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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북부조국 방문기 30. 토지개혁은 천지개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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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9건 조회 62,209회 작성일 14-12-0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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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30


토지개혁은 농민들에게 천지개벽이었다.


강당에서 응원연습을 하는 농장원들을 잠깐 들여다보고는 왼편에 위치한 제법 넓은 방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그 방의 사방 벽면은 사진과 그림과 도표들로 가득한데 바로 이곳 만경대협동농장의 지난 역사를 잘 설명해놓았다.  나처럼 북부조국의 농촌을 제대로 공부하려는 마음으로 찾은 사람에겐 아주 중요한 자료들이어서 사진으로 그 현장을 잘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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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대협동농장은 이름 그대로 김일성 주석이 태어난 만경대 주변에 위치한 농장이다.  이곳 농촌이 김 주석의 고향이라는 조건과 농민들의 자발적인 개혁의지는 해방후 처음부터 이곳이 전체 북부조국 농촌의 혁명적인 변화를 선도해서 이끌어나간 모범이 되는 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김 주석이 이곳을 1945년부터 1985년까지 40년 동안 모두 44차례나 현지지도를 한 것으로 보아 농촌의 발전과 농민들의 생활 향상을 위한 김주석의 깊은 관심과 배려의 정도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이곳을 모두 15번 찾았고, 김정숙 여사도 6번을 찾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서 1985년 이후엔 북의 지도자가 이곳을 방문하지 않은 것을 고려해보면 이때쯤은 이곳 만경대협동농장이 이미 북부조국의 모범이 되어 이후의 30년 동안은 다른 필요한 곳을 현지지도한 것으로 고려할 수 있을 것 같다. 


김 주석은 해방 후 일이 바빠 고향을 바로 찾지 못하고 1945년 10월 14일에야 만경대를 찾아 조부모님과 감격적인 상봉을 하였고 그 다음날인 10월 15일에 남리 인민들과 상봉하였다고 한다.  내가 만경대 고향집에서 마주하지 못했던 자료들도 여기에 있다.  당시의 신문기사로 인민들이 열렬히 환영한 것과, 김주석이 인민들에게 만경대를 살기좋은 고장으로 만들고 새나라를 세우는데 힘써주길 당부하는 내용, 만경대 고향집을 1946년 크게 보수한 것과 1959년 5월 9일에 원상대로 복구한 내용, 그리고  김형직 선생과 강반석 여사의 유해를 고향땅으로 이장한 내용도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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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크게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싶은 부분은 1946년의 토지개혁이었다.  토지개혁은 북부조국 전역에서 동시에 결정되고 실행되었는데 1946년 3월 한 달 동안에 모든 지주의 땅을 무상으로 몰수해서 인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였다고 들었는데 그 현장 가운데 핵심적인 곳을 지금 찾아와 당시의 상황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이곳 만경대 일대의 지주가 소유한 토지는 전체의 85%가 되었고 그외 부농, 중농, 빈농, 반소작 반자작으로 구분되는 토지가 나머지를 차지했는데 그 가운데 지주 소유의 562정보를 포함하여 578 정보를 무상으로 몰수하였다고 한다.  몰수한 토지 가운데 570 정보를 380여 농가에 무상으로 분배하였으니 이건 천지개벽과도 같은 일이다.   조상 대대로 지주의 땅을 붙이며 가혹한 지대와 세금에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시절을 살아왔던 농민들이 해방이 되고 바로 다음 해인 3월 한 달 동안 이렇게 나라에서 농사지을 땅을 주었으니 그 기쁨이 어떠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라.  이제 새봄이 와서 논밭에 씨뿌릴 때가 되었는데 지금까지와는 달리 지주의 땅이 아닌 자신의 땅에 파종할 수 있게 된 것이니 농민들은 그야말로 해방의 기쁨과 동시에 새로 땅을 갖게 된 기쁨까지 함께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 토지개혁이야말로 북부조국 농민들에겐 천지개벽을 맞이한 것과 같은 기쁜 일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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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농가당 대략 1.5 정보의 땅을 분배받았는데 이는 4,800 평에 해당한다.  논으로 환산하면 200평이 한 마지기니 한 농가당 24마지기의 땅이다.  내가 어렸을 때 보통으로 사는 친구들의 세대당 보통 10마지기 정도의 땅을 갖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의 땅을 갖게 되는 것은 중농 혹은 부농에 속한다.  북부조국 전체로 보아서 만경대는 인구밀도가 높았으므로 인구밀도가 낮은 지방에선 더 많은 땅을 분배받았을 것이다.  우리 역사상 나라에서 이렇게 넓은 땅을 인민들에게 그저 준 적이 있었던가?  그야말로 천지개벽의 일이 아닌가?  토지개혁으로 토지를 몰수당한 지주들에게도 일반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그 토지는 똑같은 넓이로 공평하게 다시 분배했다고 한다.


