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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의 뿌리, 나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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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희윤
댓글 0건 조회 2,637회 작성일 15-04-30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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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말기의 혼란상황
이때부터 고조선은 급속하게 쇠락의 길을 걸었다. 45세 여루(余婁)단군(BC 396 ~ BC 342) 이후 고조선과 국경을 접한 연나라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고, 46세 보을(普乙)단군때는 번조선 왕 해인解仁이 연나라 자객에게 시해를 당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보을단군(BC 341 ~ BC 296)의 보위를 탐하는 내란까지 발생하였다.
한개(韓介)가 수유의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점령,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이때 장군 고열가(高列加)가 내란을 진압하고 추대를 받아 즉위하니, 이분이 바로 진조선의 마지막 왕 47세 고열가(高列加)단군(BC 295~ BC 238)이다. 하지만 고열가(高列加) 단군은 우유부단하였고, 장수들의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BCE 238년, 마침내 고열가高列加 단군이 오가(五加)에게 새로운 단군을 천거할 것을 부탁하고 산으로 들어가 버리니, 고조선은 2,096년으로 그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고조선 역사 2,096년은 고조선의 중심 세력인 진조선의 역사라는 것이다. 고열가단군은 퇴위하였지만, 고조선 전체가 한꺼번에 문을 닫은 것이 아니다. 번조선은 그 이후 40여 년을 더 존속하였다. 삼조선 중, 막조선은 마지막 왕 맹남孟男(재위 BCE 366~?) 이후 역사 기록이 이어지지 않는다.

고열가단군 이전에 이미 왕통계승이 단절되고 각 부족 단위의 자치가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막조선의 무주공산 시절은 BCE195년 최숭의 낙랑국 건설로 끝이 난다. 고조선 망국의 과정은 삼신(三神) 문화에 바탕을 둔 고조선의 국가경영체제,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를 모르면 그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해모수(解慕漱)의 북부여北夫餘(BCE 239~ BCE 195) 건국
대단군의 통치권이 약화되고 부단군과 지방 군장들의 목소리가 커지던 고조선 말기에 한민족의 새 역사를 개창한 분이 바로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解慕漱) 단군이다.


해모수는 요하 상류에 위치한 고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 출신으로 BCE 239년 웅심산(지금의 길림성 서란)에서 기두하였다. 그 후 백악산 아사달을 점거하고, 당시 고열가 단군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던 오가五加 부족장들의 공화정을 철폐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해모수를 단군으로 추대함으로써, 북부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BCE 232).

‘북부여(北夫餘)’는‘ 북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이다. 고조선의 제3왕조 시대인 대부여의 북녘 땅을 중심으로 나라를 열었기 때문에,‘대’자를‘북’자로 바꾸어 북부여라 한 것이다. 그것은 망해 가던 대부여의 정통을 계승하겠다는 해모수단군의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렇게 북부여가 고조선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을 때, 고조선의 양팔인 번조선과 막조선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고조선 개국 이래로 서방 진출의 교두보이자 외부 침략으로부터 민족을 수호하는 방파제 구실을 하던 번조선 땅은 이 무렵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을 피해 넘어온 한족(漢族) 난민으로 넘쳐났다. 그 난민 중에 한고조 유방(漢高祖 劉邦ㆍBC 247~BC 195)의 죽마고우이자 연나라 왕이었던 노관(盧?)의 부하 위만(衛滿)이란 자가 있었다. 위만은 한 고조의 숙청을 피하여 조선인으로 변장한 뒤 부하 1천 명과 함께 번조선의 준왕에게 투항하였다(BCE 195).

