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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설 <새나라>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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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976회 작성일 15-10-25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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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나라


1
 
봄이다. 사람들에게 류다른 신생의 환희와 희망을 안겨주는 해방조선의 첫봄이다.
오성재는 보통강이 지척에 바라보이는 자기 밭머리에 한낮이 되여오도록 앉아있었다. 보통벌농민인 그가 분여받은 제땅에 나와있는것은 응당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고 볼수 있겠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나무등걸처럼 그냥 앉아있는거며 볕에 탄 흙빛얼굴에 잔뜩 시름겨운 표정을 짓고 자주 한숨을 내부는것은 아무래도 무슨 사연이 있는듯싶었다.
주변에는 고즈넉한 정적이 깃들어있었다. 엊그제 경칩을 바래우긴 했으나 아직은 한낮에도 쌀쌀한 기운이 가셔지지 않았고 음달에는 잔설이 웅크리고있었다. 그런가 하면 양지쪽에서는 겨울이 물러갔는가를 살펴보려는듯 새싹들이 조심조심 땅우에 얼굴을 내밀고있었다. 이제 며칠 더 있으면 저기 봉수산이며 창광산, 해방산기슭에는 개나리며 진달래가 다투어 피여날것이고 겨울을 이겨낸 만물이 땅껍데기를 비집고 나와 대지에 푸른빛을 떨칠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양지쪽에서 냉이며 달래 같은것들만 살그머니 얼굴을 내미는데 그나마 냉이캐러 나온 어린 처녀들의 눈에 걸려들기만 하면 끝장이다. 호미자루 쥔 손들이 어찌나 영악스러운지 암만 땅속깊이 박혀있어도 뿌리채 뽑아내기때문이다.
오성재는 대타령벌이며 서성리벌에서 냉이를 캐느라 언뜻거리는 조그마한 형제들을 쪼프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예전같으면 벌판에 냉이캐러 나온 녀인들이 한벌 널렸겠는데 그래도 올해 봄은 해방덕분에 형편이 좋은셈이다. 시내에서는 로동자, 사무원들에게 이달부터 식량공급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번에 나라에서 땅을 주었으니 올해부터는 농민들도 잘살게 될것이다.
생각이 땅에 미치자 오성재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였다. 땅에 대한 생각만 하면 저절로 한숨이 나오군 한다. 오성재가 서성리벌에 전답 4천평을 분여받고 표말을 박은게 열흘전이였다. 보통벌대지주 구문선의 소작농이였던 자기에게 평생 소작으로 얻어부치던 그 땅이 제것으로 차례진것이다. 집이라고 할수 없는 토성랑움막에서 마소처럼 살아온 오성재로서는 자기 인생에도 기뻐서 울 일이 생기고 자기자신이 기뻐서 울고웃을줄 아는 사람이라는게 신기할 지경이였다. 그런데 며칠전부터 오성재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졌다. 매일같이 밭에 나와앉아있느라면 그 땅때문에 피땀을 흘리던 눈물겨운 지난날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군 했던것이다. 해마다 찾아오는 장마철에 시뻘건 흙탕물이 밭머리어방을 적셔놓고 물러가면 다행이지만 키높이 자라던 수수밭을 잠그어버릴 땐 오성재의 눈물도 그만큼 강을 이루군 했었다. 다 먹게 되였던 수수농사를 망치고 온 한해 기근에 시달리는것은 둘째였다. 제일 무섭고 억이 막히는것은 땅이 못쓰게 되는것이였다.
4년전 홍수때에도 그랬었다. 숱한 인명을 집어삼키고 숱한 집들을 집어삼키고… 숱한 사람들을 한지에 나앉게 만든 그해 물란리에 오성재도 두 딸을 잃었다. 한밤중에 움막의 거적문밑으로 쓸어들어오는 흙탕물, 미리 꿍져놓았던 가산을 이고지고 다섯식구가 서로서로 손을 잡고 사품치는 물속을 헤쳐가던 그날… 캄캄칠야를 헤가르며 번개가 치고 하늘땅을 찢어발기는 굉음이 마음속의 공포를 더해주었다.
대줄기마냥 억수로 쏟아지는 비발속에서 《엄마!》, 《아!…》하는 외마디 비명소리에 뒤돌아보니 가운데 서있던 두 딸의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상순아! 하순아! 얘들아!-》
허나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들려오는것은 무시무시한 물소리뿐이였다. 이불보따리를 물우에 집어던지고 허둥지둥 그쪽으로 헤염쳐갔으나 세찬 급류에 휘말리운 어린 자식들을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가.
