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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회주의 혁명’ 차베스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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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중
댓글 1건 조회 4,876회 작성일 13-03-06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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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일보 기사 펌)


‘21세기 사회주의 혁명’ 차베스는 누구인가
5일 끝내 사망...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59년의 삶
 
정지영 icon_mail.gif
우고 차베스(58)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고통스러운 암투병 끝에 5일(현지시간) 끝내 별세했다고 그의 후계자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이 발표했다. 차베스 대통령의 사망 시점은 이날 오후 4시25분이다.

차베스 대통령은 서방 언론에 의해 남미의 과격한 좌파 지도자이자 반미주의자로 낙인 찍혔던 인물이다. 하지만 베네수엘라 민중들에겐 꾸준히 60~80%의 지지를 얻어온 지도자이기도 하다. 아울러 한국의 진보세력에게도 많은 아이디어를 주었던 인물이다.

차베스 대통령의 드라마와 같은 59년의 삶을 통해 차베스가 꿈꾼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을 돌아본다.

젊은 차베스, ‘전민항쟁’의 물결을 만나다

우고 차베스는 1954년 7월 28일 베네수엘라 서부 농촌마을에서 학교 교사 부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지도자의 꿈을 키웠으며 1975년 임관한 뒤 1983년엔 군대 내 동지들을 규합해 ‘볼리바르혁명군(MBR-200)’이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하면서 사회주의운동을 시작했다. 베네수엘라 국민의 혁명영웅인 시몬 볼리바르 탄생 200주년을 맞아 볼리바르 이념을 계승하자는 뜻이었다. 

남미는 한국보다 10년 정도 앞서 이미 IMF가 이끄는 신자유주의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 곳에서 폐허를 딛고 혁명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붉은 물결이 일기 시작한 것이었다.

베네수엘라 혁명은 ‘위로부터의 혁명’이 아니라 강력한 대중운동의 뒷받침을 받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평가된다. 1989년 신자유주의에 저항한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당시 페레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 수천 명의 민중을 학살했다. 

이에 대항해 군부 내 혁명세력들은 대중운동과 결합해 ‘전민항쟁’을 조직해갔다. 1989년 민중봉기 이후로 민간 혁명세력도 군부 내 조직인 ‘볼리바르혁명군’에 가담하기 시작해 ‘볼리바르혁명운동’으로 조직이 확대돼갔다. 

그리고 1992년 2월 4일이 밝았다. 차베스는 1만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정권을 상대로 전민항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는 실패로 끝났고 차베스는 실형을 선고 받아 복역했다. 그는 훗날 2년간의 복역 시절을 ‘긍지의 세월’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1992년의 전민항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매해 2월 4일이면 베네수엘라의 온 거리가 이 날을 기념해 붉은 옷과 모자의 물결로 뒤덮인다. 그 날을 계기로 차베스는 ‘혁명영웅’으로 떠올랐다.

베네수엘라 민중들이 사랑한 대통령, 차베스

차베스는 민중들의 지지에 힘입어 1998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이 됐다. ‘최다득표’를 베네수엘라 역사에 기록하면서 등장한 것이다.

차베스는 대통령이 된 후 과감한 혁명을 지속해갔다. 빈민층을 위한 주택을 짓고 농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나눠줬다. ‘볼리바르 계획 2000’ 프로그램을 통해 학교와 병원, 보건소 등을 재정비하고 무상의료를 확대했으며 생산수단의 국유화 조치를 취했다.

차베스 혁명이 대담하게, 빠른 속도로 진행된 데는 베네수엘라가 막대한 양의 석유를 세계에 공급하고 있었던 배경이 자리한다. 아울러 차베스는 이를 무기로 미국에 당당한 목소리를 냈으며 볼리비아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을 비롯해 에콰도르, 니카라과, 쿠바 등 중남미 좌파 지도자들과 어깨를 걸고 중남미 통합에 힘을 쏟아왔다. 

그는 집권 후 제헌의회를 설치, 헌법 개정을 통해 2000년 7월 실시한 대선에서 60% 득표율로 임기 6년의 대통령에 재선했다. 

그러던 중 차베스는 첫 번째 위기를 맞게 됐다. 2002년 4월 11일 차베스 반대파는 차베스를 축출하기 위해 쿠데타를 시도했다. 

반대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베네수엘라는 세계 4위의 석유 생산국임에도 불구하고 상위 계층에만 국부가 분배되는 사회였다. 차베스식 혁명을 지지하는 80%의 민중이 있는 반대편에는 자신의 기득권과 부를 ‘빼앗기는’ 강력한 반대세력이 존재했던 셈이다. 

