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조국 방문기 47. 원산에서 부른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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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47
원산에서 부른 노래들
내가 노래를 부를 차례가 되어 내가 제목은 모르지만 이런 노래가 있지 않느냐고 하면서 “그대가 한그루 나무라면은” 하고 시작하는 가사를 대자 대번에 봉사원 동무가 알아듣고는 노래를 부르도록 준비해 준다. 유명한 ‘나는 영원히 그대의 아들’이란 제목의 노래라고 한다. 내가 북부조국의 노래를 부르는 것에 김미향 안내 동무와 리영호 운전기사 동무가 좀 놀라는 모습이다.
이 노래 또한 내가 몇 달 전에 본 ‘우리를 기다리지 말라’라는 영화 주제가였다. 그 영화는 6.25 시절 열악한 공군력이었지만 용감한 전투기 조종사들이 온 힘을 다해서 나라를 지키다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의 조종사가 기지에서 이륙하면서 이 영화의 제목처럼 다시 되돌아오지 않고 가득 실은 폭탄과 함께 자폭하게 될 것을 각오하면서 떠나는 깊은 감동을 주는 영화였다. 영화도 감명깊었지만 주제곡의 가사와 곡이 너무 좋아서 영화를 보는 도중에 가사를 적어가며 노래를 따라 불렀는데 그 노래를 바로 오늘 원산에서 부르게 된 것이다. 제목은 가사 3절의 맨 마지막 부분과 일치한다.
<나는 영원히 그대의 아들> 전동우 작사 김건일 작곡
그대가 한 그루 나무라면은
이몸은 아지에 피는 잎사귀
찬바람 불어와 떨어진데도
흙이 되어 뿌리 덮어주리라
아~~ 나의 조국아
흙이 되어 뿌리 덮어주리라
그대가 크나큰 심장이라면
이몸은 그품에 뛰는 핏방울
마지막 한 방울 다할 때까지
높뛰는 고동을 더해주리라
아~~ 나의 조국아
높뛰는 고동을 더해주리라
은혜로운 품속에 나고 자라나
나하나 행복을 바라고 살랴
청춘의 그 나이 잊지를 마라
순간의 삶들도 값있게 살리
아~~ 나의 조국아
나는 영원히 그대의 아들
아래 링크에서 이 노래를 들을 수 있다.
김미향 동무도 노래를 하라하니 함께하자고 하였는데 어떤 노래를 하였는지는 기억이 없다. 리영호 동무는 내가 방문기 몇회 전에 소개했던 ‘중대는 나의 집’이란 노래를 노래방의 곡 가운데 찾지 못하자 봉사원에게 기타가 없느냐고 물어본다. 기타가 없다고 하니 그냥 음악 없이 육성으로 그 노래를 우리를 위해 불러주었다.
아침 일출때 안개가 걷히면서 드러나는 원산항의 아름다운 모습.
함께 여러 곡을 부르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 내가 89년 평양축전에 참여했을 때 미주동포들과 함께 연습해서 불렀던 노래 ‘나는 알았네’도 부르기를 청해서 함께 불렀다. 이 노래는 영화 ‘월미도’의 주제가이다. 맥아더가 이끄는 엄청난 화력의 상륙작전에 맞서 싸우는 월미도의 인민군은 단 하나의 해안포병중대뿐이었다. 그들이 인민군의 전략적인 일시적 철수를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3일 동안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들어 목숨을 다하여 싸운다. 대포와 총탄이 모두 다한 후에도 명령대로 3일 동안 버티며 사수하다 모두 장렬히 전사하는 영화다.
영화에서 17살 무전수 영옥이 이 부대로 전속되어 오면서 3일 동안 맥아더의 상륙을 저지하라는 명령문을 전하는데 중대원들은 영옥에게 어떻게 어린 나이에 인민군대로 오게 되었는지 물어보니 엉뚱하게도 학교를 졸업하고 인민군대에 보내달라고 동무들과 일주일 동안 엉엉 울었더니 허락이 떨어져 군대로 오게 되었다고 농담처럼 대답해준다. 영옥은 나중에 그 자리를 빠져나가도록 지시를 받았지만 가다가는 다시 돌아와 끝까지 동료들과 거기 남는다. 영옥이 부른 ‘나는 알았네’ 노래에 모두가 숙연해지며 중대원들은 조국을 위하여 한몸 바치려는 결의를 더욱 다진다.
<나는 알았네> 전동우 작사 라국 작곡
봄이면 사과꽃이 하얗게 피여나고
가을엔 황금이삭 물결치는 곳
아 내 고향 푸른 들 한줌의 흙이
목숨보다 귀중한줄 나는 나는 알았네
불타는 전호가에 노을이 비껴오면
가슴에 못 잊어서 그려보는 곳
아 내 고향 들꽃피는 그 언덕이
둘도 없는 조국인줄 나는 나는 알았네
살아도 그 품속에 죽어도 그 품속에
언제나 사무치게 불러보는 곳
아 어머니라 부르는 나의 조국이
장군님의 그 품인줄 나는 나는 알았네
아래 링크에서 영옥의 노래하는 모습을 영화의 주요 장면과 함께 '나는 알았네' 노래를 감상할 수 있다.
이번에 찾아보니 내가 부른 위에 소개한 ‘나는 영원히 그대의 아들’ 과 ‘나는 알았네’ 노래는 같은 사람이 작사한 것이다. 과연 어떤 분이기에 그 시와 곡조가 내 마음을 이렇게 감동하게 하였을까하고 인터넷에서 작사자 전동우 시인과 작곡가 라국에 대해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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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오한 철학적사색이 담긴 전동우의 시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없이 틀어잡는다.