《아!-》
그게 다였다. 무서운 자연의 힘앞에서 오성재가 할수 있었던 유일한 반항은 캄캄한 허공을 주먹질하며 목터지게 웨친 외마디 비명소리뿐이였다. 그렇게 가슴아픈 일을 당하고도 울고불고 할새 없었다. 보통강에 범람하던 큰물은 서평양일대에 막대한 재앙을 끼치고서야 자기 힘을 과시한게 만족한듯 서둘러 물러가버렸다. 물이 찐 보통강주변은 처참하기 이를데 없었다. 토성랑움막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오는 곡성, 허물어진 움막앞에 손맥을 놓고 나앉은 사람들, 강기슭에 너저분하게 널린 온갖 허접쓰레기들, 강류역의 경작지들에 한뽐도 넘게 쌓인 감탕…
오성재는 흙모래에 묻혀버린 소작지밭머리에서 너무도 기가 막혀 맥없이 주저앉아버렸다. 이제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감탕에 묻힌 수수대들중에서 파아란 이파리 몇개가 바람에 한들거리면서 숨막혀 죽겠으니 어서빨리 일으켜세워달라고 몸부림치는듯싶었다.
오성재는 그 수수대보다 자기가 더 숨막히는것 같았다. 밭이 이 모양 되였으니 올겨울 농량걱정은 둘째치고 지주의 성화를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아닐세라 지주 구문선은 소작료를 탕감해줍시사 하고 허리를 굽히는 오성재의 머리우에 개화장을 휘둘렀다.
《네놈이 맡았던 땅이니 네놈이 원상대로 복토해놔라. 그전에는 죽지도 못할줄 알아!》
지주의 손에 온 가족의 생사여탈권이 달려있으니 감히 거역할수도 없었다. 그는 안해와 함께 지게를 지고 그 땅을 되찾느라 해를 보내군 했다. 집에는 아홉살 어린 아들이 해종일 주린 배를 움켜쥐고 부모들을 기다리고있었다. 자식 여섯을 굶겨죽이고 물란리에 잃고 남은것이 그 애 하나뿐이였다.
어느날 저녁 늦게 돌아와보니 아들이 죽었다. 이게 무슨 변이냐? 움막앞에는 수해때 떠내려오던 물독 하나를 건져놓은것이 있었는데 아들이 그 안에 꺼꾸로 박혀있었던것이다. 독을 눕혀놓고 뻣뻣해진 아들을 꺼낼 때 보니 개구리 서너마리가 사방으로 달아나는것이였다. 아마도 아들은 배고픔을 달래다 못해 그 개구리를 잡으려고 독에 몸을 기울였다가 그만 손을 놓치고 반나마 차있던 물에…
여직껏 살아오면서 남의것을 탐내본적이 없었는데 난생처음 임자없이 떠내려가는 물독에 욕심을 냈다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자식마저 잃은것이다. 안해는 통곡소리도 못 내고 기절해버렸다.
오성재는 단말마적인 노성을 터뜨리며 손에 잡히는대로 집어들고 저주로운 독을 박살내버렸다. 아, 하늘도 무심쿠나!
허나 다음날은 또 소작지를 살리려 지게를 지고 나서야 했으니 이것이 그의 운명이였다. 돌이켜보면 땅은 그에게 기쁨과 행복보다 슬픔과 재난을 더 많이 가져다주었었다. 그래도 그는 그 땅을 떠나지 못했다. 떠나고싶어도 갈곳이 없었던것이다.
그런데 해방이 되여 지주놈은 도망치고 오성재는 그 땅의 주인이 되였다. 지금 오성재가 고민하는 리유가 거기에 있었다. 해방이 되였다고 해도 해마다 겪던 물란리를 피할수야 없지 않은가. 그럼 앞으로도 그 땅때문에 울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제땅을 가지게 된것은 말할나위없이 기쁘지만 홍수피해때문에 근심이 가셔질 날이 없을거라고 생각하면 기쁨은 물러가고 마음이 무죽해지군 했다. 그렇다고 나라에서 주는 땅을 안 받을수도 없고…
오성재는 멍청한 눈길로 보통강을 바라보았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강이 요즘은 사방에서 흘러드는 눈석이물에 수위가 조금 높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소리없이 얌전하게 흐르고있었다. 언젠가 지나가던 풍수쟁이가 하는 말이 보통강은 우불구불한 모양새가 신통히 룡의 형국이라고 했는데 오성재도 그 말이 그럴듯 하다고 생각해왔었다. 그러나 하도 물란리를 겪고 자식들을 죽인 다음부터는 보통강이 룡의 모양이 아니라 돼지밸을 마음대로 헤쳐놓은것처럼 보였다. 지금은 저렇게 얌전한 새색시처럼 소리없이 흐르는듯마는듯 하지만 일단 장마가 들면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즉 홍수피해를 뻔히 내다보면서 그 땅을 맡아안는다는게 오성재로서는 암만 해도 자기를 납득시키기 어려웠다. 예전에는 땅의 주인인 지주에게 매달려사는 처지여서 소작이나마 얻어부치는것을 다행으로 알았지만 이제야 자기가 땅의 주인인데 아무거나 무턱대고 받아안으면 그게 바보노릇이 아닐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오성재는 더이상 앉아있을수 없었다. 그는 무릎을 짚고 움쭉 일어서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농촌위원회에 찾아가선 뭐라고 말할가? 이 땅은 안 가지겠다고?… 안되지, 그럼 어쩐다?)