특히 베네수엘라의 5개 상업방송사는 막강한 경제권력을 소유하고 차베스에 반대해왔다. 2002년 2월 차베스가 “베네수엘라의 부는 소수의 것이 아니다”라며 국영석유회사를 재편해 정부 측 인사를 포함시키려 하면서, 기득권층은 차베스에 반대해 일어서기 시작했다.

반 차베스 진영의 주요 인사인 경제인연합회장 페드로 카르모나와 노조 지도자 카를로스 오르테가를 주축으로 파업과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상업TV에 출연해 국영석유회사를 향한 반정부 시위행진을 호소했다.

다음날인 12일 위기감을 느낀 차베스 지지자들이 대통령궁 주변에 운집했다. 그러자 국영석유회사를 향하던 반차베스 시위대는 대통령궁으로 방향을 돌렸고 이 과정에서 반차베스 시위대 몇 명이 총격으로 쓰러졌다. 이 총격이 누구에 의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상업방송은 차베스 지지자들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업방송을 주축으로 차베스 하야를 요구하며 군인들에게 쿠데타를 선동하고 국영방송마저 이들의 손에 장악된다. 외부와 미디어에서 고립된 차베스와 각료들은 격렬한 공격을 받으면서도 진실을 알릴 수단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군인들은 대통령궁을 찾아 사임을 요구하고, 차베스는 결국 체포에는 응하지만 사임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페드로 카르모나는 대통령에 취임하고 차베스의 정책은 폐기됐다. 

차베스가 다시 대통령에 복귀하는 과정 또한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미디어를 반대세력에 빼앗긴 상태에서 차베스의 각료들이 해외 케이블 방송을 통해 차베스는 사임한 게 아니라고 알린다. 이 미디어의 힘은 미약했지만, 차베스를 지지한 민중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오가며 이 소식을 곳곳에 알린다. 장악된 거대한 방송사의 힘보다 차베스를 지지하는 이들의 ‘입소문’이 더 큰 위력을 발휘했고, 이를 계기로 사태는 반전된다.

차베스 지지자들은 대통령궁에 모여들었고 차베스 경호대가 대통령궁 탈환작전에 돌입했다. 결국 차베스는 다음날 새벽 3개 특공대에 구출돼 돌아왔다. 극적인 복귀 후 차베스는 민중들이 역사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 같은 반대파와의 싸움은 차베스 임기 내내 지속됐다. 이 안에는 막대한 부와 권력을 나눠줘야 하는 기득권 세력의 강한 반발과 더불어 식료품을 이전보다 저렴하게 사게 되고 아플 때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설이 생기는데 기뻐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차베스에 대한 지지가 중첩된 베네수엘라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 

한편 이 무렵 미국 언론들은 조지 부시 행정부 고위 관리들이 반차베스 연합세력과 지속적으로 접촉해왔다면서 차베스에 대한 쿠데타 기도에 미국이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눈엣가시와 같았던 ‘반미 지도자’를 몰아내려 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이렇게 드라마틱한 과정을 통해 대통령궁에 복귀한 차베스는 2006년 대선에서도 높은 지지를 얻어 재선에 성공했다. 

개헌안 부결, 하지만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2007년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은 한 차례 위기를 맞는 듯했다. 그해 12월 2일 국민투표에 부친 개헌안이 51:49로 부결된 것이다. 

이때의 개헌안에는 ▲하루 최대 6시간 근무, ▲중앙은행 보유 외화, 대통령 직접 관리, ▲새로운 형태의 공동재산 설립, ▲천연가스와 석탄산업 국유화 등 사회주의 개혁 과제들이 두루 담겨 있었다.

그러나 차베스는 당시 개헌안 부결을 인정하면서도 “혁명은 더욱 강력해졌다”고 말했다. 또 자신은 전진을 멈추지 않겠다며 미래를 기약했다. 

그리고 2009년 2월, 대통령직을 포함해 선출직 공직에 대한 연임 제한 폐지 등을 담은 개헌안 국민투표에서 54% 찬성을 얻어 개헌안이 가결됐다. 

서방 언론은 이 결과를 두고 ‘독재자 차베스가 종신집권의 길을 열었다’고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이는 개헌안에 찬성한 베네수엘라 민중들의 뜻을 자신의 색안경으로만 바라본 결과다. 민중들은 개헌안을 스스로 택했고, 다음번 대선에서 차베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대표를 찍으면 그만인 것이다. 아울러 이 개헌안에는 2007년 부결된 개헌안과 마찬가지로 연임제한 폐지 뿐 아니라 개혁 과제들이 두루 담겼었다.

