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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창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원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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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2,632회 작성일 13-11-29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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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소리 정웅재 기자

“계속 몰아대는 게 유신 말기하고 똑같아, 권력이 미치면 오래 못가”

가볍게 웃고 있는 박창신 원로신부

박창신 천주교 전주교구 원로신부가 인터뷰를 하면서 가볍게 웃고 있다.ⓒ민중의소리



"종북 대장이 됐지, 내가"

27일 오후 전북 익산에서 만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박창신(72) 원로신부는 "허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박 신부는 22일 전북 군산 수송동성당에서 열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시국미사에서 강론을 했다. 시국미사가 열리기 이틀 전 강론을 부탁받은 그는 예수님께서 알라고 하신 '시대의 징표'가 무엇일까 하고 한나절을 곰곰이 생각했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여러가지 말(징표)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종북몰이'를 비판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땅에는 법도 없고, 정의도 없고, 폭력적 불통의 힘만 있다"고 느껴오던 원로 신부는 "제일 화가 나는 건 종북몰이"라며 30여분간 열정적으로 강론을 했다. 

시국미사에서 사제단은 박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했다.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불법 대선 개입 사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에서 '대통령 하야' 등의 피켓이 등장하긴 했지만, 공식적으로 대통령에게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집단적으로 나온 건 처음이어서 정권과 언론도 이날 미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불똥은 엉뚱한데로 튀었다. 미사 다음 날 '조선일보'는 "NLL서 한미훈련하면 쏴야죠. 그것이 북한의 연평도 포격"이라고 제목을 뽑아 시국미사 소식을 전했다. 박 신부가 강론에서 한 발언 중 자극적인 부분만 골라 전후맥락을 생략하고 보도한 것이다. 

이후 대부분의 언론들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원로신부가 시국미사에서 "북의 연평도 포격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해 논란이 커지고 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종교계에서 대통령 사퇴 촉구 목소리가 나와 곤혹스러웠을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호재를 잡은 듯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사제단에게 "조국이 어디냐"고 물었고, 정홍원 국무총리는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적에 동조하는 행위"라는 살벌한 말을 했다. 박 대통령도 "국민분열행위를 묵과하지 않겠다"고 직접 경고했다. 

언론이 전하지 않은 연평도 포격 발언의 맥락, 
그리고 평생 민중민주운동을 한 원로신부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


시국미사를 직접 보지는 못한 기자는 언론이 전한 텍스트(text, 글)을 보고 '신부님께서 안 하셔도 될 말까지 하셨구나'란 생각을 했다. 당연하게도 궁금해졌다. 언론이 전하지 않은 컨텍스트(context, 맥락)은 무엇인지. 그래서 인터넷에서 시국미사 강연 풀영상을 찾아봤다. 맥락을 살피니 궁금증이 풀렸다. 은퇴한 원로신부가 하고 싶었던 말은 정권에 비판적이면 모두 종북으로 모는 개탄스런 현실을 꼬집고 싶었던 것이다. 정권이 어떤 식으로 종북몰이를 하는지 설파하고 싶었던 것이다. 민생을 살피지 않는 권력도 엄하고 매섭게 비판했다. 

'민중의소리'는 다른 언론에서 전하지 않은 context(맥락)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박창신 신부 강론 전문을 타이핑해 24일 보도했다. 몇몇 언론이 뒤따라 전문을 보도했고, 강론 전문은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퍼져나갔다. 1980년 5.18 광주 항쟁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다 테러를 당해 죽을 고비를 넘긴 박창신 신부의 '인생 스토리'도 주목받았다. 

그 사이 보수·극우단체들은 박창신 신부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하고 검찰은 고발장 접수 하루 만에 수사에 착수했다.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은 군산 수송동 성당 앞에 모여 박창신 신부 화형식도 벌였다. 

한 번의 강론으로 순식간에 정국의 중심인물로 부상한 그를 만나기 위해 26일 오전 기차를 타고 익산으로 내려갔다. 연락은 닿지 않았지만 박 신부가 은퇴하기 전까지 사제 생활을 한 전북 익산의 한 성당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박 신부에게 전화를 하고 문자메세지를 보내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으나 감감 무소식이었다. 결국 그날 저녁 발길을 돌려 서울로 향했다. 올라오는 기차안에서 성당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내일 오후 신부님께서 인터뷰를 하시겠다'고. 