쉰고개를 가까이 살면서 오성재는 한번도 자기 주장을 고집해본적이 없었다. 모든것에 수긍하면서 살아왔다. 그렇게 어질고 순박하기만 한 그에게는 농촌위원회에 찾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울수 없는것이였다.
그렇다고 안 갈수도 없었다. 이건 땅문제이다. 농군이 죽고사는 문제이다! 많이 굶어본 사람은 땅의 금새를 잘 아는 법이다. 드디여 용단을 내린 그는 마지막한숨을 길게 내불고나서 끙 하고 일어섰다. 허름한 덧저고리소매에 두팔을 엇갈아끼우고 서성리농촌위원회를 향해 천근처럼 무거운 발을 내디디였다. 큰길에 나서서는 자기의 결심이 달라지기 전에 당도하려는듯 걸음을 다그쳤다.
서성리농촌위원회는 경의본선과 평남선이 갈라지는 당칠동에 자리잡고있었다. 해방전 왜놈군대의 련병장이 자리잡고있던 봉지동의 넓은 공지를 지나는데 점심고동소리가 철길너머 본정거리쪽에서 울려퍼졌다.
오성재는 더 조바심이 나서 눈앞에 보이는 ㄱ자형기와집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도 농촌위원회 위원들은 점심고동소리를 못 들었는지 떠들썩하게 이야기판을 벌려놓고있었다. 하긴 요즘은 농민들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혼자 길을 가면서도 싱글벙글 웃는 세월이라 점심때를 잊을만도 했다.
《계시우?》
미닫이문이 열리며 오성재네와 이웃해서 사는 리재익이 밖을 내다보았다.
《성재 이 사람, 웬일인가? 어서 들어오게.》
오성재는 자기 집사정을 잘 아는 리재익이 이 자리에 앉아있는게 반가왔다. 그는 조심스레 방안에 들어갔다. 알싸한 써레기냄새가 코구멍을 간지럽혔다. 방안에는 너덧명의 농촌위원회 위원들이 둘러앉았는데 무슨 심중한 론의를 하댔는지 표정들이 심각했다.
《어떻게 왔나?》
리재익이 묻는 말이였다.
《저, 그저… 뭐… 회의를 하댔으면 난 그만…》
오성재는 방안의 분위기에 눌리워 말을 더듬으며 문가로 돌아섰다.
《아닐세, 자네가 있어도 일없네. 앉아서 몸이나 녹이라구.》
농촌위원회 위원장이고 제일 년장자인 당칠동의 박령감이 대통에 담배를 다지며 성재를 만류했다. 성재는 허리를 구붓하고 한쪽 구석에 놓인 화로옆에 쭈그리고앉았다.
《그래서 말이네.》
박령감은 화로에서 부저가락으로 숯불을 집어 담배를 붙이고서야 하던 말을 계속했다.
《지금 전국각지에서 농민들이 김일성장군님께 땅을 주셔서 고맙다는 감사편지두 올리는데 우리라고 가만있을수 있겠는가 하는걸세.》
《안되지요. 왜정때야 그 잘난 소작지두 떼울가봐 지주한텐 물론이구 마름한테까지 푼전을 털어바치군 했는데 사흘갈이땅을 거저 받구두 입 씻고있으면 그게 무슨 사람이겠소.》
《옳수다. 어제두 평북도에서랑 황해도에서랑 장군님께 올린 감사편지가 신문에 또 났습디다. 그런즉 우리야 장군님가까이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아니요? 평양농민이면 무슨 일에서나 선봉이 돼야지요.》
리재익은 평양농민이라는 말에 힘을 주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그의 말에 공감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 자리에서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께 감사편지를 올리는것으로 의견들이 합쳐지고 그 거사를 실행하기 위한 일감들이 분담되였다. 감사편지의 내용은 어떠어떠해야 하며 농군들의 머리만으로는 어려우니 식자있는 누구누구를 청해다가 편지의 초고를 잡아보게 한다는것, 누구를 장마당에 보내여 제일 좋은 먹과 비단을 사오게 한다는것, 누구누구가 편지를 가지고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에 찾아간다는것 토론은 끝이 없었다. 오성재도 자기가 찾아온 목적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들의 토론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설사 잊지 않았다 한들 이런 정황에서야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
점심시간이 퍼그나 지나서야 박령감이 재털이에 대통을 딱딱 털며 일어날 차비를 했다.
《이젠 얼른 집에 가서 한술씩 때구 분담 맡은대루 움직입세.》
모두들 주섬주섬 일어섰다. 오성재도 어쩔수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때 문밖을 나서려던 리재익이 문득 오성재에게로 돌아섰다.
《참, 자네 왜 왔댔나? 일이 있으면 말하라구.》
오성재는 황황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우다. 그저 지나가다가…》
리재익은 고개를 기웃거리면서도 더 캐묻지 않고 퇴마루로 나섰다.
그 순간 멀리 남쪽하늘에서 둔중한 봄우뢰소리가 울려왔다.