IMG_1429362289.jpg번조선의 75세 단군 준왕(箕準,BCE 221~ BCE 195)은 그를 받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쪽 변방인 상하운장(上下雲障)을 지키는 장수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위만은 그곳에서 몰래 세력을 길러 이듬해에 왕검성을 쳐서 한순간에 준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BCE 194).『 삼국유사』와 현 역사학계는 위만이 번조선을 탈취하여 세운 정권을 위만조선이라 부른다.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또 다른 조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민족의 서쪽 영토 한 모퉁이 번조선을 잠깐 강탈하여 지배한‘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일제에 의해 조작된 ‘한사군漢四郡’
한나라 무제가 한반도의 우리역사가 중국의 식민지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조작한 역사말살의 학설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한사군漢四郡 대동강설’이다. 일제가 대동강 유역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라는 4 개의 식민 구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어떠한가?
 
BC 108년 한 무제가 위만의 손자 우거를 멸하려고 국경을 넘어 쳐들어왔다. 전쟁 초기에는 우거왕의 일방적인 승리가 이어졌지만, 장기전으로 가면서 내부의 반란에 의해 결국 왕검성은 무너지게 된다. 우거의 정권은 조선의 왕위를 찬탈해서 만든 한족 정권이기 때문에, 니계尼谿에서 상相이라는 벼슬을 하던 참參이 주동이 되어 우거를 죽여 버렸다. 그러고서 조선의 유민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한나라 군에 대항하여 피 터지는 조선족의 독립전쟁을 한 것이다.
 
 
당시 조선족의 독립운동이 워낙 강력하게 일어나서 그곳에 자기네들의 사군四郡을 세울 수도 없었다. 그런데 『삼성기三聖記』上篇상에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가 있다. 한 무제가 우거의 왕검성만 정벌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옛 고조선 지역인 만주의 북부여(BC 239 ~ BC 58)까지 완전히 먹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동방 한민족사에 최대의 위기 상황이 닥친 것이다. 이때 군사를 일으켜 의연히 일어난 구국의 인물이 서압록 위에 살던 고두막한高豆莫汗이다. 왕대나무에 왕대가 난다고, 진조선(眞朝鮮)의 47대 고열가 단군(BCE 295 ~ BCE 238)의 직계 후손인 고두막한이 나서서 한 무제를 물리쳤다.
 
이 전쟁의 결과에 대한 사마천의『사기』의 내용을 보면 한 무제는 단군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에게 5만7000명의 대군을 주었다. 두 장군은 1년이 넘는 전쟁 기간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귀국했다. 그러자 한 무제는 좌장군 순체는 사형시킨 후 시신을 조리돌리는 기시(棄市)형(棄市刑, 목을 자르고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는 형)을 내렸고, 누선장군 양복도 사형선고를 내렸다가 막대한 속전(贖錢)을 바치자 목숨은 살려주되 귀족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위산(衛山)은 고조선과 강화협상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이미 사형 당했으며, 제남(濟南)태수 공손수(公孫遂)도 마음대로 군사형태를 바꾸었다는 이유로 사형 당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마천의 이 기록을 보더라도, 결코 한나라가 승리한 전쟁이 아닌 패전인 것이다. 사마천(BCE 145년~ BCE 86년)은 이 전쟁의 목격자였음에도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정벌하고 사군(四郡)으로 삼았다”라고만 적고, 사군의 개별적 이름도 적지 않았다. 한사군을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확고하게 각인시킨 세력은 일제 식민사학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는 한반도 내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의 한사군이 있었다고 일제에 의해 조작된 역사를 그대로 가르쳤고 한국인은 이것을 어린 시절부터 외우고 다녔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BC 156년~ BC 87년)의 사관史官 사마천의 불의
한중 고대사를 날조한 기록상의 첫 인물은 2,100년 전 한나라 때의 사관史官인 사마천이다. 사마천은 동북아의 한민족 강토로 쳐들어간 한무제가 전쟁에 참패하고 돌아온 시기에, <사기史記>를 저술하였다.
 
 
중국인들의 역사 기록법
공자가 노나라 242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하여 <춘추春秋>로 이름 지었는데, 이 책은 주나라 왕실을 종주로 삼는 대일통大一統 사상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정신을 표방하고 있다. 그 후 중국 사서들은 이 <춘추>를 역사 서술의 표준으로 삼게 되었는데, 중국 사서의 편찬 원칙은 다음 세 가지의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요약된다.
 
