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조국 방문기 38. 재일동포들과 조선학교
페이지 정보
본문
25 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38
재일동포들과 조선학교
내가 북부조국을 방문한 지 한 달 후 북을 방문했던 재일동포 배안 선생이 그 방문기를 통일뉴스에 5회 동안 연재하는 것을 인터넷 페이스북을 통하여 알고는 내가 연락하여 서로 친구가 되었는데 배안 선생도 그 방문기에서 북에서 만났던 동포들과 서로 나이를 물어보고 만나게 된 동포를 동생으로 삼기도 한 것을 읽게 되었다. 내가 친구가 되어 그 이야기를 하니 배안 선생이 나와 생일을 따져보자고 해서 서로 생년월일을 터놓고 보니 내가 한 살이 더 많았고, 그래 동무와 동지로 지내면서 기꺼이 사적인 경우엔 나를 오빠라고 불러주어서 북을 방문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해외 동포로서 더욱 가까워졌다. 배안 선생의 방북기는 통일뉴스에서 읽을 수 있다. 여기에 링크 하나를 남긴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461
재일동포 사회운동가 배안 선생
배안 동지는 재일동포 2세로 아버지는 마산 출신이다. 현재 일본에서 다문화공생사회실현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여러 다른 민족들이 문화와 생활습관, 언어, 종교가 각자 다르지만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한 지역에서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각기 다른 민족이 화합하여 함께 살 수 있도록 귀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같은 민족이면서 남과 북이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지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느냐며 통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점도 많지만 서로가 오해하고 있는 점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당연히 기존의 반공교육과 지속적인 매스컴의 영향으로 우리 모두는 그렇게 반대로 배워왔고 그렇게 매일같이 듣고 보는 것으로 그 오해는 점점 더 쌓여만 간다. 배안 동지는 그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그가 말해준 다음 한마디가 내 마음에 한동안 남는다. “북에 대해서 설명을 하려면 쉬운 일이 아니지만 반미란 깃발을 들고 주체적으로 제발로 서는 나라라는 것을 대전제로 이해하려하면 어려울 건 별로 없어요.” 그렇다. 북이 지금의 북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대국에 굴하지 않고 살아남으면서 미국의 압력으로부터 진행되어진 수많은 어려움을 뚫고 이겨나온 나라라는 것을 우린 이해해야 한다. 그것만 이해한다면 북의 지금의 모습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라는 것이다.
배안 동지와 교류하는 가운데 페이스북 홈에서 배안동지와 친구사이인 장말려 선생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나의 방문기 지난 호에서 소개한 장말려 선생은 배안 선생과는 가까이 살면서 종종 왕래하는 사이라고 했다. 그래 반가운 마음에 장말려 선생에게 친구신청을 하였고 두어 달 전부터 서로 친구가 되었다. 내가 방문기 지난 호에서 장말려 선생과의 이야기가 다음 호에서 계속된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이렇게 다시 나와 연락이 된 장말려 선생과 배안 선생 덕분으로 일본의 조선학교에 대하여 좀 더 알게 되었기에 여기서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평양호텔 식당에서의 장말려 선생. 조선학교에서 교육받는 후세들이 통일조국의 남과 북, 그리고 일본을 이어주는 유능한 인재가 되어지길 바라며 후세교육에 헌신하고 있다.
장말려 선생을 포함하여 내가 북에서 만났던 재일동포 선생님들이 가르치고 있는 일본의 조선학교에 대하여 우리가 배울 점이 너무도 많다. 해방후 남한에서는 아무도 신경을 써주지 않았던 재일동포들에 대하여 북부조국은 달랐다. 새로 나라를 세우고, 전후복구에 온 나라가 떨쳐나설 그 무렵에도 재일동포2세 교육을 위하여 북은 과감하게 아주 많은 금액을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도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매년 크게 지원해왔는데 제2의 고난의행군 시절에도 그치지 않았고 지금까지 내내 이어져오고 있다.