우르르릉-
올해의 첫 우뢰소리였다. 토방에서 신을 찾아신던 사람들은 저도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메아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한번 우뢰가 터졌다. 처음보다 더 큰 우뢰소리였다.
꾸르르릉-
그 우뢰소리는 오성재에게 자기가 여기에 왔던 리유를 상기시켜주었으나 그는 무시무시한 공포의 전률이 온몸으로 쭉 지나가는통에 입이 얼어붙고말았다. 오성재만이 아니였다. 보통벌사람들에게 있어서 봄우뢰소리는 지나간 악몽의 메아리였고 닥쳐올 재난의 전주곡이였다.
봄우뢰소리는 농군들을 들판으로 부르는 소리라지만 보통벌농민들만은 그 우뢰소리를 무서워하고있었다.
한참만에야 누군가가 마당에 내려서며 탄식조로 말했다.
《어허, 올해 장마는 또 어떻게 겪을고…》
《봄에 첫 우뢰가 울어서 백날이면 장마가 진다는데 올해 장마는 좀 일찍 오려는가보군. 왜놈들이 공사를 한다고 온통 파헤쳐놨으니 장마만 지면 영낙없이 물란리를 겪겠는데.》
《요새 우리 집 처마밑에 제비가 둥지를 트는걸 보니 짚검불이 너슬너슬한게 올해 장마는 되게 겪어야 할가봅니다.》
항간에서는 제비가 둥지를 틀 때 겉면에 짚오래기가 너슬너슬하면 큰 장마가 지고 미끈하면 가문다고들 했다. 그래서 해마다 봄이 오면 제비들이 집을 짓는것을 지켜보며 자기들의 한해운수를 점치는것이 토성랑사람들에게는 하나의 풍습으로 굳어져있었다. 저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소리에 증이 났던지 박령감이 해진 지하족으로 토방들을 탕 구르며 마당에 내려섰다.
《방정들은 그만 떨게. 장마를 못 겪어본 사람들같군.》
박령감에게는 방금전의 활기를 잃어버리고 우뢰소리 한번에 서리맞은 상들을 하는것이 언짢았던것이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서도 방금전의 우뢰소리가 사라지지 않고있음을 누가 모르랴.
모두들 고개를 짓수굿하고 대문가로 향했다. 박령감은 찌꿍- 하고 대문을 밀다가 뒤에서 오는 리재익의 팔소매를 붙잡았다.
《자넨 언제 토성랑까지 갔다오겠나. 집에 가야 진수성찬이 있는것도 아닐텐데 우리 집에 가서 한끼때자구. 성재 자네도 같이 가세.》
《됐수다. 형님집이라구 뭐가 있어서 또 군불을 때게 하겠소. 내 성재 저 사람이랑 동무해서 넘어가겠수다.》
리재익이 사양했으나 박령감은 한사코 팔소매를 놓지 않았다.
《뭐가 있어서 가자는건 이닐세. 그저 해방떡(만주콩으로 빚은 콩떡) 몇개하구 동치미 한쪽이면 되지. 자네가 가면 우리 로친네가 막걸리 한사발이야 걸러주겠지.》
《허, 막걸리까지 있다면야 가야지요. 안주인이 령감님대접에 극성인 모양이우다.》
박령감은 그 말이 싫지 않은듯 느슨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당연하지. 해방전엔 못했지만 이제는 내가 가장구실을 하니까. 그나저나 장군님 령을 받들구 땅을 노나주는 농촌위원회 위원장이 아닌가. 그러니 벼슬로 말하면 옛날 구장이나 면장따위에 대겠나? 흐흐… 해방덕분에 나두 사람대접을 받는것 같네.》
사람들은 우뢰소리에 받았던 여운을 다소나마 털어버리고 한결 개운해진 마음으로 흩어져갔다.
오성재는 자기 집에 가자는 박령감의 권고를 사양하고 남포쪽으로 가는 큰길로 방향을 잡았다. 보통강개수공사장에 나가있는 장혁수를 만나보고싶었던것이다.



2
 
오성재가 찾아가는 장혁수는 해방되는 날부터 공사장현장사무실에서 혼자 살고있었다. 공사장에 끌려와 일하던 사람들은 해방과 함께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져갔지만 그만은 자기가 살던 토성랑움막을 버리고 여기에 거처를 정한것이였다. 거기에는 누구에게도 말해본적 없는 기막힌 사연이 있었다.
장혁수는 여기저기 다니며 삯짐이나 지다가 토목공사장은 벌이가 괜찮다기에 제발로 찾아온 사람이였다.