첫째, 중국에 영광스런 일은 한껏 부풀려 쓰면서 수치스런 일은 감추고(爲國諱恥)
둘째, 중국은 높이면서 주변 나라는 깎아내리고(尊華攘夷)
셋째, 중국사는 상세히 쓰면서 이민족 역사는 간략하게 적는다(祥內略外)
 
춘추필법은 표면적으로는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역사 서술법이지만, 사실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에 충실한 필법이다. 사마천 이하 역대 중국의 사가들의 잘못된 춘추필법을 지적한 것은 단재 신채호선생이다. 그는 [조선사연구초]<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에서 중국 역사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사마천을 “공자 춘추의 존화양이, 상내약외, 위국휘치 등의 주의를 굳게 지키던 완유頑儒”라고 혹평하였다.
 
 
사마천이 조작한 기자조선(箕子朝鮮)
중국 역사서에서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예濊, 맥貊, 발發, 숙신肅愼, 우이嵎夷, 내이箂夷, 견이畎夷, 서이徐夷, 고죽孤竹, 고이高夷 등과 같은 고조선의 제후국 이름들이 등장한다. 다른 호칭을 써서 조선이라는 국가 이름 자체를 철저하게 제거한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본기本紀>에서 조선이라는 호칭을 전혀 쓰지 않았다. 그런데 제후국의 역사를 다룬 <세가世家>에서 ‘봉기자어조선(封箕子於朝鮮)’ 이라 하여 갑자기 조선朝鮮이란 이름을 썼다.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중국 사가들은 조선 역사가 약 3,100년 전 중국의 제후국이었던 기자조선에서 시작된 것으로 정의한다.
 
《상서대전(尙書大典)》과 <사기史記> 등에서 전하는 기자조선의 내력은 이러하다. 주나라의 건국자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기자箕子를 풀어 주었다. 이때 기자는 주나라에 의해 풀려난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조선으로 떠나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무왕이 그를 조선 왕으로 봉하였다. 그런데 제후로 봉해진 이후의 이야기는 서로 다르다. <상서대전>은 기자箕子가 책봉을 받은 후 신하의 예를 행하기 위해 주나라를 찾아가 무왕에게 홍범구주에 대해 설명하였다고 한다.
 
반면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기자箕子가 책봉을 받았지만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았다(而不臣也)’라고 기록하였다. ‘기자를 제후로 임명했다’는 말 바로 다음에 ‘신하로 삼지는 못했다’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후가 되면 당연히 신하가 되는 것인데도 그와 상반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기자가 무왕의 신하였던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사마천이 자신도 모르게 역사의 진실을 고백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자箕子라는 인물이 조선 왕으로 봉해진 역사적 사실은 전혀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떠나버렸다(走之朝鮮)’는 구절이다. 이것은 동방 땅에 그전부터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천명하는 내용이다.
 
기자가 망해 버린 고국을 떠나 이웃나라 단군조선으로 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이 기자조선을 내세워 단군조선을 숨기려 하였으나, 오히려 더 드러내는 결과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기자조선은 한민족사를 그 출발부터 중국사에 예속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중국이 날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자箕子비간比干, 미자微子와 더불어 당시 상나라의 삼현三賢이었다. 비간은 상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에게 정치를 간하다가 사형되었고, 미자는 비간의 죽음을 보고 멀리 도망쳤다.
 
기자箕子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 감금되었다. 고려와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은 중국이 날조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한민족사의 뿌리로 여기고 기자箕子를 은인恩人으로 받들었다. 기자는 고조선 서쪽 변두리를 맴돌았을 뿐 한반도 지역으로 넘어 온 적이 없건만, 고려 때 송나라 사신이 “그대 나라에 기자箕子의 묘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자,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 후 고려 숙종 7년(1102) 예부상서 정문(鄭文)이 무주고총(無主古塚)을 하나 찾아 임금께 청하여 서경(평양)에 가짜 기자묘(箕子墓)와 기자 사당을 만들었다. 또한 서경의 반듯한 도로 흔적들을 기자(箕子)가 만들었다는 정전제(井田制)의 증거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기자 정전터와 평양 을밀대 북쪽에 있던 기자묘를 조사하면서 그 허구가 밝혀졌다.
 