이런 토지개혁이 위에서 지시한다해서 저절로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도표에서 그 비밀을 얼마간 알 수 있어 여기 옮겨본다.  먼저 당세포와 인민위원회를 조직한 것이다.  1946년 1월에 남리에 공산당세포를 조직하였고, 이후 1946년 3월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고 적혀있다.  이어서 추자리, 송산리, 내리에도 당세포와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고 되어있다.  또한 도표에 의하면 1946년 3월 8일에 6명의 위원으로 농촌위원회를 조직하였고, 토지개혁을 실질적으로 집행한 것은 농촌위원회에 의한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으로  농촌위원회가 그 일을 할 수 있기까지는 김주석의 뜻을 받들어 온 나라의 당세포와 인민위원회가 뒤에서 받쳐주었고 저 도표에서 '토지개혁을 위한 투쟁'이란 제목이 보여주듯 그 일에는 인민들의 단합과 투쟁이 있어 가능하였을 것 같다.  새로 나라를 세워나가면서 이렇게 미리 온 나라의 토지를 지주들로부터 몰수하는 일은 제법 큰 저항이 따랐을 것이기에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을 한 달만에 이뤄낼 만큼 이미 북부조국 전역에서 김주석은 인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신임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토지개혁이 이뤄진것이  46년 3월이니 이 시기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된 지 겨우 7달 만의 일이다.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소련의 군대가 주둔해있는 상황에서 소련식이 아닌 김주석의 뜻대로 북부조국이 토지개혁을 달성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부조국은 처음부터 그곳 인민들에 의한 참 민주주의를 이뤄나가도록 소련은 도와주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미군정하의 남한에서는 혼돈으로 가득한 시절이었고 이런 토지개혁은 꿈도 꾸지 못한데다 이후 유상으로 몰수하고 유상으로 분배하려했던 것마저도 흐지부지된 것과 크게 비교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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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경대협동농장을 방문한 지 며칠 후에 김철주사범대학의 정기풍 교수가 평양호텔로 찾아와 면담을 하였다.  정기풍 교수로부터 내가 들은 북부조국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토지개혁에 관하여 대화한 것을 여기 미리 옮겨본다.  정기풍 교수에 의하면 북부조국이 해방후 토지개혁을 실시할 때 처음부터 소련식의 꼬르주라 부르는 집단농장으로 하자는 의견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김일성 주석은 우리나라의 농민들이 조상대대로 자기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지주의 소작농으로 한많은 삶을 살아왔는데 이제 농민들에게 새나라는 무상으로 땅을 주어서 일단은 그 한을 풀게 하자고 했다고 한다.  당시 제대로 각성하지 못한 농민들의 입장을 헤아린 것이었다.  아무런 농자금도 없고 농사를 지을 도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농민들에게 낮은 이자로 나라에서 돈과 비료를 대부해주고 농사를 지을 도구들도 제공해주었는데 자신의 땅이 생기자 농민들은 그야말로 열심히 농사를 지어 크게 수확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해 가을의 작황에 따라 나라에 20%-30%만 바치고 나머지로 곳간이 가득하게 되자 모두들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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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풍 교수가 토지개혁과 협동농장으로 발전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름이 김재원이라는 한 농부는 너무 기쁘고 고마운 나머지 소달구지에다 쌀을 가득 싣고는 김일성 장군의 집으로 찾아갔다고 했다.  그 집에서 어떤 여성이 맞아주어서 함께 그 많은 쌀을 모두 내려놓고는 그 농부가 말하기를 나는 여기까지 온 김에 꼭 김정숙 여사를 만나뵙고 가야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자신과 함께 힘들게 쌀을 옮겨놓은 분이 바로 김정숙 여사였다는 것을 알고는 이렇게 겸손한 분이 있는가하고 감동하였다면서 여기저기 그 일을 알렸는데 거기서 '애국미'가 탄생했다고 하였다.  '나라가 우리 인민에게 이렇게 잘 살도록 해주는데 우리 인민이 가만히 있어서는 되겠는가?  지금 나라를 새로 건설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도 많고 할일도 많은데 우리들이 먹고 남는 쌀을 나라에 바치자'면서 애국미 운동이 전국적으로 불타올랐다는 것이다.  인민들이 스스로 나서서 일으킨 이 애국미 운동이 새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토지개혁을 통하여 농민들에게 땅을 무료로 나눠주어서 개인농으로 시작한 북부조국의 농촌은 이후 농민들 각자의 필요와 나라의 권유에 의하여 협동농장으로 바뀌게 된다.  이 부분은 내가 미국 땅에서 개인농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겪었던 여러가지 애로사항이 있었고 개인농의 한계를 너무도 잘 알기에 협동농장으로 진화하고 발전해나간 북부조국 농촌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다음 회에서 그 이야기를 이어가기로 하자.