다음 날 익산에서 만난 박 신부는 "노인네를 왜 이렇게 귀찮게 하냐"면서 기자를 맞았다. 그는 "주임 신부님과 상의도 하고 (상황이 이렇게 돼) 개인적으로 정리할 일도 있어 전주에 나가봐야 한다"면서 "(인터뷰 할) 시간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말머리 없이 곧바로 물었다. 

-신부님 강론에 대해 정권과 여당에서 나온 반응이 살벌할 정도입니다. 정권이 격하게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첫째는 사제단과 국민을 갈라놓으려고 하는 거라고 봐요. 또 한 가지는 나는 간단한 말로 (내 강론이)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해요. 아주 쉬운 말로 정곡을 찌르니 아픈거지. 그래서 발광하는 것 같다."

-정곡을 찔렀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사회가 반세기 이상 종북몰이를 했잖아요. 예전에는 빨갱이였고, 그게 요새 말로는 종북이고. 그게 지배논리 아녜요? 그 지배 논리를 내가 쉬운 말로 치니까 당황한 것 같아요." 

박근혜 정부의 ‘종불몰이’를 비판하는 박창신 신부

박창신 신부가 현재 박근혜 정부가 벌이고 있는 ‘종불몰이’를 단호하게 비판하고 있다.ⓒ민중의소리



-강론하실 때 보니까 원고를 보지 않으시고 때로는 차분하게 때로는 열정적으로 하시던데요. 원고없이 이런 말을 해야겠다고 미리 생각해둔 것을 말씀하신건가요.

"정의구현사제단에서 시국미사 이틀 전에 강론을 해달라고 했어요. 하루 정도 곰곰이 생각했지. 이럴 때 무슨 얘기를 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말한 시대의 징표는 뭔가. 그걸 생각했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이 종북몰이더라구. 여태 해오던 생각을 말한 거예요. 그런데 사실 그날 강론을 하려고 보니 준비한 원고 중에 한장이 빠져있더라구. 그래서 처음에는 원고를 보고 하다가 나중에는 원고없이 생각나는대로 했지." 

-빠트리신 원고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까.

"노동자, 농민문제야. 나는 옛날에 농민회 지도신부여서 그 관계를 잘알아요. 1975년부터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여서 농촌문제를 잘 알아."

-보수언론과 새누리당이 강론에서 하신 연평도 포격 발언을 문제삼았습니다. 그 발언은 어떤 뜻에서 하신 건가요.

"6.25 전쟁 이후에 우리는 북을 적으로 규정해오고 있어요. 반공으로 뭉쳐서 정치에도 써먹고 말야. 그런데 2000년에 6.15 선언하고 북하고 화해를 합니다. 노무현 때는 10.4 정상선언을 했어요. 화해를 했으면 민족이 합치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정권이 바뀌고) 다시 북을 적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연평도 사건이 터져서 종북논리가 퍼져갔어요.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을 정권이) 써 먹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 써 먹혀서 이런 정국을 만들었다 싶으니까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우리가 화해를 해야 하고 남북이 공존하면서 평화로 가야 하는데 역행을 하는 게 어딨냐 말야. 이건 엄청난 역행예요. 그래서 연평도를 얘기한 거예요. NLL을 지키지 말자는 것도 아니고 포격 사건을 잘했다는 게 아녜요. 우리가 화해를 해야 할 때 왜 거기서 훈련을 하냐. 그 얘기를 한 겁니다. 어떻게 종북몰이를 하는지 과정을 얘기한 겁니다."

-시국미사에서 사제단이 박 대통령 사퇴도 요구했는데, 사퇴요구는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시기상조가 아녜요. 우리 국민은 반공이라고 하면 깜박 죽는데 그걸 이용해서 인터넷에 띄우고 (국정원, 국가보훈처 등) 중립을 지켜야 할 국가기관이 선거에 개입한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런 식으로 국가기관을 동원하고 언론을 휘어잡으면 정권교체를 할 수 없어요. 보수와 가진자, 기업만을 위한 대통령을 뽑을 수밖에 없어요. 국가기관이 종북몰이를 하며 총체적으로 선거에 개입한 건 헌법을 부정한 거예요. 또 대선 공약도 지키지 않잖아요. 이건 표 도둑질예요. 지금 퇴진운동을 해야 해요." 

-강론에서 종북몰이가 가장 화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 강론 후 종북몰이의 희생양이 되고 계십니다.

