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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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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7건 조회 77,543회 작성일 14-10-18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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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3


만경대 고향집에서 1 



황윤미 해설선생의 안내로 고향집으로 들어선다.  오른편이 본채이고 왼편이 사랑채다.  이곳 만경대 고향집엔 김일성 주석의 증조할아버지 대부터 살아왔는데 그분은 이곳 만경대 일대의 넓은 땅을 소유한 대지주의 산당지기였다고 한다.  그 지주의 조상들의 묘들이 이곳 만경대에 있었고 그 묘들을 지키고 돌보는 일을 김주석의 증조 할아버지대부터 했다는 것이다.  연도로는 1862년부터 1959년까지 4대에 걸쳐서 가족들이 이 집에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김 주석은 1912년 4월 15일에 이 집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김형직 선생, 모친은 강반석 여사다.  이곳 뒷산 만경대는 김 주석이 동네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던 놀이터였다.  이미 5살 때 부친 김형직 선생께선 식민지 시대의 일제에 대한 혁명투쟁으로 검거되어 평양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반일지하조직인 ‘조선국민회’를 김형직 선생이 조직하였다가 잡힌 것이다.  아버지가 온 몸에 멍이 든 모습을 보고는 그렇게 만든 일제에 대해서 김 주석은 어려서부터 원수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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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 인민봉기가 일어나자 주석은 7세때에 그 시위에 앞장서서 참여했다고 한다.  거기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하고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일제는 전체 조선민족의 원수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후 부모와 함께 중강으로 이사했는데 그곳에서도 일제의 식민지배는 마찬가지여서 조선 전체가 왜놈 감옥이라며  다시 만주 통화성 림강을 거쳐 장백현 팔도구로 가서 거기서 부친은 반일투쟁을 하였고, 주석은 그곳 소학교를 졸업하였다고 한다.


부친 김형직 선생이 주석에게 ‘먼저 조국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에 따라 12세 되던 해인 1923년에 ‘배움의 천리길’을 혼자서 걸었다고 한다.  3월 16일에 출발하여 이곳 만경대 고향집에 3월 29일에 도착하기까지 노상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었고, 30리 떨어진 칠골의 외가로 가서  2년 동안 창덕학교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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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1월 중순에 아버지가 다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원수를 갚기 전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조국광복의 큰 꿈을 품고 ‘광복의 천리길’을 다시 떠나 중국 동북지방의  무송제1소학교에 편입하였다.  다음해인 1926년에 부친 김형직 선생이 감옥에서의 고문 후유증으로 30세의 젊은 나이에 서거하였다.   주석은 화성의숙에 입학하여 그때부터 첫 혁명조직인 ‘ㅌ ㄷ (타도제국주의 청년동맹)’을 조직하였고,  이후 1927년에 길림 육문중학교에 입학하여 거기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조직하면서 일제와의 투쟁을 전개해나갔다.


이곳 고향집에 남아있던 할머니를 일제는 주석이 항일투쟁을 하던 시절 16년 동안이나 끌고 다니면서 괴롭혔다고 한다.  빈손으로 떠났던  주석이 나라를 되찾고 돌아왔지만 이곳 고향집은 바쁜 일정에 바로 찾지는 못하고 두어달 후에야 찾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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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엔 여러가지 농기구들과 물레, 독 등속이 진열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멍석엔 김 주석이 해방후 이곳 고향집을 찾았을 때 사용했다는 팻말이 붙어있다.  고향집을 찾은 그날 이미 부모님들은 서른과 마흔의 나이로 모두 이국에서 돌아가셨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 집에서 반겨 맞아주었을 때의 감회가 어떠했을까?  모두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한편으로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님과 눈밭에 묻고 온 숱한 동지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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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25년 전에 찾았을 때 보았기에 기억에 뚜렸한 쭈그러진 독이 그대로 있는데 황윤미 해설선생이 다시 설명해주어서 보다 정확하게 그 독의 유래를 알게 되었다.  1874년 주석의 증조할머니가 이른 새벽에 독을 구입하러 나갔다가 저물어서야 돌아오면서 구입해온 독이다.  집에 꼭 필요한 독을 장만해야 하겠는데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도저히 구입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 결국에 저 쭈그러진 독을 보고는 왜 그렇게 된 것인가 물어보니 불을 너무 세게 주어서 열을 많이 받아 오무라졌다는 것이었다.  증조할머니는 당시 짚신 한 컬레 값으로 그 독을 구입하면서 ‘독이 쭈그러졌다고 장맛이야 변하겠느냐’하고 그 독을 구입하였는데 지금까지 140년 동안이나 그 독을 보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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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내가 방문했을 때 해설선생은 당시에 이런 말을 한 것을 기억한다.  사람들이 저 독을 구입한 것을 보고는 모두가 웃었는데 당시 증조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저 독을 보고 비웃을 때 내 가슴속에는 피눈물이 났다’라고.  그렇게 주석의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하였다는 것을 저 쭈그러진 독이 오늘까지 증명하는 것이다.  


