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권은 10.26의 의미를 되새겨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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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카페에 들어와 커피 잔을 감싸쥐며 손을 녹여야 할 정도로 날씨가 쌀쌀해졌습니다. 아직 영하로 떨어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11월이 코 앞으로 다가온 시간, 계절은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곳은 10월 25일 오후. 한국은 10월 26일이겠군요. 우리에겐 분명히 역사적인 날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하얼삔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하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떨칩니다. 일본의 대륙 정복 야욕의 상징이나 다름 없었던 이토 사살은 국권을 거의 상실한 우리 민족의 분노를 일본 제국주의에 보여줌과 동시에 일본 침략세력이 잠깐이라도 주춤할 수 있었던 거사였고, 당시 일본의 침략 야욕에 의해 분노하고 있었던 중국의 반일 세력에게도 커다란 의미가 되어 그들의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딱 70년 후의 같은 날, 청와대 옆 궁정동 안가에서는 유신 독재의 심장, 박정희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사살당합니다. 청운국민학교 5학년에 재학중이던 저는 그날도 다른 날과 같이 친구들과 궁정동 입구의 자전거 대여점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청운동과 궁정동을 씽씽 신나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궁정동 파출소 경찰관 아저씨들도 원체 저희가 그곳에서 늘 노는 줄 아는지라 별 제지도 없었고, 심지어는 사건 현장이 될 그곳의 앞길도 우리 동심들에겐 그저 놀이터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학교에 가기 전, 길바닥엔 호외가 널려 있었습니다. "박대통령 유고"라는 제목의 한 장 짜리 신문. 그리고 어머니께 유고라는 한자가 뭔지 물어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것이 어떤 뜻인지는 몰랐습니다. 그저 뭔가 큰일이 일어났다는 것만 느꼈을 뿐입니다. 세상이 시끌시끌할 정도의 큰일이. 그리고 학교에 갔을 때, 우리 꼬마들도 뭔가 큰일이 났다는 것만 짐작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학교는 일찍 파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날도 자전거를 타러 갔는데, 궁정동 쪽으로는 얼씬도 못하게 경찰들이 막았던 것도 기억납니다.
머리가 좀 크고 나서야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해, 국민학교 6학년이 되고 나서 어른들이 '전서리'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갸우뚱해서 다시 어머니께 제가 들은 이야길 했습니다. "서리처럼 확 내려서 전서리래, 저 사람이." 아마 그 서리는 '중앙정보부장 서리' 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했는데, 어머니는 제게 분명하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어디가서 그런 이야기 함부로 하고 다니지 말아."
박정희의 독재는 그렇게 종일 어떤 TV를 틀거나 흘러나오는 페르귄트 조곡 중 '오제의 죽음' 과, 한시도 화면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박정희의 얼굴과, 그리고 시간이 됐어도 방송되지 않았던 어린이 만화 프로그램과... 이런 기억들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꽤 흐르고, 저는 유신이란 것이 얼마나 국민들의 기본권을 억압하고, 또 민주주의를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통해 찾아 왔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나이가 됐습니다.
요즘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면서 그 유신의 잔재가 그대로 되살아옴을 실감합니다. 모든 국가 기관이 한통속이 되어 선거에 관여해 민주주의의 본령인 삼권분립의 정신을 유린하고, 여기에 대해 지적하고 규탄하는 모든 목소리를 억누릅니다. 언론의 자유는 애시당초 이 정권이 출발하기 전에 유린당해 그들이 바른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입이 막혀 버렸고, 그 안에서 그나마 깨어 있는 사람들이 그나마 남아 있는 인프라를 통해 대안언론이라는 이름으로 어렵게 바른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민중의 목소리를 폭력으로 막으려 했던 위수령 하의 부산과 마산에서 벌어진 민중의 항쟁은 결국 유신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 목소리를 느꼈던 박정희의 충복은 결국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말했습니다. 유신은 바로 그 '유신의 심장'의 박동이 멎고 나서야 끝났습니다. 그러나 민주화를 채 완전히 준비하기도 전에 새로운 군부독재는 다시 그 검은 발톱을 드러냈지만. 그리고 나서 채 10년이 안되어 국민은 저들의 (그것이 기만적이었을망정) 항복 선언을 받아 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나서 처음으로 수평적인 정권 교체가 이뤄지고 민주주의의 진전이 이뤄진 10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하긴 나라가 만들어지고 나서 계속 친일의 후예들이 권력을 잡고 있다가 겨우 10년간 민주주의의 맛을 보았었을 뿐이니, 그것만으로는 아마 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내리기엔 힘들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 이후 지금까지, 다시 그 유신의 그림자를 드리우려는 저들의 노력은 부단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유신시대에나 있었던 일들을 다시 목도하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매체를 장식하는 뉴스들은 지금 한국이 어떤 상황인지를 참으로 극단적으로, 초현실으로 내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시민정신은 분명히 민주주의 10년을 맛봤고, 또 깨어있는 시민들간의 소통이 가능한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인프라가 생김으로서 분명히 과거와는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권력을 잡고 그것을 영원히 향유하려 하는 저들의 시각은 박정희 유신 당시나 지금이나 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여기엔 커다란 간극이 있습니다. 상황을 인식하는 척도의 간극에서, 우리는 지금 당장은 절망스럽기 그지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간극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10.26은 독재자가 피살당한 사건이지만, 더 나아가 국민에게 귀를 닫았던 권력이 얼마나 허망하게 붕괴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상징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정권을 쥔 자들이 일부러 여론에 대해 귀를 닫고 있는 이 상황은, 어쩌면 1979년 10월 26일 당시의 상황과도 비슷하다 할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박정희의 10.26'보다는 '안중근 의사의 10월 26일 의거'를 먼저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역사의식이 다시 분명히 자리잡게 될 때, 그때 우리는 진정한 민주주의 강국, 통일강국을 이루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 봤습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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