일본정부와 보수층들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조선학교의 명맥을 이어온 재일동포 사회지만 이제세월이 흘러 3세 4세로 내려오면서 학교 수도 많이 줄었고 학생들도 많이 줄었다. 한때는 일본 전역에 수많은 조선학교가 있던 것이 지금은 64개소에 다음과 같이 유지되고 있다. 일부 학교는 초등, 중급, 고급학교가 병설된 곳도 있어 전체 학교의 숫자는 차이가 있다.
현재 일본의 조선학교는 유치원 38개, 초급 53개, 중급 33개, 고급 10개, 대학 1개 학교가 있다고 한다. 총련에서 어려운 가운데서도 저렇게 수많은 조선학교들을 지원하여 운영하는 가운데 조선대학교까지 운영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에 한인 인구가 2백만이 된다고 하는데 대학교는 커녕 제대로 된 중고등학교도 하나 없는 것과 비교해볼 때 재일동포들이 2세와 3세, 4세 교육을 통하여 조국의 말과 얼과 문화를 지켜나가고 있는 그 애국애족의 마음을 우리는 인정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북부조국 정부의 한결같은 재일동포들에 대한 지원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다음은 장말려 선생이 내게 전해준 메시지 가운데 발췌한 것이다.
“민족교육은 해방직후 풍파사나운 이역땅에서 애국의 1세대들이 국어강습소란 이름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2세들은 갖은 차별속에서도 우리 학교를 지켜주셨고, 오늘은 3세가 이어가고있습니다. 저도 민족교육을 받은 한사람으로서, 오늘날은 민족교육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애국의 전세대들의 뜻을 이어 일본땅에 있는 우리 학생들이 민족의 뿌리가 든든하고 유능한 인재로 키우는데 힘써나가자고 마음먹고있어요. 또한 새 세대들을 통일조국의 힘있는 인재로 남북, 그리고 일본을 이어주는 유능한 인재로 키우자고 분투하고있는셈입니다.”
강유사 선생으로부터 입수한 조선학교 자료사진들
장말려 선생은 보통 해마다 6월에 조선고급학교 졸업반 학생들의 수학여행을 인솔하여 북을 방문해왔는데 나를 만났던 지난 9월의 방문목적은 김일성종합대학통신박사원에서 장 선생 본인의 공부를 위한 논문지도를 받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일본에서는 조선대학교 교원들이 김일성종합대학통신박사원에 다니는데 장 선생처럼 조선고급학교 교원으로서 박사원에서 공부하는 일은 드물다면서 조국의 배려로 그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북부조국은 교육비가 없는 곳이다. 이렇게 자신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조국의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모르겠다고 말해준다. 장 선생은 현재 학사학위 (남부조국의 석사) 논문을 집필중이라고 한다.
당시 북에서 머무는 동안 장말려 선생은 북부조국의 외국어학원과 인민학교의 영어수업을 참관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거기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학생들의 외국어 학습의 의욕과 열기는 대단하였고 외국어학원의 교육수준 또한 아주 높았다고 말해주었다. 북부조국은 그렇게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서로 소통하고 교류할 준비를 갖춰가는 나라인 것이다.
내가 페이스북을 통하여 만나게 된 재일동포들 가운데 재일동포 3세인 강유사 선생으로부터 조선학교에 관한 사진을 전달받은 적이 있어 여기에 공유하는데 그분으로부터 또한 다음과 같이 조선학교와 북부조국에 대하여 귀한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 그분이 메시지로 전해준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겨본다.
“식민지 시기 고생을 하신 일세분들이 해방후 모든것을 다 바쳐 일본각지에 후대들을 위하여 학교를 지으셨습니다. 일본정부는 우리 학교를 없애버리려고 탄압을 하였고 일세동포들과 교육일군들은 목숨걸고 싸워서 지켜냈습니다. 그때 도움을 준건 조선의 김일성주석이였고 일본정부와 결탁해서 없애버려고 한것이 리승만과 박정희 정권이였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재일동포가 자기민족애를 갖고 존재하는 한 잊지않을것입니다.”