주석의 가난한 인민에 대한 사랑은 이렇게 가난을 대대로 물러받아 오면서 가난의 고통을 뼈저리게 겪어보았기 때문이리라.  그 가난은 개개인 스스로가 못나서가 아니라 나라의 제도의 잘못에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닫고, 그것을 해방된 조국은 나라가 해결해줘야 한다는 결심을 하였으리라.  주석은 자신의 가난만을 극복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 온 나라의 가난을 해결해낼 방도를 위해 고심했다.


북부조국이 해방후 토지개혁을 혁명적으로 실시한 것은 김 주석이 이렇게 가난한 집안 출생이었다는 것도 크게 작용하였으리라 생각해본다.  대부분의 인민이 농업인구인 시절에 정의롭지 못한 토지의 소유제도로 인하여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지주로, 그리고 대부분의 인민들은 소작농 혹은 소작조차 할 수 없는 처지의 상황이었다.  이 문제를  새로 되찾은 조국땅에서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지주가 가진 그 넓은 땅이 조선왕조때부터 소유했던지 아니면 친일파가 되어 일제에 협력하여 큰 땅을 차지하였던지간에 광복을 한 마당에 그 지주들의 소유를 그대로 두면서 새 나라를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새 나라는 너와 내가 평등하게 모두가 함께 어울어져 사는 나라였어야 했던 것이다.

 

나중에 내가 북의 학자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들은대로  토지개혁과 그 이후의 일에 대하여 자세하게 서술하게 되겠지만 북은 1946년 3월 5일에 토지개혁법령을 공포하여 3월 한 달 동안에 북에서 모든 지주들은 없어졌다고 했다.  지주들의 토지는 무상으로 몰수하여 땅이 없는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한 것이다.  우리들은 소련군이 북한 전역을 통치할 시기라고 여긴 이 시절에 이미 북한은 자주적으로 이렇게 중요한 토지개혁 문제를 해결해내었던 것이다.   인민들이 공평하게 먹고 사는 문제가 바로 이 토지개혁의 성패에 달렸던 것인데 그것을 한 달만에 성공시킨 것이다.  


김 주석을 북의 인민들이 떠받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여러가지 이유 가운데 이렇게 토지개혁을 이뤄낸 것 하나만 보고서도 우리는 이제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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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개개인이 못나서가 아니라 이땅위에 있는 재화와 물질을 독점하는 자들이 있고, 그것을 법으로 만들어 합법화하고 권력을 이용하여 지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북은 그 악법을 깨어버리고 서로 나누는 법을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논밭이 없던 나에게 배불리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땅을 나라에서 공짜로 준 것이다.  북의 인민들이 이것 하나만으로도 어찌 김 주석을 위대한 수령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일에 무관심했고 이후에 마지못해 북을 따라 흉내를 약간 내었지만 제대로 토지개혁을 이뤄내지 못한 남한의 당시 상황과 비교하여 이 문제는 우리들이  깊이 생각해볼만한 문제다. 


해설선생이 이제 본채 안에 걸려있는 사진들로 안내해준다.   첫 번째 방엔 조부모님들의 사진과 주석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 고향집을 찾아 조부모님과 만나 기쁨의 상봉을 하는 사진들이 걸려있다.  얼마나 기뻤는지 당시엔 사진을 찍을 때 일부러 웃으며 찍을 시기가 아닌데도 할머니가 환하게 웃고 있다.  주석의 표정도 아주 밝고 자신에 찬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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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고향집이 지어진 이후 저 날은 살아남은 가족들의 가장 기쁘고 행복했던 날이었을 것이다.  또한 주석이 고향집을 찾는 것을 알고 찾아온 이웃들과 인민들도 그 기쁨을 함께 나눴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이곳은 북부조국의 모든 인민이 직접 찾아보고 싶어하는 마음의 고향집이리라.   그래  주석의 고향집을 북의 인민들은 자신의 고향집으로 삼고  애타게 그리워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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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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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가용님의 댓글

갯가용 작성일

평양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거의 의무적으로 이곳을 거쳐야만 하는지
만약 본인이 원치않으면 방문하지 않아도 되는지 궁금합니다.