기자 정전터는 고구려시대 도시 구획 흔적이었고, 기자묘에서는 사기 파편과 벽돌조각만 나왔다. 기자箕子에 대한 진실은 그는 무왕에 의해 풀려난 후 상나라 유민을 이끌고 당시 단군조선(번조선)의 국경지역인 산서성 太原으로 이주하였다. 망명지 단군조선 땅에서 6년 정도 살다가가 고향 서화(지금의 하남성 서화현)으로 돌아가 생을 마감하였다. 당나라 때 사마정의 '사기색은(史記索隱)'은 “기자의 묘가 하남성 몽현[蒙縣: 현재의 상구현(商邱縣)]에 있다”고 썼다. 최남선도 “평양의 기자묘는 고려 중기 이후 견강부회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기자조선설은 “중국인이 이민족을 동화하는 정책의 산물”이라고 했다.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연결 고리 북부여北扶餘
단군조선(BC 2333~ BC 238)을 북부여(BC 239~ BC 58)가 계승하였다. 이것이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 맥을 바로잡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역사에서는 북부여 역사라는 게 완전 말살됐다. 그 역사의 원형이「삼성기」상, 하 두 편과 「단군세기」에 나온다. 「단군세기」에는 47대 단군 역사가 나오고 「북부여기北扶餘記」상, 하에는 북부여의 역사가 나온다. 「북부여기(北扶餘記)」상에 해모수 단군에서부터 역대 단군들이 나오는데, 5대 단군 고두막한(BCE 108 ~ BCE 60)이 바로 동명성왕이다.
 
고두막한은 중국 한족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멸망할 위기에 놓인 우리 동방 조선의 역사를 부활시킨 인물이다. 그런데 중국 한 무제가 고두막한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다가 참패를 당했다. 한 무제가 패퇴한 대사건,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수치였다. 중국 5천년 역사에서 당태종이 안시성에 와서 양만춘 장군한테 화살을 맞아 눈 빠진 것보다 더 부끄러운 사건이다. 이 같은 시대 배경 속에서 고대사를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날조한 기록상의 첫 번째 인물인 2100년 전, 한나라 무제(BCE 141~BCE 87) 때의 사관, 사마천(司馬 遷, BC 145년~ BC 86년)은 중국 25사의 첫머리인 [사기(史記)]를 편찬했다.
 
중국의 역사가들과 국내 사대주의자들이 이 북부여 역사를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민족 역사의 맥, 사통의 허리가 잘려버렸다. 그래서 국통 맥이 연결이 안 된다. 지금 역사학자들은 부여의 역사를 중국의 사료에 맞추어 꿰매고 있다. 그러니 너덜너덜하다. 이렇게 꿰매면 이런 작품이 나오고, 저렇게 꿰매면 저런 작품이 나오고, 전부 애꾸눈이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그 결과가 바로 전에 방영했던 주몽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는 고주몽이 해모수의 아들로 나온다. 그게 다 중국 측 사료를 보고 만들어서 그렇다. 해모수(BC 239 ~ BC195)와 주몽(BC58 ~ BC19)은 무려 130여년 이상 차이가 난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초대 단군이고, 주몽은 6대 마지막 단군 고무서(BC59~BC58)의 사위인데, 어떻게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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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BC 239~ BC 58)는 47세 고열가 단군조선(BC 295~ BC 238)과 고구려(BC 58 ~ AD 668)를 이어주는 잃어버린 열국시대의 역사의 맥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부여사를 잘 알아야 한다. 한무제를 물리친 후 고두막한高豆莫汗은 졸본에 나라를 열어 졸본부여라 하고, 스스로 동명왕東明王이라고 칭하였다. 이는 ‘동방 신교의 대광명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래서 졸본부여를 동명부여라고도 한다. 바로 동명왕이 고두막한이다. 그런데 이 역사가 다 왜곡되어 지금은 고주몽을 동명왕으로 가르치고 있다.
 