전동우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던중 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대에 복무하다가 국가적조치로 대학에 복교하였다. 1954년 대학을 졸업한 후 현역시인으로 있다가 1960년부터 평양문학대학(당시)과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창작지도교원으로, 1972년부터 조선영화문학창작사 가사창작실 실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시집 《청춘》(1961), 서사시 《인간의 노래》(1964), 시론 《서정시창작수업》(1964)을 발표하였으며 노래가사와 함께 많은 서정시, 서사시, 정론, 수필, 평론들을 남겼다.
작가라면 누구나 자기 생애에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명작들을 내놓기를 바랄것이다.
영화의 노래와 가요를 통하여 인민들과 각별히 친숙해진 전동우는 생애에 가사 200여편을 창작했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남긴 명가사들은 저절로 이루어진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령혼을 태우고 뼈를 깎는 노력을 하며 쓴것이였다. 그는 늘 가사에는 문학적발견이 있어야 하고 철학적인 생활을 가사에 담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어머니조국의 귀중함을 뼈에 사무치도록 절감한 시인의 심장의 노래인 《나는 알았네》는 지금도 우리 마음을 세차게 틀어쥐고있다. 이런 전동우의 가사가 있었기에 작곡가 라국은 인민들의 심장에 호소하는 서정적인 명곡을 써낼수가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땅에서 1989년 5월 10일 전동우 작사, 라국 작곡 《나는 알았네》를 음악회의 중요종목으로 무대에 올려놓게 되였다. 뉴욕의 공연장은 사상 처음으로 북조선가곡이 교포들에게 선보인다는 신문, 방송의 대대적인 기사때문에 초만원을 이루었고 소문은 무성했으나 공개적인 방해책동은 감히 해오지 못하였다.
피아노반주도 현지인 뉴욕의 입맛에 맞게 편곡하였다. 창법도 서양식발성을 하여 영화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어보였지만 청중들은 한없이 행복스러워했다. 고향의 노래를 듣자고 4시간이나 운전하고 왔다고 하며 좋아서 내 손을 꼭 붙잡고 흔들어대던 한 로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공연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성과는 말할수 없이 컸다.
그후 아메리카주민족문화연구회를 통해 라국선생이 우륵심포니에 맞는 편성으로 편곡한 《나는 알았네》를 보내왔다. 2001년 북부조국에서 온 다섯명의 음악인과 미국순회공연을 할 때에 이 음악을 긴요하게 사용하였다. 음악회에 찾아온 교포들은 이 사연을 알고있는 듯하였고 음악회장은 도시마다 초만원을 이루었다.
라국은 경성음악학교 재학중인 1950년 전쟁시기에 북에 들어온 음악가이다. 그는 남에 있을 때는 악단에서 바순을 연주하였고 입북한 다음 작곡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영화 및 방송음악단(당시)에서 수많은 영화음악을 작곡하였고 수많은 히트곡을 써내며 음악가로 꿈을 펼치며 살다가 1990년대초 작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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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에서의 밤은 이렇게 북부조국의 여러 노래를 부르며 보냈다. 노길남 박사님은 뜻밖에도 활달하게 노래하고 멋진 춤사위도 보여주셨는데 우리 세상 어디서든 사람들이 모이면 그 가운데 한 두 사람은 오락으로 사람들을 웃게 만들고 분위기를 이끌어가듯이 노 박사님도 그런 능력을 가진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북부조국 노래와 우리 민요의 흥겨운 가락으로 즐거운 분위기 가운데 네 사람이 서로 터놓고 어울리는 동안 원산의 밤은 깊어갔다.
페이스북 통일그룹 '우리는하나'로 통일을 꿈꾸는 민중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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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황진우님의 댓글
황진우 작성일
천안함 학살사건은 까마귀삿기와쥐삿기의 자작극이었다는군요.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general&wr_id=20171
광개토왕님의 댓글
광개토왕 작성일
들어보니 작품 속에서 들으면 무언가 심장을 움직이게할
내용이자 음조이군요.
'너는 오늘밤 내차지..너를 갖고싶어' 식의 가사만을 주로
듣고 부르며 성장한 젊은이들과, '내 고향 푸른 들 한줌의
흙이 목숨보다 귀중한 줄 나는 나는 알았네' 류의 노래를
부르며 자란 젊은들과..나중에 어떤 인식의 차이가 나게될지
상당히 궁금합니다. 어찌보면 그 결말이 분명할듯도 하군요.
같이 노래부르며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니..상당히 의미있는
시간이었겠습니다.
정전협정이 평화선언으로 바뀌고.. 전쟁의 위험이 없어지고 나면
그때는 어떤 노래건 선택하고 싶은대로 부를 수 있는 여건으로
바뀌게 되겠지요. 그런 즈음에도 여전히 북의 노래만을 부르도록
강요된다면..그것은 문제가 될 수가 있겠습니다.^^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노래 가사에서 두 사회의 차잇점을 말씀하셨는데 사실 두 사회의 차이만큼 노래도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조국을 위한 노래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위한 노래도 필요하고 또한 사랑노래도 필요한 것이 우리 세상이지요. 통일이 되는 날 모든 노래들도 자유를 얻게 되겠습니다.
Homeland님의 댓글
Homeland 작성일좋은글 감사합니다..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Homeland 님, 이렇게 읽으시고 댓글로 참여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