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백낙청교수와 간담회 통해 국내외 정세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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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님의 댓글
고슴도치 작성일
(이어서...)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를 생각하는 각계각층이 서로를 포용하며 힘을 합쳐야 한다는 이야기 등 가슴속에 담겨있던 의미있는 이야기들을 허심탄회하게 토로했다.
백낙청 교수는 많은 모임들을 참석하여 보았지만 이날 처럼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가슴을 열고 격의없이 자기 소개를 하고 가슴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서로 주고 받는 자리는 별로 없었다고 표명했다.
그는 요즘의 정세와 관련하여 (1) 분단체제 흔들기, (2)코리아전쟁 끝내기 움직임이 역력하다고 지적하며 이 시대의 근본문제는 분단체제 자체가 문제라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사실상 분단체제가 고정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우리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은 6.15남북공동선언을 고수하고 이행하는 그 길밖에 없다고 해법(Road Map)을 제시하면서 이것이 해결책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백낙청 교수는 이러한 해법을 풀어나가는 방법에 있어서는 정부에게만 맡기지 말고 시민단체들의 나름대로의 노력도 절실하다고 설명하고, 우리의 평화통일 과정은 점진적이며 단계적으로 진행하여야 하는데 여기에 해내외 동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새로 취임한 박근혜정부에 관련해서는 우선 이명박정부와는 차별화할 수 있는 점들도 없지 않다고 전재하고, 박 대통령이 선거기간 많은 공약들을 내놓았는데 그 중에는 진보개혁진영에서 주장한 점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 실천여부를 두고 평가할 필요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발언했다.
박근혜대통령의 대북정책이라고 한다면 ‘신뢰프로세스’를 내세웠는데 아직도 그것을 검증하지 못한 초기이기에 그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좀더 두고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가 현재의 백낙청 선생의 입장으로 나타났다. 그는 한편 새로 지명된 통일부장관이 북과의 대화와 인도적 지원을 거론한 것을 상기시키며 이것도 시간을 가지고 향후 행보를 보면서 평가했으면 좋겠다는 자세를 보였다.
백낙청 교수는 마지막으로 코리아반도 전쟁은 작은 실수로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국민들이 관심을 갖고 평화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한국의 야당, 시민단체들은 모두 철저한 자기성찰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또 대중운동과 관련하여 “국민들이 따라오는 언어”를 통해 일반대중을 설득시켜 나가야 한다는 뜻으로 대중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며 한국의 촛불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상기시키는 한편 향후 만약 박근혜 정부가 정말 잘못하게 되면 국민저항이 일어날텐데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백낙청 교수의 말씀이 끝나자 참석자들의 질문들과 응답시간이 이어졌다. 총3시간동안의 간담회를 통해 안철수 현상, 지난 대선평가, 평화협정 전망, 촛불의 향방, 6.15선언과 한미동맹간의 상호모순, 북-미수교전망, 유엔안보리 제재와 북핵실험 문제, 북-중관계와 중-미관계 문제, 한국의 민중역량 등 많은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고, 이에 대한 대답으로 진지한 간담회가 진행되었다.
오인동 박사는 이날 행사가 끝나고 백낙청 교수와 대화를 나눈 모임과 관련 “백낙청 교수를 통해 남녘의 정서를 들을 수 있었고 우린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남녘 동포인사들 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통일의 상대인 북녘을 마음과 몸으로 체험하고 또 분단지속의 근본 원인인 미국에 살면서 체험하고 있는 재미동포인사들의 분단종식의 뜻을 한국에서 오신 백낙청 교수님과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되어 의미있는 모임이 되었다.”고 그의 소감을 밝혔다.
백낙청 교수는 1938년생으로 친가는 평안남도 정주군에 있었지만, 외가가 있는 대구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였다. 변호사였던 아버지 백붕제는 코리아전쟁 시기에 이북으로 갔다. 그는 1955년 경기고등학교 재학중 미국 유학을 떠나, 브라운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시 귀국하여 군복무를 마친후, 다시 유학을 떠나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1962년부터 서울대학교 영문과에 부임하였고, 1966년부터 계간지 《창작과비평》의 편집인을 맡아 진보적 평론활동으로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74년 유신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해직되었으나, 1980년 복직되었고, 2003년 교수직을 정년퇴임하였다. 이후에도 통일운동의 일선에서 일하며 2005년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2007년 대통령 선거에는 범여권후보 단일화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백교수는 최근에는 변절 시인으로 알려진 김지하의 ‘조선일보’ 기고로 국내외에 잠시 화제인물로 부상하기도 했다.
백낙청 교수와의 간담회에 참석한 인사들(무순)은 오인동, 김용현, 손세영, 김중산, 현준기, 이활웅, 윤길상, 이태선, 배연원부부, 김창옥,이병도, 박상준, 정찬열, 김태환, 이명열, 이선주, 조경미, 차종환, 오은영, 정연진, 한시헌, 김덕주, 노길남 등이었다.(끝)
[사진]간담회가 끝나고 일부 참석자들은 백낙청교수와 함께 기념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