권을 친미의존정도가 아니라 아예 친미예속정권으로 전락시킨데 있었다.

사실 필리핀에 정부는 형식상 존재하고있었을뿐 이 나라에 주둔하고있는 미군사령부가 필리핀정권을 직접 지휘하고 운영하고있었다. 마르코스는 바로 이러한 미국을 등에 업고 장기집권을 해올수 있었던것이다.

하지만 마르코스의 집권 18년째 되는 해인 1983년에 마르코스정권에 치명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반체제운동가로 명성높던 아키노상원의원이 망명생활중에 귀국하였는데 필리핀군부가 마닐라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에서 내리는 그를 총격으로 살해하였던것이다.

이 사건은 필리핀민중의 커다란 분노를 불러일으켰으며 정부를 반대하는 민중의 항쟁은 3년동안 계속되였다. 날로 격화되고있는 민중의 항쟁에 못이겨 마르코스는 할수없이 1986년에 조기대통령선거를 진행한다는것을 발표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그리하여 피살된 아키노상원의원의 미망인 코라손 아키노와 마르코스대통령이 서로 대항하는 대통령선거전이 벌어지게 되였다.

여기에서 코라손 아키노가 당선됨으로써 독재자 마르코스는 할수없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거기에서 쓸쓸한 망명객이 되여 운명을 마감하였다.

 

《피플파워》의 여파로 등장한 코라손 아키노 녀성대통령

 

코라손 아키노대통령후보자가 막강한 마르코스 현직대통령의 부정선거를 이겨내고 1986년에 제8대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취임한 아키노대통령의 승리는 《피플파워》라고 하는 민중의 지지로 이루어진 승리였다.

코라손 아키노는 남편 아키노의 정치활동을 뒤에서 말없이 오래동안 지원하였다. 그는 남편이 감옥에 구속되여있을 때 남편의 편지를 몰래 외부에 전달하는 숨은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출옥후에 망명생활도 하였으며 총격으로 남편을 잃는 비극을 겪기도 하였다.

새로 취임한 코라손 아키노대통령은 1987년 2월에 전국민적인 투표를 실시하여 새 헌법을 제정하였는데 새 헌법은 진보적인 헌법으로서 국민들이 민주적권리를 누릴수 있고 IMF로 인한 피해로부터 민중을 보호하며 또한 로동운동과 좌파활동 등을 가능케 하는데 필수적인 법률들이였다.

막사이사이-마르코스로 이어지는 필리핀의 어둡던 정치체제는 이로써 끝장이 나게 되였다.

그동안 굴하지 않고 싸워온 민중항쟁 《피플파워》는 아키노대통령의 새 정권하에서 개혁과 민주질서를 다시 회복하는 기회를 가질수 있게 되였다.

그러나 아키노정권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아키노대통령의 집권기간 필리핀군부의 쿠데타시도가 6회나 있었는데 이것은 아키노정권을 흔들려는 친미적인 군부의 소행이였다.

뿐만아니라 독재정권시대에 뿌리를 깊이 내린 기득권층과 막강한 권력을 쥐고있는 지주들이 아키노대통령을 얕보고 개혁정책을 반대해나서고있었다. 게다가 점점 더 심화되여가는 빈부의 격차는 정치적경험이 부족한 아키노대통령에게 무거운 짐으로 되고있었다.

한편 아키노대통령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 미국이 음으로양으로 아키노정권의 앞길을 가로막아나서고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1992년 5월 아키노대통령은 6년동안의 임기를 끝내고 국방상으로 있던 라모스를 적극 지원하여 후임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1992년 6월에 라모스국방상이 필리핀의 제9대대통령으로 취임함으로써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통하여 아키노대통령은 순조롭게 퇴임할수 있었다.

1998년에 퇴임한 라모스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량면으로 엇갈리고있다.

긍정적평가는 임기동안에 빈민층비률의 감소, 년간 순수입의 상승 그리고 GNP 10% 성장 등을 들수 있다.

그러나 집권 6년동안에 실업자가 약 32만 3 000명 발생했고 IMF로부터 정부의 재구조화를 최우선으로 한 정책비판과 그리고 자유화와 민영화에 의해 경제가 근본적으로 곤두박질하였다고 하는 등 부정적인 평가도 만만치 않다.

우의 평가보다도 1998년 5월 1일 필리핀바얀당이 내놓은 라모스대통령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특이하다.

미국-라모스체제는 억압적인 로동수출정책으로 수많은 필리핀인들을 해외로 내보내 위험한 로동과 노예임금으로 장시간로동을 강요하고있다.