벌이가 좋다는게 하루종일 뼈빠지게 일해야 겨우 60전이나 70전이였다. 남달리 허우대가 크고 체통이 커서 《장꺽정》이란 별명으로 불리우는 장혁수가 저녁마다 닭의 염통만 한 좁쌀봉지를 들고 집으로 갈 때면 그 모습이 처량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는 잘난 일자리마저 떼우지 않으려고 일에 열성을 부렸다. 굶어죽을수가 없어서 자기의 로동력을 눅거리로 팔아버리면서도 목숨이 붙어있는것을 다행으로 여기던 세월이였다. 과도한 로동으로 인하여 피가 마르고 기름이 마르는것을 계산할수 없었던 세월이였다. 그 세월에 그가 진짜 사람이였는지는 자기자신도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집에 가면 자기가 사람이라는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낄수 있었다. 집이라야 토성랑움막이였다.
일찌기 부모를 잃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벌어먹던 그는 나이 서른이 되여서야 장가를 들고 토성랑에 첫살림을 펴놓았었다. 그가 장가들던 이야기를 하자면 장밤을 밝혀도 못다하겠지만 그게 재미있는 련애담이 아니라 눈물겹고 기막힌 사연이 얽힌것이여서 장혁수는 한번도 남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본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대강 추린다면 동아방직에서 왜놈감독에게 모욕을 당하고 몸을 던졌던 처녀를 구원해준것이 인연이 되여 맨주먹뿐이던 로총각도 다행스럽게 가정이라는것을 가질수 있었던것이다. 그래도 그의 인생에서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면 가정을 이루고 아들을 안아보던 그때뿐이였다.
원래 성미가 과묵해서 말수더구도 적고 좀해서는 웃을줄 모르는 그였지만 집에 와서 아들을 안아볼 때에는 두툼한 입술이 벌어지고 부리부리한 눈도 가느스름해지군 했다. 그런 생활도 3년을 채우지 못했다.
42년도 서평양일대를 휩쓴 물란리때 왜놈들은 보통강물이 점점 불어나면서 강변에 루적해놓았던 군수용목재가 떠내려가게 되자 개수공사장에서 일하던 인부들까지 동원시켰다.
《통나무가 떠내려간다. 빨랑빨랑 건져라.》
왜놈의 말은 법이였다. 조선사람의 목숨은 통나무 한대값보다 못하던 때였다.
장혁수는 집에 있는 안해와 자식이 걱정스러웠지만 왜놈들은 그의 사정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튿날에야 그는 겨우 몸을 빼서 토성랑으로 달려왔다. 그에게는 눈앞의 현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가 살던 움막은 물살에 형체도 없이 떠내려가고 그 자리에 남아있는것은 감탕에 반나마 묻힌 가마솥 한개뿐이였다. 그런데 내 아들, 내 안해는?…
《여보- 성학아-》
그에게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창광산쪽에 미리 피신도 못하고있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물결에 휘말리워들어가는 안해와 자식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듯싶었다. 혁수는 그 환영에 시달리면서 시체라도 찾아보려고 보통강을 오르내렸다. 실성한 사람처럼 먹는것도 자는것도 잊고 감탕이 조금이라도 두드러진 곳이면 혹시나 해서 무작정 파보군 했다.
물이 완전히 찐 다음에야 혁수는 대동강과 합수되는 강하류에서 감탕에 반나마 묻혀있는 안해와 아들을 찾아냈다. 안해는 포대기를 띤채 아들을 안고있었다. 포대기를 풀어버렸으면 혹시 저 하나만이라도 살수 있었으련만 어느 어머니가 저만 살겠다고 제 살점보다 더 귀한 자식을 버릴소냐?
아들을 안고있는데다 포대기가 물을 먹어서 무거워진탓에 날바다로 흘러가지 않고 그냥 가라앉아버린것 같았다. 다행이랄가? 과연 이런 경우에도 다행스럽다는 말이 어울릴가?
집이 없으니 장례를 치를데도 없었고 돈이 없으니 관을 살수도 없었고 묘를 쓸수도 없었다. 혁수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한밤중에 감탕바닥을 깊숙이 파고 안해와 아들을 묻었다. 왜놈의 눈을 피하자니 다른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던 안해와 아들을 감탕속에 묻으며 혁수는 생각했다. 아들애를 안은 안해가 캄캄칠야에 광란의 소용돌이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가? 이 못난 남편을 원망했겠지… 그리고 정말로 래세라는것이 있어 세상에 다시 태여난다면 물란리를 모르는 곳에서 살고싶다고 생각했겠지.…
그는 뒤늦게나마 남편구실을 하고싶었다. 공사를 빨리 끝내서 이 강변에 떠도는 안해의 령혼을 위로해주고싶었다. 그렇게 해야 비명에 먼저간 사랑하는 사람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줄수 있을것 같았다. 그는 자기가 공사장에서 일하는것이 보통강을 사랑하거나 어떤 정이 있어서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차디찬 세상을 살아오면서 얼음덩이처럼 되여버린 그의 마음속에 남아있는것이란 분노와 억울함뿐이였다. 그런데 그것을 터쳐놓을데는 없었다. 보통강이 몰아온 재난인데 누구와 해본단 말인가. 가슴속의 울분을 쏟아버리자면 공사장에서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자기 가정에 불행을 몰아온 자연에 대한 유일한 복수였다. 더구나 그는 갈데도 없었다. 특별히 배운 재간도 없었다. 재간이 있다면 하도 극성스레 일한 덕에 왜놈측량기사의 눈에 들어 조수로 따라다니면서 웬만한 표척눈금은 맞출줄 아는것뿐이였다. 그래서 그는 남들이 해방만세를 부르며 공사장을 떠날 때 몇몇 로동자들과 같이 공사사무실을 차지하고 설계부터 빼앗아냈다.