강유사 선생으로부터 전해받은 조선학교 학생들의 글쓰기 사진자료
“전 일본에서 나서 자란 3세입니다. 1959년도부터 시작한 귀국사업으로 근 9만명이 귀국했습니다. 그때는 경제도 남보다 북이 앞선 시기였구요. 일본에서 고생하기보다 새 조국건설에 이바지하겠다고 많은 동포들이 귀국선을 탔습니다. 그 후 조국을 둘러싼 력사가 어떻게 되였는가는 대개 알지요. 외세의존을 거부한 조선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오히려 한국이나 일본에 남았던 동포들이 밥은 잘 먹게 되였습니다. 일본과 조선은 수교가 없지만 동포들의 끈질긴 투쟁끝에 70년대이후 재일동포들이 이북으로 자유로이 다녀올수 있게 되였습니다. 저도 9〜10번은 갔댔습니다. 한달이상의 장기체류도 두번 경험했습니다. 이북 사람들의 생활수준이나 사회제도(법제도)의 특징같은것을 그 력사적 경위나 당사자들의 마음가짐을 모르면서 일본이나 미국, 한국의 "기준"을 가지고 론하면 많은 오유를 범하게 될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해요. 극단하게 말하면 수천만의 사람들이 사는 사횐데 범죄도 있을수있고 권력을 악용하는자도 나타날수가 있지요. 그러나 국제무대에서 "북의 인권문제"운운하는것은 의도적으로 조선을 고립시키려고 하는 모략이 대부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적어도 사회제도나 권력구조에 그 원인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의심을 갖는 분들은 한번 조선에 가보면 좋겠습니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보통사람들의 일상모습을 보고 특히 어린이들을 만나보면 그곳이 어떤 사회인가 순간에 리해가 될것입니다. 저는 일본에 살면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있습니다.”
강유사 선생은 또한 총련계 재일동포들이 갖고 있는 조선국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조선국적이란 하나의 기호 혹은 표식으로 무국적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식민지통치때문에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오신 분들 그리고 40년대가서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강제로 끌려온 분들이 해방당시 24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 대부분은 해방직후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이미 생활기반을 꾸린 동포들 등 50만이 일본에 남게 되였습니다. 또한 조국의 내정불안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동포들도 적지 않았어요. 그리하여 60만이 해방후에도 일본에 살게되였는데 그때까지만 하여도 국적은 "일본"이었습니다. 패망국 일본은 련합국(GHQ)통치하에 있었지만 46년에 "외국인등록령"을 공포하고 조선반도 및 대만,만주출신자들의 일본국적 상실을 통달하였습니다. 이때 조선"국적"이라는것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조국에서는 38선 이남에서 단독선거를 하느냐 어떻냐 하는 단계였고 남북총선을 하면 쏘련과 김일성주석의 폐권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미국이 단독선거를 서두르던 때였지요. 그러므로 조국반도에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성립되기 전에 국적이라 말하기보다 "조선반도 출신자" 즉, 말하자면 "일본사람이 아님"을 나타내는 "기호"로 생겨난겁니다. 그후 미국의 부추김 밑에 한일이 수교하고 일본은 "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는 대한민국"이라는 립장을 선명히 함에따라 희망한다면 조선국적을 한국국적으로 고칠수있지만 한국국적을 조선국적으로는 바꿀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고있습니다. 즉 "한국"은 국적이고 "조선"은 기호라는 말입니다. 일본정부에 말시키면 재일동포들 중에서 조선국적을 가진자는 무국적과 다름이 없답니다. 그러나 뜻있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은 아예 분단국적인 한국국적을 취득하지않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과연 국적이 아닌 "기호"이긴하나 일본에서 "조선국적"은 틀림없이 분단이전부터 존재하는 통일국적이기때문입니다. 우리집 7식구 다가 자랑스런 조선국적입니다.”