북부여의 4세 단군 고우루(해우루, BC120~ BC87)가 돌아가시고 아우 해부루가 즉위하자 고두막한은 해부루를 동쪽으로 보내고 5세 단군(BCE 108~ BCE 60)으로 등극을 했다. 이로써 북부여의 후기 시대[後北夫餘]가 시작되었으며, 그 후 6세 고무서 단군(BCE 59 ~ BCE 58) 때에 이르러 북부여는 막을 내린다. 한편 왕위에서 밀려난 해부루 단군은 국상 아란불과 함께 우수리강 지역의 가섭원에 가서 나라를 세웠다. 이것을 ‘동부여’ 또는 ‘가섭원부여’라고 하며, 금와와 대소로 왕통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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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세상에서 동명왕으로 잘못 알고 있는 고주몽은 어떤 인물인가? 그분은 고구려의 창업 시조이다. 원래 북부여의 마지막 단군인 고무서(BCE 59 ~ BCE 58)의 둘째딸 소서노와 혼인하여 북부여의 BCE 58년에 7세 단군이 되었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로 변경하였다. 우리는 그동안 주몽이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세웠으며 668년에 망했다고 배워왔다. 그러니 고구려 역사는 기껏해야 700년이 조금 넘는다. 그런데 신라의 고운 최치원의 글을 보면, ‘중국에서도 고구려 역사를 900년으로 알고 있더라’고 했다. 광개토태황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還至十七世孫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太王.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17세世를 내려와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십팔 세(391년)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이라 하셨다. 고구려왕 계보에 따르면, 1세 고주몽 이래 광개토열제는 19세인데 왜 비문에는 17세손이라고 나오는가? 이를 이해하려면 [환단고기]의 <삼성기 상>를 봐야 한다.
 
至癸亥春正月하야 高鄒牟가 亦以天帝之子로 繼北夫餘而興하사 復檀君舊章하시고 祠解慕漱하爲太祖하시고 始建元하사 爲多勿하시니... 계해(BCD58)년 봄 정월에 이르러 고주몽이 역시 천제의 아들로서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났다. 단군의 옛 법을 회복하고, 해모수를 태조로 받들어 제사 지내며 연호를 정하여 다물이라 하시니... <삼성기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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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몽은 해모수를 태조로 받들어 제사를 올리며 고구려를 건국한다. 따라서 고구려인들은 고구려의 기원을 해모수로부터 잡고 있는 것이다. 북부여 해모수의 건국(BCE 239년)을 고구려의 기원으로 잡으면, 멸망 때(668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역년은 907년이 된다. 고구려가 해모수를 태조로 삼고 있기 때문에, ‘17세손’ 의 문제도 이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된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열제가 형제 상속 등을 빼고나면 고주몽의 13세손이라고 한다. 그럼 4세는 어디에서 찾는가? 4세는 해모수 단군과 고주몽의 관계에 있다.
 
고주몽은 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 단군의 현손玄孫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해모수에서 고주몽까지 4세, 고주몽에서 광개토열제까지 13세, 이렇게 하여 해모수에서 광개토열제까지 17세를 전한 것이다. 고구려 역년 900년이나 광개토경평안호태황비문의 ‘17세손’으로 볼 때, 고구려인들은 북부여 창업자 해모수단군으로부터 그 기원을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신교의 삼신오제 사상은 한민족의역사와 문화를 움직여온 사상적 기반이었다. 신교가 밝히는 우주관의 핵심인 삼신오제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면 한민족의 국통 맥은 전혀 바로 잡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뿌리 문화를 취합하여 삼신 상제의 가르침을 통치 역사로 제도화시켰다. 이것이 중요하다. 먼저 교화시대인 배달국을 연 거발환 환웅이 백두산 신시에 나라를 처음 건설할 때 환국으로부터 받아내린 가르침이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제세이화(濟世理化), 광명이세(光明以世)다.
 
