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25]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김동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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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님의 댓글
고슴도치 작성일
“저의 아버님은 백범 김구 선생의 부하일꾼으로 일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릴 적 제 기억으로는 자상하시고, 열정적인 분이셨습니다. 제가 어려서 아버지의 대화상대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그 당시 아버지의 말씀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죠. 그리고 아버지께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시골에서 목회활동을 하실 때 돈이 없는 아픈 사람들에게 의사노릇도 하셨죠. 아버지로서 직접적으로 얘기하시진 않았지만 나와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고, 옳은 일, 정의에 대해 강한 신념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저 또한 그런 아버지를 본받게 되었습니다.”
김동수 박사의 부친은 독립운동가이자 평양 숭실대학교 출신이다. 그래서 김 박사는 그의 막내아들로 아버지가 다니던 1956년 서울에 재건된 숭실대 철학과에 입학한 재건 2기생이다. 그는 1936년 3월5일 평안남도 덕촌에서 태어나 부모님과 함께 남녘으로 내려와 연세대학교 이공대학교를 수학하고 숭실대학 철학과를 다시 들어가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1965년 미국 피츠버그신학교 목회학 석사를 수료했으며, 1965년 같은 지역에 유학 온 부인 백하나 여사와 결혼하여 두딸(큰 딸은 미국에서 학교 선생, 막내딸은 주정부 공무원)을 두고 있고, 1969년에는 피츠버그대에서 사회사업 석사 과정을 마쳤다. 또 그는 1976년 시카고 대학교 철학박사를 수료한 후 미국 버지니아 노폭주립대에서 30년간 교수로 재직했으며, 평생을 사회사업 교육과 관련 활동에 힘썼다. 김 박사는 2003년 한국의 한동대학교에 교수직을 요청받고 귀국하여 한 학기를 가르치다가 간이식한 것이 호전되지 않아 건강이 갑자기 쇠약해 지자 미국으로 돌아와 요양하다가 그후 2006년에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나가 후진들을 위해 다시 학계로 들어가 활동해 왔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6년 동안 후진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최근에 은퇴 하였고, 은퇴하면서 부친의 기념사업회와 모교 후진들을 돕는 사업에 뛰어 들었다.
그는 모교 숭실대학교 후진들을 위해 몇년 전 1억원(약10만 달러)를 부친 ‘김예진 목사 장학기금’으로 출연하여 당시 모교 동문회에서 화제가 된바 있었다. 이러한 사업을 하게 된 동기에 대해 물었다.
“우선 저는 숭실을 특별한 대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숭실은 기독교정신이 투철한 대학이고요. 또한, 일제의 치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이른바 스스로 ‘순교’한 학교입니다. 그 뜻을 이어받고자 6.25이후 서울에 와서 다시 재건해 오늘날까지 오게 된 것이죠. 다른 기독교대학을 폄하하는 게 아니라 숭실은 끝까지 투쟁하다가 순교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 정신이 숭실대에 녹아있죠. 더불어 저의 아버지를 비롯해 많은 애국자가 숭실 출신입니다. 풍부한 정신적 유산을 가진 곳이죠. 장학기금을 내게 된 이유는 단순히 숭실이 모교이기 때문이 아니라 숭실에서 배운 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근 30년 미국 학계에서 교수생활을 했던 김동수 박사가 그것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들어가게 된 동기에 대해 물었다.
“원래는 유학을 끝내고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대학원을 다닐 시절 미국에서 민주화를 위해 활동한 바 있고요. 연이어 한인 교수와 목사들이 모여 80년대부터는 통일을 위해 활동했습니다. 활동을 하면서 심지어는 빨갱이 소리도 들었었죠. 그로인해 국가보안법이라는 문제로 한국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해외에서 남북 학자들, 남북기독자들이 만나 많은 대화를 했습니다. 민족주의적인 사상,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불의에 대해 굴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제 성격은 아버지의 열정적인 성격과 달리 온건한 편입니다. 그러나 아버님의 혼과 같이 사회정의, 민족의 자주성을 위해서 투쟁해야 한다는 마음은 늘 제 가슴에 있었죠. 제 어렸을 때의 꿈은 직업적으로 무언가를 성취하겠다기보다는 바르게 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사실은 제 아버지가 6.25때 공산당에 잡혀 돌아가셨기 때문에 북한은 가족적인 측면에서 보면 원수라고 볼 수 있지만 …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당당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픔이 없다면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저에게는 그런 아픔이 있었기에 언제나 남과북이 화해하고 협력하여 평화통일을 이뤄야 한다고 절실하게 생각해 온 사람 중 한 사람이라고 말 할수 있어요. 그리고 저는 늘 내가 살던 한국에 가서 내가 배운 학문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는데 다행히 그렇게 할 할 수 있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죠.”
김동수 박사는 2008년 1월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숭실대학교 대학신문 편집국장과 가진 대담을 통해 후진들에게 바라고 싶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었다.
“숭실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진리와 봉사를 교육이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숭실의 모든 학생들은 단순히 지식을 터득하고 취업하기 위한 게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그런 정신적인 인격자가 되길 바랍니다. 숭실의 기독교 정신과, 민족정신은 우리 모두의 전통이자 유산입니다. 숭실이 가진 특별한 전통과 자랑을 내세워 자존심과 긍지를 갖고 살아가 주기를 바랍니다.”
그는 부친 김예진목사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유가족 대표로 한달에 1백68만원 정도 보상금을 받고 있는데 이 돈은 일체 공익사업에 사용해 왔다고 밝힌다.
기자는 또 오랜 만에 미국에 오셔서 여러 날을 보내셨는데 재미동포사회 통일운동진영에 대해 바라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이곳에 와서 이분 저분 만나 보았어요. 잘 알지 못하지만 그저 통일운동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보다듬어 주며 사랑해 주는 분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통일운동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가슴이 좀 따뜻하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좀 아쉽습니다.”라고 간단한 소감을 밝히며 몇일 후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김동수 박사의 연락처:
인천 광역시 청라 한울로 95 312동 1303호
전화는 010-5515-0723, 미국에서는 757-751-5596
이멜 주소: peace.dskim@gmail.com 혹은 dskds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