아래 링크에서 방문기 29회를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www.hanseattle.com/main/bbs/board.php?bo_table=freeboard&wr_id=11614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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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님의 댓글

광개토왕 작성일

글쓴이 자신이 제법 긴 세월 농업에 직접 몸을 담았던
경험이 있는 분이여서인지 전반적 글이 실감이 있고
흥미진진합니다. 

우리가 해방당시 남북 각각의 토지개혁 관련한 사안에 대하여
좀 더 공부를 한다면 글쓴이의 이야기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겠다는 느낌도 듭니다.

결국은 학교교육에서부터 남북문제 해결에 역점을 두면
장기적 통일정책을 제대로 이루어갈 수 있을터인 바
전교조 등을 탄압하는 상황에서 그런 기대를 전혀 할 수가
없었다고 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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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광개토왕 님, 글의 이해를 위해서 다음 글에는 저의 농장 경험도 일부 포함해서 써야할 것 같습니다. 

해방 후 남한의 토지개혁은 지주의 땅을 유상으로 국가가 사서 유상으로 분배하려 했는데 그 정책이 실패하였다고 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국가가 돈도 없는데 유상으로 구입한다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고, 또한 돈 없는 농민이 유상으로 구입하는 것도 어려웠겠지요.  그마저도 정책만 세워놓고 흐지부지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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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학교에서 지난 역사를 바로 가르쳐야 하는데 교과서부터 전부 왜곡해서 만들어내고 그걸 학교에서 가르쳤으니 통일과는 반대로 갈 수밖에 없었겠습니다.

전교조를 탄압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하겠지요.  참교육으로 제대로 의식있는 민중이 되도록 가르쳐야 할 학교가 저렇게 엉터리로 가르쳤으니 그 죄가 얼마나 큰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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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우님의 댓글

황진우 작성일

'나라'는 인민, 땅, 정부 이 세가지가 기본요소이므로
이 가운데 그 어느것도 개인 소유가 되어선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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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아고라에서 제 글을 읽은 어떤 사람이 쓴 댓글입니다. ///// chello어느 대하소설에서 본 글이 생각난다(남부군으로 기억됨) 선생님인 지주집 아들이 자기집 머슴에게 만약 국가가 토지를 무상으로 준다면 어떻겠느냐 하니 그렇게 좋은 세상이 어디있느냐 말한다 이에 다시 그런대 그땅에서 수확되는 모든 것을 국가가 가져가고 대신 배급을 타먹고 살면 어떻겠느냐 하니 그런 시러배같은 세상이 어디있느냐 한다... 공산주의 토지개혁은 일종의 토지노예화 이다 평생을 그 땅에 묶여 국가가 시키는대로 만 따라야 하고 일해야 하며 할당량을 채우지못하면 자아비판을 해야하는... 이에 비판 반대하고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하겠다 하면 이는 "반동(분자)"이다 그것이 노예가 아니고 무엇인가? ////