"내가 종북대장이 됐지.(허허). 나는 이 문제는 아무도 얘기할 수 없는 문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치인이 이 얘기를 하면 정치생명이 끝나요. 일반인이 하면 자기 사업에 지장을 받아요. 이 거대한 것을 아무도 손댈 수 없겠다, 신부밖에 할 수 없겠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기소가 돼서 재판정 가면 증거할 거예요. 이것(종북몰이)가 뭔지 얘기해서 앞으로 우리사회에서 종북몰이가 없어질 수 있도록. 그래서 지방색도 없고 종북논리도 없어지고 정책으로 지지받아서 대통령이 선출되고, 자연스럽게 정권교체가 이뤄져서 어느 때는 기업을 위한 정부가 들어서고, 어느 때는 노동자를 위한 정부가 들어설 수 있도록, 그거에 기여할 수 있다면 두려운 건 없어요."

-정부에 비판적이거나 힘을 모아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모두 종북이 되고 있습니다. 요새는 종박(從朴)이 아니면 종북이라는 웃지못할 얘기까지 나옵니다. 정말 정상적인 사회라는 생각이 안 듭니다.

"유신 때 보다 더한 것 같아요. 나는 유신 때 농민회 지도신부를 했는데 그때도 엄청 무서웠어요. 유신헌법을 비판하면 바로 군법회의에 끌려가고. 음식점에서 술먹다가 한 얘기도 어떻게 알았는지 바로 잡아가요. 지금이 그런 시대예요. 계속 몰아대는 게 유신하고 똑같아요. 지금이야 말을 할 수는 있으니 다행인데 유신 때는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종북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 선긋기를 합니다. 민주당도 예외가 아닙니다. 괜한 말을 해서 종북몰이를 당한다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내가 강론 때 그랬어요. 강론을 하고 나면 송 신부(송년홍 천주교 정의구현 전주교구 사제단 대표 신부)는 잡혀가고 나는 웃기는 사람이 될 거라고. 이렇게 당할 거라는 건 다 생각을 했어요. 내가 생각을 많이 한 거예요. 이렇게 나올 걸 다 알고 한 건데 두려울 게 뭐 있어요." 

-위세 당당한 종북 프레임, 종북 몰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한 사회에는 보수도 있고 보수가 아닌 혁신도 있어요. 하나는 좌고 하나는 우예요. 새가 양날개로 날듯이 좌와 우가 같이 사는 겁니다. 근데 이 좌를 적이라고 규정하면 좌는 좌라고 않죠. 나는 좌가 아니라고 하고 숨게 돼요. 오늘 날 현상이 이런 현상예요. 좌는 좌고 우는 우죠. 좌를 보고 빨갱이라고 하면 다 손가락질을 하는데 좌와 우가 정확허니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사회가 잘 되는 사회예요. 정권도 서로 교대하면서 잡고 해야 이 사회가 편안한 사회지. 한 날개를 끊어버리면 새가 어떻게 되겠어요? 제대로 날지 못하고 뺑뺑 돌다가 말아요. 발전이 없어요. 좌는 좌라고 생각하고 우는 우라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그런 사회가 되려면 좌를 적으로 규정하면 안 돼요." 

-좌우 모두 명심해야 할 얘기일텐데요, 사실 우리 사회의 기득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우쪽인데 저는 우리 사회에 제대로 된 우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제도가 있어요. 이걸 지키려는 게 우예요. 반대쪽을 적으로 규정하는 건 우가 아녜요. 자기들이 가진 걸 놓지 않으려고 아주 병적으로 행동하는 거예요. 아주 나쁜 사람들예요. 너무나 병적이야."

-신부님께서야 두려움이 없다고 하셨지만, 주변에선 걱정을 많이 하시지요.

"걱정을 많이 하죠. 방금도 미사를 두 개 하고 왔는데 사람들이 울먹울먹하고 그러더라고. 오전에는 어머니도 뵙고 왔어요."

-어머니라고 하시면.

"어머니가 살아계세요. 올해 93세이신데, 어머니도 (이번 일을) 알고 계신데 그냥 이렇게 쳐다 보시지 뭐. 우리 어머니가 내가 테러 당했을 때도 고생을 많이 한 분인데 아주 용감하셔. 옛날에는 잘 견뎠는데 지금은 노인네라..."

박창신 원로 신부가 편안한 자세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창신 원로 신부가 편안한 자세로 인터뷰를 하고 있다.ⓒ민중의소리



박정희 긴급조치 시대에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로 농민운동하며 데모 활동
광주 5.18 때는 "공수부대 민족반역자들, 밥도 주지말라" 일갈, 테러 당하고 겨우 목숨 건져


박창신 신부의 시국미사 강론 파문이 커지면서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한 장의 사진'이 네티즌들 사이에 공유되면서 퍼져나갔다. 박창신 신부가 1980년 5.18 광주 항쟁 당시 광주학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하다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해 병원에서 피를 흘리며 치료를 받고 있는 사진이었다. 인터뷰의 물꼬를 돌려 서슬 퍼렇던 유신 독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봤다. 