너도나도 다 떠나가버리면 공사는 누가 계속한단 말인가. 설사 당장 일은 못한다 해도 공사장을 지키기라도 해야 할게 아닌가.
그는 왜놈들이 쓰던 현장사무실의 방 한칸을 차지하고 낮에는 품팔이를 다니다가도 밤이 되면 그곳을 지키며 절간의 중처럼 생활하기 시작했다.
해방이 되여 한달쯤 지났을 때 그는 하도 속이 답답해서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의 간판을 내걸은 집으로 찾아갔던적이 있었다. 생전 처음 와보는 곳이였다. 자기가 오지랖 넓게 나선다는걸 모르는바 아니지만 속시원히 알아보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었던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들은것은 《정신나간 놈》이라는 욕설뿐이였다.
《지금이 어느때게 그따위 정신나간 소리를 하고있소? 당장 새정권을 세우고 사회주의혁명을 해야겠는데 왜놈들이 하던 토목공사를 마저 하자구? 그게 제정신이 있는 소리요?》
머리카락을 매끈하게 빗어넘긴 양복쟁이가 정문에서 혁수에게 하는 말이였다. 마침 현관에서 나오던 키큰 사람이 사연을 듣고나서 양복쟁이를 나무랬다.
《이 사람도 건국을 하자는건데 그렇게 욕질할거야 있소?》
그후에 알고보니 그가 총무부장을 하는 리주연이였다. 리주연은 혁수에게 어째서 당장은 공사가 불가능한가를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말은 친절했지만 공사를 못한다는것은 양복쟁이와 다름없었다.
《왜놈들이 다 파괴해놓고 달아나서 당장은 공장부터 복구해야 하오. 돈이 있어야 공사를 할게 아니요? 지금은 삽 한가락도 만들지 못하는 형편이요.》
《그럼 언제쯤 공사를 하게 됩니까?》
《글쎄, 그걸 누가 알겠소. 한 십년 지나면 가능하겠는지.…》
맥풀린 걸음으로 돌아선 혁수는 안해가 묻혀있는 강변에 앉아 하루해를 보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그렇게도 바라던 해방이였건만 그 해방이 혁수자기에게 가져다준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오히려 공사를 완공해서 안해의 혼을 위로해주자던 한가닥 소원마저 풀어줄수 없게 되여버렸다. 그러나 혁수는 자기를 다잡았다. 나라사정을 생각하면 당장 공사를 할수 없다는거야 철없는 코흘리개들도 머리를 끄덕일만큼 명백한 답이 아닌가. 현실을 리성적으로 감수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를 내면서도 그는 공사를 중지해야 한다는 랭혹한 사실을 감정적으로 용납하기 힘들었다. 그는 안해에게 량해를 구했다.
(여보, 어찌겠소. 나라사정이 어렵다는데 기다립시다. 나라가 있고야 백성이 있는건데 좀 더 참아주오.)
올해 2월에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면서 평안남도인민위원회에는 토목과가 새로 나오고 보통강개수공사장을 로동조합산하에 정식 등록하였다. 도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 된 리주연이 직접 공사장에 찾아와 그 사실을 전해주었다. 리주연은 혁수에게 로동자들을 모집하여 공사를 추진시킬 준비를 하라고 하면서 만주콩도 좀 보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준비사업일뿐 공사를 당장 시작하는것은 아니였다. 그래도 혁수는 기뻤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시작된다지 않는가. 중요한것은 나라에서 이 공사를 잊지 않고있다는것이다. 혁수는 예전에 함께 일하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공사장에 나오도록 설복하였다. 그래서 한 50여명정도의 로동자들로 향토건설대를 무어가지고 지난달부터 일을 시작했다.
방대한 공사량에 비하면 너무도 작은 인원이였다. 그나마 로임도 지불하지 못하는데 인민위원회에서는 공사장을 감감 잊었는지 나와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오성재가 거기에 당도했을 때 장혁수는 마당 한구석에 바위처럼 틀고앉아서 질통끈을 손질하고있었다. 끈이 자주 끊어져 애를 먹이댔는데 마침 넙적한 평피대가 생겨서 그것으로 교체하는중이였다. 송곳으로 피대에 구멍을 내고 가는 철사로 촘촘히 결박하는데 솥뚜껑같은 큼직한 손이 군동작 하나 없이 정확하게 움직이는걸 보면 평생 그 일만 해본것 같았다.