이때의 개헌안 통과로 2012년 대선에 출마할 수 있게 된 차베스는 식지 않은 민중들의 지지에 힘입어 2012년 10월 치러진 대선에서 54.42%의 득표를 얻어 4선에 성공했다. 2019년까지의 임기다.

그러나 이번엔 병마가 차베스를 덮쳤다. 2011년 6월 쿠바에서 암수술을 받은 데 이어 차베스는 본격적인 암치료에 돌입했다. 2012년 7월 암치료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선언하고 건재한 모습으로 그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차베스는 다시 2012년 말 암치료를 시작해 12월 쿠바에서 암수술을 받게 된다.

차베스는 올해 초부터 암투병 중 감염으로 심각한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는 등 큰 고통을 겪어왔으며, 지난 1월 10일 차베스의 집권 4기 취임식은 무기한 연기됐다. 그리고 3월 5일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59년의 삶을 마쳤다. 

차베스는 4기 임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면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은 이대로 좌절되는 것일까.

그는 지난해 12월 8일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을 공식 후계자로 지명했다. 아울러 베네수엘라 연구자들은 베네수엘라 혁명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차베스라는 강력한 ‘개인’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풀뿌리 지역조직을 기반으로 일궈져 온 것이어서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차베스가 꿈꾸고 만들어온 베네수엘라 혁명의 미래는 앞으로 어떻게 그려질까.
 
 
<민중의소리=정지영 기자>
 

기사입력: 2013/03/06 [11:47]  최종편집: ⓒ 사람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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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우님의 댓글