-원래는 공대를 졸업하셨죠. 사제가 될 생각은 뒤늦게 하셨나 봅니다.

"화공과를 졸업했어요. 초등학생 때부터 우리 마을 사람들은 저보고 사제가 되라고 권유했어요. 내내 그런 생각을 안 하다가 대학교 2학년 때 사제가 되기로 마음 먹었어요. 졸업하고 군대 갔다와서 신학대학에 들어갔죠. 그러니까 대학을 10년 이상 다녔지. 그러고 1973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어요. 아주 젊을 때죠. 시퍼럴 때지."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을 초기부터 같이 하셨나요.

"처음에는 같이 하다가 내가 사회운동을 하면서 뜸했지. 내가 전라북도 민주화운동단체를 한 이십년 했는가봐. 87년부터 했으니까. 그렇게 하다보니 정의구현사제단은 좀 멀리하게 돼서 한 10년 정도는 안 한 것 같아요. 그러다 이번에 강론 때문에 글루 들어가서...(하하)"

-1980년 5.18 때는 광주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활동하시다가 고초를 당하셨죠. 무슨 활동을 하신 겁니까.

"내가 1975년부터 농민회 지도신부를 하면서 농민운동을 했어요. 그때는 긴급조치 시절인데 아무도 데모도 못하고 꽉 막혀있던 때지. 정말 무서울 때인데, 가톨릭농민회에서 쌀 생산비조사를 해서 쌀값을 올려달라는 데모를 하고 다녔어요. (박창신 신부는 "이게 아주 귀중한 물건"이라며 허리띠를 풀어 보여줬다. 허리띠 버클에 쌀 그림이 그려져 있고 '78 쌀생산비조사'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다보니 정부하고 가톨릭농민회하고 아주 예민할 때지. 그러다가 1980년 5월 19일에 광주 북동성당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총무가 5.18 상황을 보고했어요. 아주 무섭다고. 그때는 언론이 꽉 막혔잖아. 지금은 새누리당으로 간 김현장이라고 있어요. 그 사람이 광주를 탈출해서 전주교구청에 와서 '전두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인쇄물을 만들어서 전라북도에 다 뿌리고 다녔어요. 나는 그때 여산성당에 있었는데 신자들과 학생들이 유인물을 나눠주다가 경찰에 잡혀간 거예요. 대전 계엄사까지 끌려가고 아주 난리가 났었는데, 그때 7공수가 여산성당 관할인 충남 금마면에 있었어요. 내가 거기서 앰프를 들고 '광주에서 작전하는 공수부대들 밥도 주지말라고, 민족 반역자'라고 하고 다녔지. 작은 동네인데 난리가 났죠. 결국 한달 후에 여산성당에 (괴한들이) 와서 나를 치더라구. 그 뒤에 하체 마비가 와서 5~6년 고생하다가 지금 이렇게 절룩거리고 다녀요." 

박창신 원로신부가 1970년대 농민사제로 일하던 때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며 허리띠를 풀어 보여주고 있다. 허리띠 버클에는 '78 쌀 생산비 조사기념. 한국가톨릭농민회'라고 쓰여 있다.

박창신 원로신부가 1970년대 농민사제로 일하던 때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며 허리띠를 풀어 보여주고 있다. 허리띠 버클에는 '78 쌀 생산비 조사기념. 한국가톨릭농민회'라고 쓰여 있다.ⓒ민중의소리



-당시에 생명까지 위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요, 위험했죠. 내가 원래 청년들을 사제관에 안 데려 가는데 (테러를 당한) 그 날은 청년들을 데려갔어요. 그때가 토마토가 나올 땐데, 우리 집에 가서 토마토 먹고 음악 감상을 하자고 하니 청년 둘이 따라 나섰어. 그 청년들이 있어서 안 죽었지. 나 혼자 있었으면 죽여놓고 갔겠지. 아주 무서운 시절이었어요. 지금 또 당하고 있는데 인제는 마지막을 장식하는 거지."

-박정희 정권 때 데모하고 그러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가톨릭농민회, 천주교만 한 거예요. 그때 오원춘 사건 등 엄청난 사건들이 많았어요. 유신 정권 말기하고 요즘 현상하고 비슷해요."

