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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25신)방북취재 이모저모 사진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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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슴도치
댓글 1건 조회 8,522회 작성일 13-05-22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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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25신)방북취재 이모저모 사진들(3)

글쓴이 : 노길남 특파원 날자 : 2013-05-22 (수) 02:03 조회 : 42 btn_singo2.gif btn_print.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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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러시아 할머니(맨오른쪽)가 친구 할머니와 함께 손녀 마리아를 데리고 이곳 평양에 와서 평양에 있는 대학에 유학시켜 자신의 조직을 이어 받는 지도자로 양성하기 할 생각이라고 한다. 후비를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한 할머니의 애국적인 자세가 존경스럽다.

민족통신 편집인겸 대표인 노길남 박사는 최근 방북취재(2013.4.10~5.8) 마치고 돌아와 당시에 평양에 체류했던 카나다의 에드문트에 거주하는 김원백선생을 포함하여 러시아에서 손녀를 데리고 할머니, 미국인 부인을 의사는 부부동반으로 3자녀를 모두 데리고 가족, 뉴질랜드에서 부자 조용하게 북부조국을 지원해 여러동포들도 만날 있었다고 회고하며  해외동포들과도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이번에는 이모저모 3번째  사진들과  함께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평양-25)방북취재 이모저모 사진들(3)

 

[평양=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평양에 체류했던 한달동안  카나다의 에드문트에 거주하는 김원백선생을 포함하여 러시아에서 손녀를 데리고 할머니, 미국인 부인을 의사가 부부동반으로 3자녀를 모두 데리고 가족, 뉴질랜드에서 부자, 경제활동을 하는 오스트랄리아 동포, 재중동포들, 재일동포들, 그리고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는 재미동포들 조용하게 북부조국을 지원해 여러동포들도 만나  많은 대화도 나눴다.

 

사재털어 나무심기통일운동에 헌신한 김원백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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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백
선생(65) 사재를 털어가면서 북녘 땅에 나무를 심는 사업을 지원해 왔다. 그는 동안  푸른통일조국가꾸기운동대표로서 북녘땅에애국 양묘장 운영해 왔다.  북녘에 심은 속성 포플러 나무를 두고 북측 인사로부터 종자는 문익점 선생이 목화씨를 들여온 업적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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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님의 댓글

고슴도치 작성일

북측 인사로부터 “이 종자는 문익점 선생이 목화씨를 들여온 업적과 같다”는 말까지 들었다. 평범한 사업가로 단순히 나무심기를 돕는 과정에서 그는 분단역사의 발자취도 알게되었다. 이제는 나무심기에 전념해 왔지만 통일운동가로서의 위상도 갖게 되었다.

그는 1976년 동포들 3~4천여명이 거주하는  카나다 에드문트라는 곳으로 이주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남쪽이 지금과 같은 경제활동을 갖추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의 부친이 1950년 7월에 코리아전쟁 당시 전사했다. 그는 아버지의 애국심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남녘 땅 사람들은 그를 고아 취급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싫어져서 그 땅을 떠났다.

아이들도 다 키우고 시간적 여유도 있었던 그는 그의  처의 친척을 찾기 위해 1990년대부터 중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중국을 방문했다가 그 중에 한 친척이 두만강 조중 국경에 살아서 그 곳에서 보니까 북쪽의 사정을 알게되었다. 그 당시 산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래서 1990년 처음으로 방북했고 몇 년에 한 번씩 지속적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이런 과정에서 북녘동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당시 나무심기가 곧 통일사업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나무심기사업을 하게 되었다고 그 계기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황주양묘장, 남포양묘장 등에 나무묘목들을 제공해 주는 사업을 포함하여 각종 나무심기 사업에 뛰어들었다. 사재를 털고나서 지속적인 사업을 하려고 하였으나 자금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 이전의 6.15시대에 남녘의 통일부를 찾아가서 “어차피 대북 협력단체들에게 지원금이 있지 않느냐, 최고 10억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어차피 통일을 위해서 준비해야 할 일이라면 나도 그 자금을 쓸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그 담당자가 하는 말이 “선생이 국적이 외국이라서 지원금을 지원하기 힘들다”고 해서 포기한적도 있다고 밝힌다.

그는 노후도 생각하지 않고 북녘 땅에 나무심기 사업에 매달리면서 자식들에게도 아버지에게 경제적으로 기대하지 말라고 설명하고 사업은 처에게 맡기고 남북을 드나들었다. 이 사업을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여의치 못했고, 처에게 맡겨놓은 사업은 한 직원을 잘못 만나 어려움을 겪에 되었다고 돌이켜 보기도 한다.

김원백 선생이 기부한 나무들의 양도 상당하다. 30~40여차례 나진, 회령, 온성 등에 보냈고, 묘목 나무 합쳐 120만 그루 정도를 5차례나 보냈으니까 이것만도 6백만 그루가 된다. 정동영 통일부장관 시절에는 남녘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고, 또 언급도 있었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와서는 대북협력체제는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며 몹시 안타까와 했다.

그는 남녘사회에서나 북녘사회에서 모두 나무심기 해외동포 사업가로 널리 알려진바 있다. 6.15시대가 시작되고 6~7년이 지난 시기에는 ‘사재털어 1억그루 북녘땅에 나무심기 운동’을 펼치는 해외동포 사업가로 널리 알려진바 있었다. 그는 아직도 그 꿈을 살리기 위해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체제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나무심기 운동에 참여할 국내외 동포들의 성원도 간곡하게 바라고 있다.

*문의 연락처: email 주소는 wonkim0625@hanmail.net 혹은 wonkim@shaw.ca

카나다 전화는 780-903-8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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