평양 아닌 다른 지역만 방문한 사람들은 그 유사한 상황도 없는 것으로보아
굳이 자신이 방문하기 싫으면 가지않아도 될듯한데 실제로는 어떤 상황인지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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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갯가용 님, 그날의 일정을 안다면 누구든지 스스로 가고 싶지 않은 곳은 가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아마 남한에서 수년 전에 많이들 방문할 때 대부분 가지 않았으리라 여겨집니다.  일정에 넣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요.

북에서도 그들이 귀히 여기는 고향집을 답사하기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일부러 보여줄 하등의 이유가 없겠지요.  김 주석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가서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알게 될 수도 있겠지만 마음을 닫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은 아무런 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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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가용님의 댓글

갯가용 작성일

이전 한국의 정치인들이 북에가면 모두 그곳을 들렀다는데
안가도 되는 곳을 굳이 간 모양입니다.

방문록에 무슨 찬양의 말을 썼다고 말들이 많기도 했는데
모두가 먹고살만하다보니 혹시 만경대 방문을 회피하면
억류되거나 불이익을 당한다고 지레 겁을 먹었던 모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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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아, 가지 않겠다는데 억지로 누가 데리고 가겠습니까?  예의상 거절하지 못하고 갔나봅니다.

방문록 같은 것은 제겐 내어놓지도 않았습니다.  있다면 그것도 스스로 원하는 사람이 작성하게 되겠지요. 

북이 인권이 없는 국가도 아니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손님에게 만경대 안가면 되돌아오지 못하도록 할 나라가 세상에 어디에 있을까요? 

한데 제대로 김 주석을 아는 사람이라면 (세뇌된 것 씻어버리고) 스스로 한번 쯤은 당연히 찾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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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우님의 댓글

황진우 작성일

김주석이야말로 세계의 위인이십니다.
10년 안으로 양심있는 이들은 모두 찾아가 참배할것입니다.
정신이상이 아니라면 지금도 누구나 존경합니다.

양놈과 그 떨거지들의 갖은 핍박을 이기고 세계에 우뚝 솟았지요?
미국도 무서워하지 않던가요?
조선이 누굴 두려워 하던가요?
누가 오늘의 조선을 일으켰나요?

이 세상 어디에서 먹여 주고 집 주고 가르쳐 주고 병 고쳐주던가요?
그렇다고 조선의 인민들이 과로사 하던가요?
굶어죽었다는 말들이 있었지만 굶겨갖고 어떻게 일을 시킵니까?
상사 눈치보며 잔머리 굴릴 필요 없고 전셋값 걱정 없고 -----

걱정이 있다면 금수강산 낙원에 핵 폭탄이 떨어질까 걱정하는 일 뿐 아니겠습니까?

조선이 뭐가 낙원이냐구요?
그럼 쓰레기통 뒤져먹고 지하철에서 자는게 낙원입니까?
뼈빠지게 일해서 목사 신부 중 호의호식하라고 돈 바치는게 낙원입니까?
교회 절 모텔 많은게 낙원입니까?

조선과 이남을 정확히 비교해봅시다. 이남이 조선보다 나은게 과연 뭐가 있나요?
부정 부패 허영 사치 사기 투기 ----이런건 낙원의 기준과는 모두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멉니다.

조선의 걱정이 한가지 더 있다면 이남에서 노예살이 하는 형제자매들을 하루빨리 마귀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고 온 세계가 평화롭게 사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 나라를세운 위인이신데 참배를 않는다면 좀 이상한거죠.

게다가 풍수지리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누구나 만경대 만수대 땅을 딛기만 해도 자주정신이 깃들어 자신이 주체가 됩니다.
가지 못하게 말려도 무릎꿇고 빌며 찾아가 참배고 주체의 기를 온몸에 듬뿍 담고 올 일입니다.

앞 뒤 없는 글이지만 모두들 알아 차리기는 하실걸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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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황진우 님, 현 상황을 정확하게 꿰고 계십니다.

조선의 걱정 가운데 이제 핵무기가 북에 떨어지는 걱정은 않아도 좋게 된 것 같습니다.
맞받아칠 준비가 된 곳에다 미국이 멍청하게 핵으로 스스로 죽자고 공격할 수는 없으니까요.

가장 큰 소원은 조국통일의 소원이고, 그것이 온 인민의 염원인 것은 확실합니다.

남한의 과연 몇몇이나  통일을 지금 소원하고 있을까요?  너무 아픈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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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우님의 댓글의 댓글

황진우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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