오원춘 사건은 1979년 5월 5일 안동의 농민운동 지도자 오원춘이 백주 대낮에 정보기관원에게 납치당한 사건이다. 78년 경북 영양군 청기면 농민들은 군과 농협에서 알선한 감자씨(시마바라)를 심었으나 싹이 나지 않아 감자농사를 망치자, 진상조사 후 당국에 피해보상을 요구해 비교적 수월하게 피해액 전액을 보상받았다. 그러나 79년 5월 이 피해보상운동에 앞장섰던 오원춘이 기관원에게 납치돼 감금되고 테러를 당했다. 당사자인 오원춘은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농민운동을 위해 진실을 밝혀야겠다고 나섰고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와 사제단은 7월 17일 이 사실을 전국에 폭로했다. 

이에 당황한 당국은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오원춘을 비롯,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간부와 신부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했다. 또 대통령 특별조사령, 매스컴을 통한 사실왜곡, 농민회 및 교회비방 등 온갖 탄압을 자행해 사건이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유신헌법 철폐와 종교탄압 중지를 요구하는 기도회·단식기도·가두촛불시위가 가톨릭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전개됐다. 이러한 사태의 확산으로 가톨릭농민회 전국회장이 구속되는 등 농민운동에 대한 극심한 탄압이 뒤따랐으나, 이 사건은 전국적인 연대투쟁을 통해 농민운동의 질적 발전을 가져온 계기가 됐다. (*한국근현대사 참고)

-박근혜 정권은 집권하고 1년도 안 지났는데요. 유신 정권 말기랑 비슷하다면... 

"아주 잘못됐죠. 부정선거를 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어요. 부정선거 문제에 냉랭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굉장히 붙어 있어요. (정권이) 조금 잘못하면 폭발할 것 같아요. 올 겨울은 추워도 뭔가 할 것 같아. 올 겨울은 아마 뜨거울거예요." 

-작년에 은퇴를 하셨죠. 지난 40년 동안 사회활동을 해 오셨으니 이제 좀 쉬셔야 할 때인데...

"은퇴하고 일주일에 네 번 장구를 가르치러 다녔어요. 잘은 못 쳐도 가르칠만한 실력은 돼요. 앞으로는 못 가르치겠구만...(옆에 같이 앉아있던 신도가 '기소할 건덕지가 없는데 무슨 소리 하시냐'고 한 마디 했다.) 미쳐 버리면 하는 거야. 나 잡아다 놓고 내가 말 한 마디 하면 그걸 또 이용하고 그러겠지. 나야 상관없어요. (감옥에서) 밥이나 먹고 있는 거지. 그런데 (권력이) 미치면 (그 권력은) 오래 못 가요."

"정치가 잘못하면 밥도 못먹어.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는 건 밥도 먹지말라는 얘기"

박창신 신부의 강론 후 새누리당과 보수세력은 사제의 정치 참여를 비판했다. 새누리당에서는 "사제복을 벗고 발언을 하라"는 말도 나왔다. 박창신 신부는 정치를 밥에 비유하면서 이를 반박했다. 

"종교가 정치에 개입해선 안 된다는 것은 정당 당원이나 국회의원을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밥을 먹는 것도 정치입니다. 정치가 잘못하면 밥도 못 먹는 거예요.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은 밥도 먹지 말라는 얘기랑 똑같은 거예요. 사회 비판은 모든 크리스챤이 다 할 수 있는 겁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시국미사 이후 개신교와 불교쪽에서도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 내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사제단에서는 전주교구와 거리를 두는 분위기였는데요.

"같이 합친 거 같아요. 오늘 보니 분위기가 좋던데요. 대통령 퇴진을 요구한 시국미사를 상의하고 해야 하는데 전주교구에서 단독으로 해서 그랬던 건데, 나중에 좋은 일은 다 합쳐지게 돼 있어요. 나는 내 일 때문에 퇴진운동 분위기가 꺾일까봐 걱정이었는데, 안 꺾이는 것 같아 다행예요. 지난 번에는 NLL 갖고 난리를 치니까 본질을 잊었잖아요. 지금은 그러지 않고 제대로 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 기분이 좋아요. 전주 성당의 어떤 아줌마는 내 강론 전문을 인쇄해서 나눠주고 다닌다고 하더라구. 이 분위기는 사실 나를 모함하고 그러면서 야들(정권, 새누리당)이 키운거지." 

박창신 신부는 "세상은 변했는데 하는 짓이 똑같으면 안 통한다"면서 "강하게 누르면 누를수록 강하게 반발하게 돼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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