황진우 작성일

시카고의 항거는 오늘도 자본주의를 뒤흔든다
 
3.8국제부녀절은 시카고근로자들의 투쟁에 뿌리를 두고있다.시카고는 미국의 한 도시이다.부자와 빈곤자,천당과 지옥이 명백한 대조를 이루며 공존해온 이곳에서는 일찍부터 자본의 착취를 반대하며 생존의 권리와 민주주의적자유를 위한 투쟁이 활발히 벌어졌다.
1909년 3월 8일 생존권과 정치적권리를 요구하여 대규모적인 시위와 파업을 단행한 미국의 시카고녀성들의 투쟁은 극심한 녀성천시사회인 미국사회는 물론 자본주의세계전반을 크게 뒤흔들어놓았다.이날의 시위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녀성으로 태여난것이 《죄》가 되여 천대와 멸시,차별의 대상으로 되여온 미국녀성들의 쌓이고쌓인 울분과 분노의 폭발이였으며 남자들과 꼭같은 존엄과 권리를 요구하는 녀성들의 대중적항거였다.
시카고녀성들의 투쟁을 계기로 지구상에 전세계근로녀성들의 국제적명절이 생겨난지도 한세기가 지났다.하지만 지금까지도 온갖 불평등과 구속에서 벗어나 자기의 존엄과 권리를 지키려는 녀성들의 념원은 세계적범위에서 실현되지 못하고있다.
《세계화》가 추진되고 과학과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녀성들의 빈궁,녀성들에 대한 차별,녀성매매는 갈수록 심각해지고있다.
《번영》과 《발전》을 떠들어대는 자본주의사회를 보자.미국의 인구조사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10년에 전국적으로 녀성빈궁자수는 1 700만명이상에 달하였다.이로써 녀성빈궁률은 17년래 최고를 기록하였다.일본에서는 낮은 수입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해가는 근로자들가운데서 70%이상이 녀성들이다.
자본주의나라들에서 날로 우심해지는 녀성의 빈궁문제는 사회에 지배하는 불평등,녀성차별에 기인된다.녀성을 《아이낳는기계》라고 모독하고 한 나라 수상이 녀성을 상품처럼 대통령에게 《선물》하였다고 말한것을 비롯하여 자본주의나라 정객들속에서 종종 튀여나오는 듣기에도 거북하고 저렬한 소리들은 녀성의 인권과 존엄을 유린하는 자본주의사회의 그릇된 녀성관을 투시해보기에는 충분하다.
머리우에 부은 물이 발끝으로 흐른다고 이러한자들이 정치를 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녀성들의 불우한 운명은 필연이다.하늘높은줄 모르고 오르고있는 녀성들의 실업률이 그것을 말해준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녀성들이 직업을 얻는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최근년간 세계를 휩쓴 경제위기로 자본주의나라들에서 오랜 력사와 자금력을 자랑하던 기업체들이 줄줄이 파산되고 《경영손실》을 메꾼다는 미명하에 기업체들이 저저마다 대대적인 해고소동을 벌리고있는 형편에서 더욱 그렇다.자본주의나라 녀성들은 녀성이라는 단 한가지 리유로 기업체들에서 첫번째 해고대상으로 되고있다.그들은 리윤추구에 눈이 어두운 경영주들로부터 무지막지한 사직을 강요당하고있다.
자본주의나라들에서 일자리를 제일 힘들게 얻는것도 녀성들이고 제일 쉽게 떼우는것도 그들이다.요행 직업을 얻은 녀성들의 경우에도 로동생활에서 극심한 차별을 받고있다.미국에서 녀성근로자들의 평균임금은 남성들이 받는 임금의 76.2%에 불과하다.이딸리아에서는 녀성근로자들이 남성근로자들에 비해 평균 16%나 적은 임금을 받고있다.최근년간 오스트랄리아에서는 남성근로자와 녀성근로자사이의 임금격차가 17%로 늘어났다.초보적인 생존권까지 빼앗기고 실업과 빈궁에 쫓기는 자본주의나라 녀성들이 저마다 모성의 권리를 포기하고있는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국제무대에서 빈번히 인권소동이 어지럽게 일고있지만 그것을 주도하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 녀성들은 인권유린의 첫째가는 희생물로 되고있다.
미국에서는 5명당 1명이 성폭행을 당하고있으며 수많은 녀성들이 강간위험을 수시로 느끼고있다.해마다 10만명의 녀자어린애들이 매춘업에 끌려들어가고있다.7~8살의 어린 소녀들이 실종되였다가 후에 흉기에 찔리우고 성폭행의 피해자가 되여 나타나는것은 미국에서 흔한 일로 되고있다.하긴 대통령의 경호원이라는자들이 해외에 나가서까지 성추문으로 세상사람들을 경악케 하고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사회적으로 보호와 우대를 받아야 할 녀성들이 한갖 성노리개로 되고있는 현실을 두고 미국신문 《인터내슈널 헤랄드 트리뷴》이 미국은 성폭행의 특산지라고 단죄한것은 우연하지 않다.3.8국제부녀절을 산생시킨 미국땅에서 녀성들이 이런 처지에 놓여있는것은 개탄할 일이다.
미국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것이 아니다.세계적으로 인신매매로 하여 근 250만명이 성폭행을 당하거나 강제로동에 종사하고있는데 그 대부분이 소녀들을 포함한 녀성들이다.지난 세기에 력사에 없는 반인륜적인 성노예범죄행적을 가지고있는 일본에서는 인신매매범죄조직들이 떠들어대는 직업광고들에 속아 끌려온 동남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동유럽출신의 녀성들이 《성산업》에 종사하고있다.그 수는 현재 수만명에 달한다고 한다.이것은 수많은 녀성들이 상품화되여 인신매매의 희생물로 되고있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다.
자본주의나라에서 녀성들의 인권은 가정에서도 무참히 짓밟히고있다.그들에게 있어서 가정은 행복의 요람이 아니라 《지옥》으로,불행과 고통의 근원으로 되고있다.유럽리사회가 발표한 조사자료에 의하면 유럽적으로 녀성들의 12~15%가 폭력범죄의 피해자로 되고있다고 한다.특히 프랑스에서는 평균 3일에 1명의 녀성이,영국에서는 평균 1주일에 2명의 녀성이 가정폭력범죄에 의해 목숨을 잃고있다.이딸리아에서는 폭행을 당한 녀성들이 670여만명에 달한다고 한다.가정폭력행위가 얼마나 극심한가 하는것은 미국에서 《가정폭력방지법》이라는 괴이한 법까지 만들어지고 결혼증서를 발급할 때 《가정폭력부가세》를 받아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능히 짐작할수 있다.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성행하는 녀성들에 대한 폭력범죄는 수많은 녀성들의 정신과 육체를 사정없이 파괴하고있다.
최근년간 제국주의자들의 간섭책동으로 세계 여러 지역들에서 발생하고있는 분쟁들에서 첫째가는 피해자도 녀성들과 어린이들이다.특히 침략자들의 발길이 가닿는 곳마다에서는 녀성들에 대한 성폭행과 인권유린이 그칠새없이 감행되고있다.
자본주의라는 썩어빠진 토양에 뿌리내린것으로 하여 인생의 막바지에서 모대기며 시들어가는 녀성들의 불우한 처지는 반인민적이며 반동적인 사회제도가 존재하는 한 언제 가도 달라질수 없다.
투쟁만이 살길이다.104년전 시카고녀성근로자들이 터치였던 분노의 함성은 오늘도 《우리는 99%이다!》라는 구호밑에 수억만 근로대중을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로 부르고있다.
본사기자 배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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