미국-라모스체제는 우리 로동자들을 현대판영웅이라고 추켜세우면서 사실은 우리를 현대판노예로 만들어놓고있다. 우리가 년간 벌어들이는 자금에 대하여 엄청난 강제징수, 수수료 그리고 이중과세등으로 착취를 당하지만 아무도 우리를 미국-라모스체제로부터 보호해줄 힘은 없다.

미국-라모스체제속에서는 언제나 선거때만 되면 금과 총의 권력이 더욱 요동치고있다.

이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할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근본적으로 토지개혁과 민족산업화의 실현 그리고 민주적이고 민족적인 필리핀을 건설하는 길뿐이다라고 필리핀의 《피플파워》는 오늘도 웨치고있다.

 

필리핀은 다시 우경화로 가는가?

 

라모스대통령퇴진후 오늘까지 두명의 대통령이 등장했는데 두사람 모두다 우경화대통령들이다.

1998년 6월에 제10대대통령으로 취임한 에스트라다대통령은 영화배우출신으로서 미국의 레간을 닮은 꼴의 대통령이다. 그는 레간처럼 영화배우일뿐만아니라 또 반공주의전도사로도 레간을 꼭 닮았다.

그는 독재자 마르코스시대의 악명높았던 반공법을 다시 부활시키려고 시도했으며 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외국독점자본의 도입과 무차별민영화 등을 강행함으로써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를 더욱 악화시키였다.

이렇게 되자 로동자련맹, 필리핀공산당, 필리핀좌파련합세력, 공무원로동총련맹 등 각종 단체들과 광범한 민중들이 총궐기하여 에스트라다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해나섰다.

결국 에스트라다대통령은 6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친미극우파정권이라는 민중의 심판을 받고 집권 3년만인 2001년에 부대통령인 글로리아 아로요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쫓겨나고말았다.

그러면 아로요 녀성대통령은 어떤 인물인가?

에스트라다대통령이 《피플파워》에 의하여 퇴진됐는데 아로요부대통령은 군부의 지지에 의하여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돌이켜보면 필리핀 《피플파워》는 마르코스의 20여년 독재정권타도에 성공했다. 그리고 미국-라모스체제의 정권도 무너뜨렸다. 뿐만아니라 친미적인 에스트라다대통령도 《피플파워》에 의하여 도중에 쫓겨났다.

그러니 제2차 세계대전후 지금까지 필리핀력사에서 《피플파워》의 위력은 유감없이 과시되여온셈이다.

그런데 군부가 우파인물인 아로요를 대통령으로 또다시 내세웠으니 말문이 막힐뿐이다.

어쨌든 아로요 녀성대통령은 2001년 1월에 제11대대통령으로 취임했고 2004년에 부정선거의 론난속에서 또다시 재선되여 제12대대통령으로서 2010년까지 집권할수 있게 되였다.

2007년 어느날 아로요대통령이 참가한 기자회견때 있은 일이다.

이날 기자들의 질문공세를 받은 아로요대통령은 녀성적인 신경질반응을 일으켜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그때 제기한 기자의 질문은 이런것이였다.

《마르코스대통령과 라모스대통령독재때 기득권갑부들이 지금도 여전히 어마어마한 재산가들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대통령께서 우려하지 않으십니까?》

이 질문을 받고 아로요대통령은 그저 대답을 회피한것뿐아니라 아예 기자회견장을 박차고 나간것이다.

이것은 《그래 나는 전임 두 독재대통령들의 후계자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행동으로 나타내보인것이라고 해석할수밖에 없다.

필리핀의 사회현실은 아직도 정치와 경제에 있어서 오랜 독재정치와 미국위주의 사상을 가지고있는 엘리뜨들이 권력을 장악하고있다. 이들 엘리뜨중심의 세력들이 고의적으로 필리핀의 우경화정책을 부추기고있으며 우경화된 군부가 요지부동하게 존재하고있는것이다.

아로요대통령의 집권으로 인하여 필리핀에서 세계화로 표현되고있는 신자유주의와 신식민주의가 득세하게 된것도 복잡한 필리핀의 사회현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오늘 필리핀에서 사회주의운동의 과거와 현재의 운동세력들의 련합체인 민족민주전선과 신인민군조직 등 여러 사회운동세력들이 우경화를 막고 경제독점세력인 엘리뜨계층과 대항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하고있다.

말하자면 필리핀의 좌파는 결코 쇠퇴하지 않는 《피플파워》이다. 왜냐면 그것은 정의이기때문이다.

오늘 아로요이후 새롭게 필리핀대통령으로 등장한 인물이 다름아닌 《피플파워》에 의해 마르코스독재정권을 밀어냈던 코라손 아키노 이전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필리핀의 정치동향을 가늠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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