그래 제가 답글을 아래와 같이 썼습니다. // CJK제 방문기를 계속 읽어보면 어떻게 농민들에게 분배되어지는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북이 인민을 착취하는 나라로 아시는 것이 지식은 많은 분 같은데 여전히 세뇌된 것을 씻지 못하는군요. 안타깝습니다. 땅도 주고 트랙터도 주고 기름도 무료로 주고 주택도 무료로 주고 아이들 교육도 무료로 주려면 국가에서 돈이 필요하겠지요. 그렇지만 전체 수확량의 30% 정도만 나라에 바친다면 할 말 있으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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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님의 댓글

주체 작성일

지난 70년이란 긴 세월동안 문학이건 음악이건 아니 사회 모든 채널을
통하여 줄기차게 북을 깎아내리고 음해해온 결실을 톡톡히 보고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한국은 진정 제국주의 국가가 가장 모범적이고 성공적으로
지배해온 국가중의 하나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동구의 우크라이나에 이러한 한국의 성공사례를 접목시키려
시작하고 있기도 하지요.

세뇌된듯 보이는 당사자들이 아둔하게 보여 때로는 그들을 욕해보기도
하지만 실은 그사람들도 피해자이므로 나무랄게 아니라 연민의 정으로
대해야 하지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현재 이런 방북기를 쓰거나 또한 그 논조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어찌보면
우연히 운이 좋아서 그들보다 조금 더 일찍 바른 정황을 알게되었을 뿐이겠습니다.

70년간 세뇌되었다면.. 누군가 또 다시 70년에 걸친 큰 노력이 가해져야
그런 세뇌에서 벗어나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 견지에서 본 여행기는 그 큰 노력의 일환이자 밑거름이 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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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형근님의 댓글

백형근 작성일

45년 일본인들이 물러갈 때 조선의 전 국토와 공장은 일본인들 소유였고 극 소수만 친일매국노들이 차지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주인이 없어진 "토지는 농민에게 분배"하고 "공장은 노동자가 자주관리"한다는 원칙은 상식이었지 않나요?

남한은 1946년 미군정청이 여론조사를 했을 때 80% 이상의 사람들이 주인없어진 일본인 재산은 사유화가 아니라 "토지는 농민"이 "공장은 노동자"가 관리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남한을 식민지로 통치하기 위해 온 미군정청은 사유 재산을 거부하고 공유화를 주장하는 사람과 분단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전부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지 않나요?

즉 당시는 모든 사람들이 사유화를 폐기하고 공유화 내지는 사유화를 주장했는데 북한은 오히려 국유화로 관료들이 통제하는 형식을 취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페북은 장난치는 무리가 많아 그런지 글이 달리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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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북에선 공장의 시설들을 일제가 대부분 파괴하고 도망하는 바람에 다시 그걸 살리기 위해서 당시 기술자들을 모두 불러들여 새나라를 건설하는데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최고의 악질들이 아니라면 새로 일할 수 있게 한 것이지요. 그렇다고 남한처럼 그들에게 권력을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기술이나 지식으로 새 나라 건설에 이바지하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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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나님의 댓글

세르나 작성일

'통일은 대박이다'라고 말한 대통령 박근헤의 그 말에, 통일의 대상이 북한이며 또한 그 북한을 구성하고 있는 민중은 우리 민족이며 동포라는 뜻이 당연히 포함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남북통일은 단순히 '헤쳐 모여'하는 행사가 아니다. 남과 북은 서로를 잘 알아야 한다. 그것이 통일을 하기위한 가장 기초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환상적으로 말하는 통일은 정치꾼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타개하는 수단으로만 이용될 것이다. 이번 신은미씨의 북한방문 토크쇼는 북한을 아느데 기여할 것이며 그것은 통일을 지향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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