쌀쌀한 날씨인데도 그는 덧저고리도 안 걸치고 광목으로 지은 물바랜 작업복만 입고있었다. 체통이 큼직한 사람이 외진 곳에 혼자 쭈그리고 앉은 모습은 마치 심심산중의 이끼오른 돌부처나 해묵은 나무등걸을 련상케 했다. 해볕에 탄 구리빛얼굴이며 귀전을 덮은 더부룩한 머리며 제때에 깎지 못한 수염이며 모든것이 그를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보다 10년은 더 늙어보이게 했다. 장혁수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다가 뜻밖에 나타난 오성재를 보자 엉거주춤 일어섰다.
《아니?》
《혁수 이 사람, 그새 무고한가?》
두사람은 손들을 맞잡고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올해 설날에 혁수가 토성랑마을의 어른들한테 설인사를 하려고 왔을 때 보고는 못 보았으니 반가울수밖에…
혁수는 마당가의 평상에 오성재를 끌어다 앉혔다.
《어떻게 여길 다 오셨수?》
장혁수는 담배쌈지를 꺼내들다가 문득 생각나서 물었다.
《참, 점심은 자셨수?》
《먹구 왔네.》
성재는 거짓말을 했다. 가슴이 답답해서 점심을 건넸는데도 먹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장혁수는 마라초를 권하며 또 물었다.
《다들 어떻게 지내시우?》
성재는 잠시 제 기분에서 벗어나 동네형편을 알려주었다.
《임자는 모르겠구만. 영산이네가 얼마전에 문수리로 이사를 갔네. 영산이 애비가 손재간이 좋아서 화학공장에 입직했는데 공장에서 집을 거저 주었대.》
정말 희한한 소식이였다. 예전엔 토성랑에 쪽박 차고 오는 사람은 있어도 다른데 집을 잡고 나가는 사람은 없었던것이다.
《그리구 장돌이는 이달부터 서성리변전소에 나간다네.》
장돌이라면 평천리 오물장에서 넝마주이로 살던 녀석인데 로동계급이 되였다는 소리이다.
《해방이 좋긴 좋군요. 형님두 땅을 받았겠지요?》
혁수는 여느때는 하루 세마디도 안한다는 사람인데 한동리사람을 오래간만에 만난데다 듣느니 새소식뿐이여서 말이 많아진것 같았다.
《받았지.》
성재의 말은 어딘가 쓸쓸하게 울렸으나 혁수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어디에 받았나요?》
《응- 전에 내가 소작부치던 땅 있지 않나? 서성리철다리아래에 4천평을 받았네.》
혁수는 오성재의 무릎을 철썩 내리쳤다.
《정말 해방이 좋긴 좋수다.》
혁수의 입에서는 해방이 좋다는 소리가 떠날줄 몰랐다. 혁수는 제가 땅을 받은것처럼 기뻐하는데 당자인 오성재는 심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좋기야 좋지.》
그제서야 혁수는 오성재의 얼굴에 비껴있는 그늘을 알아보았다.
《왜 그러시우?》
오성재는 그 질문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한듯싶었다.
그는 혁수의 팔목을 꽉 잡으며 간절한 기대와 희망을 안고 애원조로 물었다.
《임자, 말해주게. 공사를 언제부터 다시 하나? 임자야 알겠지?》
혁수는 오성재의 물음에 한순간 얼떠름해졌다. 그걸 물어보자고 예까지 왔는가? 그건 알아서 뭘하자고? 아차! 땅, 분여받은 땅때문이로구나!
혁수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성재를 한동안 마주보다가 제먼저 눈길을 돌려버렸다. 할말이 없었던것이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말없이 담배를 말았다. 공사를 당장 하고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자기같은 백성이 나라일에 간참할수야 없지 않는가.
지금 혁수는 자기를 찾아온 성재에게 공사장의 암담한 실태를 시시콜콜히 다 말해줄수는 없었다. 공사의 운명이자 분여받은 땅의 운명이고 오성재자신의 운명인데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가슴답답한 소리만 해주겠는가.
혁수는 오성재의 락심한 얼굴을 마주볼수 없어 먼 하늘가로 눈길을 돌리며 한마디 했다.
《나라에서 다 생각이 있겠지요.》
《후-》
오성재의 맥빠진 한숨소리에 혁수는 울컥 화를 냈다.
《제 사정만 사정이라고 할수 없지 않나요?》
《그래, 나라사정이 먼저구말구.…》
오성재는 고개를 떨구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잠시후 오성재는 그곳을 떠났다. 오던 길을 되짚어 농촌위원회로 향하는 그의 걸음에는 어딘가 비장한데가 있었다. 제 생각에 옴해버린 그는 분별을 잃었고 따라서 자기가 얼마나 엄청난 일을 치르려 하는지 알수 없었다. 설사 알았다 해도 그는 멈춰서지 않았을것이다. 그의 덧저고리 안주머니에는 토지소유권증서가 들어있었다. 농촌위원회에는 마침 박령감도 있고 리재익도 있었다.
《허, 임자 또 왔나? 암만해도 무슨 일이 있는게로군.》
박로인의 물음에 오성재는 말없이 숨만 몰아쉬였다.