백성들을 다스려 진정한 하늘 백성으로 만드는 통치 이념을 배달국 환웅천황께서 처음으로 열어주신 것이다. 그리고 삼신의 질서, 삼신 상제의 창조 코드인 삼수(三數)를 통치원리로 하여 나라를 삼한으로 나눠 다스린 것이 조선, 정확히 말해서 단군조선이다. 이 조선을 후대의 한양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옛 조선, 고조선이라고 한다. 국통을 안다는 것은 우리 한민족사의 국통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요순시대의 중국천지가 9년 간 계속된 대홍수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무렵, 동방 고조선의 천자 단군성조는 105세 되시던 갑술(BC 2267)년에 태자 부루를 중국 양자강 남방에 위치한 도산(塗山)에 보내 도산 회의를 주재하도록 하고 단군조선(古朝鮮)의 제후였던 순이 특파한 우(禹)에게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비법”을 전수케 하셨다.『吳越春秋』,『歷代神仙通鑑』

우禹가 세운 하나라(BCE 2205~BCE 1766)도 고조선에 예속되었다. 우는 아버지 곤이 치수에 실패하여 순임금에게 처형당한 후 그 뒤를 이어 치수사업을 맡아보던 관리(司空)였다. 순을 대신하여 참석한 도산회의에서 우는 고조선의 태자 부루에게서 오행치수법이 적힌 금간옥첩(金簡玉牒)을 받았다. 이 비법으로 홍수를 해결하고 인심을 얻어 나중에 순의 왕위를 물려받아 하나라를 열었다. 하나라는 마지막 군주 걸桀에 이르기까지 내내 고조선을 상국으로 모셨다.

환국 시대부터 전수되어 내려온 천부경(天符經), 여기에는 우주론을 바탕에 깔고 하늘과 땅과 인간의 일체관계에 대한 인성론의 문제가 담겨있고, 환국 다음에 배달국의 개창자 배달환웅이 열어주신 우리 한민족의 신관, 신학의 원전 삼일신고(三一神誥)가 있다. 그리고 고구려 재상 을파소를 통해 내려온 366가지 인간이 지켜야 될 윤리덕목을 기록한 참전계경(參佺戒經) 이것이 우리민족의 3대 소의경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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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보통 4천년, 5천년 전 용 상징 문화유물이 발굴 됐는데, 만리장성 북쪽 밖에서 자기들 용문화의 원형보다 몇천년 전에 그런 유물이 나오고 있다. 여기서 놀라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해석할거냐? 이게 자신들 문명이 아닌데, 이걸 어떻게 해석할거냐? 이런 고민에 빠져서 결국 중국화하자 해서 바로 이것이 동북공정, 우리 민족 시원역사를 완전히 중국화 역사속으로 편입하는 것이다. 남의 나라 문화 역사 강탈 그 거대한 프로젝트가 바로 한 세대 전부터 시작된 동북공정이다.

중국의 현지 역사 유물로 들어가 보면 중국은 남부가 보통 신석기 8천년까지 나오는데, 북부는 9천년 전 우리 옛 조상들이 살았던 환국 배달국의 문화 유적이 나오고 있다. 지금 소하서 유적지를 보면 최초의 신석기 문화 유적지가 나오는데 여기는 9천년 전에서 8천5백년 전 유적지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흥륭와 문화를 보면 8천2백년에서 7천2백년 시간대인데 여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옥결이 나오고 있다. 또 집단 거주지가 나오고 이것이 우리나라 강원도 고성이라던지 바로 한반도 남부 여수 안도리 신석기 유적지까지 연결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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