윗 글을 읽고는 내가 강유사 선생께 간단하게나마 다음과 같은 답글을 보냈었다. “강유사 선생님의 재일동포로서의 자세한 설명 참 고맙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무국적이 존재한다는 것이 정말 기가 막히는군요. 그런데도 그 가시밭길을 기꺼이 걸어가는 재일동포들은 존경을 받아 마땅합니다. 조일수교가 얼른 이루어져야 제대로 된 국적을 갖고 제대로 대우를 받을 수 있겠군요. 무엇보다 조국이 통일이 되어야 어깨를 펴고 보란듯이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다.”
강유사 선생이 제공한 일본의 조선학교 자료
내가 방문기를 계속해서 연재하는 동안 해외동포로서 조국의 통일에 기여하기 위하여 통일운동에 관심있는 분들과 소통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배안 동지, 장말려 선생과 더불어 강유사 선생과 여러 재일동포들이 깊숙히 연대하게 되어 참으로 기쁘다. 통일운동은 우리가 시간과 노력을 많이 기울여서 어려운 가운데서 펼쳐나가는 조국을 위한 희생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그 노상에서 참 귀한 동지들을 만나게 되고, 그 동지들로 인하여 바른 정보를 공유하게 되고, 서로를 격려함으로 또한 기운을 얻고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귀한 운동이다.
이렇게 지구촌 곳곳에서 살아가는 통일을 꿈꾸는 동지들과 서로 연대하여 우리 세대 최고의 가치를 가진 이 통일운동을 펼쳐나간다면 이 운동이 조국통일의 그날을 앞당기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 확실하다. 북부조국의 인민들이 모두 원하는 통일을 해외의 뜻있는 동포들이 함께 외치고, 또한 남부조국의 민중 가운데 통일의 바람을 크게 일으켜나간다면 꿈에도 그리던 우리 모두의 소원인 통일의 그날은 기어이 오고야 말 것이다.
- 이전글김어준-주진우 항소심 무죄 판결, 그리고 당연한 것을 기뻐해야 하는 이 시대 15.01.15
- 다음글북부조국 방문기 37. 북에서 만난 재일동포 선생님들 15.01.12
댓글목록
갯가용님의 댓글
갯가용 작성일
읽자니 참으로 귀한 내용이자 귀한 글로 여겨집니다.
해방이후 재일교포 역사의 한 부분이 한 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잘 정리되었다 생각됩니다.
그리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북에서는 꾸준히 재일동포
2세들을 위한 교육에 신경을 써왔음도 새로이 알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민족애와 동포애가 없다면 결코 시행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간에 북한이 재일동포들을 꼬셔 북송케 하여 가진 재산을
모두 압류하고 폭압을 가했다는 식으로 선전해 왔는데 이제보니
그마저도 모두 거짓이었음을 알 수 있겠군요.
갯가용님의 댓글
갯가용 작성일
그러고보면 최근 신은미씨나 황선씨를 추방 구속하는 행태가
별다른 일이 아님을 또한 알게 됩니다.
그간의 거짓들이 계속 드러나도록 이들을 그냥 보고 놓아 둘 수만은
없다는 큰 두려움과 불편함이 있었음이 분명하겠습니다.
그간에 거의 40회 가깝도록 본 여행기가 연재되어 왔지만 상기의
내용을 읽고서도 여전히 여행기의 진위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간에 얼마나 매국부패 세력들에게 이들이 깊히 세뇌되어 왔는지를
절절히 통감하게 합니다.
아울러 통일운동의 앞길이 얼마나 어려울 지도 아울러 진저리케 합니다.
아무쪼록 연재 필자의 건강과 건필을 빕니다.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갯가용 님, 2012년 4월 14일의 보도된 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북부조국에서 재일동포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그동안 158차에 걸쳐 6579억원을 보냈다고 하니 이 얼마나 엄청난 지원인가요.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김일성 주석의 100회 생일을 맞아 재일교포 자녀들에게 1억6천560만 엔(한화 약 23억2천만 원)의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4일 전했다.
통신은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 김정은 동지께서 재일동포 자녀를 위해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에 보내주신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은 지금까지 158차에 걸쳐 469억2천505만 엔(한화 약 6천579억 원)에 달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