리재익도 오성재의 거동이 여느때와는 다르다는것을 느끼며 앉은뱅이책상에서 돌아앉았다.
《무슨 일인지 말해보게.》
오성재는 진정을 못하고 씩씩대다가 덧저고리를 헤치고 토지소유권증서를 꺼내들었다.
《나한테 땅을… 바꿔주었으면 해서…》
박령감도 리재익도 놀라운 눈길로 오성재를 바라보았다. 오늘까지 토지분여사업을 해오면서 처음 당하는 일이였던것이다. 리재익이 오성재쪽으로 한걸음 나앉으며 물었다.
《임자 그게 무슨 말인가?》
《사정 봐주시우. 해마다 그 땅에서 물란리를 겪을 생각을 하면 속이 떨려서…》
오성재는 말끝을 흐렸다. 리재익은 《허참.》하고 탄식을 하고나서 오성재를 설복했다.
《이 답답한 사람아! 임자가 해방전에 그 땅때문에 고생했다는거야 내가 잘 알지. 하지만 그런 땅을 받은게 어디 임자 하나뿐인가? 보통벌에서 농사짓는 사람치고 큰물피해 받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나두 임자네 옆에 땅을 받았다는거야 잘 알테지? 이거야 생 주정이 아니고 뭔가, 응?》
《거야 그렇지만 암만해도…》
《꽝 -》
박로인이 주먹으로 앉은뱅이책상을 내려치는 바람에 오성재는 와뜰 놀랐다.
《너 이놈! 농사군이 감히 땅타발을 해? 네놈이 이 보통벌에 태줄을 묻은 놈이 옳긴 옳으냐?》
추상같은 고함소리에 문창호지가 즈렁즈렁 울었다. 박로인의 악마디진 주먹은 그냥 후들거리고 눈에선 시퍼런 린광같은것이 뿜어나왔다. 애당초 그는 땅을 가지고 시야비야하는 오성재를 설복하고싶지도 않았다. 그만큼 땅은 그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신성한것이였던것이다.
《그게 어떤 땅이라구… 해방전엔 그 땅이나마 소작부치게 해달라고 지주놈한테 손이야 발이야 빌군 하던 놈을 그래도 사람답게 살아보라고 김일성장군님께서 땅을 노나주셨는데 뭐가 어찌구 어째?》
오성재는 정신이 좀 들었는지 앞에 앉은 두사람을 번갈아보며 눈길을 허둥거렸다.
《나야 그저 큰물에 내 땅이…》
하지만 이미 엎질러놓은 물이였다. 박령감은 방바닥에 놓여있는 오성재의 토지소유권증서를 와락 나꿔챘다.
《너같은 놈은 땅을 가질 자격이 없다. 땅을 모욕하는 놈은 여기서 살 자격두 없어. 썩 나가!》
오성재는 순간에 몸이 굳어졌다.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그는 박로인앞에 무릎걸음으로 다가앉으며 애원했다.
《형님, 이러지 마시우. 땅을 떼다니요? 그럼 난…》
《썩 나가지 못할가? 괘씸한 놈같으니.…》
박로인은 사정봐줄것도 없다는듯 오성재를 등지고 돌아앉았다. 무거운 침묵이 방안의 공기를 압박했다.
오성재는 애원에 찬 눈길로 박로인을 바라보다가 구원을 청하는듯 리재익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리재익도 오성재를 편역들지 않았다. 사람이 미련스러워도 정도가 있지 이거야 너무하지 않은가.
《임자 토성랑사람들을 망신시키지 말게. 사람이 가난하게는 살아도 제 욕심만 챙기려들면 못써!》
리재익한테서까지 얻어맞고나니 오성재는 더 기대볼데도 없었다. 오성재는 귀가 멍멍해지고 방바닥이 흔들흔들하는것 같았다. 갑자기 그는 살멱을 찔리운듯 꺽- 하고 흐느끼며 고개를 떨구었다. 두손으로 방바닥을 짚고 어깨를 떠는데 피같이 진한 눈물이 노전바닥에 스며들었다.
《내가… 미련한 놈이우다. 평생소원하던 제땅을 가지구두 고마워할 대신에 타발부터 했으니… 내가 미욱한 놈이우다. 하지만… 그 땅때문에 가슴에 재만 남은걸 생각하면… 어이쿠… 해방된 오늘에는 그런 설음모르고 농사짓고싶었수다. 평생에 한번만이라두 한뙈기 땅에서나마 원쑤같은 물란리를 모르구 농사짓고싶었단 말이우다. 그런데… 내가 토성랑에서두 못살면 어디 가서 살란말이요? 어허…》
오성재는 절망에 차서 부르짖었다.
온몸의 기운이 말짱 빠져버린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방안의 사람들은 그를 붙잡을 생각도 하지 않고 침통한 표정으로 덤덤히 앉아있었다.
오성재가 대문을 나서는것과 동시에 웬 사람이 농촌위원회마당으로 들어섰다. 그 사람은 토지개혁실태료해그루빠에 동원되여있는 농림국 부원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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